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여인

본문: 왕상 17:8-24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왕상17:7]. 18:1과 야고보서 5:17에 의하면 당시 이 같은 가뭄은 36개월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이 가뭄은 언약의 저주이었다(11:13-17). 이는 하나님 백성에게 위기이었다. 위기를 불러 온 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비와 이슬을 보내 준다고 하는 바알을 추종한 결과이었다. 요단 동편 그릿 시내에 물이 말랐다. 아합의 통치 권역에서 벗어난 길르앗 북쪽 고원지대 어느 동굴에 칩거하며 까마귀들이 날라다 준 식물로 약 1년간 버티어 오던 엘리야는 정든 그 곳을 떠나야 했다. 그릿 시내가 말랐기 때문이다. 그동안 반역적 이스라엘과는 달리 까마귀들은 순종을 잘하였다. 까마귀들은 왕의 박해를 받고 있는 엘리야에게 아합 궁으로부터 왕이 먹는 음식 떡과 고기를 물어다 주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명령이 내렸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대로 살아갔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을 받고 사는 선지자이었다. 그는 위기를 당하여 하나님의 명 없이는 한 발자국도 옮기지 않았다(9:18-23).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했듯이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명에 따라야 한다.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은 예언자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또 다른 명령을 내렸다.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그러나 오늘 이 강론에서는 명령을 받은 한 여인에게 초점을 두고자 한다.

. 명령에 순종하는 여인 (17:9)

가련한 이방 여인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 하나님의 보살피시는 눈은 마음씨가 하늘로 향한 사람을 하나도 놓치는 일이 없다. 그 여인은 필시 하나님께서 지켜보시고 보살피고 있었던 여인이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런 명령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면, 바알을 섬기는 여인에게 이런 명령을 내렸을까? 아닐 것이다. 우상의 본거지에 살고 있는 이방여인이었지만, 그 여인은 하나님을 신봉하는 여인이었다. 삶의 한계선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옷자락을 만진 여인과도 같이 필사적으로 하늘을 앙망하며 절규하였을 것이다.

나는 명령 받았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인간은 명령 받은 존재이다. 生命이란 말 자체에 명령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삶은 명령이다.

1. 새 피난처

엘리야의 식수(食水)였던 그릿 시냇물(3)이 말라버리자 하나님께서는 이제 엘리야를 위하여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피난처를 일러주신다. 그곳은 곧 사르밧(Zarephath)이다.(9). 엘리야는 가뭄이 끌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사르밧[왕상17:9]차르파트제련 화덕,‘ ‘정련소라는 뜻이다. 그 곳은 페니키아의 염료 생산지이었다. 그리고 옷감도자기, 농산물, 지주 색 염료를 생산·판매하는 산업중심지이기도 했다. 이 성읍은 두로와 시돈 사이 중간쯤에 위치한 오늘날 지중해 연안에 있는 수라펜드(Surafend)이다.

이곳 사르밧은 이세벨의 부친 시돈 왕 엣바알이 다스리는 지역이다(16:31). 결국 이세벨이 여호와 신앙인들을 탄압하고 있을 때, 정작 엘리야는 이세벨의 고향 깊숙이 묻혀 숨어버린 셈이다. 등잔 밑은 어둡기 마련이다. 엘리야를 여기로 피난지로 게 한은 것은 아기 모세를 바로(Pharaoh)의 궁전으로 피난시킨 하나님의 섭리의 지도와 유사하다(2:10). 하나님께서는 역설적으로 적대자의 심장부를 도리어 자기 백성을 위한 은신처로 삼는다. 하나님은 가장 위험한 곳을 엘리야의 피난처로 지정하셨다. 이런 여인의 집이 위기의 시대 하나님의 종의 피난처가 되었다. 하나님이 지시한 곳은 그 곳이 마우리 위험해 보여도 가장 안전한 곳이다.

2.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하였느니라”(17:9)

하나님께서는 자기 종 엘리야를 이방인, 그것도 남편이 없는 가난하고 무력한 과부 집을 은신처로 삼게 했다. 이는 선민 이스라엘에는 이런 사람들이 없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어서 그들이 얼마나 배교의 늪에 깊이 빠져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 땅에 많은 세도가도 있었고 이른바 의인들이 있었을 것이나, 그 어느 누구도 엘리야를 숨겨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처럼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가장 약한 자를 택하여 존귀하게 사용하셨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한 특징이다(고전 1:26-31).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자랑치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 역경을 이겨나가는 여인-재난 중 죽음을 목전에 둔 여인

엘리야가 하나님의 명에 따라 가서 보니 가련하기 짝이 없는 과부네 집이었다. 처음에 그냥 과부라고 해서 호기심도 일어났을 법하다. 선지자는 가는 길에 여러 상상을 하였을 것이다. 얼굴은 어떻게 생겼나. 나이는? 그리고 재산도 좀 지니고 있겠지 등등. 그러나 막상 만나고 보니 자기를 공궤할만한 인물이 아니어서 의아스러웠다.

1. 테스트

나무 가지를 줍는지라”(17:10) - 이는 거리에 흩어져 있는 모든 나뭇가지를 주워 땔감을 삼을 수밖에 없는 과부의 극빈을 나타낸다. 엘리야는 이 기가 막히는 모습을 보고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인가 하는 의심이 일어났다. 그래서 시험해 보는 요청을 질문형식으로 한 것이다.

(1) 1차 시험- “물을...나로 마시게 하라” - 아합 당시의 가뭄은 이스라엘 뿐 아니라 팔레스틴 여러 지역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렇다면 물이 귀한 상황에서 낮선 나그네의 물 요구는 부담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비록 근동에서는 식수 대접이 거의 신성한 의무처럼 여겨졌다 하더라도 말이다. 물을 달라는 것은 사르밧 과부가 넘어야 할 첫 번 째 시험(test) 문제인 셈이다. 이 테스트는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이 우물가에서 이삭의 신부 감을 찾고 있을 때 물을 달라는 장면을 연상케 하는 요청이다(24:17; 4:7).

 

(2) 2차 시험- “청컨대...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왕상17:11) - 앞서의 물 부탁을 거절치 않자, 엘리야는 과부에게 이제 더 어려운 요청을 한다. 즉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더욱 식량난이 열악한 형편인 과부에게 떡을 요청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엘리야가 무리한 부탁을 한 것은 자신을 공궤할 과부가 누구인지 알아보자는 데 목적이 있었다(9). 사르밧 과부는 이 두 번 째 시험마저도 통과하여야 했다.

 

2. 여인의 고백

당신의 하나님”(왕상17:12) - 유명 주석가들은 과부의 이 같은 말에서 그녀가 이미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는 자였다는 해석을 한다(Keil & Delitzsch). 그러나 이와 반대로 보는 해석도 있다. ,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어서 그녀가 '나의 하나님'이 아닌 '당신의 하나님'이라 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Pulpit Commentary)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과부가 여호와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시점은 어디까지나 그녀가 엘리야의 말을 청종한 다음부터라는 것이다(14, 15). 그러나 이는 바른 풀이가 아니다.

그 이유는 17:9에 비추어 이미 사르맛 과부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고 자기의 길에 비추이는 모든 빛을 따라 사는 사람이었다.” (PK 129).

그 여인이 받은 빛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나 정작 선민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말씀에 청종치 않은 반면 이방인 과부는 선뜻 그 말씀을 받아들인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기에 이 시점에 엘리야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봉사자가 누군지 분명히 확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명령을 내린 것이야 말로 사실은 극한 상황에 처한 여인을 구출하기 위하여 엘리야를 보내 살리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구출작전이다.

 

3. 마지막 한 끼를 양보하는 여인

나는...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엘리야의 요청은 잔인한 요청으로 들릴 수 있다. 그 남은 밀가루는 죽기 전 마지막 먹고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저녁 식사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떡 하나를 요구한 엘리야의 한 마디는 과부와 아들의 생명을 요구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훗날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과부를 신앙의 표본으로 등장시켰다.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야 말로 이처럼 생사(生死)의 갈림길에서 사는 길이다.(4:24-26; 21:2).

 

한편 이스라엘이 바알 숭배에 몰두하는 동안 바알 숭배의 본 고장에서 한 과부가 바알 신앙을 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었다는 점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아무리 캄캄한 흑암 속에서도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의 빛이 역사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42:16; 4:16; 1:13).

우리 하나님은 아끼지 않으시고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8:32; DA 762). 하나님은 자신도 주셨다. 이 여인도 아끼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종에게 드렸다. 이것은 마치 이삭을 요구한 하나님께 아브라함이 아들을 제물로 내 놓은 것과 비슷하다.

이 시험을 치루는 극빈자는 베푸는 자로 전환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시험을 당하는 여인의 합격 장면도 된다. 예수께서 이 여인의 이야기를 인용하신 것도 이런 영적 제련을 거친 여인의 금싸라기 같은 정신을 살리고 싶어 해서 이었을 것이다(4:25-26).

 

4. 엘리야의 권고

(1) “두려워 말고”(왕상17:13) - '두려워'에 해당하는 '야레'(yare)'무서워하다' 외에도 '존경하다' ‘경외하다는 뜻을 지녔다. 하나님을 거룩한 두려움(외경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그것은 참된 지헤의 길이 된다. 사르밧 과부가 마음속에 이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하나님께 향한 거룩한 두려움으로 승화되는 것이 곧 믿음의 길이다.

(2) “먼저...그 후에” -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하나님에 향한 거룩한 외경심으로 심화되는 과정은 자연히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거기에는 의지적 선택에 의한 결단의 단계가 있어야 한다. 엘리야는 그러한 결단의 촉구를 한 것이다. “먼저에 유의해야 나다. 즉 떡을 만들되 먼저 엘리야에게 가져 오고 차후 자신과 아들을 위해 만들라는 말이다. 최후의 양식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한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특성은 모든 면에서 우선순위를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에 두는 것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6:33). 이 여인의 자세는 예루살렘 성전 헌금함에 두 렙돈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은 그 여자의 믿음과 궤를 같이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4:6)

5. 약속 [왕상17:14]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상기시키면서 엘리야는 하나님의 약속을 제시한다.

이 약속 (왕상17:15)은 하나님의 더하기 법의 축복의 약속이다.

(1) “저와 엘리야와 식구” - 12, 13절에 의하면 사르밧 과부에게는 가족이라곤 아들 하나밖에 없었음을 알 수 있다. 혹자는 '식구'(bayith), 즉 권속(眷屬)이란 말이 나온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들은 사르밧 과부에게 임한 축복의 소식을 듣고 온 그녀의 친척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Lange, Pulpit Commentary)고 한다.

(2) 여러 날 - '여러 날'(yamim)은 며칠 정도가 아닌, 상당히 오랜 기간을 의미한다. 그런데 14절에 따르면 사르밧 과부의 집에 밀과 기름이 떨어지지 않은 시기는 다시 비가 내릴 때까지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기간은 적어도 2년 이상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시 가뭄은 36개월간이나 지속되었으니(5:17) 그 동안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 머문 기간(2-7)을 빼더라도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2년 이상 공궤(供饋) 받았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상과 같이 사르밧 과부는 선지자 엘리야를 영접함으로서 선지자의 보상을 받음은 물론(10:41)이고, 자기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온 가족에게까지 구원의 은총을 끼쳤다.

 

(3) 곱하기 법으로 축복하시는 하나님

[왕상17:16] "통의 기루가...없어지지 아니하니라" - 이는 하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시어 말씀을 확실히 이루어 주신 사례에 속한다. 이 기적은 엘리사가 가난한 과부에게 기름을 가득 채워주었던 기적(왕하 4:1-7)과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써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그 궤를 같이한다(6:41-43). 조그만 것, 별 것 아닌 것 같은 것이 하나님의 이적을 매체가 된다. 한 웅큼의 양식이 2년 이상의 만나가 되어 이스라엘 광야의 생활을 연상시킨다.

인간이 더하기 법으로 살아가면 하나님은 곱하기 법으로 축복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약속을 담고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붙잡고 더하기의 방법으로(덧셈방식으로) 은혜에 은혜를 더함으로 그리스도의 품성을 완성시키는 일을 한다면 하나님은 곱하기법으로(곱셈방식으로) 일하실 것이다.”(6T 148; AA532).

 

. 부활신앙으로 업그레이드

[왕상17:17] 엘리야가 몸을 의탁한 집주인의 아들이 병들어 죽고, 그 재앙이 엘리야의 기거와 결부되면서 발생하는 위기의 상황이 더 두드러지게 보인다(18). 축복 속에는 고통도 들어 있다.

1. 독자를 잃은 과부

(1) “숨이 끊어진지라” - ''(neshamah)은 생명 현상의 대표적인 기능인 호흡(breath)을 가리킨다. 21절의 ''(nephesh)생명’ ‘살아 있는 존재를 가리킨다. 하나밖에 없는 과부의 아들이 죽은 것이다. 예전에 삼육대학 식당 책임자 과부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다. 어느 여름 날 그 아들이 대학 호수에 가서 수영하다가 죽었다. 장례예배에서 어느 목사님이 설교 중에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자기 자식을 하나 그 과부에게 주고 싶은 심정이라고 한 말이 기억난다. 그런 아들의 죽음은 과부에게 인생이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다.

 

(2) 의혹: “하나님의 사람”(왕상17:18) - 그 말과 행위에 있어서 진정한 선지자를 일컬을 때 자주 사용되는 용어이다.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가 베푼 이적을 보고서 엘리야가 진정한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였음을 확신한 게 분명하다(15, 16). 그런데 이 하나님의 사람 때문에 재난이 자기에게 몰려 왔다는 것이다. 인간이 불행을 만나면 온갖 생각이 그를 사로잡는다.

 

2. 자기 죄를 깨달은 여인

(1) “당신이 나로 더블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과부에게 있어서 독자(獨子)란 자기 생명의 유일한 희망이 된다. 그런데 그 아들이 죽자 과부는 층격을 받고 엘리야가 자기 집에 온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사르밧 과부의 말속에는 엘리야에게 '내가 당신을 선대(善待)한 결과가 도리어 이것입니까? 라고 하는 항변이 들어 있는 것이다. 사실 그 동안 과부가 엘리야를 공궤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선지자였으므로 선지자의 대접을 한 것이다. 그렇게 하여 과부는 선지자의 보상을 받았던 셈이다. 그런데 갑자기 아들이 죽어버렸다. 그것은 과부에게 있어서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을 일순간에 허무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자기와 아들에게 선지가가 큰 고통을 몰고 왔다고 본 것이다.

(2)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생각나게'에 해당하는 'zakar'기억하다', '회상하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하고서야 그동안 살아왔던 지난날을 반성한다. 죽음 앞에서 죄 문제가 눈앞에 다가온다. 어떻게 죄를 해결할 것인가? 인생의 최대 문제는 죄 문제이다. 사람들은 흔히 재난이나 질병을 당하고서야 그 재난의 심판이 자기 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고대인들이나 오늘날 인간이 지니기 쉬운 통념적 사고방식이다(4:7; 9:2 ). 사르밧 과부는 아들의 죽음을 자신의 죄 값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사실 엘리야 같은 선지자가 옆에 있음으로 해서 과부는 자신의 죄에 대해 더욱 민감한 의식을 갖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엘리야조차도 과부의 아들이 죽은 것에 당혹스러워 했으리라(17:19-20). 그러나 도리어 이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9:3). 

3. 죄 해결책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용서를 받아야 한다. JC가 우리 죄 짐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우리가 주 예수께 우리 죄를 자복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워서 우리 모든 허물을 용서하신다.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다. 이것을 확신하지 못하고 늘 죄 값, 형벌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4. 엘리야의 기도

(1) “여인의 품에서 취하여”(왕상 17:19) - 사르밧 과부가 아이 시신을 자기 품에 안을 정도인 것으로 보아 당시 그녀의 아들은 퍽 어렸던 것 같다(Hammond). 

(2) “자기의 거처하는 다락에” -  팔레스틴과 같은 뜨거운 기후의 지방에서 지붕 위에 툭 트인 방은 비교적 통풍이 잘되는 쾌적한 곳이다. '히브리인의 주거 형태' 참조. 그러므로 엘리야가 다락에 기거하고 있었다는 것은 사르밧 과부로부터 기꺼운 환대를 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환대에도 불구하고 사르밧 과부가 큰 불행을 당하였으니 그곳에 체류하고 있는 엘리야로서도 난처하고 민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3) “부르짖어” (왕상17:20)

엘리야 역시 독자의 죽음을 보고 당혹스러웠다. 그래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부르짖음에 해당하는 원어 'qara‘는 도움을 호소하여 급히 부르는 절박함과 안타까움을 내포하고 있는 단어이다. 따라서 과부 아들의 죽음과 과부의 항변은 엘리야를 적잖이 당황하게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엘리야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당혹스런 일을 당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간구하는 자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시는 살아계신 분이심이 드러났다(24).

(4) ‘’ - ''는 문맥상 '기어코' 또는 '결국'의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글 공동 번역은 이를 '기어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즉 이는 아이의 죽음을 그대로 당신의 최종 결론으로 삼으시겠냐는 하나님께 대한 엘리야의 항변인 것이다.

 

(5)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왕상17:21) - 이는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의 몸을 통해 죽은 아이에게 전달되므로 그 아이가 소생(蘇生)할 것을 탄원하는 간절한 염원이 담긴 신앙적 행동 표현이다(Schmidt). 세 번 엎드린 것이 그것인데 여기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만 아이의 소생이 가능하다고 하는 엘리야의 믿음을 엿볼 수 있다. 왜냐하면 '3'이란 숫자는 삼위 하나님의 '완전 수'이기 때문이다. 한편 성경에는 본 절과 비슷한 장면이 더 나오는데 곧 엘리사와 바울의 경우에서 찾아 볼 수 있다(왕하 4:34; 20:9 이하).

(6)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 이 말은 ''으로 번역된 '네페쉬'는 앞에서 보았듯이 '살아 있는 존재(생령)'를 뜻한다. 그러므로 '혼이 몸에 돌아오다'는 말은 생명을 되살려 달라는 뜻이다.

 

5. 예언자의 기도 응답 - 하나님의 권능의 현현

(1)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왕상17:22) -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는 말은 곧 기도의 응답을 의미한다. 그런데 본 절에서 '들으시므로'에 해당하는 'shama는 특히 '이해하며 경청하는' 세심한 동작을 의미한다. 즉 이는 당혹해 하는 엘리야의 기도 속에 담긴 처지와 곤경, 다급한 마음을 통틀어 이해하시는 하나님의 경청 자세를 잘 나타내준다. 한편 엘리야는 신약에서도 기도의 대표적 인물로 언급된다(5:17). 그러나 엘리야의 기도의 능력이란 엄밀히 말해 엘리야의 기도들 들으시는 하나님의 창조와 재창조의 능력이다.

 

(2)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왕상17:23) - 고대 근동 지방에서 다락이란 귀빈 접대의 장소이다. 엘리야는 다락에 기거하는 환대를 받은 것이다. 엘리야는 죽은 아이를 안고 다시금 다락에 올라와 하나님께 호소한다(19-21). 이제 엘리야가 두 번 째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갈 때는 이전의 당혹스러운 상황이 아니다. 엘리야는 이제 당당하게 하나님의 능력의 증거를 안고 내려가는 것이다. 이처럼 외면상 똑같은 동작이긴 하나 거기에 실린 의미의 차이는 엄청나다. 때문에 여기서 모든 의심을 종식 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극적 강조는 더욱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6. 부활을 목도하고

(1) “살았느니라” - 이에 해당하는 '하이'(chay)'산 채로 있다' 또는 '생명을 회복하다'는 듯의 '하야'에서 온 말이다. 따라서 이는 문맥상 '되살아났다'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2) 이제야 - '이제야''앗타'(now)''(this)의 결합어이다. '이제 이것으로'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이는 죽은 아이 소생 사건으로 인해 사르밧 과부가 더욱더 확실히 엘리야를 신뢰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3)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 - 원래 구약이 보여 주는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는 곧 침묵과 비밀로 자신을 감추지 않으시고 도리어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말한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2년 이상 엘리야가 체류하면서 보았던 하나님의 권능과 가르침이 위기로 이어졌지만, 그리고 의심도 일어났지만, 이제 확실하게 믿게 되었다는 확신에 찬 고백을 한 것이다.

(4) 확신에 찬 고백- “진실한 줄 아노라” - '진실한'에 해당하는 '에메트(emeth)'는 그 확실성을 분명히 신뢰할 수 있는 '진리'를 뜻한다. 부활은 진실의 근거가 된다. 부활을 통하여서 과부의 인생을 보는 눈, 세계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부활은 진실을 증거한다. 이 단어는 하나님 말씀의 본연의 모습을 지적할 때에 자주 사용되었다(119:142, 151, 160; 10:21). 그러므로 사르밧 과부가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한 것임을 시인한 점은 이제 그녀가 보다 확고한 신앙 상태에 이르렀음을 보여 준다. 선민(選民)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던 시대에 이처럼 한 이방인 과부가 하나님의 말씀을 '에메트(진리)'라고 고백한 사건은 예수님께서도 인용하시리 만치 뜻깊은 사건이 된 것이다(4:24-26).

하나님의 명령은 그의 부활의 권능까지도 담고 있다. 만나가 이어지는 이적의 신앙이 이제 부활신앙으로 연결된 것이다. 그러나 과부의 아들이 다시 살아난 부활은 나사로의 부활처럼 영원한 부활의 맛보기일 뿐이다. 주님 다시 오시는 날 영원한 부활의 세계가 열린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아가면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확신할 때 신앙관, 인생관, 세계관이 모두 바뀌었다.

 

(주 참고 자료: 호크마 주석(만나 주석) 내용을 상당 부분 그대로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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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