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주의(Principleism)의 길

(이 글은 '천국시민의 길' - 산상보훈연구-에 나오는 '해석 방법들' 중, ' 4. 그리스도인을 위한 이상'을 확대시킨 것입니다.)

I. 들어가는 말

삶의 현장은 복잡다단하여 어느 판단 원리를 적용하여야 할지 난감한 경우가 자주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윤리적 판단의 원리로 여러 가지 모델들이 등장하여왔다. 이러한 모델들에는 자유주의 윤리, 근본주의 윤리, 신정통주의 윤리, 복음주의 윤리, 해방신학 윤리, 상황윤리, 연관주의 윤리, 계층주의 윤리, 비상충적 절대주의 윤리, 상충적인 절대주의 윤리, 무상명법적 윤리 등이 부침하여 왔지만 크게 상대주의 윤리와 절대주의 윤리로 대분할 수 있을 것이다. 상대주의 시대, 다원주의가 지배하는 오늘 이 시대에 어느 하나의 절대주의를 추구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이라는 비판을 받기가 쉽다. 그러나 절대주의를 포기하는 날 그리스도인은 사사시대와 같이 자기 소견에 옳다고 여기는 대로 살아가는 위험이 있다. 여기서는 지나간 날 여러 절대주의 모델들의 한계를 생각하면서 그 하나의 대안으로 원칙주의(principleism)를 제안하고자 한다.

 

II. 일반적인 의미

원칙주의는 절대주의적인 윤리적 판단원리에 속한다. 이 원칙주의에서는 성서의 법도와 규칙()들에 대한 완전한 이해와 순응을 중심으로 윤리적 결단을 내리나 성서를 율법주의적 법률 책으로 보지 않고 윤리적 원칙과 지침의 책으로 본다. 그리하여 이 입장에서는 말씀을 주석 하여 끌어낸 사상을 삶의 현장에 접근시킨다. 원칙주의는 문자(文字) 그대로를 생활의 세세한 문제에 직접적으로 대입(代入)하는 것이 아니다. 삶의 모든 정황과 사건에 대한 규칙이나 규범을 마련하고자 하는 율법주의는 무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이 어떤 원칙을 말하고 있는지에 역점을 두고 이에 따라 윤리적 판단을 해야 할 것이다.

엘렌 화잇은 사랑을 원칙으로 보았다. “순결하고 거룩한 애정은 감정이 아니고 원칙이다. 진정한 사랑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은 충동적이거나 맹목적이 아니다”(청년, 435). “생애를 지배하는 원칙이 되는 사랑”(4증언, 224)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랑을 원칙으로 이해되고 있다.

십계명의 계율은 온 인류에게 적용되는 것이며, 만민을 위한 교훈과 통치 원칙으로 주신 것이다”(부조, 305). 십계명은 각 계명이 원칙을 담고 있다 (1-하나님에 대한 배타적 예배, 2-영적예배, 3-경외하는 예배, 4-하나님이 원하는 시간의 예배와 안식, 5-권위 존중, 6-생명 존중, 7-순결, 8-정직, 9-진실, 10-만족).

예수의 윤리는 제자 윤리, 종교윤리, 내적 윤리, 원칙에 기초한 윤리, 완전윤리, 모든 시공에 적용되는 윤리, 모범적으로 예시된 윤리이다. 특히 산상보훈에서는 율법의 원칙과 정신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있다.

 

III. 구체적 주장

 

계시와 영감의 소산물인 교훈에 담겨있는 의미를 오늘 우리의 삶에 적용하여야 한다. 따라서 먼저 성서교훈의 의미를 열심히 탐구(探究)하여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천착(穿鑿)된 의미는 성경의 다른 교훈과 비교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교훈으로부터 시험받아야 한다. 이러한 검증과정을 거쳐 도출된 원칙은 그것이 전체적으로 성경적 이상과 조화를 유지하는 때에 수용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율법주의적 접근방식과 상황주의적 판단원리가 가져오는 과오를 피하여야 할 것이다. 삶의 여러 정황에 상이하게 적용되는 원칙으로 윤리적 판단을 해야 할 것이다. 계명이나 계율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계명 도는 계율에 내재된 중용적인 원칙들이다.

 

상황주의적 윤리가 사랑이라는 미명 아래 근본적인 원칙을 이완 내지 무시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원칙주의는 성경상의 명령과 금지를 아주 심각하게 고려하여야 한다. 어느 특정의 상황이 윤리적 결단과정에 영향을 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상황을 반드시 결정적(決定的)인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사랑은 원칙이지 원칙을 뛰어 넘게 하는 디딤돌이 아니다. 계명의 근본정신이 사랑이라고 할 때 그 사랑은 계율화된 사랑으로 계명의 받침대가 된다. 그래서 십계명을 제쳐놓는 결단을 피하여야 한다. 이 십계명이야말로 오늘날 우리 삶의 현장을 관장하는 발판규범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십계명을 우리 삶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

 

성서시대 문화를 위한 성서의 가르침은 각 시대 사람과 문화를 위한 하나님의 뜻(원칙)을 함축하고 있다. , 그 시대의 의미를 탐색하여 오늘날 이 시대에 적용하는 작업이 수행되어야 한다. 예컨대, 바울과 베드로는 각각 여자의 옷과 머리모양에 관하여 권면하고 있다(고전 11:5-15; 벧전 3:1-6). 여기서 머리를 가리는 외형이 현대문화에 맞는다고 보지 않는다. 그러나 그 권면 배후에는 그 시대에 상식적으로 기대하는 신자로서의 정숙한 차림을 하여야 한다는 원칙이 담겨 있는 것이다. 정숙하고 단순한 차림으로 교회의 평판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원칙주의는 외적(外的) 형식적 법률이나 법도(법칙)보다 원칙을 강조한다. 따라서 특수문제를 해결하고자 곧 성경 절을 들이대는 식으로 하지 않는다. 계명보다 중요한 것이 그 율법이 말하고자 하는 원칙이나 이념일 것이기 때문이다.

 

IV. 전제조건

 

원칙주의는 몇 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친 백성들이 선한 행동을 하기를 소원하고 있다. 이는 어떤 일이 선하기 때문에 그러한 행위를 원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에 유의하여야 한다. 오히려 하나님이 원()하시기에 선하다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거룩하시게 하였으므로 거룩한 날이 된 것과 마찬가지의 원리이다. 일곱째 날이 거룩하기에 지정하신 것이 아니라 지정하셨기에 거룩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이냐 여부, 또는 거룩하느냐 여부는 하나님이 뜻하시는지 여부에 달려있다.

하나님은 도덕적 선택에 관하여 자기의 뜻이 알려지도록 계시하셨고 영감을 주셨다. 하나님의 뜻은 역사 속에서 또한 친히 활동하시는 것을 통하여서 나타났다. 그러나 그 분은 주로 예언자들에게 주신 계시를 통하여 자신의 뜻을 펼치셨다. 여기서는 말씀과 기록이라는 방식으로 명제적 진리의 교류가 있었다. 이 계시(啓示)중에 최고의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분이야말로 하나님의 뜻과 본성을 직접 계시하시었다. 이 하나님의 계시가 성경에 보존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시고, 섭리적으로 보호하여 오신 성경은 신학적 및 윤리적 세계에서 야기되는 제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최고의 그리고 궁극적인 권위를 지녔고, 삶의 여정에서 충분한 지침이 된다. 성경학도는 성령의 조명 아래 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오늘을 위한 원칙과 지침을 통찰하며 깨닫는다.

 

인간행동에 관한 하나님의 객관적 의지는 법칙(법도)과 원칙으로 구성되어있다. 이 법칙과 원칙은 하나님의 품성(品性)의 투영이다. 즉 하나님의 품성에서 도출된 것들이다. 따라서 법칙은 단순히 그 분의 뜻을 조명하는 것 그 이상이다.

 

하나님이 계시하신 법칙과 원칙들은 상이한 상황에서 상이하게 적용될 수 있다. 그래서 가변적인 하위법인 율례, 또는 국법 체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원칙 그 자체는 불변적이며 고정적이고, 객관적이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의지에서 발원하였다. 그리하여 법칙의 표면적 진술 배후에는 그것들을 생산하여 내는 하나님의 뜻과 이념이 대부분 잠재되어 있다. 상황은 배려되어야 하나, 결정적인 것은 그 상황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된 의지이며 원칙이다.

 

우리는 성경상의 각 계명(명령)을 주의 깊고 철저하게 검토하여야 하고, 정확하게 주석하여야 한다. 그 말씀이 전달하고자하는 정확한 의미를 도출하는 것은 절대 절명으로 필요하다. 법의 원래의미를 역사적사건적문법적으로 밝힌 후에 거기에 잠재된 원칙을 현재(現在)의 문제에 적용하여야 할 것이다.

 

알덴 톰슨(Alden Thompson)처럼 사랑(Love)와 법률(Law)을 분리시켜 이해하면 안 된다. 율법을 준 것 그 자체가 곧 하나님의 사랑을 준 것이다(20:2). , 법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22: 20-30). 하나님의 법을 지킨다는 것은 그 분을 사랑한다는 표현이다. 타인을 돌보고 보호하는 것은 그 사랑이 확장된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사랑과 법을 평행 법으로 대비하여 전자가 후자의 상위에 군림케 하는 일은 법이라는 언어 표현 양식으로 사랑을 전술하고 있는 진리를 곡해하는 것이 된다.

 

이 원칙주의에서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과 성령의 직접적 도우심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 같은 전제적 도우심을 통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성취와 구현할 수 있는 것이다. 타락한 세계 속에서 죄의 본성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성으로는 이 도우심 없이는 하나님의 뜻을 자력으로 이룰 수가 없다. 인간은 거룩한 뜻과 자기의 불완전한 구현 사이에서 괴로워하면서 하나님의 꿈이 서린 그 뜻인 원칙을 지향하며 그 꿈을 품어 보고자 애를 쓴다.

 

V. 원칙주의의 적용 몇 사례들

 

1. 안식년과 희년

 

원칙주의에서는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 구약성경 시대의 안식년과 희년제도(21:2-6; 23:10-11; 15:1-4; 25: 9-10)가 문자 그대로 적용되어 효력을 발생해야 한다고 보지 않는다. 우리는 이 제도의 문자적(文字的) 법의 구현에 기속되어 있지 않다. 한 사회는 일정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괴리(乖離)와 간극(間隙)이 눈 덩어리처럼 축적되어 간다. 그래서 안식년이나 희년제도는 이 괴리와 간극의 모순을 좁히는 방법으로 고안되었다. 이같은 안식년과 희년의 정신을 구현하여, 사회적으로 분배(分配)적 정의를 구현하는 조정원리로 삼아 그 현대적 적용인 나눔을 시도하며 나아가는 발판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 완벽하고도 궁극적인 나눔을 통한 자유와 복귀의 성취는 하나님 나라에서 가능할 것이다.

 

2. 6 계명- “살인하지 말지니라

 

십계명의 다섯째 계명부터 차례로 권위 존중, 생명존중, 순결성, 정직성, 진실성 그리고 만족이라는 원칙들을 품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이해이다. 여기서는 제6계인 살인하지 말지니라를 생각하여 보기로 한다.

 

상황론자나 연관주의자는 상황에 따라 그 행동을 고려하기 때문에 이 계명에 들어 있는 원칙을 고수할 필요가 없다. 율법주의에서는 전면적인 살인 금지로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원칙주의에서는 계명 배후에 있는 이 인간생명 존중에 그 역점을 두어 생명 고양과 증진에 힘써야 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율법주의자 유대인들과 대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원칙주의적 입장에서 율법을 풀이하였다. 그것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 산상보훈이다. 예수께서는 형제를 보고 분노하는 자를 살인자로 보아 정신세계에서의 생명존중과 사랑의 원칙을 드러냈다.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은 자를 간음한 것으로 보는 입법자의 풀이에서는 마음의 순결이라는 원칙을 천명하였다.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라는 탈리오 법칙, 즉 보복의 고리를 끊고 원수 사랑의 원칙을 가르치신 것은 동기론적 개인윤리의 금자탑이 된다.

 

생명 존중의 원칙을 파멸하는 세력의 위협을 제동하는 정의에 토대를 둔 사회 윤리의 탈리오의 법칙을 평화주의라는 미명으로 배격하는 것은 전체적인 생명 존중 원리에 반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보훈의 개인 윤리를 사회윤리와 구별하여야 하는 소이가 여기에 있다. 재침례파의 산상보훈 이해가 산상설교가 구약성경의 윤리를 대체한다고 보아 무저항주의를 사회윤리로 극대화시키는 극단적인 주장을 한 것은 신구약성경의 통일성을 파괴한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는 점도 배려하여야 할 것이다.

 

VI. 강점과 약점

 

이 원칙주의에는 강점과 약점이 있다. 먼저 강점을 보면 성서교훈이 모든 문화와 각 시대에 적용될 수 있다는 점, 성서교훈의 참 의미는 적용되어야 한다는 점, 율법주의와 자유주의 양극단을 피한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원칙주의는 생명 윤리의 기조가 된다는데 있다.

 

단점을 열거한다면 이 접근 방식(方式)은 아직 충분히 발전되지 않았다는 점, 원칙을 추출하여 해석하는 방식에 관한 구체적 지침이 결여되어있다는 점, 원칙들이 상호 충돌하는 듯이 보일 때 해결시안이 부족하다는 점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죄악 세상에서는 어느 하나의 원칙이나 규범으로 딱 부러지게 보편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낙태와 같은 딜레마 현상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단점이 부각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계층적 절대주의 같은 판단 원리를 보완적으로 적용하면 되리라고 본다.

 

VII. 맺는 말

 

원칙은 순례자의 여정에 있어서 이정표나 방향 표지판과도 같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 원칙을 지향하는 일에 목숨을 걸고 평생의 과제로 안고 발걸음을 하늘로 향하여 좁고 곧은 그리고 협착한 길을 걸어간다. 이 원칙은 이 땅에서의 생명과 영원한 생명의 이정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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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