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의 길 서설

구원 : 2022. 4. 25. 17:18

 

()의 길 서설

 

하늘로 문을 열고 답답한 가슴에 신선한 공기를 마시자.

목숨을 걸은 의로운 갈망이면 바위를 쳐도 생수가 솟아났다.

 

이 시는 석진영 씨의 사랑의 불이 켜질 때의 둘째 연이다. 목숨을 걸은 의로운 갈망이 그리워지는 세태이기에 이러한 시가 가슴에 와 닿는다.

물질주의, 현실주의, 권력주의, 그리고 상대주의가 인간의 사고와 행동 양식을 결정케 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이러한 의로운 갈망은 허공을 치는 것과도 같다. 영원을 지향하는 이상과 변함없는 절대적인 가치를 끝없이 추구하는 것은 매력이 별로 없어 보인다. 이상과 절대적 가치가 무시되거나 또는 극소화된 개인의 삶이나 사회적 인식은 반사적으로 도덕적. 영적 황폐와 빈곤을 배출하여 납덩이처럼 무거운 구름으로 그 개인과 사회를 감싸 버리게 한다. 그리하여 의()가 힘을 잃고 그릇됨이 삶을 지배하는 원리로 행세하게 된다. 그러나 한 인간을 살리고 사회를 건지는 길은 의로 사무친 삶이다. 영원한 관점에서 의의 이상적 길을 추구하는 삶이야말로 한 인간으로서 가치 있는 길을 걷게 하고 안주할 수 있는 사회를 창출케 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이요”(5:6)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물질주의, 현실주의에 타협치 않고는 적응하기 어려운 흐름에서 옳음을 추구하는 것이 과연 행복과 만족을 줄 수 있을 것인지 자못 의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올바름을 찾아 나선 길은 고통스런 길이며 증오와 부조화가 기다리고 있는 길이기에 행복도, 만족도 있을 수 없는 현실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축복의 약속을 선언하고 있는 말씀은 그리스 철학이나 중세 가톨릭의 스콜라 철학에서 말하는 수평적 윤리의 틀에서 볼 것이 아니다. 종교 개혁자들은 의를 코람 데오(coram deo), 곧 수직적 틀로 조명하고 있다.

 

의의 순례자 마르틴 루터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신학은 그의 의()를 추구한 순례자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의 의와 루터를 분리하여서는 루틴의 면모를 바르게 이해할 수도 없다. 루터가 뇌성벽력이 몰아쳐 오던 어느 날 그가 사실상 두려워했던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었고, 죽음에 대한 준비 없이 죽는다는 절박성 때문이었다. 그래서 성 앤(St.Anne)에게 수도원에 들어가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인간이 되고자 서원하였다. 2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완전히 결별하고 수도원에 들어간 루터는 심혈을 기울여 이 의의 영적 순례 길에서 몸부림치는 금욕적이고 자학적인 생활을 쌓아 나갔다.

루터에게 성경에 나타난 가장 두려운 말이 있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의라는 말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전 모습을 준엄한 재판관으로 보았다. 그의 심령은 하나님의 의 앞에서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러한 자기의 절망적 상황에서 탈피하고 하나님의 의에 이르고자 하여 성인들의 유물에 집착하고 고행과 선행에 몰두하여 보았다. 고행을 극한 선상까지 몰고 가고, 선행을 산처럼 쌓아도 에르푸르트(Erfurt)수도원의 이 구도자에게 더하여진 것은 더욱 처절한 절망의 몸부림뿐이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의야말로 하나님의 최대의 특성이 되기 때문에 끝없는 이기적 욕망이 자기 안에 도사리고 있는 그는 이 의 앞에 설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로마행 순례자의 길에서 얻은 것도 환멸뿐이었다. 이러한 루터의 고투는 스콜라 철학이 인간 이성에 토대를 두어 마련한 의의 추구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당대의 철학은 루터에게 낭패만 안겨 주었을 뿐 참된 의에 이르게 하지 못하였다.

 

비텐베르그(Wittenberg) 수도원으로 옮긴 순례자 루터에게 한 줄기 서광을 비추어 주게 한 것은 아우구스투스 노선에 있었던 스타우피츠(Johann von Staupitz)의 도움이었다. 스타우피츠는 루터에게 독일 신비주의를 소개하면서 또 하나의 구원의 길은 자기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께 맡기는 것, 즉 신뢰하는 것임을 역설하였다. 루터는 전적인 이 신뢰의 길에서 어느 정도 평안을 찾았다. 이 때 스타우피츠는 루터를 비텐베르그 대학의 교수가 되도록 결심을 시키고, 다른 이들에게 관심을 갖도록 지도하였다. 성경의 광맥을 파 내려가던 루터는 거기서 자기의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도 발견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연구와 강의에서 루터 신학의 기본적 구도가 꼴 지워졌다. 죄와 은혜 또는 공의와 사랑이란 원천적 문제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시편을 읽었을 때 풀리게 되었다. 의로운 재판관으로만 보인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보게 된 것이다. 의와 사랑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로마서 연구를 하면서 밤낮으로 117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의의 문맥을 더듬고 명상하던 어느 날, 루터는 이 의라는 말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게 되었다. 이 하늘로부터 오는 선물인 의가 구원을 가져오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이 라고 한 말을 보기만 해도 공포심과 증오심이 솟구쳐 올랐는데 이제는 이 말이 가장 매혹적인 말이 되었다. 그의 의의 순례 길에는 전율이 섬광처럼 일어났다.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로 충만한 경험을 하게 되었던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루터 신학의 출발점이 되며 종교 개혁 불길의 인화점이 되었다. 의의 길이 수평적 길이 아닌 수직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루터는 자기 순례의 고투와 말씀 탐구에서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예언적 남은 백성과 그리스도

 

종말을 향하여 치닫고 있는 전 세계를 향하여 선포되는 요한계시록 14612절의 세 천사의 메시지는 6절에서 말하고 있는 영원한 복음이 그 알파가 되고 12절에서 말하고 있는 예수의 믿음이 오메가가 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사실상 믿음의 의의 복음이 그 주축이 됨을 알 수 있다. , 이 종말론적 메시지는 구원론적 메시지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신학에 있어서 종말론은 등뼈와 같고 의의 길인 구원론은 그 심장과 같다. 역사의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메시지가 루터 시대와 같은 의의 선포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한결같은 의의 길이 역사의 심장 역할, 곧 생명의 길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 그리고 영원토록 같으신 분이다(히브리서 138절 참조). 영원한 복음이란 변함없는 복음이다.

 

예언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성서 예언의 궁극적 목적을 다가오는 사건에 관련된 정보만을 제공하는 것에 두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활력이 가슴에 타오르게 하는 역동적 경험을 일깨우는 데 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갈파하고 있다.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 하는 것이 가하니라”(벧후 1:19). 이 말씀은 예언 연구에 샛별이 되시는 그리스도가 심령을 지배하시고 꽉 차게 되는 경험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성서 예언에 관한 참된 지식은 인간의 마음 안에서 일하는 그리스도의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어야 한다. 종말론적 메시지 위에서 탄생한 예언적 남은 백성에게 그리스도가 모든 희망의 중심, 샛별”(the Morning Star)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샛별이 떠오르지 않는 교리적 지식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할 뿐만 아니라(11:6 참조), 오히려 영혼의 독소가 된다.

 

구원론과 종말론은 불가분리적으로 밀착되어 있다. 종말론적 최후의 메시지에서 복음의 중요성을 두고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갈파하였다.

 

다니엘서가 말하게 하라. 요한계시록이 말하게 하라. 그리고 진리가 무엇인지를 말하라. 그러나 주제의 어떤 면을 제시할지라도 예수님을 모든 소망의 중심,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22:16)로서 높이도록 하라”(TM 118).

 

따라서 보석처럼 소중한 주제인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의가 그 동력이 되어 사람의 심령을 변화시키는 체험이 되어야 한다. 믿음의 의()가 토대가 된 세 천사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에는 종교 개혁에서와 같은 열과 정신이 서려 있어야 한다. 믿음이 결여된 신학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 남은 자손은 16세기의 루터, 칼뱅, 츠빙글리, 멜란히톤 등이 주도한 첫 번 째 종교 개혁을 계승하여 두 번 째 종교 개혁을 주도할 사명을 띄고 있다. 요한계시록 1415절에는 특별한 백성, 곧 남은 무리의 모습이 나와 있고 그 다음 146-12에는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선포되는 영원한 복음의 메시지가 나오는 점에 비추어 남은 백성과 영우너한 복음 메시지 사이에 상관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뒤에 따르는 메시지가 특별한 백성들이 전할 메시지로 본다는 것은 문맥상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마지막 남은 백성은 지난날 종교 개혁자들이 전한 믿음의 의에 관한 신학과 경험에 매우 정통하여야 하고 자기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첫 번 째 종교 개혁 시대 선포된 것과 같은 영원한 복음에 속하는 것으로 입증 선포하여야 한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자기들에게 향한 율법주의라고 하는 비난과 탄핵이 거짓된 것임을 분명하게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 의의 길로의 초청이 그리스도계 여러 교파의 인사들과 만날 수 있는 공동의 장()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갈망하는 의는 위로부터 선물로 오는 예수 그리스도며 그의 십자가에 나타난 의다. 완전한 하나님이시자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께서는 이 의를 바리새인과의 투쟁을 거치면서 분명히 하였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아는 의의 지식 때문에 유대주의와 투쟁하였다. 루터와 칼뱅 등 종교 개혁자들은 이 의 때문에 로마 가톨릭 체제와 대결하였다. 이 의의 빛을 전하는 남은 무리도 주변의 빗나간 종교 체제와 그 사상과 대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예언적 통찰로 나와 있다(12:17; 13; 14:8, 9 참조).

 

종교 개혁의 횃불을 올리는 데 기여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믿음의 의 에 관한 메시지는 기실 구약 성경에 잘 나타나 있고 예수께서 천명하고 있으며 바울이 재천명하고 있다. 우리의 과업은 성경에 나타난 이 의의 원리를 투시하는 데 있다. 루터가 말한 대로 그리스도인 생활은 이 의에서부터 의로 향하는 순례이기에 우리의 탐구는 더욱 의미가 있다고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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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AHN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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