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이슈
Let It Be
팝송 가사 한 토막을 옮겨 본다.
When I find myself in times of trouble(곤경에 처하였을 때),
Mother Mary comes to me(성모 마리아가 내게 다가와),
Speaking words of wisdom(지혜의 말씀을 하시니),
Let it be(그냥 내버려 둬).
‘렛잇비’가 수 십 번 반복되는 가사가 전하는 것은 성모 마리아의 말인 것으로 하여 ‘그냥 내버려 둬’ 잘 될 거야, 시간이 약이 될 것이야 하는 메시지를 전한다. 한 개인이 무엇을 하던지 내버려 두라는 것이다. 이런 흐름이 오늘의 우리 문화 코드가 되어가고 있다. ‘렛잇비’는 현대인의 의식 구조에 자리 잡고 있다. 지나간 날의 시스템이나 원리에 짜 맞추려는 시도들은 오늘 이 사회에서 왕따를 당하게 마련이다. 학교 교육 현장을 비롯하여 정치계 동태가 그렇고, 심지어는 종교계까지도 ‘렛잇비’가 파고든다.
탈근대주의란?
오늘 이 시대를 가리켜 흔히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칭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탈근대주의’ 또는 ‘근대주의 이후’로 칭하기도 한다. 21세기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이다. 이 사조가 예술, 건축 영화, 음악 등 각 영역에 침투하고 있다. 이 용어는 충분한 토론과 논의도 없이 오늘날 철학이나 예술, 개인의 삶이나 사회전반에 걸쳐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작금의 시대정신과 문화를 Postmodernism이란 단어로 이해하려는 시도들이 확대되어가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정의를 내리기가 애매하고 어렵다.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보편적이고 일의적(-義的)인 개념 설정이 어려운 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정의를 내린다면, 하나의 유형으로 고착, 제한 받아 포스트모더니즘에 걸맞지 않게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모더니즘 기조와 그 한계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이해는 그에 대칭 개념어인 모더니즘의 특성 이해가 선결되어야 한다. 감리교 신학자 Thomas Oden은 모더니즘의 기간을 프랑스 혁명(1789)으로부터 공산주의 몰락1989년으로 어림잡은 일이 있다. 이 모더니즘은 인본주의, 이성주의, 계몽주의 관념론, 기술적 메시아니즘, 경험주의라는 특성으로 꼴 지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이 진리의 결정자가 되어 인간의 이성으로 모든 것의 답을 얻을 수 있다는 낙관주의적 확신이 그 저변에 깔려 있다. 지난날의 신 중심의 사상 체계에서 벗어나 인간을 역사 무대의 중심 위치에 올려놓은 모더니즘에서는 과학이 신의 자리를 점령하여 과학이 말해 줄 수 없는 것은 인간이 알 수 없다고 한다. 이런 낙관주의적 세계관은 문명의 경이적 발전에 크게 기여도 하였다. 모더니즘은 회의 원리, 자율의 원리, 자연의 원리(물질본질론/우주는 질서 정연한 체계), 조화의 원리(우주의 합리성과 질서), 및 진보의 원리라는 데카르트의 cogito ero sum(I think, therefore I am) 라는 계몽주의 사상 기조 위에서 발전된 틀이라고 볼 수 있다(Stanley J. Grenz & Roger E. Olson의 20th Century Theology, 18-23).
모더니즘이 지배하여 온 결과 반신주의와 유물론적 이데올로기가 인류를 참혹한 살육전쟁으로 몰아가는 세계 내의 거대한 구조적 변화를 야기했다. T. S. 엘리옷은 이를 두고 ‘황무지’로 묘사하였다. 지구 생태계의 가공스러운 파멸도 이 모더니즘의 열매 인 것이다. 핵전쟁과 핵 재난 위협은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제킨 모더니즘의 비극적인 소산물이다.
그리하여 17세기부터 서구 세계 문화를 지배하여 온 세상으로 파급된 모더니즘의 세계관은 파탄 당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
Postmodernism은 문화의 전반적 현상을 두고 통칭한 표현이다. 이 어휘는 문학이론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학, 건축이론과 철학에서도 다루어지고 있다. 이에 대하여 심도 있게 논의한 학자들은 주로 프랑스와 독일 학자들이다. 즉, Vattimo, Foucault, Jean Dubuffet, Delouse, Derridda, Baudrillard, Rorty, Lyotart, Benhabib, Huyssen, Foster, Jamesom, Habermas, Wellmer, Spaemann, Kamper, Solterdijk, Jencks 등이다. 그 중에서도 Jean Dubuffet과 Lyotart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가장 심도 있게 개발하고 연구하여 그 깃발을 선두에서 날렸다. 1951년에 이미 Jean Dubuffet은 '우리의 문화는 우리에게 맞지 않는 옷이다'라고 하면서 금세기 후반에 본격적으로 다가올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적 경향을 얘기하고 있다. 그는 이제 예술뿐 아니라 가능한 모든 다른 영역에서도 깊은 정신적 변화와 새로운 방향전환이 일어나고 있다고 하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상적 틀을 떠받들고 있는 몇 가지의 지주들이 있다.
1. 시스템 반대
탈근대주의 사회는 탈 형식화와 탈 장르화를 선호한다. 따라서 합리주의적 전통이나 보편적 가치 체계를 배척한다. 획일성과 동질성 및 통일성 같은 것들의 구속에서 벗어나 그 대신 다양성, 대중성, 및 개성을 존중한다.
2. 중심원리 반대
성경의 중심 원리는 하나님이시다. 이 중심점이 있어야 역사와 세계의 설명이 가능한 것이다. 그 중심 원리를 배척하므로 인하여 현상계 설명은 해석자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여기에서 현대 문화의 불확정성이나 애매 모호성이 자리매김을 하게 되고 불연속성, 임의성, 반역성, 무작위성, 해체성이 강조된다. 깊이를 결여한 문화의 천박성이 숙명적일 수밖에 없다. 탈근대주의는 현대사회와 문화의 파편화, 단편화를 촉진할 뿐 총체적인 운명공동체 의식 같은 것은 실종되게 마련이다. 예술 작품도 상품 유통 구조 속에 해체되어 자본의 흐름을 좆는 단편으로 전락된다.
3. 세계관의 반대
시스템을 반대하고 중심원리를 배척하는 탈근대주의는 세계의 구성, 의의 및 가치에 관한 통일적 견해라고 볼 수 있는 세계관이 없다. 따라서 역사의식도 빈곤하고 과거를 잊어버려 비역사적, 비정치적 성향을 띈다. 현실이란 구경거리로 전락된다. 반항성(revolt)을 중요시하는 탈근대주의에서 관심을 둔 영역이 있다면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 같은 것들이다.
4. 상대주의
체게도 중심도 반대하고 세계관도 거부하는 탈근대주의는 상대주의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인간의 이성이 진리로 인도할 수 있다는 믿음을 이제 더 이상 지지할 수 없게 되었다. 과학적 방법도 이성도 보편적 객관성도 그 한계에 부딪쳐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된 것이다. 객관적 지식이나 실재라는 것도 없다는 인식이 팽배하여 간 것이다. 사물들과 사건들은 본질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오직 해석이 있을 뿐이다. 세계에 관한 연구는 상황에 관한 연구일 뿐이다. 인간은 그 상황의 일부일 뿐이다. 해석은 기록된 책이나 저자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고 해석하는 사람, 또는 독자의 관점과 가치관에 따른다. 해체주의의 등장으로 고정된 해석체계나 구조를 배격한다. 진리란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다. 진리는 합리적이지도 않고 객관적이지도 않다. 절대적 진리란 없다. 메타이론은 상실된다. 한 사람의 의견은 다른 사람의 의견과 똑같이 유효하다.
윤리에도 개인적 또는 문화적 타당성을 가진 기준이 모호하여져 제한선이 무너지고 있다. 문학에 있어서는 해석학에서의 다원주의로 나가 고정된 해석이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절대성은 상대성으로, 일의성은 다의성으로, 동질성은 이질성으로, 단일성은 다원성이나 복수성으로 대체되어 간다. 합리주의 원리도 비합리성에 눈을 돌리는 시각의 변화가 일어난다.
포스트모더니즘 비판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본적 주장 하나의 사상체계로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에 반대하는 것은 사회를 지탱시키는 현존하는 시스템에 눈 감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삶의 현장에서는 부단히 시스템을 요청하고 있으며 그 시스템 없이 유지 발전할 수 없는 것이다.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고치거나 개선하는 길을 택할 것이다. 중심점을 반대하는 길은 우상숭배와 다신론의 문호를 여는 길을 재촉할 뿐이다. 인간은 무엇엔가, 누구엔가 경배하는 본성에서 탈출할 수 없는 존재이다. 중심점 되는 하나님을 배격한다면 많은 신들을 섬기는 사회로 나갈 수밖에 없다. 어떤 특정한 세계관에 집착하는 일을 반대한다면 진화론이나 마르크스주의나 해방ㅅ니학 같은 세계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상대주의를 택하는 탈근대주의는 각자가 자기 소견대로 살아가는 ‘렛잇비’ 노래나 반복하여 열창할 것이다. 따라서 모더니즘에서처럼 형이상학적, 초월적 세계와 초월적 존재를 거부하는 일은 모더니즘과는 다른 빗나간 차원에서 계속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의 소리도 높다. 그 예로 앨런 소칼(뉴욕대 물리학 교수)이 1997년 지적 사기(Fashionable Nonsense) (민음사, 2000)를 들 수 있다. 그는 프랑스 현대 철학은 모조리 사기라고 비판한다. 프랑스 현대철학은 언어의 유희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물론 소칼은 현대과학철학의 상대성에 대하여도 비판의 칼날을 세우고 있다.
탈근대주의의 아비 격인 Friedrich Nietzche는 死神論을 전개하고 무의미에 집착하는 니힐리즘에 함몰되었다. A. J. Ayer는 수학적-경험적 진리 이외의 명제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보는 논리실증주의적 언어분석은 초월적 세계와 성경 진리를 배척하여 탈근대주의를 부추겼다. Jacques Derrida는 ‘모든 해석은 잘못된 해석일 뿐이다’고 하여 자기 자신의 해석 마져 잘못된 해석이라는 자가당착에 빠졌다.
Postmodernism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거리가 먼 사상체계이다. 그것은 더 고차원의 인본주의요, 내재주요, 상대주의요, 주관주의의 특성을 지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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