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성소와 재림전 심판

A. 하늘 성소론의 중요성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 (이하 재림교회로 표기함) 교리의 대부분은 다른 그리스도교 교회 단체들에서도 가르치고 있는 공유적 위치에 있다. 그러나 성소교리는 특히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에서 제사장과 대제사장으로 봉사하고 계시며, 거기서 자신의 십자가상에서 이루신 속죄의 희생 공로를 자기 백성들의 필요에 적용시키고 있다는 교리는 재림교회의 독특한 교리가 되며 더 나아가서 이 성소교리는 재림교회 교리들 가운데에서 중추적 위치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LeRoy E. Froom은 성소교리가 하나의 현저하고 구별되는 구조적 진리-재림교회의 정체를 표명하고 재림교회로 하여금... 타 그리스도교 단체와 구별되게 한 유일한 교리적 가르침이라고 갈파하였다.

Ellen G. White하늘 성소 봉사에 관한 올바른 이해는 우리 믿음의 기초라고도 하였고 하늘 성소에서 인간을 위한 그리스도의 중보는 구 속의 경륜에 있어서 십자가 상의 죽음심만큼 본질적인 것이 되고 진리의 완전한 체계 (complete system of truth)”가 된다고 지적하였다. 여기서 진리의 완전한 체계란 표현에는 성소교리가 다른 주요 교리를 조명하며 또한 연계되어 있어 포괄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렇다고 재림교회가 성소론에 관련된 모든 것을 독보적으로 가르치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모세 5경에 나오는 성소에 관한 여러 해설책들에서 보듯이 성경에 나오는 성소 구조나 제의에 관한 것들은 그 구체적 설명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도 있겠으나 여러 학자들이 대체적으로 같은 내용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재림교회가 레위기서의 매일 제의와 연례제의라는 성소봉사의 표상적 기본구도를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 나온 세상 종말까지의 하늘 성소에서의 하나님의 활동과 연계시켜서 그 원형을 보고 있다는데 그 차별성이 있다.

재림 교회의 하늘 성소 교리의 단초는 종교 개혁자들의 통찰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루터나 칼빈과 같은 종교 개혁자들은 오래 전에 하늘 성소에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한 개괄적인 지적을 한 바 있다. 재림교회는 이것을 보다 상세하게 발전시켜 왔다. , 종교개혁자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하여 그가 승천하신 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현재적으로 하시는 직무를 중보자, 중재자 (간구자), 화해자, 변호자, 제사장 및 대제사장으로 활동하시는 것으로 보았다. 특히 칼빈은 그리스도의 3대 직무중 제사장 직무는 그의 죽으심과 중재 (interecssion),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고 하며 중재는 하늘 성소에서 계속되고 있다고 본다. 또한 그리스도의 제사장직무는 대속사와 충돌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하늘 성소에서의 이 간구 사역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대속사의 계속적 적용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통찰은 극히 원론적이라는 한계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주요성을 띈 성소교리가 더 이상 발전되지 못하여 왔지만 하나님께서는 마지막때 남은 교회를 통하여 발전, 부각시키셨다. 성소론은 그 표상적 이해를 바탕으로 하면서 그 원형인 하늘 성소와 그 곳에서의 그리스도의 활동에 관한 진상의 탐색이란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 원형의 문제는 하늘 성소의 정체성에 대한 입장이 무엇이냐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과 그 성소에서의 그리스도의 사역내용이 무엇인가로 집약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이 두 가지 시각에서 고찰키로 한다.

성소론의 주된 자료는 출애굽기, 레위기, 다니엘, 히브리서, 및 요한계시록이다. 출애굽기는 지상성소의 구조에, 레위기와 히브리서는 성소와 관련된 제사기능 즉 중보에 역점을 두어 다루고 있다. 히브리서에 재림전 심판의 시간에 관한 기사는 나오기는 하나 중보사상 만큼 명료하지는 않다. 이에 비하여 디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은 하늘 성소에서의 심판 활동과 시간에 역점을 두고 있다. 특히 다니엘서 7-9장은 재림 신도의 하늘성소 이해에 결정적인 기사가 나온다. 따라서 이 연구에서는 원형 성소의 정체와 그곳에서의 활동 및 그 의미를 이 성소론 자료의 범주내에서 탐색키로 한다. 다니엘서는 하늘 성소에서의 심판기사에 그 초점을 두고 있으며 정한 때끝에 관한 시간 예언 해석의 주석에 두지 않았다.

 

B. 히브리서의 하늘 성소 정체

1. 하늘 성소의 존재

신구약 성경 기자들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통치하고 계심을 말하고 있다 (20:22;4:36; 123:1; 57:15; 66:1; 5:34; 12:25; 7:48, 49). 하늘에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봉사하시는 사령탑이 존재한다. 이 하늘의 사령탑, 하나님이 계시며 지상을 통제하시는 곳이 하늘 성소이다. 성경 전체에 관통하여 하늘 성소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11:4; 102:19; 1:2, 3). 이 하늘 성소는 하나님의 그의 거처가 된다 (11:4; 68:34-35). 이 하늘 성소에서 하나님께서 활동하시고 세상을 다스리시며, 심판을 베풀고, 하늘 천군의 찬양을 받으시고 기도를 들으시며 당신의 사자들을 파견하신다.

 

2. 히브리서에 나오는 하늘 성소의 정체

하늘 성소의 객관적 존재에 관하여 여러가지 이론들이 제기되어 왔다. 히브리서를 중심으로 한 이에 관한 세 가지 이론들을 고찰하며 다음과 같다.

 

a. 은유론적 해석 입장 (The metaphorical interpretation)

이 입장에서는 하늘 성소의 객관적 실재를 부인하고 하늘 성소에 관한 성경 본문에서 은유적 영적 의미를 추출하는 일에 전념한다. 이러한 해석 유형은 개념론적 해석에 집착한다. .

첫째로 사상론적 해석 (the conceptual interpretation)에서는 헬라주의적 성향을 띈 유대주의 사상 세계에서 나타났다. 특별히 Philo Judaeus가 하늘 성소를 은유적으로 해석하였다. 그는 최고의 것, 곧 가장 참된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의 거룩한 전은, 우리가 믿어야 하는데로 전 우주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존재가운데서 가장 신성한 부분, 즉 하늘을 그것의 성소로 가지고 있다라고 지적한 데서 이 사상론적 해석이 나타난다.

둘째로 주석적 해석 (the exegetical interpretation)에서는 히브리서 9:1-10:18절에 나온 제의적 언어 (cultic language)에서 그 단서를 찾는다. 예컨데 세상에 속한 성소”(9:1)에서 세상에 속한 (kosmikon)" 이 지상 성소가 우주의 상징임을 묘사한다고 보아 9:1이 우주적 패턴을 지닌 지상 장막이란 식으로 주석한다. 첫 장막“ (skēnē he prote)" (9:2)의 성소는 지구를, 지성소는 하늘을 각기 상징한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하늘 성소는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하늘에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활동도 실제적으로 없다고 보는 주석을 한다.

히브리서에 나타나는 하늘 성소를 이렇게 은유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은 그리스도께서 하늘 봉사 사역을 위하여 한 장소에 들어가셨다는 점 (4:14)을 비롯하여 6:19-20; 8:1-2, 6; 10:12에 나오는 장소적 이동사상을 무시하게 될 뿐만 아니라, 히브리서가 전제로 한 그리스도께서 화육하시고 갈바리에서 제물로 드려진 것 등에 시간 개념이 내포되어 있고, 하늘 성소의 정결이 강조되어 있는 점 (9:23)에 비추어 몇 개 언어가 Philo의 언어 용법에 외형적으로 유사하다고 보아 히브리서에서 하늘 성소를 은유적으로 말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무리한 해석이 된다. 주석적 해석 역시 히브리서 전체 구조 문맥을 일탈한 것들이다. 예컨데 제의 언어인 세상에 속한 성소는 유대인의 언약의 장막 그대로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9:2의 첫 장막구조도 성소/지성소 구분에 그 주목적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b. 실재론적 해석 입장(The realistic interpretation)

이 입장에서는 하늘 성소의 실재성에 관한 은유적 해석을 배격한다. 히브리서는 하늘에 성고가 실재한 다는 시각을 가지고 기록되었다고 본다. 실재론적 해석에는 문자주의적 실재론과 기능적 실재론이 있다.

(1) 문자주의적 실재론

이 입장에서는 하늘 성소는 지상 성소의 구조와 규모와 정확하게 문자적(literalistic)으로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여준 식양 (taḇnît)(25:8,9) 곧 하늘 성소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이해하기 어려운 점들을 내포하고 있다. , 하늘 성소의 구조와 건축의 설계를 그림자 되는 지상 성소의 그것들로 이해한다는 주객 전도의 무리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성소건축 형태가 솔로몬과 스룹바벨 성전과의 차이가 크고 에스겔이 계시중에 본 성전과도 다르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는 셈이 된다.

(2) 기능론적 실재론

이 주장은 앞의 실재론을 변형시킨 것으로 하늘 성소의 실재는 그리스도의 사역의 객관성의 보호 장치로서 유지되지만 하늘성소 구조에 관한 세부사항이 명료하게 제시되지 않았다고 본다. 그래서 하늘 성소에 관한 문자의 뜻을 따라 해석한다 (literalizing interpretation). 대부분의 재림 신도들이 문자적 실재론적 해석의 틀에서 오는 천상 지리학이나 건축한 수립의 난점 때문에 이 입장을 따르고 있다. 따라서 그림자되는 지상성소에 비추어 원형되는 하늘성소를 볼 것이 아니고 그림자를 조망할 것으로 본다. 요컨데 이 입장에서는 하늘성소의 외적 형태 (form)보다는 지상 성소의 첫째 칸과 둘째 칸에서의 제사장의 봉사에 상응하는 두 국면의 활동 즉 기능에 그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여기에 하늘성소에 관한 히브리서의 한계성이 있다.

재림 교회에서는 실재론적 시각에서 하늘 성소론을 펼쳐왔다. 각 시대의 대쟁투 23장은 하늘에 성소가 있다는 것을 도무지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못박고 있다. 히브리서가 하늘 성소의 실재성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그러나 구조에 관하여는 요한계시록 같이 구체성을 띄지 않고 있는 한계성이 있다. 히브리서가 겨냥하고 있는 것은 구조성에 있지 않고 성소의 실재성과 진정성에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실제적 제사장 직분과 실제적 봉사 사역 즉, 중보사역 기능에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므로 참 장막에 부리는 자” (8:2)가 되셨고 성전의 봉사가 지상에서 하늘의 성전으로 옮겨졌다는 점에서 히브리서의 하늘 성소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소망스러운 것이다.

이제 히브리서가 말하고 있는 하늘 성소의 실재성을 말하고 있는 내용을 보도록 한다. “이제 말하는 것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 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 (8:12). 이어서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성소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 (8:5)라고 하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 (9:11)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하늘성소는 이 지상성소에 비할 수 없는 성소” (ton hagia)참 장막( sēkēns tes alēthinēs)” 이다. “온전한 장막,” “성소” (8:2)는 하늘 성소에 대한 일반적 진술이다. 이점은 평행적 어귀인 참 장막성소란 말을 설명하는데서 더 확연하여 진다. “참 장막에서 진정한,” “실재하는의미이다. “하늘에 있는 것은 하늘 성소로 지상 성소의 원형이 된다. 지상 성소는 모형 (hupodeigma)이며 그림자 (skia)"이기 때문이다. 모세 성소는 하늘 성소의 식양 (taḇnît, tupos)"에 따라 지상성소를 건축하였다 (25:8, 9).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여준 식양은 축소형 모델(miniature model)"이었지 하늘 성소 그 자체가 아니었다. 9:24에 나오는 하늘에 있는 것들과“ ”참 하늘 ( heaven itself)"에 관하여는 의견이 분분하나 하늘 성소를 지층하고 있다고 보야야 한다. 지상성소가 정결하게 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듯이 하늘 성소도 정결하게 되어야 한다는 대비관계가 이를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10:1에서는 하늘 성소를 참 형상 (eikōn)"참 장막에서와 같이 그림자가 되는 지상성소와 대비한 방식의 표현이다.

요컨데 히브리서에는 하늘 성소의 실재성과 그 성소에서 진행되는 그리스도의 실제적 제사장 직분과 봉사 활동 기능에 그 토대를 두면서 권고를 하고 있는 설교적 목적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C. 요한계시록의 나오는 하늘 성소 정체

요한계시록은 히브리서와 같이 직접적으로 모세성막과 대조시키지 않고 하늘 성소의 단면을 직접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하늘 그 자체와 하늘 성소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다. 11:19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하늘 안에 있는 것- 하나님의 성전이란 문자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어 성전이 위치한 하늘과 하나님의 성전이 확연히 구별되는 것이다. 또한 15:5에서도 하늘에 (in)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한 표현이나, 14:17다른 천사가 하늘에 (in) 있는 성전에서 나오매한 진술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늘 그 자체와 하늘 성전을 구별하고 있다. 성소론 교의는 하늘 성소의 빛을 중심으로 하여 지상 성소를 이해하여야 한다는 점에서 요한계시록의 하늘 성소에 관한 현 단면은 그 의미가 큰 것이다. 땅의 표상에 대한 하늘의 원형은 그림자와 실체의 관계와 같아 땅의 표상이 갖고 있는 크기나 재료가 하늘의 원형의 그것들과 같을 수 없다. 만군의 왕께서 거하시는 하늘의 성전 그것에는 수 많은 천사들이 수종들고 있어 (5:11) 지상의 어떤 건물을 가지고도 그 크기와 영광을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하늘 성전에 관련된 표현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성전 (naos)

히브리서에는 ta hgia (성소들)가 동서내에는 성소론 이해상 기본용어가 되어 있지만 요한계시록에서는 naos가 성소에 관한 기본적 용어로 나오고 있다. 요한계시록 전체를 통하여 이 naos14회 나오고 있다.

요한계시록에서 naos하늘 성전에 적용되어 있는 때는 기본적으로 지성소를 가르키고 있으나 동시에 은유적으로 거룩한 그리스도인 공동사회를 뜻하는 것으로도 3:1221:22에 나타나고 있다. “내가 성안에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21;22)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막는 어떤 것도 없는 상태를 보여 주고 있다. 이 구절은 승리한 교회에 관한 부분 (21:5-22:5)에서 나타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본 구절은 새 예루살렘을 묘사한 것의 일부라고 한 점이 그 의미를 바로 파악케하는 관건이 된다. 21:3에서 하나님의 장막 (skēnē)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란 표현이 하나님과 인간의 최종적 재결합을 시사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하나님의 거하시는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완전한 연합과 조화된 상태에 있어 성전이 필요없다는 점을 시사할 수도 있다. 죄가 더 이상 존재치 않을 뿐만 아니라 지성소의 원형인 새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하므로 이 21:322:21에서는 해나 달의 비침이 쓸데 없는” (21:23) 것 처럼 naos도 죄의 멸절 이전과 같이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2. 마당(aulē)

요한계시록 전책을 통하여 "마당"이란 말은 오직 한 곳에만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요한에게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정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11:1-2)고 하였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 사역을 하셨기에 이곳에서 어떤 활동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늘에는 사실상 지상성소와 같은 마당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3. 성소

요한계시록에는 naos개념이 주로 지성소에 적용되고 있음은 이미 지적하였지만 그렇다고 성소에 관한 설명에 제외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지상 성소의 첫째 칸과 같은 성소가 하늘 성소에도 존재하고 있음을 보이는 진술들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4:5에서는 보좌앞에(enopion) 일곱등불 켠 것이 나와 있다. 이것은 모세 성소에 나오는 일곱 등잔을 가진 일곱가지가 달린 등대와 정확하게 일치하는표현이 아닐지라도 그 상통성은 나타나 있다고 보겠다. 여기서 전치사 앞에는 보좌를 전제로 한 장소적 개념을 갖고 있다. , 누군가의 이란 것이 그 기본적 의미이다 그러므로 보좌앞에 있는 성소에 일곱 등불켠 것이 놓여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보좌가 있는 장소는 지성소에 해당한다.

이 일곱 촛대는 요한계시록이 시작하는 첫 장에 나오고 있으며 (1:12-13), 일곱 교회를 대표하고 있다 (1:11, 18-20). 계속하여 세상에 빛을 발하여야 하는 교회의 대속적인 이 과업을 이 촛대로 묘사하면서 그 과업을 시행하도록 제사장이 이 촛대 사이에 거니시고 있다. 이것은 성소에서의 그리스도의 계속적 중보사역 단계를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일곱 등불에 관한 묘사외에 금향단 (8:3, 5; 11:1; 14:18; 16:7)과 분향하는 일 (8:4), 단위로 부터 불을 담을 향로 (8:5)가 나오고 있다. 이 분향하는 일이야 말로 성소 봉사의 핵심적인 중요성을 띄고 있는 것이다. 이 분향하는 단에 관한 진술이 금단으로 (8:3; 9:13)으로 나타나고 이 단은 보좌앞에 있고 (8:3), 하나님앞에 있으며 (9:13), 성전안에 있고, 이 금단 위에는 불이 있다 (8:5).

금향로를 가지고 와서 제단 곁에 서서 향을 많이 받아 가지고 모든 성도의 기도와 화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놓은 것에서 선지자 요한은 하늘에 있는 성소의 첫째 칸을 본 것을 표시하는 것이며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까지는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의활동은 계속되고 있다 (9:13).

이 천상성소의 첫째 칸에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은 그의 승천후 보좌에 즉위한 후 시작되었다는 사상은 서상한 바와 같은 촛대 사이에 거니시는 일과 금단 사역으로 뒷받침되고 있다.

 

4. 지성소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naos가 전술한 21:22에서와 같이 시사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한 실재적 성전 또는 지성소를 가르키고 있어 하늘 성전의 존재가 확실하다. naos 용례로 보아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naos는 하나님 보좌가 있는 같은 장소에 있다 (7:15). 여기서 하나님 보좌 앞은 하나님 임재 앞을 뜻한다. 이 하나님 임재 앞에 (7:10), 천사들, 장로들, 네 생물 (7:11), 흰옷 입은 큰 무리, 144,000 (14:1-3; 15:2-4)이 있다. 요한은 이 144,000하나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 (7:15)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144,000이 하나님 보좌앞에서 봉사하고 하나님은 그 보좌에 앉아 계시며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의 거소인 지성소 naos 안에 그 보좌가 있음을 보이고 있다. 보좌가 하늘 성소에 있을 진데 그것은 지성소에 있어야 한다.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4:1,2). 트라웁 (Helmut Traub)4:1하늘은 문이 열려지고 있는 성전이다라고 보고 그 의미를 보다 맹백하게 하고 있다 (8:1; 11:19; 12:10; 19:1 참고). 여기서 4-5장의 장면은 하나님의 보좌를 중심으로 한 하나의 단위이지만 다니엘 7:9,10의 조사심판에 관한 모습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후 그리스도교 시대의 시작인 하늘 성소에서의 즉위식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나오는 인봉된 책은 다니엘 7:10의 뚜가지 이상의 심판 책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 것이다.

11:19하늘에 성전이 열리니는 심판 사역의 시작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재림교회는 이 천상 성전이 열리고 언약궤가 보이는 것 즉, 심판하는 일의 시작을 조사 심판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때 그리스도가 하늘 성소의 첫째 칸의 봉사를 마치고 지성소 안에 들어가 그의 중보 사역을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성소 (naos)안에 언약궤가 있다 (11:19). 지상 장막에 비추어 보면 언약궤는 지성소안에 있는 만큼 여기서 naos는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9:3-4참고). 화잇 (Ellen G. White)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는 광경을 둘째 칸인 지성소라고 하였다. 성전 (naos)안에서 언약궤가 있는 것을 본 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임박 즉, 재난의 임박을 알리는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분 후였던 것으로 이것은 곧 조사 심판의 시작을 본 것이다.

 

D. 재림전 심판

비재림교인 학자들 중에 재림전 심판을 신봉하는 자는 거의 없다. 거의 모든 학자들이 다니엘서 연구에서 이 주제를 놓치고 있다. 그러나 재림교회는 다니엘 7-8장을 요한계시록 14:6, 7과 연계시켜 그리스도의 재림전 심판의 성서적 근거로 삼고 있다. 다니엘 7장은 동서의 중심축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이 7장의 하늘 성소에서의 사건은 8장에서 성소 제의 언어로 반복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재림전 심판 (pre-advent)”이라함은 심판의 기간 개념을, “조사심판이라 함은 심판의 방법을 함축하고 있는 표현이 된다.

 

1. 심판 대상자

재림전 심판은 각 시대 하나님의 백성을 그 대상으로 한다. 특히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백성에게 이 재림전 심판은 그 뿌리가 되는 갈바리 십자가 구속사 사건과 연계된 좋은 소식으로 본다. 이는 심판 선언 문맥에 영원한 복음” (14:7)이 있기 때문이다.

영원한 복음은 갈바리에 관한 진리이다. “죄를 위한 속죄로서의 그리스도의 희생은 그 주위에 다른 모든 진리가 주렁주렁 달리는 대 진리이고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 진가를 인정하기 위하여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갈바리 십자가로부터 흘러나오는 빛 가운데서 연구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 갈바리는 재림전 심판 이해의 관건이 된다.

사실상 갈바리에서 심판날은 원천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임금이 쫓겨나리라“(12:31) 란 말씀이 이를 시사하고 있다. 이 갈보리에서의 심판은 하나님의 백성을 종국적으로 구원하고 하나님 백성의 원수를 파멸시키는 것을 뜻한다. 이 구원과 파멸의 이중적 선언은 구속사에서 재림전 심판, 천년기 심판, 천년기 후 심판을 통하여 수행 성취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혹자는 갈바리 사건은 레위기 16장의 대속죄일 연례행사의 원형으로 보기도 하나 이는 재림전 심판의 십자가 상의 구속의 적용이란 점을 간과하고 있는 소치다. 이 점에 관하여는 앞으로 더 다룰 것이다.

 

a.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 자

성경 표상론에 의거하면 인간 역사를 끝장지우는 재림전 심판은 레위기 16장의 대족죄일인 행사에 예표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만이 이 연례심판의 대상이 되었지 다른 민족이나 국가는 해당되지 않았다 (16:16). 다니엘서 7장은 이 연례 심판 표상의 원형이 되어 있다. 동 다니엘서 7장의 재림전 심판 원형에서는 심판 대상자의 개개신원이 나오지 않고 성도를 신원하는 일이 나오고 있다. 그리고 작은 뿔에 대한 심판 선언이 나오고 있다 (7:22,26). 여기서 심판이 선언되는 일에는 조사 심판이 전제가 된다는 것은 논리적 귀결이다. 요컨데 여기서 심판선언의 대상은 두 그룹으로, 그 첫째는 작은 뿔의 공격을 당하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7:20-22, 25-27), 그 둘째는 그리스도교 체재로 자처하는 작은 뿔이다 (7:22, 26).

 

b. 작은 뿔

이 재림전 심판대상에 작은 뿔이 포함된다. 재림교회의 학자에 따라 이를 보는 시각에 차이가 있다. Ellen G. White하나님의 백성으로 공언한 자 뿐이다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은 다 이 엄숙한 심사를 거쳐야 할 것이다.“ White의 이 진술들을 고려할 때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참 백성과 믿는다고 공언하는 두 무리가 상정된다. 작은 뿔 세력 안에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와 성도들이 있겠지만 하나님과 성도들을 미워하는 신앙체제도 내포하고 있음을 유의할 때, 위조체제인 작은 뿔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다고 공언하는 자에 포함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심판에 포함되는 대상은 첫째 어떤 신앙 단체에 속하던지 간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한 모든 사람들과 둘째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체제인 작은 뿔이 여기에 해당한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도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 있는가 하면 명목적인 이스라엘 백성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백성에도 참 백성과 명목적 백성이 있다. 마태복음 22:1-14의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예수께서는 재림전 심판을 언급하고 있으며 Ellen G. White도 이 비유해석에서 섞인 무리 (a mixed company)”로 풀이하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모든 사람이 다 참된 제자들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하늘에서 루스벨이 충성된 천사로 가장하면서 그리스도와 그 지위를 넘보는 일을 자행하였던 것처럼 작은 뿔도 공인된 그리스도교 체제로 위장하여 일하고 있는 것이다.

다니엘의 역사적 배경 및 당대의 예레미아와 에스겔 선지자들의 글을 성찰하면 이는 작은 뿔이 그리스도와 신약시대 성소봉사를 거스려 공격하는 것과 상응하는 일로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한 작은 뿔은 심판시에 그 지배권을 상실당한다. Baldwin은 이를 두고 하늘 법정은 그의 권세가 박탈당하며 멸망당할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재림 교회 성경주석은 교황권 멸망의 심판선언이 있을 것이며 그 권세가 마지막 때까지, 성도를 거스려 계속 전쟁할 것이며 그후 성도들에 대한 권세가 영구히 제거되어 소멸될 것으로 보고 있다.

다니엘 자체가 성도와 작은 뿔이 다같이 재림 전 심판선고를 받을 것으로 말하고 있다. 이 선언에는 인자같은 이에게 권세가 주어지고 (7:13-14), 작은 뿔이 권세를 빼앗기고 (7:26),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성도들에게 권세가 주어지는 (7:18,25) 세가지 상호 관련된 행위가 포괄되어 있다. 작은 뿔이 권세를 상실한 것은 짐승세력들이 권세를 상실한 것과는 달리 (7:12) 종말론적 사건임을 유의해야 한다 (7:21-22, 25-27).

그리고 다니엘 7장에는 성경상 작은 뿔에 관한 심판기사가 동반되고 (7-9, 12-14, 20-22)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심판을 하러임하시기 (3:5) 때문 즉, Ellen G. White이 말한 것처럼 심판의 집행을 위하여 그가 임하시기때문이다.

작은 뿔이 심판에 포함된 성경적 증거는 히브리서에도 나온다.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katapatesas) 자기를 거룩하게 한 연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경을 욕되게 하는배도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 (10:29)에 상응한다. John Calvin도 히브리서 10:29의 밟는 세력을 교황권으로 견주어 해설하고 있다.

고대 왕조시대 하나님께서 패역한 세력이 성전을 더럽힌 (왕하21,13; 23:11; 5:11; 8:1-18)결과 다니엘시대에 전술한 것처럼 유다에게 심판이 임한 것이다.

재림전 심판에 작은 뿔이 포함된 또 다른 신약성경의 근거는 데살로니가후서 2:2-4에 나오고 있다. ,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2:3-4)고 한 세력은 신약시대에 그리스도의 지위를 찬탈한 종교적 세력이다. 이 세력의 뿌리는 구약성경 에스겔 28:2, 이사야11:4 및 다니엘서 11:36에 나온다. 작은 뿔의 진상을 밝힌 불법의 사람을 두고 Hans K. LaRondelle바울이 적그리스도를 무신론 세력을 상징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대신한다거나 위한다고 주장하는 철저하게 종교적 세력이다고 기술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정곡을 찌른 해석이 된다.

요한계시록의 12장과 17장의 두 여인장 곧 참 교회와 거짓 교회 기사와 세 천사의 짐승” (작은 뿔) 기사 (14:6-11)에서도 이 재림전 심판 사건이 위조 그리스도교 체제와 관련하여 나오고 있다. 요한계시록 13장의 1-10의 짐승도 작은 뿔에 관한 것이다. 종말적 남은 백성의 원수도 1612-16의 용과 거짓 선지자가 연합하여 전 세계로 하여금 성도들을 거스리게 하는 것은 (16:14; 13:3; 12:17) 다니엘 7장에서 작은 뿔이 모형적으로 성도들을 거스리는 것과 상응하는 것이다

대속죄일이 재림전 심판뿐만 아니라 천년기와 천년기 이후의 심판까지도 표상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즉 다니엘 7장의 심판은 레위기 16장의 대속죄일의 한 부분이 된다는 점이다. 대속죄일의 행사는 하나님 백성의 원수인 아사셀 염소에 대한 심판 (16:20-22)으로 다니엘 장의 하나님의 백성의 원수인 작은 뿔에 대한 심판과 상응한다. 아사셀 염소(scapegoat)는 종국적 원수인 사단을 표상하며 광야로 보내진 것은 1000년기와 1000년기 이후 심판시 사단에게 내려진 심판(20:23, 7-10)의 표상이 된다. 요컨데, 다니엘서 7장은 지상의 작은 뿔 활동과 그 결과 천상의 심판활동이 있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c. 심판 선언의 이중성

재림전 심판의 선고는 이중적이다. 첫째는 하나님의 성도들의 구원이며 둘째는 그들의 원수들에 대한 파멸 선언이다. 물로 이 이중선언은 갈바리의 이중 선고의 전개이다. 다니엘서의 여러 곳에서는 이 이중선언적 기사가 나와있다. 여기서 구원에는 다니엘 세 친구를 건져내시겠고 (Shzab)” (3:17,28)에서와,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6:20.21) “구원하시겠고란 말에서 확인된다. 이말은 12:1구원” (malat)에서도 나오고 있다. 다니엘과 그 세 친구에 대한 역사적 구원은 7:10의 재림전 심판시 사용되는 " (7:10)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에 대한 종말론적 구원의 의미를 가늠케 한다. 하나님 백성의 역사적 구원 사건은 다니엘과 그 세 친구의 원수의 파멸을 수반하였다 (3:22; 6:24). 성도들의 종말론적 구원은 원수 (작은 뿔)의 파멸사건과 대응사건이 된다 (7:26-27). 이렇게 역사적 지역적 구원사건이 종말적, 우주적 구원 사건을 푸는 단초, , 표상이 된다.

다니엘에서 문자적인 바벨론이 하나님 백성의 원수로 나오고 요한계시록에서는 영적 바벨론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 백성의 원수가 된다. 단지 다니엘에서는 바벨론이 한 제국에 불과하였으나 (1:1-2), 요한계시록에서는 온 세계로 확산된다는 (13:3; 17:1-19:21)차이가 있다. 이렇게 다니엘 7장과 요한계시록 13-19장에서는 하나님 백성을 공격하고 같은 세력이 등장하고 있다 (7:21과 계17:5,6 참고).

그러나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경배치 않는 고대 바벨론이 재림전 심판 보다는 집행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이에 반하여 원형적, 영적 바벨론은 재림전 심판의 대상이 된다. 동 영적 바벨론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지만 그 행동은 하나님과 성도들은 대적하기 때문이다 (7:21-26; 8:9-11, 25-26; 11:28-32; 12:11).

 

2. 재림전 심판의 때

다니엘 7장의 심판이 그리스도의 재림전의 심판이란 내적 근거는 7:21-22에 나오는 사건의 세 사건 즉 작은 뿔이 성도들과 싸우는 국면- 성도를 위한 신원 (심판) 국면- 재림시 성도들이 나라를 얻는 국면이 잘 나와 있다. 이 순서는 7:25-27에서 다시 반복되고 있다. 이 세 국면에서 심판 국면이 그리스도의 재림 국면에 선행하고 있다.

이 심판의 그리스도의 재림전에 발발한다는 것은 다니엘서 구조 문맥 자체에서도 엿볼 수 있다. 열국의 흥망 후에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신다. 이 열국의 흥망 배후에서 하나님께서 왕들을 폐하시고 세우기도 하는 (2:21) 심판이 진행된다.

이 나라의 흥망과 천국건설의 평행적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2:37-44: 바벨론-메대파사-헤라-로마-10나라-하나님 나라

7:4-14,22,27: 바벨론-메데파사-헬라-로마-작은 뿔-하나님 나라

8:2-9, 20-26: 메대파사-헬라-작은 뿔(이교-교황로마)-심판

다니엘 7:7-8에는 네째 왕국인 로마 다음에 작은 뿔이 등장한다. 따라서 8장에서 같은 평행적 기사인 작은 뿔도 로마 다음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과거주의자들이 흔히 8장의 작은 뿔을 Antiochus Epiphanes (175 B.C.-164 B.C.)로 보고 있는 것은 문맥상 바르지 않다. 이 작은 뿔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왕국의 도래시까지 권세를 부리고 설치므로 그때까지 진행되는 세력임을 알 수 있다. 더구나 Antiochus EpiphanesSeleucus왕조 (311-65 B.C.)에서 개인적으로 선왕만큼 대왕의 호칭도 받지 못하였고 동방정복이 시원치 못하였으며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힌 B.C. 168Chislev 15일에서부터, B.C. 165Chislev 15일 까지 기간은 2300주야에 맞지도 않는다. 또한 예수께서 멸망의 가증한 것 (24:15; cf 8:13)을 미래적 사건으로 보고 있으며 뿔이 한 왕을 지층한다고 보기보다도 왕국의 등장이란 문맥과 비교할 때 동 왕이 작은 뿔 예언 당사자일 수가 없다. Judas MaccabaeusAntiochus를 패퇴시켰다고 해서 인자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시는 분이 (7:9-13) 될 수 없고 또한 독립전쟁에 승리한 유대가 영원하지도 않았다는 점은 다니엘서 기사를 유다와 안티오쿠스로 볼 수 없게 한다. G.K. Beale이 다니엘서 7장과 12장의 심판 은 종말론적 박해 상황에서 나타난다고 지적한 것은 Antiochus로 보는 시각의 부당성을 바로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3. 2300주야-2300

성소에서 매일드리는(tamid) 봉사를 제하여 버리는 공격(8:11)2300주야(8:14)와 연계되어 있다. 이는 작은 뿔이 하늘 성소 봉사를 공격 하는 행위가 된다. 확인하면 그리스도의 봉사를 공격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 심판의 이유가 된다.

역사 비평학자들은 이 2300주야를 안티오쿠스가 예루살렘 성전을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일이 중단된 기간과 일치시키고자 하여 성전 제사가 2300일간이 중단되었거나 2300제사가 중단되었다고 한다. 2,300제사는 하루의 조석 제사 2회를 시사하여 기간상으로는 1150일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간단히 언급한 것에서 처럼 2300일이나 1150일 그 어느 기간도 성전 제사 중단기간과 정확하게 맞출 수 없다는 점에 문제점이 있다. 더구나 1150일로 해석하는 것은 주야정확하게는 저녁과 아침” (ereb boqer)이 각기 단수로 되어 있어 두 개가 합해져야 하루를 이룬다는 점에 맞지 않는다. Sigfried Schwantes가 지적한 대로 다니엘 8: 142300주야 표현은 창세기 1장의 기사에서 차용한 것인 이상 창조기사의 저녁 (ereb)이 되고 아침 (boqer)이 되니” (1:3, 6, 13, 19, 23, 31)란 두 단어가 하루를 구성한다는 성서 자체의 명쾌한 규범적 해석에도 맞지 않는다. 그래서 “ereb boqer" 은 제사용어가 아니고 하루를 가르키는 성서적 표현으로 보는 것이다.

역사주의 입장에서는 2300주일은 2300년으로 해석한다. 이것은 1=1년 예언 해석 원칙에 토대를 두고 있다 (cf. 4:6).

다니엘서 8:13에서 한 천사가 한 이상에 나타난 바... 어느 때까지 (until when) 이를꼬?”란 잘문의 답변으로 “2300주야가 나온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이상에 해당하는 “hazon”이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hazon8:1, 2, 13 17절의 정한 때 끝에 관하여 나오고 있는 점에 비추어 이상의 시작으로부터 정한 때 끝까지 해당되는 범위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hazon은 메데 파사때로부터 헬라 이교와 교황로마의 작은 뿔을 포괄하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여기에 2300일이 2300년으로 풀이 될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일찍이 마르틴 루터는 작은 뿔을 교황권으로 지목한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H. C. Leupold은 교황이 적그리스도라고 한 루터파의 해석을 지지하였다

예언 해석상 소위 고전적 예언 (classical prophecy)과 묵시문학적 예언 (apocalyptic prophecy)을 구별하여야 한다. 전자에서는 문자적 용어와 시간이 나오지만 후자에 있어서는 상징과 상징적 시간이 나오고 있다. 다니엘서에 있어서는 상징과 상징적 시간이 나오고 있다. 다니엘 7, 8장에서는 여러 제국을 상징하는 짐승들이 나오고 있는 바 이 묵시적 예언에 나오는 때인 한 때, 두 때, 반 때 (7:25; 12:6, 14)2300주야 (8:14), 70주일 (9:24) 같은 것은 상징적 때를 말하고 있음을 당연한 귀결이라고 말할 수 없다.

2300 ereb boqer에 관하여 2300년으로 보고 동 2300년은 457 B.C.로 부터 1844 A.D.에 이른다고 한 역사주의적 메시야적 해석은 이 모든 문제점들을 극복하고 있다.

 

E. 재림전 심판의 복음성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같이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4:15-16).

갈바리의 그리스도께서는 재림전 심판 기간 중에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 이것이야 말로 심판날에 있는 복된 소식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재림전 심판시 중보자가 되신다는 소식은 복음이다.

 

1. 대속죄일

유대력으로 1년의 끝인 대속죄일에는 성소 (, 회막, 지성소, 및 제사장)를 위하여 속죄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죄를 위하여 속죄” (16:33,34) 하였다. 성소와 백성의 죄를 정결케 한 후 완결된 정결을 경축하고자 장막절 행사를 치루었다. 성력으로 1년 끝에 오고 민력으로는 년초에 해당하는 새해 재림전 심판사상은 다니엘 8:14의 사상의 디딤돌이 된다. 다니엘은 이 연례 행사-재림전 심판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2300주야 끝은 집행 심판의 기점이 아니고 그것을 위한 과정의 기점이 된다. , 2300주야 끝에 집행심판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집행심판을 지향한 심판의 과정이 2300주야 끝에 시작된다.

첫째천사의 기별은 이러한 중대한 기점의 도래를 알리고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14:17). 대속죄일은 성소주위에 모이는 때이다. 또한 백성을 대표한 대제사장이 지성소에서 하나님께 봉사하는 일에 그 초점이 모아지는 때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지나간 날을 참회하는 때며 지나간 날에 성소에 전가시킨 죄를 도말하는 때이므로 드디어 개인과 민족이 구원을 받는 때이다. 2300년이 끝나는 18441022일은 모형되는 대속죄일의 원형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이 재림전 심판은 하늘 성소봉사중 두 번째 국면인 지성소봉사에 초점이 모아지는 때가 된다. 지상의 작은 뿔은 이 그리스도의 하늘 성소봉사에 향한 관심을 자기의 사제적 봉사에 쏠리도록 한다.

 

2. 히브리서에 나타난 재림전 심판

히브리서에 나타나는 성소관련 본문을 이해하는 일에 있어서 재림교회내에 두 조류가 있다. 그 하나는 William G. Johnson의 갈바리로부터 모든 예전 봉사를 회고하는 방식으로 대속죄일 제물들보다 더 좋은 제사와 더 좋은 피에 역점을 두고 있는 입장이다. 이 견지에서는 히브리서에는 율법과 법정 모델이 나오지 않고 또 그것들을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는 것으로 본다. 물론 Johnson은 히브리서에서 심판 주제가 나오고 하늘성소에 대속죄일 개념도 나오고 있으나 하늘성소의 정결(9:23)과 심판의 시간에 관한 관심을 유발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

이 견해와는 대조적으로 Richard M. Davidson은 히브리서 9장에 성소정결에 관한 시간에 관한 암시가 있으며 그 후 심판 (27)과 그리스도의 재림 (28)이 있다고 보고 있다. 그는 더 나아가 히브리서 도처에 나오는 미래 심판의 기사가 (2:2-4; 4:1-3; 6:7-12; 10:29-29; 12:26-29) 조사심판과 (4:12; 6:10; 10:28-30) 집행심판을 시사한다고 보고 있다. 그는 이러한 시간적 시사는 구약성경의 표상과 조화된다고 본다.

물론 히브리서가 심판시간을 재림전 심판과 최후 심판을 구별하는 식으로 체계있게 들어내고 있지 않지만 영원한 심판 (6:2), 심판시의 불사름 (6:8), 소멸하는 불 (12:29)의 결과에 앞선 심판 용어들에 (9:27; 10:27; 13:4) 과정적 의미도 개재된 것으로 보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또한 하나님은 만민의 심판자가 되신다 (12:23).

또한 히브리서가 유념하고 있는 대상은 뒤로 물러간 그리스도인들이 포함되어 있다(2:1; 3:12, 15; 4:1, 7, 11, 14; 5:12; 6:5; 10:26; 35-39; 12:1-6, 12-16, 25; 13:1-2, 7-17, 22).

그들이 포기한 것이 더 좋은 그리스도 (1:4), 더 좋은 소망 (7:19), 더 좋은 언약 (7:22), 더 좋은 약속들 (8:6), 더 좋은 피가 있는 (9:12), 더 좋은 제사 (9:23)가 된다.더 좋은 것을 포기한 이들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노래의 후렴처럼 거론하는 것은 당연하다. 9:23의 하늘 성소 정결의 필요성은 9:24-25의 대속죄일과 연계되어 있어 모형론적 일치성을 확연히 하고 있다. 9:23의 하늘 성소 정결 (katharizesthai)”은 다니엘 8:14정결의 직접적 인용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더 좋은 제물되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위하여 원형되는 하늘 성소에(9:24; cf. 8:5) 들어가사 하나님앞에 나타나신 것을 보면 9:23의 하늘 성소 정결과 24-28절의 심판 기사가 별개의 사건인 양 할 수 없는 것이다.

히브리서 1026-31하나님의 아들을 밟고(katapatesas)”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마땅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요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고 한다. 히브리서는 그 시작에서부터 (1:2) 그리스도의 승귀 사상을 전개하고 있음에 비추어 하나님의 아들을 발로 밟는다고 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주신 어떤 은사를 짓밟는다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신 승귀의 신분을 지닌 아들을 짓밟는 행위로 보는 견해가 승귀-배도한 그리스도인이 짓 밟음의 대비관계에 어울린다. 즉 이 배도한 그리스도인의 짓밟는 행위는 작은 뿔이 자신의 신원을 그리스도에게로까지 격상하며 그리스도의 매일 봉사 (tamid)를 탈취한 것을 상기시킨다. 다니엘 8:13절에 나오는 짓밟는다는 표현이 LXX의 다니엘과 히브리서에 나오는 같은 pateo동사를 사용하여 같은 적 그리스도의 공격을 묘사하고 있다. 이와같은 점에서 히브리서 9:22-2810:26-31은 다니엘서의 재림전 심판을 인유하고 있음을 지실할 수 있다. 단지 이 짓밟는 일이 9:22-28에서는 성소와 백성의 정결이란 점에, 10:26-31은 심판에서 배척 선고의 사유가 되는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일에 그 초점을 두고 있을 뿐이다. 앞서 지적한 것 처럼 히브리서가 다니엘서 처럼 심판 법정 장면을 상세히 취급하고 있지는 않다해도 수직적/수평적 표상-원형의 대비를 하므로 저자의 의중에는 다니엘서의 재림전 심판장면이 깔려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재림전 심판

요한계시록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와 지성소에서 봉사활동이 확연히 나오고 있다. 그리고 다니엘서의 심판사상을 이어받아 발전시키고 있다.

a. 하늘 성소에서의 그리스도의 봉사 활동

요한계시록은 앞서 언급한 것 처럼 묘사에 있어서 마당에서의 사역에는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 희생의 십자가로 표상된 번제단 사역은 그리스도께서 성취시켰기 때문에 천상에서 존재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번제단의 제물되는 어린양 (amnos)과 그 어린양을 속죄제물로 드리는 제사장이 일체가 되어 나타난다.

세상 죄를 속하고자 대신 죽은 어린양의 모습은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그리스도에 관한 가장 중요한 모습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하는 권능이 특별히 어린야의 모습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어린양은 요한계시록에서 그리스도를 구속자, 심판관(6:16; 15:3; 19:11), (5:13; 7:14, 17; 21:1, 3), 제사장 (5:6, 9, 12; 7:14; 12:11)으로 묘사하고 있다.

어린양이 희생 제물이면서 동시에 제사장과 심판하시는 분이란 것을 드러내고 있다. 무엇보다도 희생 제물인 어린양이 이 희생제물을 바치는 제사장과 동체가 된다는 것은 놀라운 사상인 것이다.

이 어린 양은 죽임을 당한 것 같고 (5:6), 또 죽임을 당한 존재로 (5:9, 12, 13:8), 그 속죄의 피로 사람을 샀고 (5:9), 환란에서 나온 자들의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 (7:14). , 성전, , 번제단에 바쳐진 어린 양은 회개한 죄인 대신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살아계신 그리스도며 메시야적인 고난을 당하는 종이다. 이 그리스도가 제사장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가 되었다 (1:5). 그래서 세세토록 살아 있는 분이 되었고,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전능한 분 (1:8)이다.

이 어린 양 제사장되는 그리스도는 지상에서 자기 과업을 모두 마치고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그는 보좌에 즉위하시고 (3:21) 봉사자 (minister) 로서 권세를 받으셨다. 요 컨데,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가 어린양이 되심에 기초하여 하늘 대제사장으로서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요한계시록 1장은 제사장과 봉사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 갈 수 있다는 사상 (5:2; 2:18; 벧전3:18 참고)과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을 위하여 간구하는 자” (8:34, 7:25)와 함께 참으로 제사장 기능을 하시는 분이 된다는 사상의 연속선상에 있다. 요한계시록에서 그리스도의 제사장직과 대사장직은 구별된다.

 

b. 성소사역

상술한 바와 같이 어린양-제사장되는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를 가지고 봉사하는 제사장이다. 자기 피로서 죄에서 해방하시는 (1:5)분이기 때문이다. 하늘 성소에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은 중보자 (mediator)와 간구자 (intercessor)로 이는 제사장으로 취임하신 후 시작되었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이 하늘 봉사를 위한 그의 취임이란 신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성소에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은 다음 두 가지로 나오고 있다.

(1) 일곱 등불(일곱 촛대) 사역

요한계시록의 두 곳 (1:12, 13; 4:5)에서 이 등잔에 관한 진술이 나오고 있다. 모세 성막의 성소 남쪽에는 일곱 가지에 살구꽃 모양의 일곱 등잔을 가진 등대가 있었다(25:31-40; 37:23; 40:24).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금촛대가 모세 성소의 일곱 등잔을 가진 둥대와 그 묘사에 있어서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해도 양자가 상관성을 띄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2) 금단사역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기도를 통해서이다. 그러나 사실상 불의하고, 죄되고,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은 이 방법으로 조차도 하나님께 자신을 드릴 수없다. 인간이 올리는 기도마저 불완전하고 죄에 오염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성소에의 길을 열어 놓지 않는 한 인간이 하나님께 이를 수가 없다. 그런데 인간이 기도할 때 그리스도인의 공로와 종보, 그리고 믿음을 통하여 자기 백성에게 입혀지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상징한 향연이 그 기도와 함께 올라 가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금단사역이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8:4). 금향단에서의 그리스도의 중보는 인간이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확실하게 한다. 이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를 통하여 통하여 죄인은 의롭게 되고 하나님앞에 가납된다. 그래서 이 그리스도의 계속적 중보로 죄인이 하나님과 친교를 유지할 수 있는 길이다.

 

c. 지성소 사역

요한계시록에서 그리스도의 지성소 봉사 사역은 증거궤와 하나님 보좌와 관련하여 심판 부활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다.

(1) 지성소 사역 시작

다니엘 8-12장까지의 나오는 정한때 끝또는 마지막 때”-the time of end-(8:17; 11:35, 40; 12:4, 9)작정된 기한 (at the appointed time)"에 올 것이고 (11;35) 묵시적인 마지막 때까지 하나님의 주권적 시간안에 착수, 봉함되어 있게 된다 (12:9). 이러한 다니엘서의 마지막 때는 그리스도의 초림의 때가 아닌 다니엘 7:258:14의 긴 예언 기간의 시작점이 된다. 그리하여 이 긴 예언 기간의 시작점에서 하늘에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이의 보좌가 등장한다.

마지막때에 관한 의식은 요한계시록에서 42개월 또는 1260(11:2; 12:6, 13:5)로 시사되었고 그 기간은 하늘 성소와 관련되어 있다. 만일 이 년, , , 시의 기산점을 1453년의 콘스탄틴노플 (Constantinople) 함락으로 삼는다면 그 끝이 1844년이 된다. 따라서 이 년, , , 시에 관한 이해는 재림전 심판의 기점 이해에 시사하는 바가 있게 된다. 대속죄일 전 심판 선포의 나팔 (23:23-28, 2:1)을 불고 이어서 심판이 시작되고 이 년, , , 시도 나팔과 연관되어 있기 대문이다.

상술한바 다니엘에서 천상 심판은 다음과 같은 봉사의 연속선에서 이해된다. 작은 뿔이 성도와 싸우는 일이 옛적부터 항상 계신이가 올 때 까지진행된다 (7:21-22, 9). 심판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성도를 위하여 베풀어졌다 (7:22). 이 년대적 순서에서 까지란 말과 때가 이르매란 표현에서 보는 바와같이 싸움과 심판이 동시성을 띄고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특이한 것이다. 즉 싸움 다음에 심판에 이른다는 것과 심판 후에 성도가 나라를 얻는 다는 것이다, 요컨데, 싸움-심판-왕국받음의 논리로 심판이 왕국을 받는 일 보다 선행한다.

요한계시록에서 그리스도의 천상 지성소 봉사는 하나님 성전이 열리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다 (11:9). 성전이 열리는 사건은 지성소에 관한 것임은 이미 지적한 바 있다. 하나님 성전 (naos)이 열림과 동시에 그 안에서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였다 (11:9). 지상 성소에서 언약궤는 십계명을 내포하고 있었다( 25;16, 9:4). 사실상 언약은 십계명으로 두 돌판에 친히 쓰신 것“ (4:13) 이기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언약의 기초가 되고 이를 내포하고 있는 것은 언약궤가 된 것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언약의 기초인 이 십계명 도덕률은 하나님 품성의 사본으로 대쟁투의 계쟁점이 되어 온 것이며 십자가를 통하여 그 무오성, 영원성이 확인된 것으로 심판의 척도가 되는 것이다. 이 여호와의 율법은 성전, 제단과 또 42개월인 1260일 끝에 예배자를 척량하는 일에 사용되는 것이다 (11:1-3). 여기서 지성소 봉사의 주역이 되는 그리스도는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5:6, 7)있는 대제사장의 제의 차림인 것이 한 층 더 그의 지성소 봉사를 확인해 준다. 11:19에서 문이 열리는 것은 빌라델피아 교회에 보내는 기별에서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가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이” (3:7)가 하는 일이다. 그분이 열린 문을 두었다 (3:8). 이 빌라델피아 교회가 적용되는 역사적 기점이 1844년에 끝나는 것에 비추거나 상술한 성전을 척량하는 일이 1260, 1260년 끝과 연관되어 있어 그 끝이 1798년에 이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 문 또는 문이 열리니는 전술한 다니엘 7장과 8:14의 심판 사건의 때가 지시하는 때와 같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조사심판의 개시를 알리는 심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척량하는 일의 표준 근거가 되는 언약궤가 보이게 한 것이다.

 

(2) Nisdaq의 어의

1844년에 시작된 (11:1-3, 18, 19) 예수 그리스도의 지성소 봉사 국면은 요한계시록상의 성소론 백미가 된다. 이 문제에 대한 고찰 이전에 기초 용어인 nisdaq의 어의를 정립할 필요가 있다.

다니엘 8:13에서 어느 때까지 (until when)”가 제기되었을 때 그 담으로 14절에서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고 했다. “정결함을 입는다(nisdaq)”는 말은 히브리어로 קד󰖯(sādaq)의 닙알 수동형으로 구약성경에서 여기만 나타난다. sādaq의 뜻이 욥기 4;17에서 정결하다란 의미로 사용된 ר󰚙󰖧 (taher)와 동의적 평행성을 띈 문장에 나와 있어 정경함을 입는다는 것으로 성서 시대 사람들이 의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밖에 nisdaq바르게 하는 것” “의롭게 하는 것”, “옹호 하는 것의 의미를 가진 것으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어nisdaq이 함축하고 있는 모든 의미를 담고 있는 역어를 찾는다는 것은 난사이다. 요컨데, nisdaq이 담고 있는 기본적인 어의는 정결하게 하는 것”, “바르게 하는 것”, “의롭게 하는 것”, “옹호하는 것이어서 다니엘 8:14정결함을 입게 하리라는 말을 이해하고자 할 때 이를 모두 고려하여야 한다. 1844년 하늘 성소에서 전개되고 있는 활동상을 알 수 있는 핵심적 열쇠가 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3) 속죄 옹호 사역

히브리서 923에 보면 하늘 성소 정결의 필요성이 강조되어 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nisdaq의 옹호국면을 먼저 보여주고 있다.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단회적 (once for all)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옹호하였다. 즉 십자가는 단순히 하나님의 용서하는 사랑을 들어낼 뿐만 아니라 또한 그러한 사랑의 거룩성을 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행위가 십자가이다. 이렇게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거룩성이 옹호된 것과 같이 요한계시록 5장에 나오는 천상의 지성소에서는 죽음을 당하신 어린양이 옹호되고 있다.

 

(4) 정결과 심판 사역

서상한 속죄 옹호 사역에 나타난 정결 (5:9; 7:14)은 심판사역 (11:18)과 함께 별도 고찰을 요한다. 특히 14장과 15장이 이 정결과 심판을 주로 강조하고 있다. 인간의 종류는, 하나님 권위를 거부하는 악인, 하나님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참된 회개를 한 신자, 하나님의 참된 신자로 보이는 거짓 신자가 있을 수 있다. 이중에 첫 번째 무리는 문제 될 것이 없다. 고대 성소 봉사에서의 대속죄일이 이스라엘 백성을 대상으로 하였듯이 1844년 이후의 천상 조사심판에는 영적 이스라엘 백성이 그 대상이 된다. 그러나 교회안에는 가라지와 밀 (13)이 섞여 있다. 혼인잔치에 초청된 자에는 악한 자나 선한 자가 섞여 있다 (22:10). 그래서 재림전에 심판이 요청되는 것이다. 예복을 입었는 지 여부를 조사하는 일이 (22:11-14) 필요하다. 하나님을 따른다고 공언하면서 불순종 하는 자들 곧, 그리스도의 공로에 가리움을 받지 않는 자들은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도말 (blot out)될 것이다 (32;33, 3:9 참고). 그러나 흰 옷을 입은 자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흐리지 (blot out) 아니하고 그 이름을 아버지 앞과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3:5). 고대 지상 성소의 매일 봉사에 있어서 회개한 죄인의 죄가 속죄 제물의 피를 통하여 성소에 옮겨져 성소가 더렵혀 지듯이 새 언약에 있어서도 실재의 대제사장이 실재하는 하늘 안에 있는 실재의 성소에서 회개한 죄들이 그리스도위에 믿음으로 놓아지고 하늘 성소로 옮겨져 이 하늘 성소를 더럽히게 된다.

또한 대속죄일 봉사를 통하여 더렵혀진 성소가 정결케 되듯이, 하늘 성소의 실제적 정결이 하늘에 기록된 죄들을 옮기거나 도말하는 것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죄 회개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누가 속죄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지 결정하고자 기록책들의 검사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소를 정결케하는 일을 조사하는 일-곧 심판하는 일을 포함하고 있다.

요컨데, 요한계시록 14, 15장에서 지성소에서의 그리스도의 사역 시간대에서 하나님은 기인한 일을 하시는 분, 의롭고 참되신 분으로 완전히 옹호되므로 다니엘 8;14의 의미가 확연케 되었다. 구속의 첫열매 144,000명은 또한 자기들을 흠없게 하는 어린양의 피로 옹호되고 있다. 하나님의 심판할 때가 이르렀기 때문에 죄를 버리고 정결케하고, 속죄하고 심판하는 일이 진행되는 것이다.

 

(5) 사단의 하늘 성소 봉사 훼방 사역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햐어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13;6). 이는 교황권이 하늘 성전-참 장막에서 백성의 주의를 끌어가 히8;1, 20이 하늘 성소의 봉사를 파쇄시키려는 것을 뜻한다. 즉 하늘의 예수의 중보사역이 미사, 고해, 성사나 마리아 숭배로 대치된 것과 관련된다.

다니엘 8:1절에 따르면 종교-정치적 작은 뿔 세력은 매일 드리는 제사를 제하여 버렸고 성소를 헐었다. 이곳의 매일 드리는 것(tamid)는 하늘 성소에서 하는 계속적인 활동 즉, 계속적 중보 봉사의 개념을 함축하고 있다. 이 작은 뿔의 자기 확대 활동에는 위조 중보자 도입, 위조 중보 활동 즉, 그리스도안에서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 것을 인간 공로로 대치, 신자들에게서 그리스도의 속죄하는 자기 희생의 은덕을 박탈한 영속적 희생 (제사)대용, 영원하고 완전한 하늘 대제사장 직분을 대신한 인간 제사장직분과 중재발전이 포함되어 있어 다니엘 8:14의 성소를 헐은 것과 요한계시록 13:6의 훼방의 실상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원수는 성소가 없다고 하는 가르침과 거짓 이론을 도입하여 사람들을 신앙에서 떠나게 할 것이다.

 

(6) 지성소 사역의 종결

요한계시록이 예수 그리스도의 지성소 사역의 종결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는 것은 동서가 종국적 회복을 말하는 마지막 책인 만큼 당연한 귀결이다.

다니엘 8-11장의 하늘 성소에서 예언되어 있는 것이 있으며 하늘 성소에서 히브리서 8-9장과 요한계시록 11:19; 14:1; 15:5-8에서는 현재적 사건으로 전술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가 현재 우리의 중보자와 왕이신 대제사장으로 봉사하고 계신다. 이 중보자와 대제사장으로의 활동은 십자가 속죄의 적용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중대한 행사에 있어 그 시작을 시간적 요인을 알리는 확연한 기별이 있는 것은 진술하였거니와 여섯째 인을 뗄 때 종말을 알리는 지진 (6:12)이 나고 인간들은 진노의 큰 날이 임박한 것을 크게 탄식한다 (6:15-17).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이 진노의 날이 이미 이르러 하늘 성소의 정결과 속죄의 결과인 죽은 자를 심판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한 자들에게 상주시는 (11:18) 심판이 있게 된다. 그리하여 드디어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롭고 불의한 자는 그대로 불의하리라 (22;11)”는 피동태 nisdaq이 아닌 능동태적 sadaq의 언도 심판 선언이 있게 된다. 이리하여 조사 심판은 끝나고 모든 인간은 영원히 의인과 악인-무리로 확정된 것이다. 이 때가 어린양의 진노인 7재앙이 내리는 때이다. 그리스도께서 성소를 떠나는 사이 (15:5) 세 천사들은 지성소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순종하여 그 재앙을 쏟는다. (16;1). 큰 바벨론의 심판을 받게 될 때 (18:8, 10) 재앙을 쏟게 된다. (16:8-19). 한 천사는 하나님의 심판의 의로우심을 선하고(16:5) 그리스도가 성소를 떠나실 때 주 전능한 분의 심판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다고 한 음성이 제단으로 부터 나온다(16:7). 이때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의 찬양이 울려 퍼지며 하나님의 심판은 참되고 의롭다고 한다. sadaq의 계속 선포가 있게 된 것으로 완전한 의와 전적인 옹호가 확연케 된 것이다

 

d. 재림전 심판사상의 발전

Kenneth Strand는 요한계시록을 8대 주요 예언의 연속으로 구분하고 있으며 4-14장은 역사시대 계시로, 15-20장은 종말론적 심판시대의 계시로 부분을 구성되어 있음을 잘 논증한 바 있다. 그는 4대 종말론적 부분의 각 절정은 심판이 되고 있다는 점도 지적하였다.

Strand의 구분 방식과는 다소 다른 구분 방식을 취하는 이론도 있지만 요한계시록의 절정이 심판에 있다는 점에는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앞에서 지적한 히브리서와 요한계시록 모두가 심판에 그 초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요한은 다니엘의 심판사상을 수렴하여 연속 발전시키고 있다. 요한계시록과 다니엘은 모두가 역사적 부분과 종말론적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유사성뿐만 아니라 평행적 기사가 많이 나오고 있다. 특히 다니엘의 작은 뿔 기사는 요한계시록에서 짐승으로 지목되어 있다. 요한계시록과 다니엘 평행기사는 다음과 같다.

1. 요한계시록 13장과 다니엘 7장의 평행기사

짐승(13)

작은뿔(7)

큰 말을 함(5)

큰 말을 함(8)

성도들과 싸움(7)

성도들로 더불어 싸움 (21, 25절 참고)

마흔 두달일할 권세를 받음(5)

한때 두때 반때 동안 권세 받음(25)

2. 거짓 예배가 작은 뿔과 짐승에게 올려진다 (8:14; 13:4-8, 12-15).

3. 거짓 예배를 강요하는 사형령이 내려진다 (3:4-6; 6:5-12; 13:14, 15).

4. 가짜 경배대상으로 다니엘에는 문자적 바벨론이 나오지만, 요한계시록의 짐승은 영적 바벨론으로 나온다 (17:5). 요한계시록에는 이 바벨론에서 나오라는 초청이 울려퍼지고 있다 (18:2-5; 14:7).

이 출바벨론 호소는 에스라와 느헤미아 시대에 있었다. 이 호소는 짐승을 경배하는 일에 있어서 돌아서 참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호소하고 있는 재림전 심판 기사의 결정적 부분이 되었다 (14:7)고 갈파하고 있다. Gregory K. Beale짐승과 작은 뿔의 일체성을 확신한 나머지 요한 계시록 13장은 다니엘 7장을 본따서 되었다고 한다. 요한계시록은 작은 뿔에 대한 선고 (7:21, 22, 26, 27)가 어떻게 집행되는 가를 표출시키고 있다. 이 집행은 그리스도와 짐승사이에 있을 최후적 재림전 투쟁에서 일어난다. 이 재림과 투쟁에는 용, 짐승, 및 거짓 선지자의 삼자동맹 즉 사단의 삼위일체적 동맹이 촉성된다. 아마겟돈 전쟁 (16-19)은 하나님께서 바벨론 (작은 뿔/짐승 및 추종자들, 13:3)에 대한 최후적 재림전 대결이 되며 자기 백성의 원수들에 향한 하나님의 파멸 심판을 제공한다.

그때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았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이한 낫을 가졌더라” (14:14). 이것은 구름타고 오시는 그리스도의 재림 모습이다. Hans K. LaRondelle은 이 모습을 그분의 구름 수레(병거, His Cloud Chariot),"로 보고 있다. 요한계시록 14:14의 구름타고 오시는 사람의 아들은 다니엘 7:13인자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의 연속선상에 있다.

T. Longman 는 다니엘 7:13절에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전쟁 병거 (the Divine war chariot)"를 타고 오신다고 보았다. 다니엘 713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재림전 심판 선고를 받으러 하나님께 나아가시는 것을 묘사한 반면, 요한계시록 14:14에서는 그 연속선상에서 동 심판을 집행하고자 인간을 향하여 오시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이중의 구름타고 천상 이동을 하는 것과 지상에서의 하나님 백성을 바벨론에서 모음과 짐승세력의 모음이란 이중 모음 (14;6-13; 16:12-16)은 대조적이 되어 있다. 심판 집행전에 심판 선고를 수령하는 것은 재림전 심판의 강력한 논증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구름 병거를 타고 하늘 성전을 떠나고 이 하늘 성전에서 세 천사들이 성전으로부터 나와 심판 집행에 참여한다 (14:14-20).

선고와 집행심판이 작은 뿔/짐승이 공격한 성전으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작은 뿔/짐승이 백마타고 오시는 그리스도와 백마를 타고오는 천사들을 공격하고 백마타고 오시는 그리스도와 천사들은 작 은뿔/짐승과 싸우고자 오신다 (19:11-21).

 

4. 십자가와 재림전 심판의 상관성

대속죄일 행사시 평사시의 조석 번제 의식은 진행되었다. 재림전 심판시대에도 번제의 원형인 십자가의 은총 효험이 계속된다는 것을 불문가지이다.

a.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시고 우리의 원수를 대적하신다.

신약성경의 어느 책도 히브리서 만큼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의 천상 봉사활동을 잘 기록하고 있지 않다. 자기 백성을 위한 그리스도의 중재()는 구약 성경상의 제사장과 대비하여 더 좋은 봉사이며 수많은 제물들에 비할 수 없는 더 좋은 희생제물이 된다. 히브리서에 심판 법정에 관한 사상이 체계적으로 발전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의 중보와 중재에 관하여는 체계화되어 있다. 책의 기록을 검사하는 일 (7:10)은 심판의 한 국면에 불과하다. 다른 주요 국면은 중재직분 (intercession, 딤전2:5) 또는 그리스도의 대언 직분 (요일2;1)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앞에 계시고 거기서 온전히 구원하실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7:25).” 다니엘 7장의 절정은 성도가 나라를 얻는 사건에 있다 (18). 이 나라를 얻는 사건은 은혜의 선물이다. 하늘 법정의 재림전 심판의 복음성이 여기에 나와 있는 것이다. 이 중재와 대언 직분 관점에서 보면 히브리스와 스가랴 3장은 상호 연관되어 있다.

재림전 심판의 우주적 대쟁투가 초점이 되고 있는 스가랴 3장에는 이 대언자-중재자 사상이 잘 나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인 여호수아는 절박한 필요에 직면하였다. 더러운 옷을 입은 연고로 사단이 그를 대적한다 (3:1-3). 이 스가랴의 계시에는 참소자와 변호자의 공방이 있는 하늘 법정이 나와 있다. 여호수아는 불에서 거낸 그슬린 나무같은 존재로 부각되어 있다 (3:2). 여호수아와 유대민족은 포로가 되어 파멸의 경계선에서 구원을 받는 입장이기에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와도 같은 존재였다. 사실상 그들은 포로가 되는 것이 마땅하였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돌아섰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포로가 되게 하셨다 (1:1-2). 이런 배경을 전제로 하고 히브리서가 말하고 있는 배도한 자, 뒤로 물러간 자를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고대 유대민족이나 히브리서의 그리스도인 유대인들은 작은 뿔처럼 반역적이었다. 이 히브리서에서는 범죄하나 백성을 위하여 기록되었고 그들의 필요를 아신 그리스도께서 중보하신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복음이 아닐 수 없다. 사단의 참소를 받은 여호수아를 더러운 죄악의 옷을 입고 있는 여호수아의 절박한 필요를 채워주시고 죄를 제하여 버리고 사단을 반박하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복음이다.

마태복음 22장에는 혼인 예복 검사에서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그 사람은 자기 옷으로 충분히 설 수 있다고 보았다. 자기 삶의 방식에 안주하였던 이 사람은 바깥 어두운데 내어 던져졌다 (22:13). 이 자기의 의로 살아간 사람과는 달리 여호수아는 자기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하나님의 도우심 즉, 그분의 의만을 바랐다. 애굽에서 육적 이스라엘을 건지셨던 분은 영적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구출하실 것이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온전한 믿음만을 가지고 그분의 도움을 바라며 서 있을 뿐이었다. 그리스도의 중보가 성부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게 하는 것에 역점이 있지 않고 사단의 참소에 대답하는 것에 그 역점이 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함이니라” (16:26, 27).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임명에 따라 거기 계셨다.

여호수아와 사자에 관한 스가랴의 이상은 속죄의 큰 날이 마쳐가고 있는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경험에 특별히 강하게 적용된다.” 그래서 스가랴 3장은 재림전 심판의 한 모형이 된다. 사단이 여호수아를 책망할 때 여호와의 사자 (천사, 12장의 미가엘)로 나타나는 그리스도께서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벗기고 말씀하기를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3:3,4)고 하였다. 이것은 구원의 이적이다. 여호수아가 내가 여호와를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셨다(61:10)고 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요컨데, 히브리서가 상정한 대언자-중보자 사상은 이런 성질을 지니고 있다. 스가랴서에서 나온 것 처럼 그리스도께서 심판이 시작되었을 때 당신의 중보를 마치지 않으시고 계속하시고 있다.

남은 백성은 재림전 심판 기간 중 정복하시고 승리하시는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대언과 중보활동을 부각시키고 있는 스가랴서나 히브리서에 관심을 집중하여야 한다. 남은 백성의 초점은 그리스도가 되어야지 그들 자신이 되어서는 안된다.

요한계시록에서 성도들은 이 심판 기간에 창조주되는 그리스도를 경배한다(14:7). Ellen G. White도 그 첫 계시에서 오로지 그 눈을 그리스도에게 고착시킨 자들만이 하늘에 이르는 길에 서 있고 그리스도로부터 눈을 돌린 자들은 아래 세상으로 떨어졌다. 남은 백성은 아담/하와의 타락시 처럼 (3:10,12) 인간의 행위로는 이 필요를 충족시킬 수 없다. 오로지 죽임당한 어린양만이 덮어 가리울 것, ,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제공한다. 누더기 옷을 걸친 탕자에게 가장 필요로 한 옷은 그리스도의 의의 옷이다 (15:22참고).

재림전 심판의 대상에는 성도들이 포함된 것은 전술한 바 있다. 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만이 구원을 받는다 (12;1). 그들은 작은 뿔처럼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큰 말도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과장하지도 않고 성도들을 박해 하지도 않았으며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의 자리에 두는 일이나 진리를 땅에 던지는 일도 하지 않았다.

스가랴는 재림전 심판을 대쟁투적 시각으로 하늘에서 조사심판이 집행되는 과정에서 성도가 원수로부터 공격당하고 있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다니엘에도 성도가 작은 뿔 원수로 부터 지상에서 공격받는 것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스갸랴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조사받는 그들을 위하여 서 계시고, 다니엘에서도 그 집행시에 그들을 위하여 서 계신다 (7).

사단은 그들은 좌절시키기 위하여 그들의 죄를 그들 앞에 제시한다. 그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들을 대적할 기회를 끊임없이 찾고 있다. 심지어 그들의 가장 훌륭하고 가장 가납될 만한 봉사까지라도 그는 타락한 것 처럼 보이게 하고자 애쓴다. 가장 간교하고 가장 잔인한 셀수 없는 계책들을 통하여 그는 그들을 정죄하고자 노력한다. 인간은 이 비난들을 스스로 대항할 수 없다. 그는 죄로 더러워진 옷을 입고 하나님앞에 서서 그의 죄를 고백한다. 그러나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께서는 회개와 믿음으로 자기들의 영혼을 지켜주도록 그분께 바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효과적으로 탄원하신다. 그는 그들을 변호하시고, 갈바리의 강한 논증에 의하여 그들의 비난자를 물리치신다.”

 

b. 재림전 심판은 갈바리 십자가에 에워싸여 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함으로 꼭 심판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주께서는 자기 백성을 아신다 (딤후2:9).” 그러나 심판은 천상 천하의 모든 피조물을 위하여 필요하다. 구속받은 자 멸망당하는 자와 다같이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알아야 한다 (15:3참고).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의 대쟁투의 이슈가 하나님의 공의와 관련되어 있으므로 이 심판이 필요한 것이다. 재림전 심판에서 온 우주는 인간의 선악간의 행위를 기록한 것을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주목하고 있는 사항은 십자가 상에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신 구원하신 일을 사람들이 받아들이거나 배척하는 일이다. 그들이 언약의 구세주께서 하시는 대속적 심판에 어떤 관계를 맺느냐가 결정적인 처사가 되는 것이다 (16:26-27; 17:3참고).

갈바리 십자가와 그 결과가 되는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계속하시고 계시는 중보를 분리하지 않고 연계하여 이해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십자가 사건이 개인의 운명을 결정짓는 그리스도의 중심의 사건이지만, 재림전 심판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중심의 사건이 된다. 요한계시록이 희생제물과 제사장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재림전 심판을 심판받는 인간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은 소망스럽지 못하다. 심판이 인간이 이룬 일에나 관심을 쏟는 것이라면 성도들이 1,000년동안 왕노릇하는 (20:6)기간에 악한 일에 전념하는 것도 포함하는 것을 상정하게 되어 천년기란 매우 위태로운 기간이 될 것이다. 이 재림 심판은 자기를 거절한 개개인에 대하여 참으시며 기다리시는 그리스도에게 연계시켜 이해하는 것이 인간 중심의 심판을 초극하는 것이 된다. 타락한 인간의 품성보다 그리스도의 품성과 그분의 하시는 일을 바라보는 것에 심판의 요체가 있다 하겠다. 따라서 심판은 각 개인이 한 일이 무엇이며 하지 않은 일이 무엇이냐가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들이 십자가 상에서 자기를 대신하여 심판 받으실 때 자기를 위하여 하신 일을 수용하느냐 여부가 더 결정적이 된다. 그것을 수용하는 자는 곧 그리스도를 위하여 행하는 것(25:31-46)으로 연계되기 때문이다.

또한 심판에서 인간 옹호도 있지만 하나님을 옹호하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 심판이 인간 구원 차원을 넘어서 그리스도와 사단사이의 대쟁투 차원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심판은 그리스도의 갈바리 사건에 토대를 두고 있다.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신 분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다. 재림전 심판 사건은 십자가 상에서 이루신 구속사의 전개과정에 속한다. 그리스도께서 갈바리 십자가에서 하나니의 백성인 성도들을 구원하시고 사단과 그들의 원수를 파멸시키셨다. 재림전 심판은 우리를 갈바리의 십자가로 향하게 하며 또한 위에 계신 그리스도로 향하게 한다. 우리가 죄 용서를 받고 죄를 떠났다 해도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바라 보아야 변화되어 하늘에서 살기에 적합하게 된다 (고후3:17-18). “저들이 만일 저들 바로 앞에서 저들을 그 도성으로 인도하는 예수님께로 저희 눈을 고정시켰다면 저들은 안전하였을 것이다”. 예수께서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다(14:6). 그분만이 탕자에게 새옷을 입히실 수 있고 (15:22), 잃은 양의 길을 우리안으로 인도하실 수 있다 (15:5). 재림전 심판은 갈바리로 에워 쌓여 있으며 그 안에는 그리스도의 중보가 있다. 재림전 심판 다음에는 아마겟돈이 있다.

갈바리 십자가, 하늘 성소에서의 중보, 및 아마겟돈 이 세 사건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일관하여 자기 백성을 위하여 일하시고 그들의 원수를 대적하신다. 심판에서 작은 뿔을 조사받고 아마겟돈에서 심판 선언을 받는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을 구속사과정에서 전개하신 그 일부가 재림전 심판이기에 심판할 때가 이르렀다는 선언이 영원한 복음이 된다. 이 심판의 때에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께서는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7:25). 그러나 사단은 이 하늘성소에서의 그리스도의 봉사를 제쳐놓고 지상의 작은 뿔의 사제직 활동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하고 인류의 유일한 대속자로부터 인간사제에게 지향하도록 착동한다.

 

맺는 말

하늘성소의 실재성은 묵시문학연구의 관건이 된다. 히브리서에서도 이를 상정하고 있다. 히브리서에서 하늘 성소를 은유적으로 이해하는 것 보다는 기능론적 실재론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 하늘성소의 실재성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오고 있다. 히브리서와 요한계시록에는 하늘 성소에서의 예수그리스도의 제사장 및 대제사장으로서의 활동이 나와있다. 예수그리스도의 하늘 성소의 할동은 갈바리의 십자가 사건의 연속선상에 놓여있다. 특히 요한계시록에서 희생제물이 되시면서도 제사장이 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을 강조하고 있는 점은 갈바리 십자가에서의 구속을 위한 희생사건과 하늘 성소에서의 제사장으로서의 활동을 긴밀하게 연계시켜야 될 당위성을 엿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갈바리도 하늘 성소도 모두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히브리서에는 다니엘서의 심판법정이 전제되고 있는 것이 짓밟는다는 하늘 성소에서의 예수그리스도의 활동을 다니엘 7-8장의 심판 메시지와 연계시키고 스가랴 3장의 대제사장 여호수아에 대한 참조자와 변호자의 공방을 이 심판 사건에 조감시킬 때 재림전 심판사상은 성서 종말론의 핵심으로 부각된다. 이 재림전 심판대상은 소위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한 사람들이나 하늘 성소를 훼방하는 세력인 작은 뿔인 영적 바벨론이 된다. 그리고 이 재림전 심판의 때에 관하여는 요한계시록이 고대 절기인 대속죄일 행사의 연례절기와 성소봉사의 표상성과 한 때, 두 때, 반 때와 2300주야를 말하고 있는 다니엘서를 수렴하고 연속 발전시키고 있어 일치성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 하늘 성소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봉사활동인 재림전 심판은 그 주체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이시란 점과 십자가 희생을 적용시키는 대언자로서 하시는 일이란 점에서 복음적 메시지가 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되고 이 복음적 심판 기별이 요한계시록 14장의 영원한 복음에 나타난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에 투사되어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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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