들어가는 말

대총회는 SDA와 에큐메니컬 운동의 관계에 관한 공식적 입장을 결의한 바 없다. 그러나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동 주제에 관하여 B. B. Beach<Ecumanism-Boon or Bane?> (Review and Herald, 1947)을 저술하였으며, Raoul Dederen 박사의 전문적인 기사들, 기타 상당수의 기사들이 재림교회 출판물에 소개되어 왔다.

SDA는 에큐메니컬 운동과 그 주된 조직체인 WCC가 전면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성 있는 여러 국면과 활동들을 비판적 시각으로 본다.

에큐메니컬 운동에 좋은 점도 있다. 1) 그 최대의 목적은 그리스도교의가시적인 통일성 추구하는데 있다. 제자들이 하나 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한 주제였다.

2) 종교자유와 인권을 신장하고 인종차별을 배격하며, 복음의 사회 경제적 적용을 추진한 것은 선한 일들이다.

이같은 좋은 점을 무시하고 에큐메니컬 운동을 총체적으로 보는 것은 문제시 된다.

“Ecumenism” 은 헬라어 oikoumene에 그 어원을 두고 있다. Oikoumene"사람이 사는 지구," "세상," "인류," "우주," "세계," 오는 세상를 의미한다(17:6-7;24:14; 2:25; 13:3-4). 이 어휘는 새로운 세계, 새로운 인류로서 교회, 새로운 세계인 교회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II. 에큐메니컬 운동의 발전과정

A. 역사적 논의 과정

1. 에큐메니컬 운동의 등장 배경

전 세계 복음화 운동으로 그리스도교계의 공동체 의식 발전과 교회 간의 협력증진을 통한 교회 연합 지향한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공동의 적 등장에 대처하는 일이 필요하였다. 인본주의 등장, 세계대전으로 인한 불안정, 무신론에 토대를 둔 국제 공산주의 운동, 파시즘과 나치즘과도 같은 초국가주의(super nationalism) 등장,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 동방종교 등 타 종교의 갱신발전 추세가 그리스도교의 결속을 재촉하는 역할을 하였다. 교회 안으로 밀려오는 세속주의의 파도는 서구 교회의 공동(空洞)화 현상을 유발하여 그리스도교회의 최대의 적이 되어 왔다.

2. 중요 회의들

고대 에큐메니컬 회의는 교리의 일치를 도모하는데 그 목표가 있었다. 그리하여 325년의 니케아회의, 451년의 갈게돈회의 등이 개최되었다. 근대 에큐메니컬 연합교회 운동은 주로 봉사에 역점을 둔 모임들로 시작되었다. 근대 에큐메니컬 연합교회 운동 개최에 있어서 대주교 죄더볼름의 역할이 컸다.

1054 서방가톨릭교회로부터 동방 정교회의 이탈

1517 서방가톨릭교회로부터 프로테스탄트교회들의 분리

1846 영국 및 미국에서의 50개 교단 이상이 Evangelical Alliance 결성

1908 31개 미국 개신교단들이 Federal Council of Churches 결성

1910 에딘버러에서 세계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 IMC). 로마가톨릭 측 은 불참, 동방 정교회 측은 참석

1921 New York Lake Mohonk에서 IMC 회동, 개신교 선교기관들 협력체제 구축 시도

기타 1947 (가나다), 1952 (화란), 1958 (가나)에서 회의

1925 스톡홀름, 생활과 봉사 세계회의 (Conference on Life & Work )

세계와 관련을 맺고 있는 교회 강조, 전쟁 배격, 그리스도인의 정치, 경제, 사회, 윤리적 제 문제들을 논의하고 각국 그리스도인의 공동전선 책임을 강조

1927 로잔(Lausanne), 신앙과 직제(Faith & Order) 세계회의

연합을 위한 신학적 기초 추구, 국제정치, 사회 문제에 대한 통일된 입장 추구

1938 Utrecht에서 Faith and Order Life and Work 연합 모임

1948 - WCC - 화란 암스텔담. 인간의 무질서와 하나님의 계획

1961 - IMCWCC에 가입. 뉴델리.

1983 Lima Text (BEM 문서)

3. WCC 회의(The World Council of the Church)

1Amsterdam 1948 -<인간의 무질서와 주님의 계획>, 44개 국가 147교회 참여, 교회론 정립 추구, 가시적통일 주장, 국가와 교회의 밀접한 관계 추구, 공산주의 및 자본주의 모두 거부 기류

2Evanston 1954 <예수그리스도 - 세상의 희망> 163교파 참여, 하나님의 선교 강조, 분 열 정죄, 급진적 운동 추구, 제 국주의 식민주의 비판, 평신도 역할 강조, 저개발국가 문제 등

3New Deli 1961 <예수그리스도 - 세상의 빛>, 198 교파 참여, 러시아 정교회와 동구라 파 공산국가 교회 참여, 3세계 문제 및 저개발국가 문제, 정치적 독립과 민족주의 문제 등, IMC와 통합

4Upsala 1968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리라>. 인종차별 문제, 사회적 및 경제적 정 의 문제, 선교를 위한 합동작전 등

5Nirobi 1975 <자유케 하시며 하나 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286교파 747명 참여, 해방신학, 타 종교 대표들 옵서버로 참석,

6Vancouver 1983 <예수 그리스도 - 세상의 생명>. 3000개 회원교회의 4억 신도들 대표, 일치를 위한 조치, 교회의 치유와 나눔, 평화와 생존 위협에 대한 대처, 정의와 인간의 존엄 성을 위한 투쟁, 커뮤니케이션

7Canbara 1991 <오소서, 성령이여 - 만물을 새롭게 하소서>, 창조신학, 진리의 영, 일치 의 영, 성령

8Harare 1998 <하나님께 돌아가 희망 속에 기뻐하라>. 희년 총회, 332개 교단 960명 대 표 참석, 5000명 참석, 평화, 창조세계, 생명의 신학, Padare의 다양한 나눔 경험, 세계화된 고통 문제 등

9차 브라질 2006214~23,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 <하나님 당신의 은혜로 세상을 변화시키소서> 340여 회원 교회, 7백 여 명의 대표들 참석, 라틴 아메리카에서 열리는 최 초의 총회, 전 세계 교회와 에큐메니컬 기관과 단체들이 참여해 공연 전시회 토론회 등을 개 최하는 에큐메니컬 운동프로그램

10차 부산총회, 20131030~118, 열흘 동안 열린 부산총회는 1961년 인도의 뉴델리 총회 이후 42년 만에 열리는 아시아 대륙의 총회, 한국에서는 처음 열린 총회로 보수진영의 지속적 반대 가운데 진행되었다. 한국의 정치적 긴장 배경에서 WCC에 제안된삼위일체 하나님과 생명, 평화, 치유이슈와 필리핀 교회가 제안한 정의문제가 아세아의 중요한 선교적 과제라는 점을 감안되어 부산총회의 주제는 생명의 하나님, 정의와 평화로 우리를 이끄소서”(God of life, lead us to justice and peace)로 결정되었다. 134개국 140여개 개신교파의 총대 700명을 포함한 2800여명의 해외 지도자들 참석하였다.

부산총회 선교선언문을 보면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내포되어 있다. 종교다원주의적 경향을 탈피치 못 하였고 동성애도 차단하지 않았다.평화에 있어서도 정치적인 평화 개념에 치우쳤으며 정의 개념이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종교개혁적 정의를 의미하지 않고, 독재정권에 의해서 박탈당한 시민권의 회복을 뜻하고 있다. 또한 생명에 대하여서도 영원한 초자연적인 생명(zoe)과 자연적, 생물적인 생명(bios) 구분이 분명치 않게 나와 있어 생명에 대한 진정한 기독론적이고 구원론적인 이해가 결핍되어 있다. 그리고 한반도 선언서에 북한의 인권조항 반영 안 되었고,  관제 북 교회와의 교류라는 좌파적 시각에 서 있다. 

4. 로마가톨릭 측 에큐메니컬 주요 대응

19641121Vatican II에서 Decree on Religious Freedom and Decree on Ecumenism 논의

19641121일 교황 Paul VIDecree on Ecumenism (Unitas Redintegratio) 발 표

1965127일 교황 John 23세 와 Constantinople 대주교(Patriarch)1054년의 교 황 Leo 9세 와 대주교 Michael Caerularius 상호 파문한 것 철회

 로마가톨릭은 Vatican II를 에큐메니컬 회의로 부르면서 자기들을 하나님의 유일한 양 떼"로 보는 일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개신교회들을 분리된 형제들(separated brothers)"로 칭하는 등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 옵서버로 참석을 권유하였다. 교황청 기구로 그리스도교회 연합 증진을 위한 사무국(Secretariat for Promoting Christian Unity)을 설치하였다. 로마가톨릭의 에큐메니컬 목표는 갈라져 나간 개신교회, 동방 정교회, 유대교, 심지어는 타 종교까지 포함시켜 모두가 교황의 수장권 지도 아래 로마가톨릭의 품으로 돌아오게 함에 있다. 이들의 에큐메니컬 운동의 진정한 목적은 개신교회적 교회의 연합 개념을 넘어서 로마가톨릭교회로 복귀하도록 함에 있다. 이 복귀의 중요 방편은 가시적 교회의 몸의 지체로 들어가는 성만찬 즉, 미사에 참여케 하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결국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대신 교회가 연합과 복귀의 중심이 된다. 로마가톨릭교회 측 에큐메니컬 자세에는 자기들의 교리 중 어느 하나도 변화시키고자하는 의도가 전혀 없는 것으로 보인다.

1995525일 교황 John Paul II세의 Encyclical on Ecumenism (Ut Unum Sint)

교황 John Paul II1995525일에 요한복음 17:21에 나오는 "Ut Unum Sint (that they may all be one)"이라는 그리스도의 기도문 한 구절을 빌린 105 쪽 짜리 회칙을 발표하였다. 교황은 이 회칙에서 연합의 기초를 진리라고 그럴듯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진리의 성령께서 위대한 전승과 교회의 살아있는 교도권을 통하여 일하신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는 완전한 연합은 거룩한 미사에 참여할 때 일어난다고 거듭 주장하고 있다. 결국 그의 에큐메니컬 사상은 전승, 교회, 미사 참여, 교회의 교도권이라는 범주를 한계로 하고 있다.

1997823일 제12회 가톨릭 청소년대회 미사에서 요한 바오로 2세가 역사상 처음으로 가톨릭이 개신교도 학살 사건에 개입이 되어 있음을 시인하고 유감의 뜻을 표명

요한 바오로 2세의 후계자로 제 265대 가톨릭 교황의 자리에 오른 베네딕토 16세는 그의 첫 공식 활동이었던 바티칸 시스티나성당에서 집전한 미사에서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반드시 재통합하는 일을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고 공식 선언을 하였다.

 

B. 가톨릭-개신교 사이의 에큐메니컬 운동 개관

1. 1983년의 미국 루터교와 로마가톨릭 측의 기본합의문 채택

로마가톨릭 측과 루터란 측이 교황의 전 교회 수장권에 합의하고 가톨릭 측의 전통적인 의화관에 동조하였다.

2. 1994329ECT (Evangelicals and Roman Catholics Together)선언문 채택

ECT 선언서는 40여명의 개신교 복음주의 학자 및 로마가톨릭 유명 학자들에 의하여 만들어 졌다. 복음주의자들과 가톨릭신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자매가 된다고 시작한 선언서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서로의 연합을 더욱 완전하게 구현할 소명을 받았다는 목표를 개진하고 있다. 비록 비공식적인 문서이지만, 그 시사하는 의미와 파장은 크다. 복음의 의미를 전통적인 가톨릭의 칭의-성화병행론 입장에 맞추어 조율한 문서여서 종교개혁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 정신을 유린한 문서라는 비평이 있다. 사실상 이 보고서에는 “faith alone” 등에서 사용되는 “alone"이라는 종교개혁자들이 사용한 단어가 빠져 있다.

 

3. 19991031일 루터교와 가톨릭의 칭의(Justification) 교리에 대한 공동선언문 채택

로마가톨릭과 루터교와의공동 선언문은 공동선언문을 발표하기까지 30여 년간의 길고 긴 대화를 나누었다. 이 선언문에 따르면 가톨릭은 세례를 전후하여 일어나는, 인간의 내적 변화의 과정을 전적으로 은총으로 돌린다. 동시에 세례에서 받는 의롭게 됨이 결코 그 이전이나 그 이후의 내적 변화에 결코 의존하지 않는다고 양보했다. 루터교는 수직적인 이신칭의차원에서 믿는 사람은 이미 성령(사랑)이 부은바 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시기 때문에 성화의 추진력을 지녔고, 소망 가운데 있다고 밝혔다. , 가톨릭은 오직 믿음의 차원에 사랑소망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역시 구원’(이신칭의)은 결코 성화’(사랑과 소망)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함에 대하여, 루터교는 이신칭의성화는 구별되지만 분리는 될 수 없다고 하면서, 종전보다 성화를 더 강조했다.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루터의 구원론과 트렌트 공의회 문서에 나타난 구원론문제는 무엇이었는가? 트렌트 공의회문서에 따르면, 가톨릭은 세례를 받을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믿음, 사랑, 소망이라고 하는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주입받음으로써 의롭게 된다. 이는 이미 세례 이전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반응으로 성취되는 인간의 질적 변화(초기 단계의 믿음, 사랑, 소망)를 전제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의롭게 된 사람은 세례이래로 계속해서 성화의 삶을 살아간다. 당시 가톨릭은 이 성화구원론에 포함시켰다. 요컨대, 로마가톨릭교회 측은 칭의와 성화가 구원론에 있어서 함께 가는 패러다임으로 본 것이다.

반면에 루터는 사람이 복음을 성령의 역사로 받아들여(믿음),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보았다. 이때에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전혀 의롭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의를 옷 입어 의롭다 하심을 받고, 성화(사랑과 소망)로 나간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차이점은 루터는 밖으로부터 오는 의를 덧입는다고 하는 복음의 수직적인 차원을 강조하였고, 가톨릭은 인간이 세례를 전후로 하여 내적 변화를 성취해야 한다고 하는 수평적 차원을 강조한 것이다.

 

4. 2007년 감리교와 가톨릭 측의 의화 교리에 대한 합의 공동 선언문 채택

2007720일부터 24일까지 서울 금란교회에서 제19차 세계감리교대회 중 감리교와 가톨릭이 의화 교리에 대한 합의 공동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감리교는 공동 선언문대해 상당히 공감하는 배경에는 칭의에 있어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영향도 받았지만, ‘성화는 사회윤리를 강조하는 가톨릭과 굉장히 통하는 부분이 많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의화’(칭의)라고 하는 것은 우선 죄에 대한 용서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인데, 가톨릭이 가지고 있는 용서의 개념과 시스템 자체가 개신교와는 조화를 이룰 수 없는 고해성사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문제거리가 될 것이다. 가톨릭이 개신교와의 일치를 위해서 고해성사를 포기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가톨릭의 교리들은 성경보다는 교회의 전통을 우선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을 신앙과 교리의 유일한 지침으로 삼고 있는 개신교가 가톨릭과 화해 혹은 일치한다는 것은 근본부터가 문제점을 안고 있다.

 

5. 한국에서의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의 일치기도회

그리스도인 일치를 위한 기도회는 가톨릭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중 19641121일 교회 일치에 관한 교령 일치의 재건이 반포된 이후 1966년부터 세계교회협의회(WCC) 신앙과 직제위원회와 로마교황청 그리스도인 일치촉진평의회가 공식적으로 기도주간 자료를 함께 준비하기 시작했고 1968년부터 그 자료에 기초해 일치 기도 주간을 지켜왔다.

한국에서는 1965년부터 대한성공회와 한국 천주교가 서로 방문해 기도회를 개최하기 시작했고 1986년부터 KNCC와 한국천주교, 한국정교회, 기독교한국 제교회가 함께 주최하는 그리스도인 일치기도주간 합동기도회를 드려왔다. 20021216일 이 기도회에 참여해온 교단들의 대표들이 모여서 한국 그리스도교 일치운동을 공식화했고 기도회의 명칭도 일치기도회로 수정해 사용하기로 했다.

 

세계교회협의회(WCC) 신앙과 직제위원회와 교황청 그리스도인 일치촉진평의회가 공동으로 주관하는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주간(200511825)을 맞아 한국에서는 천주교, 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정교회, 루터회, 구세군 등 그리스도교 각 교파 지도자들이 교파를 초월해 일치기도회에 참석했다. 그들이 내 세운 구호는 "우리는 하느님의 한 형제"이었다.

특히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교회일치위원회(위원장 김광준 신부)와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 대화위원회(위원장 김희중 주교)가 공동주최한 ‘2005년 그리스도인 일치기도회120일 오후 5시 서울 종로구 연동교회에서 교회의 유일한 기초이신 그리스도라는 주제로 열렸다.

일치기도회는 조성기 목사(예장총회 사무총장)의 집례로 정진우 목사(기장총회 선교국장)와 홍창진 신부(한국천주교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 대화위원회 총무)의 감사기도, 말씀 전례(윤일순 수녀, 김대원 신부), 김희중 주교의 강론,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봉독에 이어 나창규 한국정교회 신부, 김준철 구세군 사관, 김광웅 루터회 목사,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전진택 목사, 강신원 연동교회 어린이, 김진홍 한국기독청년협의회장, 나창규 신부의 기도 순으로 진행됐다.

이 기도회에서는 그동안 한국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의 연구모임을 통해 쌓은 이해를 바탕으로 작성된 한국 그리스도교 일치운동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공동 성명서도 처음으로 발표됐다. 이날 성명을 통해 한국 땅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일치를 이루려면 진정한 회개와 거룩한 생활, 이해와 관용 용서와 평화의 정신이 필요하다그리스도교 교회들이 저마다 자신이 정통적이라든가 또는 순수 복음적이라고 주장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믿음과 모범적 행실을 통해 나타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며 각자 지닌 다양성과 차이는 그리스도 교회의 다양한 모습을 나타내면서도 일치를 보여주는 형식이 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의 각 교단은 이 땅에서 일치와 사랑을 지향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각 교단의 은사와 성공에 대해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각 교단의 부족과 실패에 대해서는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며 그 교회가 하느님의 뜻에 맞는 올바른 길을 가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참가자들은 한국의 그리스도교가 천주교와 정교회 개신교로 크게 나뉘어져 마치 서로 다른 종교로 잘못 인식되는 것을 넘어서서, 예배의 형식이나 교리적 차이는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다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하나의 형제임을 고백하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기도회에서 김희중 주교는 교회의 유일한 터전이신 그리스도라는 제목의 강론을 통해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하느님이 그리스도라는 기초위에 세우신 동일한 건물임을 깨달아야 한다서로 잘못을 뉘우치고 주님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C. 재림교회와 루터교회 연맹(the Lutheran World Federation)사이의 대화 (1994-1998)

양 측은 1994111-5까지 독일 Darmstadt에서 첫 회동을 시작하면서, 그 목표는상호간 보다 나은 이해를 이룩하고, 거짓 고정관념을 타파하며, 신조의 기초들을 발견하고, 실제적, 상상적으로 마찰을 일으키는 문제들을 발견함에 있다고 하였다.

 

다름슈타트의 토론은 공개적이었으며, 솔직했으며, 우호적이었다. 재림교회 대표들은 마르틴 루터의 사업에 강한 감사의 마음을 피력하였다. 동 모임에서는 다룰 주제를 다음과 같이 채택하였다.

첫 회기: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율법; 율법과 복음

두 번째 회기: 교회론과 교회의 권위에 대한 이해

세 번째 회기: 종말론

이러한 의제 채택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오직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말미암아 칭의를 받는다는 교리는 루터교회와 재림교회 양측에 중심 교의가 된다. 이 중심 교의에 대한 논의는 더 깊은 신학적 숙고를 시작하는 좋은 지점이 된다. 같은 방법으로, 율법과 복음의 이해는 루터교 교리를 정의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된다. 반면에 재림신도들은 칭의에 관한 강조로 말미암는 논리적인 결과로서 율법과 순종을 중심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에 종종 율법주의자로 낙인 받아 왔다. 이들 이슈들에 대한 주의 깊은 논의는 더 나은 신학적 탐구의 기초적인 출발점이 될 것이다.

(2) 재림교회는 자주 분파(sect)"로 지목되어 왔다. 이 재림교회가 그리스도교교회들의 어느 스펙트럼에 속하는지 탐구되어야 한다. 재림교회가 세계적인 그리스도교회의 일원이 되는지 아니면 특별한 운동을 하고 있는지 여부를 결정짓는 것은 재림교회 자체의 자기 이해를 위하여서도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교회와 교회의 권위에 대한 재림교회와 루터교회의 이해에 관하여 쌍방간 토의는 절실하다. 동봉된 문건들은 루터 교도들의 신조의 역할과 재림신도들을 위한 E. G. White의 저술들이다.

(3) 종말론과 근래의 흥미있는 주제들에 대한 광범위한 성경적 증거에 비추어, 우리는 루터교회의 종말론이 너무 비한정적인지, 재림교회의 종말론이 너무 한정적인지를 탐구할 필요가 있다. “남은 무리바벨론그리고 짐승의 표와 같은 신학적 용어들에 관한 재림교회 기본 신조를 이 연구에 포함시켜 연구할 것이다. 더욱이 하늘성소와 재림 전 심판에 관한 재림교회의 견해는 십자가에서의 단회적 속죄와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봉사에 대한 더 넓은 배경 아래에서 논의될 필요가 있다.

첫 주제 회기의 쟁점들은 1996617-21, 캐나다 토론토 근처 Mississauga에서 개최되었다. 몇 개의 관련 논문과 광범위한 논의에 기초하여 공동 선언문의 초안 작성, 토의, 및 승인이 있었다. 대표자들은 관련된 교단들로부터 지명되었다. 루터교회 측 대표 의장은 Faith Rohrbough(USA Canada), 재림교회 측 대표 의장은 Bert B. Beach(USA)이다.

똑같은 회의의 양식이 199761-6일 까지 스위스 Jongny에서 개최된 회집에서도 계속되었는데, 동 모임에서 두 번째 주제 부분의 초안이 상정되고 승인되었다. 더 나아가 초안작성위원회가 지명되고 이 위원회는 미국 실버스프링에서 199710월에 마지막 회의를 갖고 출판물에 관한 협의를 하였다.

마지막 회합은 1998510-16, 스위스 Cartigny에서 개최되었다. 그 회합에서는 공동 선언문을 마무리하였으며 양 측 교회들의 미래 삶을 위한 제안서를 마련하였다. Cartigny 회합에는 재림교회 대총회 회장 Dr. Robert Folkenberg와 세계 루터교연맹의 총무 Dr. Ishmael Noko가 참석하였다. 양 측 회합의 대단원은 516일 프랑스 Collonges 소재 재림교회에서의 예배로 막을 내렸다.

우리는 서로 1994년에 낯선 자로 만나, 1998년에 친구로 헤어졌다. 우리는 질문들을 가지고 왔고, 상호간 감사하며 헤어졌다. 의미심장한 교리적인 차이점이 남아 있지만, 우리는 상호간 공통점이 많은 것을 발견하였다. 그 공유적 유산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사랑, 종교개혁으로부터 공유하고 있는 유산, 마르틴 루터의 사업과 가르침에 대한 깊은 감사, 신앙적 자유에 대한 관심, 무엇보다도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은혜를 통한 칭의의 복음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Justification by Faith)

 

(1) 칭의에 관한 합의점

칭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이고 오직 믿음을 통하여 오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의로워 진다.

루터교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The Lutheran Augsburg Confession) (1530) -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 자기의 공로와 행위와 만족을 통하여 의와 죄사함을 얻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인한 은혜를 통하여 죄사함을 얻고 의롭게 된다”(CA, art. ).

재림교회의 열 번 째 기본신조(10th Fundamental Belief) - 우리는 주와 그리스도가 되시고 대속자와 모본자가 되신 예수를 믿은 믿음을 행사한다. 구원을 받아들이는 이 믿음은 거룩한 말씀의 능력에서 나오며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의롭게 되며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며 죄의 세력에서 구원을 얻는다.”

 

두 교회는 sola scriptura, solus Christus, sola fide, sola gratia의 원칙을 인정하는 프로테스탄트종교개혁(Protestant Reformation)의 상속자요 루터의 자손으로 간주한다. 두 교회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에 대하여 상호 공유하고 있다. 이런 관점은 성서적인 진리에 기초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율법을 통하여 쓰여진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의롭게 됨을 지지하기 때문이다”(3:28 NRSV). 루터교회(교리4)와 재림교회(교리10)는 둘다 롬 3:21-26을 그들의 가르침의 기초로서 인용하고 있다.

 

구원에 관한 다른 신앙적인 강조점이 있지만, 서로 공유하는 관점에 비추어보면 그들은 부조화될 필요가 없다. 전통적으로 루터교회에게 있어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에 관한 올바른 가르침이야 말로 모든 다른 중심 신조들의 판별 기준이 된다. 재림교회는 그것을 판별기준으로는 삼지 않지만, 의와 칭의의 개념을 구원의 경험에 있어서 보다 넓은 문맥에 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그리스도안에서의 구원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는 재림교회의 중심(심장)이 된다.

 

그러나 재림교회는 구원은 행위가 아니고 모두 은혜이지만, 그 열매는 십계명에 대한 순종이다”(기본교리 18)라고 가르친다. 루터교회 역시 새로운 순종,” 믿음은 선한 열매와 행위를 수반해야 하며 우리 모두는 그러한 선한 행위를 하나님께서 명령하신것으로 가르친다(CA VI). 그러나 아우크스부르크신앙고백에서는 계속하여 우리는 그것들을 하나님을 위해 행하는 것이지, 마치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공로로 여기는 것처럼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양측은 모두 선한 행위를 자격이나 공로로 인정하지 않고 열매로 보는데 동의한다. 재림교회는 이러한 행위들을 주님에 대한 우리사랑의 증거”(교리 18)라고 부른다. 루터교회도 자주 새로운 순종(new obedience)”으로 설명한다. 십계명에 대한 재림교회의 특별한 강조는 루터교회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 특별히 강조하는데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두 교회는 순종과 열매를 자격이나 공로 대신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어느 쪽도 율법의 행위로 얻는 칭의에 대해 가르치지 않고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두 교회는 칭의를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고 동시에 그분 안에서 값없는 새 생명의 선물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죄사함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언으로 이해한다. 칭의라는 말은 그리스도안에서 회개하는 신자의 마음에 그리스도로 인한 근본적인 하나님의 의의 전가로 구성되어 있다. 새 생명의 선물,”또는 그리스도 안에 거함은 비록 그 의미가 개념적으로 죄 사함에 대한 근본적인 선언과는 구별된다고 보더라도, 성화라고 불리워질 수 있다. 칭의와 성화는 신자들의 경험에서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루터교회와 재림교회는 새 생애또는 칭의에 대한 성화의 측면을 그리스도 안에 거함,’또는 성령 안에서의 새 생애로서 묘사한다. 루터교회는 이 새 생애를 본질적인 면에서 말씀과 교회의 성례전 안에서 성령을 받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리하여 루터교도는 Large Catechism에서 루터의 사도신경 주석을 따라서 성령은 성도, 또는 성도의 교제, 죄 사함, 몸의 부활, 그리고 영생을 통하여 우리의 성화에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재림교회는 좀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성화를 정의 한다. ,“성령을 통하여 우리는 거듭나고 성화된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며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의 율법을 기록한다. 우리는 신의 성품에의 참여자가 되며, 현세와 심판에 있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진다”(기본교리 10).

 

두 교회가 이러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애, 또는 성령 안에서의 새 생애는 사람 자신의 능력, 또는 노력에서 오는 어떤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에 동의한다. 이 새 생애는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은사이다. 그리고 이 명백한 이유 때문에 그 것은 우리 자신이 중심이 된 생애가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또는 성령 안에서의 생애이다. 완전주의에 대한 방지책으로서 재림교회는 죄를 짓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은 반면에, 루터교회는 의로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죄인으로서 여전히 남아있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죄인에 대한 칭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여기 현재적 경험을 꼴 지워야 하는, 살아있는 실체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성령에 의한 성령 안에서의 삶이다(5:16-25). 동시에 그것은 십자가 아래에 감취어진 그리스도의 왕국 안에서의 믿음의 생애이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안에 사신것이라. 내가 이제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20).

 

율법(The Law)

율법에 관한 우리의 토론의 네 가지 영역들

 

(1) 루터교회와 재림교회 모두는 칭의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라는 범주 위에 있다는 점을 확인한다. 따라서 율법을 지키는 일은 구원의 공로가 되지 못한다. 율법에의 순종은 값없이 주신 구원에 대한 인간의 반응, 즉 결과이다. 이 점에 있어서 양 측은 일치된 입장을 보여 주고 있다.

 

(2) 루터교회와 재림교회는 십계명의 중요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각 교단은 율법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에 대하여는 다른 의견을 보여 주고 있다.

 

재림교회의 율법에 대한 관심은 다음과 같은 기본교리 18에 잘 나타나 있다.

하나님의 율법의 위대한 원칙들은 십계명에 체현되고 그리스도의 생애에 예시되어 있다. 그것들은 인간의 행위와 관계들에 관한 하나님의 사랑, 의지, 및 목적의 표현이며 각 시대의 모든 인류가 지킬 의무가 있다. 이 교훈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세우신 언약의 기초가 되며 하나님의 심판에 있어서 표준이 된다. 성령의 활동을 통하여 그것들은 죄를 지적하며 구주의 필요성을 깨닫게 한다.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로 얻는 것이요, 행함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구원 열매는 계명에 대한 순종이다. 이같은 순종은 그리스도인의 품성을 계발시켜 주며 행복감을 가져다 준다. 그것은 주님에 대한 사랑과 동료 인간에 대한 우리의 관심의 증거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순종은 생애를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나타내며,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전도를 힘 있게 해 준다.”

십계명에 대한 루터교도들의 올바른 인식은 두 교리문답집에서 루터의 주석에 따른 해석에 잘 나타나 있다.

 

a. 루터교회는 율법을 십계명 보다 더 넓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b. 루터교회는 율법을 은혜와 대립되는 것으로 보는 부정적 입장을 취한다. 율법과 복음 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것이야 말로 신학적 이해의 출발점이 된다.

c. 루터교회는 율법의 용도에 있어서 교훈적 용도(didactic use), 즉 그리스도인 삶의 지침에 집착한다.

d. 루터교회는 율법과 목음의 문맥에서 율법을 본다. 이런 점에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를 중시한다.

e. 루터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자유 입장에서 율법을 본다.

 

그러나 재림교회의 율법관은 다음과 같다.

a. 루터교회 보다 더 긍정적으로 율법을 본다. 기본교리 18에 나타난 대로 그들은 십계 명이 믿음의 행위에 있어서 더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b. 성화에 있어서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은 기본적인 동인이 되고 있다. 율법은 계율화 된 사랑(codified love)이 된다. 율법은 사랑의 삶을 위한 골조가 된다.

c. 율법과 복음은 완전히 조화되는 것으로 본다.

d. 그리스도인의 행위가 최후 심판 교리에서 율법에 따라 조사 받는 것을 더 강조한다.

 

(3) 루터교교회와 재림교회는 의롭게 된 사람의 삶이 믿음의 행위로 나타난다는 점에 의견을 같이한다. 성령께서는 계율을 넘어서 자발적인 태도로 열매를 맺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신다(5:22).

(4) 양 측은 세 번째/네번째 계명에 관하여 의견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루터교회는 그리스도교회의 전통적인 관습을 따라 일요일을 부활의 날로써 성일로 지킨다. 그들은 일요일을 안식과 예배의 날, 곧 성서적 안식일로 보고 있다.

재림교회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 사업에 있어서 안식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들은 안식일은 창조주와 구속주께 향한 사랑의 표가 되며 대쟁투의 계쟁점이 될 것으로 본다.

 

교회에서의 성경과 권위

루터교회와 재림교회는 모두 간에 성경을 교회의 권위의 기초가 되는 것으로 본다. 오직 성경만이라는 종교개혁의 원칙은 두 교회의 핵심에 들어 있다.

그러나 루터교회는 말씀과 성례전 봉사를 통하여 그 권위를 행사한다. 그들은 복음이야 말로 권위의 본질이 되고, 성경은 그 문서화된 기초가 되며, 성례전은 그 외적 징표가 되고, 그리고 시노드(synod) 등교회 각종 위계 기구는 성령의 대행자로 본다.

재림교회 기본교리 제1장은 성경의 권위를 진술하고 있다. 모든 교훈과 실천들, 그리고 결의문의 권위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으로 귀착된다. “성경, 곧 신약과 구약은 하나님의 간동으로 기록된 말씀으로 ... 성경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무류한 계시이다. 성경은 품성의 표준이요, 체험의 시금석이며, 교리들에 대한 권위있는 계시자요, 역사 속에서 활약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기록이다.”

 

두 교파의 공통된 신앙 고백은 예수님만이 교회의 머리라는 것이다. 목회자의 모든 관점이 그에게서 나오고, 모든 신자의 목회자와 그리고 안수 목사의 위임된 권위는 여기에 포함된다. 교회 권위의 구조는 루터교와 재림교가 다르다. 루터교 교회 구조는 역사적이고 교회들의 문화적 환경에 일치하도록 매우 다양하다. 재림교회는 비록 많은 나라에 분포되어 있지만 기본적으로 통일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루터교와 재림교 모두 성경을 결정적인 규범(norm, norma normans)으로 본다. 그러나 루터교는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아다나시아 신조,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과 루터의 소교리문답의 5대 고백들을 중시한다.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경을 예전에,루터의 소교리문답은 일반 신자 교육용으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은 신학교육 기초자료용으로 각각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재림교회는 비록 고대 에큐메니컬 신앙고백의 내용을 성경적인 것으로 수용하고 있다하여도, 루터교회처럼 각종 신경들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 그들은 성경 그 자체가 신경이 된다는 신념을 지녔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엘렌 화잇의 저술들의 가치를 중시한다. 그의 저술들은 교회에 권면하고 있으며 영적 자양분을 공급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재림신도들은 그의 기록들을 지속적이고도 권위 있는 진리의 자료로서 교회에 위로와 인도와 교훈과 교정을 제공한다”(기본교리 17). 엘렌 화잇의 권위는 성경으로부터 파생된 권위에 속한다. 그는 sola scriptura 원칙을 보증하였고, 재림신도들은 그의 기록들을 성경으로 검증하였다.

그리하여 루터교회와 재림교회는 성경, 교회의 권위 구조, 그리고 성경 외의 권위있는 자료들에 대한 접근에서 큰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두 교회는 권위의 핵심적 자료가 동일한 성경을 가지고 있다.

교회론(Ecclesiology)

재림교회와 루터교회는 모두 교회를 신자들의 공동체로 이해한다. 교회는 전 역사를 통하여 성서시대로부터 우리 시대까지 존재한다. 두 교단들은 복음의 선포, 예배하는 삶, 개인적인 기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과 세계를 위한 봉사는 교회 안에 각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중심적 요소들이라고 확신한다. 이 요소들은 또한 교회로 하여금 살아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 신자들의 공동체가 되게 한다. 양 측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리고 성령의 전으로서의 교회에 관한 성서적 묘사를 확신한다. 그리스도교회는 단순한 외적인 조직이 아니라고 한점에서 의견을 같이 한다. , 그것은 신자들의 집회(모임, 총회), 영적인 공동체요, 주 예수의 오심을 고대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다. 교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로 고백하고, 그의 오시는 나라를 고대하고, 온 세상에 복음의 기별을 선포한다. 이 사역에 대한 인식이 교회의 자기 이해의 필수요소이다.

양 측의 교회관에는 일치점과 불일치점이 있다.

재림교회의 교회관은 다음과 같다.

a.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믿는 신자들의 공동체이다.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을 계승하여,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불러 내신 바 되었다”(기본교리 11).

b. "우리는...예배와 친교, 말씀의 교훈과 성만찬의 거행, 온 인류에의 봉사와 전 세계적인 복음의 선포에 동참한다.”

c. 믿음이 침례에 선행하는 성인 침례를 신봉하며 루터교회의 유아세례를 반대한다. 성찬예식에 있어서 주의 임재를 믿지만, 기념설적 성만찬 예전을 시행한다. 성찬예식 전 세족식을 거행한다.

d. 종교개혁의 후예로서 충성스러운 남은자의 사상을 견지하고, 남은자는 선과 악의 대쟁투에 있어서 요한계시록 14장의 선교적 사명을 선포하므로 주의 재림을 준비시킨다.

루터교회들의 교회관은 다음과 같다.

a. "하나의 거룩한 그리스도교회가 있을 것이고 영원히 남을 것이다. 이것은 복음이 그 순결성으로 선포되고, 복음에 따라 거룩한 성찬식이 시행되는 믿는 자들의 모임이다.(CA 7).

b. 교회의 뿌리는 구약 시대에서 발견되고 기독교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체결한 하나님의 새언약으로 나타난다.

c. 그리스도교회의 정체성은 복음과 두 예전, 곧 세례와 주의 만찬이라는 징표를 통하여 밝혀진다. 세례와 믿음의 상호관련성을 밎지만 믿음이 결여된 세례(유아세례) 역시 효력이 있다고 본다(Large Catechism, IV, 53). 주의 신체적 임재로 보는 공재설적 성만찬을 신봉한다.

d. 루터교회의 남은자의 사상은 신자와 성도의 모임과 많은 거짓 그리스도인들 중에 경건한자로 본다.

종말론

루터교회와 재림교회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종말론의 중심이 되심을 확신한다. 그분은 시간과 공간의 주이시며, 그의 십자가상에서의 대속적 죽음은 기만적인 악의 권세를 이기셨고 모든 만물을 궁극적으로 회복할 확신을 주셨다. “아버지께서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1:19,20).

예수를 믿는 신자들은 현재와 미래의 두 국면에 관계를 지닌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직 은혜로 칭의된 사람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었다(3:3). 그리고 그들은 이미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앉는다(2:6). 의롭게 된 자는 새 피조물이 되며(5:17),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다(2:19).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요일 3:1,2).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공포와 불확실성 가운데 더 이상 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은 시간 가운데 처하여,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초림하신 때로부터 시작된 종말”(1:2)에 살고 있다. 그리고 아직도 그리스도께서 만주의 주가 되실 때를 고대하고 있다. 그리하여 재림교회와 루터교회는 칭의의 현재의 실재성을 확신할 뿐만 아니라, 영광가운데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한다. 복된 소망”(2:13)재림교회라는 바로 그 이름에 반영되어 있고, 루터교회가 고대하는 사랑하는 마지막 때”(the dear last day)를 공유하고 있다(Luther, WA Br 9, 175).

많은 점에서 두 단체는 구원사에 대한 유사한 견해를 지녔다. 루터교회와 재림교회는 역사가 원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선적(線的)으로 진행하고, 목적 없이 제멋대로가 아니라, 우주적 회복이라는 목표(telos)를 향하여 나가고 있다고 확신한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8:22).

개인적인 종말론에서는 루터교회와 재림교회는 성경이 영혼의 불멸보다는 몸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루터교회와 재림교회는 고대 사도신경이그리스도께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신다고 선포하고 있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양측 모두 성경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병행되는 심판을 가르치고 있다고 증언한다(딤후 4:1). 그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는 또는 유업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공로로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이지, 그들의 선행의 공로로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은 영생의 근본적인 기초가 되고, 하나님의 선물과 비밀이 된다.

모든 일의 결국(극치)을 기다림에 있어서, 루터교회와 재림교회는 한쪽으로 치우치는 극단을 피하려고 노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재림에 대한 과열된 시대로 충만해 있다. 양 측은 재림의 시기를 정하는 일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 다양한 계산에 대하여 경계한다. 두 교단은 세상을 향한 활동적인 봉사를 추구한다. 재림교회는 날마다의 준비를 강조하면서, 주의 다시 오심의 임박성을 강조한다.

 

루터교인과 재림교인들이 성서 예언 해석을 위한 몇 가지 원칙들에 대하여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첫째, 성경은 그 자체가 해석하도록 허용되어야 한다.

둘째, 우리는 미래를 안다고 주장할 때에는 적절한 겸비를 나타내야 한다.

셋째, 예언은 그것이 성취된 후에야 명백히 이해된다는 것이다.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14:29).

재림교회와 루터교회는 성경의 묵시문학들에 대하여 특정의 확신을 공유하고 있다. 그들은 이 같은 문학이 그리스도인 삶을 위한 연구와 선포와 교훈을 위하여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들은 이러한 묵시문학이 여타 모든 성서 문학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배경에 뿌리 내리고 있으며, 또한 그것은 그것이 출현한 문맥을 말할 뿐 아니라, 장차 올 세대를 위한 중요한 메시지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또한 묵시문학의 중심은 그리스도이시며, 우주적 드라마의 형태 로 선악간의 대쟁투를 묘사하고 있다고 본다.

 

양측의 종말론 이해에 있어서 이러한 일치성이 있지만, 또한 심각한 불일치 분야도 있다. 이 불일치한 점들은 성경의 묵시문학을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두 교단은 역사가 클라이맥스를 향해서 움직이고 있으며, 또한 성경은 장차 올 사건들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을 준비시키고 있다는 점을 믿고 있다. 그러나 재림교회는 이 문제들에 대하여 보다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 이는 27개 기본교리 중 다섯 개가 종말론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점에 잘 드러나 있다(23-하늘 성소에서의 그리스도의 봉사, 24-그리스도의 재림, 25-죽음과 부활, 26-천년기와 죄의 종말, 27-신천지). 반면에 루터교의 신앙고백 저술에는 고대 신조에서 확인된 것 이상은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재림교회에서는 성경의 역사적 정확성 문제는 매우 중요하며, 사건이 일어난 후(ex eventu)에 예언이 기록되었다는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루터교회는 묵시문학을 해석에 있어서 전통적으로 매우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해 왔다. 묵시문학 책은 기록된 이후에 일어날 역사적 특별한 사건들에 관한 예언들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은 그 책에서 초기교회의 위기적 의미가 있는 사건들과 연관시켜 보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재림교회는 성경의 묵시문학이 의미심장한 예언적 요소(predictive element)를 지니고 있다는 시각을 지녔다. 다니엘과 요한계시록 책은 중요한 역할을 하여 왔으며, 또한 계속해서 그리할 것이다. 이 책들은 영적 윤리적 가치를 넘어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종말(eschaton)을 향하여 치닫는 역사의 넓은 개요를 포착케 하려는 신적 목적을 담고 있다. 이 지식은 나태한 호기심을 만족시킬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역사의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확인케 함에 있다.

이리하여 재림교회는 다니엘서가 동 서에 시사된 대로 B.C. 6세기에 기록되었다고 본다. 그들은 다니엘의 이야기들을 궁중의 이야기로서가 아니라, 교훈적인 역사로서 읽고 있다. 또한 초기교회로부터 19세기까지 다니엘서에 대한 해석사를 살펴보면 7, 8장에 나타난 작은 뿔 기사는 B.C. 2세기의 사건들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재림교회는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상징, 숫자 및 짐승들은 상세한 것은 아니지만, 넓은 의미에서 인류 역사의 과정을 전달하고 있다고 본다. 재림교회는 성경의 자기 해석 원칙과 각 문서의 역사적 배경에 따라 이러한 해석을 한다. 간혹 어떤 재림신도들이 넓은 의미에서 보다는 더 상세한 이해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므로, 하나님만이 아시는 미래를 오도하는 진술을 하는 과오를 저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림교회는 이러한 극단을 파하고자 노력해 왔으며, 또한 역사주의적 해석이 유효한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묵시문학에 관한 재림교회의 관심으로 말미암아 종말론적 교리, 즉 재림 전 심판 교리가 명확하게 드러났다(기본교리 23, 하늘성소에서의 그리스도의 봉사). 다니엘서, 히브리서 및 다른 책들을 연구하는 기초위에서 한 재림 전 심판교리연구는 심판이 역사에 있어서 특별한 시간(1844)에 시작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하였다.

루터교회는 예수님을 대제사장(7-8)으로 묘사하는 기독론을 확인하고 있지만, 대제사장이 최근 역사의 특정한 시간에 그의 봉사사업의 새로운 국면을 시작하였다는 것을 시사하는 성서적 근거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재림교회가 성경적 및 신학적 증거들을 호소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재림교회는 이 교리가 복음을 위협하지 않는다고 본다. 이는 하늘 성소의 심판이 은혜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확신을 가진 자들의 신원을 밝혀 주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심판의 사업을 위해 들어갔었을 때에 중재자가 되시는 일을 중단한 것이 아니다. 하늘 성소 자체는 그 형태보다는 기능적인 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재림교회에 있어서 이 교리는 재림교회 자기 이해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 이 교리는 그리스도 재림이 가까웠다는 전망 때문에 소망을 일깨워 준다. 또한 그것은 하늘과 땅이 연결되었음을 확인하며, 자기들의 구세주가 중보자도 되심을 확신케 한다. 또한 이 교리는 하나님께서 선악간의 긴 쟁투를 종식시키려 하는 까닭에 위로를 안겨준다.

 

두 개의 다른 재림교회의 종말론적 교리들은 바벨론과 짐승의 표에 관한 의 상징들이다. 재림교회는 요한계시록에 사용된 바벨론은 그리스도교 시대에 나타난 배도로서 그리스도교 세계에서의 종말론적 배도로 그 절정을 이룰 것으로 믿고 있다. 그리고 나서 정치적 종교적 동맹이 형성되어 큰 박해로 이어질 것이다(13:15-17).

 

재림교회는 짐승의 표를 마지막 때에 범세계적으로 억압적인 정부가 일요일 준수를 강요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해 왔다. 그들은 오늘날의 일요일 준수가 짐승의 표를 구성한다든가 혹은 일요일을 준수하는 사람들이 짐승의 표를 받았다고 믿지 않는다.

 

[시간적 제한 때문에 종말에 관한 천년기 같은 다른 주제들 대하여는 토론하지 못했다.]

 

종말론을 강조와 이해에 있어서 견해의 차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루터교회와 재림교회는 예수님은 구세주요, 의롭게 하시는 분이시오 역사의 주인이 되신다는 공통적 믿음을 확인하였다. 그들은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11:15)실 때에 그의 백성들이 하나가 되도록 하신 그리스도의 기도가(17) 온전히 성취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제안

우리의 대화중에서 우리들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이해함에 있어서 괄목할 만한 수렴에 도달하였다. 우리들은 엄연히 존재하는 교리들의 차이점들을 감추기를 원치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우리 교회들에게 다음 사항을 제안한다.

 

1. 우리는 재림교회와 루터교회가 각기 상대방들이 신봉하고 있는 기본 신조를 상호간 이해하도록 제안한다. 이러한 일반적인 인정을 아래와 같이 구분한다.

 

a. 루터교 신자들은 자기들의 국가나 지역에서 재림교회를 sect로 취급하지 말 것이며, 자유로운 교회 그리고 세계적인 그리스도교회로 취급하도록 제안한다. 이 제안은 재림교회가 삼위일체의 하나님 이름으로 물 침례를 받는데, 루터 교회도 이 침례가 유효함을 인식하는 것,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 충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교파 안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는 공동 확신을 갖는 것에 기초를 둔다. 이 견해는 CA 과도 일치한다.

 

b. 우리들은 재림교회가 다른 그리스도교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 확신을 끊임없이 확인시키도록 제안하는 바이다. 이 제안은 재림교회 대총회 규정 1996/ 1997, O 75의 표현에서 볼 수 있다. 이 규정에서는 분명히 다른 그리스도교회들을 언급하고 있으며, 또한 세상의 복음화를 위하여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분으로서 사람들 앞에 그리스도를 높이는 다른 기관들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주의 만찬에 관한 재림 신도들의 이해에 따라 루터교도들이 믿는 그리스도인”(기본교리 15)으로서 재림교회의 성만찬 예식에 참여하는 것을 환영해야 한다.

 

2. 우리의 논의에서 우리는 성경이 교회의 권위의 유일한 기초이며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심에 대해 포괄적인 의견 일치에 도달하였다. 신조와 고백의 문서들은 루터교회를 위한 신앙의 기준으로 도출된 것들이다. 유사한 방법으로 재림교회에게는 E.G. 화잇의 저술들이 성경으로부터 도출되었으며, 성경으로 시험된 것들이다.

 

이러한 의견 일치의 기초 위에서 우리들은 재림교회와 루터교회가 공중석상에서 가르치거나 신학적 교육을 할 때에, 상대편 교회의 권위를 진실되고, 논쟁적이 아니게 제시하며, 상대방의 자기 이해와 일치하는 방법으로 제시하기를 제안하는 바이다.

 

우리는 전도와 매일의 삶에서 성경에 우선순위를 두는 중요성을 재확인한다. 우리는 개인적 성경 연구가 그리스도인 생애의 기초적 부분이 됨으로 우리들 교회들이 공동적인 성경연구에 참여하도록 신자들을 격려한다.

 

3. 각 신앙 공동체는 자기들의 정체성과 확신들을 계속 유지해 나가는 반면에, 양 측은 총체적인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선(), 이해 및 인류의 향상을 위해 협의의 고리를 갖도록 격려하며 키워나가기를 제안한다. 공동적 증거(전도)를 위해 아래와 같은 협력의 여러 분야들을 제시한다.

 

a. 인류의 고난을 덜어주는 일

b. 종교적 자유 증진을 위한 노력

c. 목회자들의 협회 / 목사들의 모임

d. 공동 기도회

e. 성서 공회 사업

 

4. 루터교회와 재림교회는 상호 관심이 있는 주제들을 탐구하기 위해, 쌍방 협의 모임을 종종 갖도록 제안한다. 한 걸음 나아가 우리들의 첫 번째 협의는 현대 사회에 특별한 관련이 있는 휴식과 예배일에 관한 신학적 기초들과 그 영적 측면을 다루도록 제안한다. 이러한 협의회에는 쌍방의 신학자, 목사, 교회 지도자, 평신도들과 그리고 가능한 다른 초청 인사들을 참여토록 할 것이다.

 

5. 루터교세계연맹과 재림교 대총회는 자기 교단의 신자들이 상대방 교단의 견해와 영적 관심을 보다 잘 이해하도록 하기 위하여 이 보고서의 배포와 연구를 위한 계획들을 수립하도록 건의한다.

1998. 5. 15 스위스, 카티니

 

III. 재림운의 예언적 운동 성격

1. SDA는 요한계시록 14장에 나와 있는 영원한 복음을 선포하도록 특별히 부름 받은 교회이다. 이것은 교만이나 건방진 소리가 아니다. 재림교회는 요한계시록 제14장과 제 18장의 마지막 기별을 온 세상에 선포하도록 위탁 받은 남은 백성들이다. 묵시문학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재림교회가 종말론적으로 참된 에큐메니컬 운동을 주도하도록 위촉하셨다. 그들은 타락한 교회들에서 하나님 백성을 불러내는 使命을 지녔다. 재림교회의 에큐메니컬 운동의 토대에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이 들어 있다(14:12). 재림교회가 추구하는 에큐메니컬 운동은 먼저

1) 바벨론에서부터 나오고(calling out from Babylon disunity),

그 다음에

2) 연합을 위한 교제로 진입(calling in to a fellowship of unity and truth and love with in the glove- encircling) 하는 수순을 밟는데 있다.

 

그러나 세계교회협의회(The World Council of Churches,이하 WCC로 칭함)의 수순의 특징은 먼저 범세계적인 조직에 연합으로 진입하라는 것에 있다. 현재 300여개 이상의, 교회와 교단들이 이 WCC에 가입하여 있다.

밀러운동은(The millerite movement )은 수많은 교단과 교회들을 아우른 일종의 에큐메니컬 운동이었다. 초기 재림교회 신도들 역시 이질적인 각 교파 출신들이어서 역시 어느 면에서 에큐메니컬 운동의 성격도 지녔다. 그 출발의 에큐메니컬 운동 이상으로 재림교회는 종말론적인 에큐메니컬 운동을 전망하고 있다.

 

IV. 에큐메니컬 운동의 교회 연합관

1. NT에서의 교회 연합 특색

1) 개인적인 회심, 성화, 기쁨, 신실, 순종의 특징을 지니고 진리 가운데 연합하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 (17:6,13,17,19,23,26).

2) 재림직전 종말론적 교회상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의 믿음을 지닌 남은교회(12:17)이어서 초대형교회가 아니다.

3) 분리(separation/division)하여 나오는 일은 교회의 순결과 온전성을 보호하는 방편으로 성서적이다.

2. WCC의 에큐메니컬 운동 특색-연합열광주의(Ecumenthusiasts)

1) 전교회 조직의 연합 추구 - 초대형교회(Mega church) 추구

2) 분열이나 분리는 용서받을 수 없는 스캔들로 의식화 작업--이단이나 배도는 크게 문제시 되지 않지만 분리는 해악적인 것으로 본다.

3) WCC 지도자들은 개인적 성화와 부흥에 관심이 별로 없다. 그러나 참된 회심 없는 형식적 연합과 조직체에 연합하는 일은 외식일 뿐이다.

 

V. 에큐메니즘의 신조관

1. 교리에의 유연성 자세 강조 - 이상적인 교회 연합은 교리를 제2선으로 제켜둔다. 다른 교회의 교리를 존중하고 자기 신조에의 경직성을 탈피한다. 에큐메니컬 운동과 교회연합 교리 이외의 신조를 상대주의하는 전제를 두고 있다. 이는 교회의 진정한 영적 활력을 상실케 하는 길이 된다.

2. 겸비와 온유의 덕목 자세 강조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 )라는 성경절을 강조하나 이는 진리와 덕목을 혼동한 문제성이 있다.

3. 모든 교리는 시간적 조건의 제약을 받고 있다. cocktail approach를 하여 모든 교리 포용 추구하고 다양성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강한 확신 없이는 교회가 영적 힘을 발휘 할 수 있을까?

 

VI. 에큐메니즘의 성경관

1. SDA 성경관 -

- 성경이 하나님의 뜻에 무류한 계시, 교리적 진리의 권위 있는 계시자.

- 구속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권능의 행위에 관한 신뢰성 있는 기록

- 성경의 통일성 신뢰, 성경은 하나님 말씀, 성경 中心

 

2. WCC 다수 지도자들의 성경관

- 성경은 규범적이고 권위 있는 것이 아니다.

- 복음서의 비신화화, 성경의 다양성 강조

- 명제적 계시 개념 배척

- 독자반응론 강조, 성경 절은 하나님 말씀이 아니고 주님의 말씀도 포함하고 있다.

 

3. 묵시문학적 예언관

묵시문학의 예언은 마지막 때를 위한 것이 아니다. 피루시아에 관한 구절들은 형식상 들어 있으나 긴급성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에큐메니컬의 복음 전도 사명에 별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다 .

요컨대, WCC 는 종말론적 장님이 되는 위험성이 있다.

 

4. 성서적 죄와 구속관

SDA 는 그리스도와 사단시대의 거시적 대쟁투의 구도로 이해, 하나님의 말씀과 사기꾼의 거짓말사이의 대쟁투, 충성스러운 남은 자와 바벨론 사이의 대쟁투, 하나님의 인과 짐승의 표 사이의 대쟁투로 본다. 그러나 에큐메니컬 운동가들은 사회적 문제해결에 집착한다.

 

5. 선교와 복음 전도관

1) 전통적 선교관은 복음전도에 초점, 복음의 축어적 선포에 두나, 에큐메니즘은 shalom의 성취. 일종의 사회적 평화와 조화 또는 성취에 집착한다.

2) SDA는 구원을 기본적으로 개인을 죄로부터 구출에 두나, 에큐메니즘 구원은 사회적 억압 받는 자 구출, 굶주린 자, 인종편견, 사회적 부정에서 구출, 해방에 둔다.

3) SDA는 회심한 개인이 영적 재탄생을 통하여 급격히 변화되는 것에 두지만, 에큐메니즘의 변화/회심은 불의한 사회 구조의 변화에 둔다.

4) 복음전도

- WCC는 덜 복음 전도적이어서 그 결과 교회 성장세의 둔화, 교인 감소, 선교사 파송 감퇴 현상 초래하여 선교 자금지원도 자연히 감소됨.

- 에큐메니즘의 선교활동도 쇄잔, 보수적 복음주의에서나 복음전도를 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이슬람의 전투적 선교열 가속 현상 및 동양 종교 각성과 관심이 부각되고 있다.

그러나 SDA는 복음전도와 선교를 강조한다.

 

6. 에큐메니즘의 사회 정치 책임 의식

1) 에큐메니즘은 정치 문제 민감하고 적극적이다. 반면에 재림교회는 정치 문제에 신중히 접근한다.

2) 에큐메니즘의 정치적 책임 내용

구원의 세속화

천년후 재림론 - 점진적, 낙관론적 정치 발전과 개량 사회추구

진화론적 발전이라는 유토피아 신앙

사회주의적 집단주의 평등주의/사회주의 추구, 그러나 공산주의적 유물론 배격

에큐메니컬 사회운동가들은 유토피아적 피안의 비젼에 집착한 재림교회를 잘못되었다고 본다.

3) SDA의 정치적 책임 내용

- 도덕적 원칙들에 역점. 성서적 지도 방향 제시하고, 정치적 지도의 대변인 노릇하지 않는다. 원천적으로 씨에 관심을 두어 그 결과나 영향력이 사회와 정치에 파급되기 바라고 있어 정부를 밀어붙이는 일이나 정치적 논쟁에 휘말려 들어가지 않는다. “나의 왕국은 이 세상이 아니다” (18:36).

7. 종교 자유관

1) 초기- 1948 Amsterdam 회의에서는 종교자유를 의제로 채택, 이 종교 자유를 에큐메니컬 연합의 전제 조건으로 보았다.

2) 1968 - WCC 본부에 종교자유 기구 창설

3) 최근 - WCC 종교 자유에 관한 입장이 모호하여짐

1978 - 자금자원 중단으로 종교자유국 폐쇄

4) 오늘날 - 종교자유관 개념 변질, 그것은 하나의 인권차원에서 개념이지 모든 타 인권을 단단히 묶는 기본적 개념으로서의 종교자유관 희박, 즉 종전의 종교자유가 여타 진정한 자유들에 대한 수호자 역할을 한 위상이 증발되었다.

5) 종말론적으로 기성교회가 종교적 박해의 진원지가 된다는 점을 간과한다. 오늘날 에큐메니컬 운동권에서는 오히려 사회 정치적 변혁활동에 불참하는 신도와 교회의 입지가 좁아져 버렸다. 심지어 혁명적인 에큐메니컬 운동가들은 연합을 위해 또 사회 공익을 위하여 종교자유를 일시적으로 제한 내지 폐쇄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8. SDA의 예언자적 인식

1) 회고(Looking back) - 교황권 박해, 교황권의 반그리스도교적 역사, 국가와 교회의 제휴 등 고찰

2) 전망( Looking forword) - 가톨릭 주의와 프로테스탄티즘의 제휴 위험성 전망.

3) 현재 성찰(Looking the present) - 재림교회는 영원한 복음 전도 사명, 창조주 경배, 예수의 믿음 고 수, 하나님의 심판 시간 도래 확신.

9. SDA가 에큐메니컬 연합의 가능 범위-- 복음 전파 차원과 빈곤한 인류구원에서는 협력 가능.

10. 타 종교단체와의 관계

1)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타교단의 구령활동을 높이 평가한다.

2) 그러나 SDA는 그리스도의 재림 박두 전파 책임을 지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활동지역을 축소하는 일은 不可能하다.

3) SDA 지도자들은 가교 건축자(Bridge builder) 역할을 하여야 한다. “목사와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미치는 데는 더 많은 지혜가 필요하다.”EV 562

재림교회를 유대인의 ghetto 같은 것을 구축하는 일을 기피하여야 한다. 전도하여 사람들을 자기 성안으로 포로로 데리고 오는 정도로는 안 된다. 분리주의 멘탈리티에서 脫皮하여야 한다.

우리의 목사들은 다른 교파의 목사들과 가까이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들을 위하여 중보하고 계시므로 그들을 위하여, 그리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라. 그들에게는 엄숙한 책임이 지워져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자로서 이와 같은 양떼의 목자들에게 깊고도 열렬한 관심을 나타내야 한다”(6증언, 78).

 

11. 회의에 옵서버로서 참여하고 타 교회와 대화하는 일의 유용성

WCC의 회원으로 가입하는 일은 소망스럽지 못하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과 사조는 알아야 한다. 재림교회의 입장을 판단 위하여서도 회의에 옵서버로서, 또는 교단간의 대화 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동안 저들과의 대화는 저들의 편견과 오해를 세척하고 재림신학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도 되었다. 재림교회는 자긍심을 갖고 심도있게 성경적 진리를 펼치는 일은 현대진리 선포의 한 방편도 된다.

Ecumenism이라는 말은 초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oikoumene에 기원을 두고 있다. Oikoumene오는 세상(the world to come)” , 하나님의 우주적 왕국의 도래를 뜻한다(2:5, NEB).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5-16).

 

VII.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한 비판

1. 초대형교회 지향

WCC가 원래 회원교회를 위하여 봉사하겠다는 초기의 약속을 버리고 오히려 중앙 집권적 초대형교회(Super church)로 지향 및 변신하여 가고 있다.

2. 사회 및 정치 참여 지향

敎會 자체의 개혁과 성장과 발전을 주제로 한 운동이 아니라 사회적 제반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사회를 위한 교회로 변신하고 있다. 복음 전도만이 사회 구원 최선의 길이라는 시각을 탈피하고 사회에 도움만 된다면 그 方法이나 內容을 문제시 하지 않는다. 악의 원천이 피상적인 사회문제에 있다고 본다.

정교 분리 원칙을 깨트리고 권력과 제휴하여 간다.

 

3. WCC敎會統合 목표 지향

(1) 기구적 통합강조

(2) 기구적 통합 요원 확대

참 통합은 기구적 통합보다는 정신적, 영적, 신앙적 統合이 중요하다. WCC에 한번 가입하면 탈퇴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4. 신학적 좌경화 및 혼합주의 지향

WCC는 교리적 타협이나 중립성 내지 신학적 자유주의(latitudinarianism)를 토대로 하는 교회연합을 추구하고 있다. WCC가 성경의 영감과 권위성을 이완시키고, 그리스도교의 근본적 진리(그리스도의 대속사, 동정녀 탄생, 재림, 부활)을 부인 내지 약화시켰다. RC의 마리아론이나 교황의 수위권에 굴복하는 신학적 절충주의 내지 타종교를 other faith라고 칭하면서 수용하는 혼합주의를 지향하여 왔다.

 

4. 복음선교에 대한 정열 상실.

전도와 교회 일치에서 교회일치에 역점을 두는 것은 교회의 본래의 사명을 약화시킨다.

 

5. 성서적 교회관 이탈하고 문화사적 교회관으로 변신.

 

재림교회는 특히 역사적으로 1844년의 재림운동에서 탄생한 교회로 요한계시록 제 13장의 짐승과 그 우상과 투쟁하는 교회이며, 14, 18장에 나오는 종말론적 사명을 지녔다. 특히 남은교회로 예언된 교회이다. 진리교리를 회복하는 순수성을 포기할 수 없으며 정치적 권력기구로 변신한 WCC에 동참하지 않는다.

 

요컨대, 재림교회는 WCC 같은 연합의식이 없다. 재림교회의 목표는 WCC가 추구하는 목표와 다르다. 재림교회가 WCC에 가입할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역사적 이유--재림교회는 1844년 이래 재림운동의 사명을 가지고 등장하였다. 이 한 목적을 중심으로 하나 됨이 필요하다.

 

2. 교리적 이유--재림교회는 그 정체성과도 같은 핵심 기별을 타협할 수 없다. WCC의 교리적 자유주의(latitudinarianism)를 따를 수 없다. 재림교회는 교리적 타협을 하고 연합하는 것을 배척한다. 재림교회가 WCC와 연합하므로 치러야 하는 대가가 너무 크다. 교리적으로 하나 됨은 재림교회의 기본적인 교회관이 된다. 진리 때문에 바울은 유대주의를 떠났고, 종교개혁자들도 로마 가톨릭교회를 떠났다.

거짓 것과 혼합시켜 그것을 참된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사단의 계책이다. 일요일 휴업 운동의 지도자들이 사람들에게 필요한 개혁 사업과 성경과 일치되는 원칙들을 강조할 수도 있다. 그러나 거기에 하나님의 율법과 반대되는 요구가 포함되어 있을 것 같으면 하나님의 종들은 그들과 연합할 수 없다. 사람의 계몽을 위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제외하는 일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쟁투, 587-588)

 

3. 정치적 이유--재림교회는 국가권력과 제휴할 수 없는 정교분리의 원칙에 서 있다. WCC는 교리적 연합보다 조직의 연합을 간조하고 있다. WCC에 한 번 가담하면 빠져 나오기가 어렵다. 재림교회는 WCC가 짐승의 우상을 향하여 나가는지 여부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

4. 예언적 이유--재림교회는 여자의 남은 자손으로 부름을 받고 등장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시키는 남은 자손의 등장을 예고하였다. 요한계시록 13장과 17장은 그리스도교계가 연합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하는 교회를 박해할 것을 예고하고 있다.

합중국의 주요한 교회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교리에 의하여 서로 연합하여 그 국가로 하여금 자기들의 교령(敎令)을 강제로 실시하게 하고, 그들의 제도를 강압적으로 유지하려는 때가 이르면, 그 때에 개신교 미국은 로마교적 교권 정치의 우상을 만들게 되고, 그 필연적 결과로서 이에 반대하는 자들에게는 법률적 형벌을 과하게 될 것이다”(쟁투, 445).

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