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본성 타락 그리고 구원의 길

- 엘렌 화잇의 예언적 시각에서 -

 

엘렌 화잇의 구원관에 대한 명료한 이해를 위하여 죄에 대한 이해를 확립하는 것이 선결적이다. 그리고 화잇이 하나님의 율법과 복음의 조화로운 융합이란 차원에 서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율법은 생명과 행복을 위한 보호하는 울타리 역할, 인간 본성을 비추는 도덕적 거울의 역할, 더욱 고상한 삶의 표준의 역할을 한다.

 

이 도덕적 거울 앞에서 인간은 자기가 죄인 됨을 깊게 깨닫는다. 이 도덕적 거울은 인간이 율법을 범한 행위자인 것과 악한 상태 곧 절망적 파멸의 존재임을 폭로한다. 죄는 인간의 범법 행위와 타락한 상태를 여지없이 폭로하고 있다. 이 두 국면은 다음과 같은 진술에 잘 나타나 있다.

 

인간의 타락 상태

바울은 인간이 타락으로 인하여 죄성을 타고난 존재가 되었다고 한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2:3).

 

本質 上(φύσις nature, 본성) 震怒子女이었더니에서 보 듯 인간의 본성은 태어나면서부터 진노의 대상 곧 불순종의 상태로 전락되어 있는 존재이다. 이러한 죄책과 오염에 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속죄 제물로 자기를 드린다는 구원의 길을 제시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진노(분노)의 대상을 위하여 자신을 예수께서 화목제물(propitiation)로 자기를 드렸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원수관계, 소외관계에 있는 인간을 화해시키신다. 그는 죄의 속박으로 죄의 종이 되는 인간을 위하여 자신을 속전으로 바치셨다.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인간의 타락 상태를 진술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전부 범하였으며 율법을 범한 자들로서 인간은 절망적으로 파멸에 이르게 되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로 전락하였으며 단 한 가지 선도 행할 힘이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8:7). 도덕적인 거울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바라볼 때에 인간은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고 자기 자신의 악한 상태와 율법의 공의로운 형벌 밑에서 절망적인 파멸에 이르게 된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깊이 빠지게 된 죄의 절망적인 비탄 가운데 버려지지 않았으며 죄인을 파멸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과 동등하셨던 분께서 갈보리에서 당신의 생명을 바치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6)”(1기별, 321).

 

위 진술에서 보듯이 죄는 범법 행위와 타락한 상태 이 두 면을 지니고 있다. 특히 인간의 타락한 상태는 죄된 성향(propensities),” “기욺(inclinations),” “경향이나 성벽(tendencies),” 및 죄로 뒤틀림(bent)”(5BC 1128; Ed 29; 1HP 195)으로 이는 물려받은 죄 또는 내주하는 죄를 두고 한 표현들이다. 이를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진술은 다음과 같다.

 

사람의 본성에는 악을 행하려는 성향 곧 인간이 자신으로서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이 내재되어 있다”(Ed 29).

 

아담은 그 후손들에게 죄된 불순종의 내적 타고난 성향을 물려주었다(5BC 1128).

 

만일 어린 아기를 출산하기 전에 어머니가 방종하거나 이기적이고 조급하며 흥분적이면 그런 기질들이 아기의 성질에 반영될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자녀들이 거의 극복할 수 없는 악의 성향(性向)들을 상속물로 물려받았다. 그러나 만일 어머니가 확고하게 바른 원칙들을 따르고, 절제하고 극기하면, 또한 그가 친절하고 온유하고 이타적이면, 그는 그와 같이 고귀한 모든 품성의 특성들을 아기에게 물려 줄 수 있다”(MH 372-373).

 

죄 때문에 그의 후손들은 선천적으로 불순종의 성향을 타고난다(Because of sin his posterity was born with inherent propensities of disobedience)”(5BC 1128; White Comment, 1:1-3,14).

 

자녀들이 부모의 비행의 결과로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나 그들이 부모의 죄에 동참하지 않는 한 부모의 죄 때문에 그들이 벌을 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체로 자녀들은 부모의 발자취를 따른다. 유전(inheritance)과 부모들의 모본으로 말미암아 아들들은 아버지가 저지른 죄를 짓는다. 나쁜 버릇과 그릇된 식욕과 저열한 품행은 육체적 질병과 퇴화 현상을 지니고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전승물로 내려간다. 이 무서운 사실이 죄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을 견제하는 데 큰 힘을 발휘해야 한다”(PP 306).

 

만일, 사단이 사람들의 마음을 흐리게 하고 기만하여 그들이 위대하고 선한 일을 성취할 수 있는 선천적 능력이 그들 속에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할 수만 있으면, 그들은 할 수 있는 힘이 그들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그 일을 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된다. 그들은 어떤 초월한 능력을 인정하지 않게 된다”(1T 294).

 

우리는 우리가 빠진 죄의 구렁텅이에서 우리 자신이 힘으로 피해 나올 수는 없다. 우리의 마음은 악한데 우리가 그것을 고칠 수 없다.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14:4).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8:7). 교육과 수양과 의지력(意志力)의 연단과 인간의 노력은 각각 상당한 분한(分限)을 가졌으나 이것들이 마음을 변화시키는 일에는 무력한 것이다. 이것들이 혹 행위의 외모적 단정을 만들어 낼 수는 있다 할지라도 마음을 고칠 수는 없으며 생애의 동기(動機)를 깨끗케 할 수도 없다. 사람이 죄에서 벗어나서 성결하여지려면 먼저 마음속에서 동작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나니 곧 위로부터 새 생명을 받아야 한다. 이 능력은 곧 그리스도이시다. 오직 그의 은혜만 이 죽은 심령의 기능에 생기를 주어서 그것을 하나님께로 즉 거룩한 데로 이끌 수 있는 것이다”(SC 18).

 

죄의 정의 문제 바로 알기

흔히 죄는 불법”(요일 3:4)이라는 정의를 외적 행위에 국한시켜 그 진상을 이해하려는 주장이 있지만, 화잇은 동 정의를 외적 행위뿐만 아니라, 그 뿌리인 내적 죄된 상태까지 포괄하고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우리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定義)죄는 불법이라”(요일 3:4)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3:23)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3:12)라고 선언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저희 심령의 상태에 관하여 속고 있다. 저들은 육신에 속한 마음이 만물보다도 거짓되며 몹시 악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저들은 저희 자신의 의로 스스로 감싸고 있으며 저들 자신의 인간적인 품성의 표준에 도달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저들이 거룩한 표준에 이르지 못하고 저들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요구들을 감당하지 못하게 될 때에 저들의 절망이 얼마나 처절할 것인가!”(1기별, 320).

 

위 인용문은 =불법이라는 도식으로 죄의 정의를 내리고 있지만, 불법이 외적인 행위에 국한 된 문맥이 아니다. 위 인용문을 이끄는 대전제에 다음 말씀이 선행되어 있음에 유의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계명들은 그 내용이 포괄적(包括的)이며 그 뜻이 심원하다. 몇 자 안되는 간단한 표현으로 인간의 전체적인 의무를 밝혀주고 있다”(1기별, 320). 그리고 =불법이라는 정의라는 문단 안에서 동 불법을 인간의 내면 상태와 연관 시키고 있다. 그리고 거룩한 표준이라는 제목의 글을 인간 내면 상태를 묘사하는 다음 진술로 끝맺고 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전부 범하였으며 율법을 범한 자들로서 인간은 절망적으로 파멸에 이르게 되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로 전락하였으며 단 한 가지 선도 행할 힘이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아니라 할 수도 없”(8:7). 도덕적인 거울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바라볼 때에 인간은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고 자기 자신의 악한 상태와 율법의 공의로운 형벌 밑에서 절망적인 파멸에 이르게 된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깊이 빠지게 된 죄의 절망적인 비탄 가운데 버려지지 않았으며 죄인을 파멸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과 동등하셨던 분께서 갈보리에서 당신의 생명을 바치셨다. ”(1기별, 321).

 

원죄에 관한 역사적 논의 개요

이와 유사하게 아담의 죄로 인하여 오늘 이 땅에 죄가 편만해졌지만, 그의 후손에게 전가되는 과정을 밝히는 일은 쉽지 않다.

이 원죄 이슈는 그 원죄 자체에 국한된 이슈가 아니다. 원죄 그 자체에 관하여 어떤 시각을 가지느냐에 따라서 여러 중요한 신학적 이슈들을 보는 시각이 달라질 것이 때문이다. 원죄가 여러 신학적 주제들과 얽혀져 있는 난제이기 때문에 단칼로 무 베듯이 자를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원죄 논쟁의 역사는 펠라기우스-아우구스투스 이래 오래되었다. 펠라기우스(360-420)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과 죄책은 아담의 죄와 무관한 것으로 신봉하였다. 그래서 아담의 죄책이나 타락한 본성은 후손에게 전가(imputation)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모든 사람은 아담이 죄를 짓기 전과 같은 상태로 탄생한다. 그리고 죄는 인간의 자유 선택에 따라서 행해진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의식적으로 행한 죄에 대하여서만이 책임이 있다고 본다. 이런 주장은 시 51:5에 어긋난다.

 

아우구스투스(354-430)는 죄가 유전적으로 후손들에게 직접적으로 전가된다고 주장했다. 이 전가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그래서 인류의 성품은 부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롬 5;12이 자기의 주장의 강력한 증거가 된다고 보았다. 모든 사람이 지었다고 한 것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짓는 원동력이 아담의 유전으로 인해서 결과가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Jacob Arminius, 1560-1609)와 그를 따른 자들은 아담의 죄의 결과로 본래적 의를 잃어버렸으므로 인간이 탄생할 때에는 아담의 죄의 결과인 부패한 본성을 지닌 채 탄생하다고 보았다. 타락한 본성은 아담의 죄의 유전 결과로 인간은 무력한 존재가 되어 이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아담 후손의 전적 부패를 인정하지만, 아담의 죄책을 이어 받은 것이 아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이중예정론이 아닌 조건적 예정론을 수용하였다. 아담의 죄책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해결하였으니 후손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죄의 유전으로 오는 부패성을 두고 롬 5;12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인간이 부패한 상태에서 성령과 협력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죄를 범할 때 죄가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갓난아이는 죄인 아닌 셈이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선행적 은총에 저항, 거절할 때 죄인이 된다. 이런 사상은 칼뱅주의의 맹렬한 비평에 몰려 항론파로 지목되었다.

 

칼뱅주의자들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과 죄책 모두가 아담의 죄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이런 시각에서 그리고 항론파의 주장을 배척한 1618년 도르트 회의(Synod of Dort)에서는 이른바 TULIP이라는 5대 교리를 결정하여 금과옥조로 삼았다. 5대 교리란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무조건적인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제한 속죄(unlimited atonement), 저항할 수 없는 은혜(irresistible grace), 및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이다. 훗날 칼뱅주의자들은 이 5대 교리 영어 첫 글자를 따서 튤립이라는 멋진 어휘를 조립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존 웨슬리는 아르미니우스 사상에 깊이 영향 받아 아르미니우스의 학생으로까지 불려졌다. 그는 원죄 개념을 수용하였지만, 그 원죄를 모든 인간에 영향을 준 유전된 부패성으로 보았다. 그는 심지어 갓난아이라 할지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마찬가지로 거듭나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아르미니우스와 차이점을 보여 준다.1. 이리하여 그는 아르미니우스의 사상을 수정 보완하여 전개하였다. 그는 선행은혜 사상을 수용하여 생명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작동한다고 보았으며 의롭게 하시는 은혜의 사역은 성령을 통하여 성화된 삶으로 인도한다고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선택의 자유 역할을 중요하게 여겨 흔히 칼뱅주의적 전적 타락론에 함몰된 인간의 자유 선택의지를 살려 냈다.

 

재림교회 선구자들은 아르미니우스-웨슬리의 사상적 계보의 후예들이다. 특히 다음의 엘렌 화잇의 메시지는 전적 부패(타락)과 선행 은총 및 그리스도에 나가는 첫 단계인 하나님의 영의 이끄심을 받아야 함을 보여 주고 있다.

 

회잇의 원죄관

그렇다면 화잇은 원죄에 관한 아래 언급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첫째 아담과의 관계에서 인류가 그에게서 받은 것이란 죄책(guilt)과 사형 선고(the sentence of death)밖엔 없다”(CG 475; Letter 68, 1899).

 

재림교회 내에서 인간이 탄생 시 죄책을 지닌 존재인가에 관하여는 두 가지 견해가 대립되어 있다. 그 하나는 우드(John W. Wood)의 입장이이다. 그는 탄생 시 유전적 경향을 지닌 타락한 상태는 인정하나 죄책을 지닌 존재로 보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 견해를 취하고 있다.2. 이에 대하여 올슨(Robert Olson)은 아담으로부터 물려 받은 죄책을 지닌 상태로 인간은 탄생한다고 보고 있다.3.

 

화잇은 원죄 사상을 아우구스투스-칼뱅의 전적타락 사상에서 한 말이 아니다. 전적타락 사상이란 칼뱅주의의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론과 이중 예정론 사상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너무 교란되고 부패하여 하나님께서 주도하신 구속하시는 부르심에 응답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하나님께서 택하시는 계획에 의존할 수밖에 없도록 조치하셨다는 것이다.

 

화잇은 원죄를 자연적 타락과 물려받은 불순종의 성향이란 시각에서 보고 있다. 화잇은 원죄의 더 이상의 의미를 삼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화잇은 첫째 아담과의 관계에서 인류가 그에게서 받은 것이란 죄책(guilt)과 사형 선고(sentence of death)밖에 없다”(CG 475)는 진술에 혼란스러워 할 필요가 없다. 이는 전통적인 원죄 사상을 수용한 것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전 인류의 보편적 타락상을 함의한 표현이다. 이런 통찰은 마음의 자연적 타락성 (the natural depravity of the heart)" (In Heavenly Place 195, 196)을 두고 한 표현으로 보는 것이 그의 사상 맥락에 조화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죄를 인간 모두가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보편적 타락성)을 받은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죄책과 사형선고라는 표현에 유의하면 인간이 첫 죄로 인하여 타락한 상태와 죽음에의 존재로 전락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화잇이 죄책을 물려받은 존재로 탄생한다고 해서 아우구스투스의 원죄관에 동조하는 것이 아니다. 화잇은 인간이 타락상태를 물려받았다고 해서 아우구스티누스적 및 칼뱅주의적 아담의 죄책의 전가를 배제하고 있는 것이다. 4.

 

현대신학에서도 이런 동향을 보여주고 있다. 죄의 유전론의 치명적 약점은 자유와 책임이라는 인격적 존재라는 인간의 본질에 불일치한다는 점에 있다. 원죄가 유전되었다면, 인격의 책임을 어떻게 물을 수 있으며, 인격적 자유 결단성을 북돋아 성숙한 방향으로 어떻게 나갈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오늘날 학자들은 원죄를 과거에 집착한 생물화학적 논리구조가 아닌 죄의 보편성이나 죄의 불가피성을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더 나가서는 죄를 초인격적인 것으로 본 애매한 표현을 사용한다. 콘첼만(Hans Conzelmann)은 원죄를 두고 나의 죄는 내 앞에 있으며 상실된 존재는 불가피하다는 것에 대한 철저한 표현이라고 갈파하였다.5. 혹자는 원죄가 인간이 모두 하나님 앞에 반역한 죄인이라는 개념을 전달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를 등진 죄인이다. 이런 시각들은 원죄라는 단어의 애당초의 함의가 변질된 것을 시사하고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이 자연적으로 타락되어 우리 자신으로서는 올바른 진로를 추구할 수 없다”(1HP 163). 그리하여 아담의 독특한 죄로 인하여 그의 후손들은 물려받은 불순종의 성향을 지닌 존재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자연적 타락성을 지닌 존재로 탄생하지만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부르심을 선택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라는 능력을 지닌 존재로 탄생한다는 점에서 신학계에서 흔히 논의되는 원죄 사상과 차별화시키고 있다.

 

선행 은혜 필요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자유의지에 선행한다. 웨슬리의 선행 은혜론은 하나님께서 구속의 주도권을 잡고 있다. 아담과 하와가 자기 의라는 무화과 잎 옷을 입고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였을 때, 하나님이 먼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부르시며 찾아 나섰다. 화잇은 죄가 세상에 들어 왔을 때 인간의 의지는 사로잡혔다고 진술하였다(ST, Nov. 19, 1896).

 

사람의 품성에 있어서 그처럼 요긴한 요소를 이루는 이 의지는 타락으로 사단의 지배하에 들어가 버렸다. 그리하여 사단은 언제나 그 자신이 기뻐하는 뜻을 따라 역사함으로 사람의 완전한 멸망과 불행을 도모해 왔다”(5T 515).

 

타락하여 사단에게 사로잡힌 영혼들은 복음을 통하여 구속(救贖)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스러운 자유를 누려야 한다. ... 죄가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의지를 통해서이다”(MB 60-61).

 

우리의 의지를 순결하고 깨끗하게 된 상태로 다시 돌려받기 위하여,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께 바쳐야 하며, 또 그분께서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사랑과 능력을 아낌없이 쏟아 부으실 수 있도록 그분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그것을 그분과 연결시켜 놓아야 한다”(MB 62).

 

독립적인 인간의 의지는 악을 저항하고 정복할 진정한 능력이 전혀 없다. 영혼의 방호벽은 무너져 버린다. 사람은 죄에 대한 방벽(防壁)이 없다”(8T 292).

그대들의 의지를 그리스도께 바침으로써 그대들은 정사와 권세를 초월한 능력으로 더불어 연결되는 것이다. 그대들은 그대들을 굳게 서게 할 힘을 위로부터 얻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하나님께 끊임없이 바침으로 말미암아 새 생애 곧 믿음의 생애를 살 수 있게 될 것이다”(SC 48).

 

사람이 죄에서 벗어나서 성결하여지려면 먼저 마음속에서 동작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나니 곧 위로부터 새 생명을 받아야 한다. 이 능력은 곧 그리스도이시다. 오직 그의 은혜만 이 죽은 심령의 기능에 생기를 주어서 그것을 하나님께로 즉 거룩한 데로 이끌 수 있는 것이다”(SC 18).

 

맺는 말

 

엘렌 화잇은 아담의 첫 범죄의 결과 자연적 타락 상태를 부각하였다. 아담의 첫 범죄는 시공을 넘어 영향을 끼친 독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그는 이른바 칼뱅주의의 원죄론적 죄 전가론에 동조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택의 자유를 강요치 않으신다. 그러나 죄의 영향이 너무 침투하여 있어서 인간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의 의롭게 하심과 선행적 은혜의 권능의 역사가 인간 구원의 매 단계마다 절실하게 필요하다.

 

인간의 타락성이 너무 깊어 인간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신앙 행로의 발걸음마다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그리스도인 삶의 생명선이다. 이 생명의 줄을 잡고 그의 은혜의 권능을 의지하면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어느 한 순간도 우리는 무죄한 완전을 주장할 수 없다. “우리는 이 사특한 몸이 그의 영광스러운 몸 같이 변화되어 꼴 지어지기까지는 나는 무죄하다고 말할 수 없다”(Signs of the Times, March 23, 1888).

 

우리들은 인간의 마음이 자연적으로 타락하게 되고 우리들 스스로는 바른 길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한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우리들 편에서 최대의 노력을 기울일 때 우리들은 승리를 얻을 수 있다”(CT 544).

참고문헌

1. John Wesley, The Doctrine of Original Sin According to Scripture, Reason and Experience In Answer to Dr. Tayler (New York: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in the United States, 1817, 340-341.

2. John W. Wood, “Sin, the Human Condition, and Salvation, The Sancutuary and the Atonement, eds. Arnold V. Wallenkampf, W. Richard Lesher (Washington, D.C.: Review and Herald Publ. Assn., 1981), 716.

3."Outline Studies on Christian Perfection and Original Sin," Ministry Supplement, October 1970), 28.

4. Woodrow W. Whidden, "The Humanity of Christ Debate: What Did Ellen White Teach?", Ellen White and Current Issues, vol. 2 (Brrien Springs, MI: Center for Adventist Research, Andrews University, 2006), 45.

5. 콘첼만(Hans Conzelmann), 신약성서신학(Grudriss der Theologie des Neuen Testament), 박두환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01).

Posted by KAHN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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