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의 눈 영의 눈 2
마음의 창(양심의 창) - 인생의 명의를 만나는 창
눈은 신체의 한 부분일 뿐이지만 육체의 눈이 밝고 어두움에 따라 온 몸이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한 것이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성한다(마 6:22-23). 하와가 선악과나무를 “보암직하고”(창 3:6)에서 “보암직하고”란 ‘눈이 추구하는’ 뜻이다. 즉, 욕망을 가지고 대상을 바라보았다는 뜻이다. “眼目의 情慾”에서 “정욕(epithumia)”은 사물에 대한 탐욕을 뜻한다. 의지의 모든 결정, 그리고 심지어 가장 좋고 가장 숭고한 인간의 감정과 능력들까지도 이 탐욕의 포로가 된다. 하와의 눈이 밝아 진 것은 금지된 것을 탐욕스런 눈초리로 보게 되었다는 뜻이다.
아무리 훌륭한 자질을 지녔다 해도 시각과 청각을 마음대로 사용한다면, 심령이 왜곡되게 마련이다(4T 108). 육신의 눈과 영의 눈은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상호 긴밀한 관계에 있다. 인간은 “바라봄으로 변화된다(COL 355). 바라보는 대상과 그 내용에 따라 인품은 꼴 지어진다. 그래서 관상학 책에서도 몸을 1천 냥이라고 하면 눈은 900냥이라고 한 것이리라.
한 쪽 눈 수술 후 다른 쪽과 초점이 하나로 안 보여 불안했다. 아직은 시력이 개선 과정에 있어서 그런지 일목요연(一目瞭然)이란 말이 틀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다른 쪽 눈을 수술하고 보니 초점이 잘 형성되어 일목이 요연하다. 두 눈을 가지고 보는 시각이나 관찰력은 엄청나다. 눈은 두 개이지만 시각은 하나이어야 한다. 관찰과 이해는 나누어져 두 곳에 미쳐야 하나 초점은 한곳에 맞춰져야 한다. 만약에 한곳에 집중이 안 되면 온전한 눈이 못 된다. 두 눈이 제각기 보아도 안 되고, 두 개가 다 보여도 안 되고, 덜 보여도 안 되고 명확히 하나로 초점이 맞춰져야 온전한 눈의 구실을 한다. 온전한 눈이라고 할 때 사물을 관찰하는 명확성에만 있는 것 아니고 보다 영적인 의미도 있다.
성경과 예언의 신에는 눈을 메타포적으로 사용한 용례들이 나온다. 성한 눈(마 6:22)은 진실한 영혼의 눈이다. 영의 눈은 맑은 마음, 깨끗한 양심의 눈, 성령의 눈이다.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버리라“(마 5:29)는 가르침은 의지를 처서 복종하라는 뜻이다.
“여호와의 誡命은 純潔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시 19:8). 하나님의 계명은 사람이 진리를 탐구할 때 그 길에 빛을 비추어 준다. 여호외의 계명이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만든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또한 시 19:8은 하나님의 계명 이외에 다른 것으로는 인간이 참된 진리를 이해할 수 없으며 선악을 분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여호와의 계명은 인간의 영적인 지식을 밝혀 주는 유일한 등불이다(잠 6:23).
성경에는 백내장 때문에 맹인이 된 것으로 추정되는 부조들 이야기가 나온다. 이삭은 137세 노령으로 인하여 시력을 상실하였다. 그의 이 약점을 이용하여 야곱이 형 에서로 위장하여 축복을 받았다(창 27:1 PP 179). 임종이 가까운 147세의 야곱은 고령으로 말미암아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였다(창 48:10). 그러나 이들 부조들의 마음의 창은 깨끗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을 만나고 있었으며 자녀들에게 예언적 축복을 하였다 육신의 눈이 잘 안보이거나 맹인아라고 해도 영의 눈은 예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치심으로 일시적 장님이 된 사람들이 있다. 동성애 정욕에 이끌려 그에 굴복한 소돔 사람들(창 19:11),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는 아람 사람들(왕하 6:18-22),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훼방하여 바울의 견책을 받은 엘루마(행 13:11)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 바울도 한 때 그리스도교회를 박해하고자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안디옥을 찾아가다가 하늘의 강력한 빛을 받고 3일 동안 거의 실명상태에 빠졌다. 비록 아나니아가 안수 기도한 후 그의 눈에서 비늘을 떼어 어느 정도는 회복되었지만, 나머지 사도의 인생길에서 약한 시력은 육체의 가시가 되었다(행 13장).
명의를 만난 복음서 맹인들
재림교회 주석서에서 소개한 복음 조화에 나오는 이적은 35개가 된다. 예수께서 치유 이적을 베푸신 대상 중에는 유독 맹인을 치유하신 사건들이 다섯 건이나 된다. 즉, 가버나움의 두 맹인들(마 9:27-31), 귀신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마 12:22-32), 벳새다 근처 이방 지역에서 이방인 맹인 (막 8:22-26), 여리고 맹인(막 10:46), 다섯 번째 안식일 이적에 해당하는 태어나면서 맹인 된 자 (요 9:1-41),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탄원한 맹인 바디매오(막 10:45-52)이다. 이들 맹인들의 시력을 회복케 한 치유 사건들은 예수의 메시아 되심을 증거 하기도 하고, 안식일의 참 정신을 들어내기도 하고, 탈선민주의, 탈 종족주의적 복음 정신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앞을 못 보는 인간에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 맹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명의를 만나 고침을 받은 것이다.
이런 여러 맹인 치유 사건 중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고 심지어 제자들까지도 당대의 잔인한 정죄의 눈으로 바라보고 예수께 질문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요 9:2). 눈이 멀게 되는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다.
재림교 주석서는 이 상황에 대한 당대 흐름을 밝히고 있다.
랍비들의 글에는 태아 시절에라도 범죄할 가능성이 있다고 암시하는 몇 가지 기록이 있다(예를 들어, 미드라쉬 랍바(Midrash Rabbah) 창 25:22).
유대인들은 이 세상에서 겪는 삶의 고통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가르쳤다. 탈무드에 의하면, “죄가 없다면 죽음도 없고, 범죄하지 않았다면 고통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으며(Shabbath 55a, Soncino ed., 255), “병자는 자신의 죄를 다 용서받기 전에는 병이 나을 수 없다”라고 했다(Nedarim 41a, Soncino ed., 130).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죄에 대한 형벌을 정해진 규칙에 따라 정확하게 내리신다고 랍비들은 가르쳤다. 그 규칙에 대한 몇 가지 예가 미쉬나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이 형벌을 받는 분량은 결국 자신의 행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삼손은 자신의 눈의 욕망을 따라갔기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그의 눈이 빠졌다. 압살롬은 머리카락으로 영광을 받았으므로 머리카락이 나뭇가지에 걸려서 매달리게 된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첩 열 명을 데리고 살았기 때문에 병사 열 명의 칼에 찔려 죽었다. 그리고 그는 세 마음, 즉 아버지의 마음과 재판관의 마음과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빼앗았기 때문에 세 개의 화살이 그를 꿰뚫었다”(Sotah of the Talmud, 1. 7, 8, Soncino ed., 37, 41). 모든 죄에는 각기 고유한 형벌이 주어진다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적어도 어떤 경우에는 고통의 크기를 보면 그 죄의 중한 정도를 알 수 있다고 유대인들은 믿었다.
당대의 정죄적 진단 시각을 벗어나 예수께서는 “이 사람이나 그 父母의 罪로 因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 9:3)고 밝히셨다. 그는, 인간의 불행을 고쳐서 복이 되게도 하시는 사랑과 능력을 베푸셨다. 인간들은 불행한 것을 보고 피하며 저주하기에 급급하나, 하나님은 그런 것을 상대하셔서도 자비를 베푸신다.
벳새다 맹인 치유 과정은 독특하다.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24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막 8:24).
이 경우 치유가 두 단계 과정을 거친다. 하지만 부분적으로 시력이 회복되었을 때, 그의 믿음이 증가하여 예수가 그를 완전히 치유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음을 주목하게 할 것이다. 사람들이 눈앞에서 걸어 다니지만 그것은 마치 나무가 걸어 다니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현대 백내장 치료에서 경우처럼 수술 이후 약물 치료 등을 거치면서 점점 시력이 회복되어가는 과정과 유사하다.
나가면서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근원적 통로는 내면적인 “마음의 눈”을 통하여서이다. 기관인 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여하에 따라 이 내면적인 마음의 문의 상태가 형성 결정된다. 마음의 눈을 통한 직관적인 통찰에 하나님의 영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 일을 위하여 성령의 안약, 은혜의 안약의 도우심이 늘 함께 해야 한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은 사람을 찾는 하나님에서 이렇게 갈파하였다.
“항상 하나님에 대한 민감한 의식을 지닌 자에게는 점점 더 영의 세계의 신비를 아는 지혜가 주어진다. 눈 없이 보고, 귀 없이 들으며, 혀 없이 말하고 감각으로 알 수 없는 사물을 인식한다. 그들은 이성작용을 넘어선 영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p. 138).
이 경지를 체험한 욥은 이렇게 고백하였다.
“내가 主께 對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主를 뵈옵나이다”(42:5).
뜻 밖에 모진 고난을 당한 사람은 깊은 신앙의 심성으로 돌아간다. 고난은 남을 돌보는 심성을 낳는다. 고난은 선일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신 것이 아니다. 사람이 겪는 고통은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면서 동시에 하나님도 고통스럽게 한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고난의 파괴적인 고통 한 가운데서 가장 영원과의 연결선을 건설하는 생명의 본질을 만날 수 있게 한다.
욥은 이제 인생의 위대한 명의 하나님을 만났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통하여 그 분의 영광과 능력과 권세가 어떠한 것인가를 피부 깊숙이 깨닫는다.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욥의 영안이 열리고, 그분의 위대한 주권과 놀라운 섭리에 대하여 새삼 알게 되었다. 특히 그동안 자신의 순전성과 의로움을 주장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직접 만나볼 것을 소망했던 욥으로서는, 하나님을 직접 대면함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고 인식하게 된 것이다.
사계절 중 가을은 풍성한 열매와 단풍이 아름답다. 인생의 가을을 맞이한 최대의 소원이 있다면 풍성함과 아름다움을 체험하는 일일 것이다. 욥이 그런 체험을 하였다. 다니엘도 백발이 성성한 인생의 끝자락에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였다(단 10장), 외딴 섬에 유배당한 요한도 이런 체험을 하였다(계 1장). 이들은 오랜 세월 살아가는 동안 켜켜이 쌓여 있을 법한 혼탁한 영적 백내장을 극복하고, 영안을 통하여 인생의 위대한 명의를 만나는 체험을 하는 중 인류 역사의 흐름의 줄거리를 꿰뚫어 보았다. 이런 체험을 두고 入神의 경지라고도, 환상(vision)의 경지라고 일컫는다. 순례자는 이 길을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