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

 

상업주의 세상에는 짝퉁이 범람한다. 이는 종교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신앙의 세계에 여러 부류의 지도자들이 등장하여 양들의 마음을 노략질한다. 특히 옛 부터 예언적 카리스마를 지닌 것처럼 행세하는 자들이 등장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을 해 왔다. 이런 일은 구약성경 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구약성경에 나오는 예언자들에 관한 기사들을 살펴보면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구별하는 일은 쉽지 않다. 거짓 예언자들이 참 예언자인 것처럼 행세하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들 중 상당수는 권력을 잡고 있어서 옳고 그름, 착함과 악함을 재단하는 위치에 있기도 하여 적어도 자기 시대에는 백성들이나 핵심 세력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런 점에 비추어 Gotffried Quell (1896-1976)이 그 구별 시도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까지 한 극단적인 논평을 하였다. 이 논평을 문자 그대로 따를 수 없지만 당대의 시대상을 꿰뚫어 본 것으로 보이기까지 한다(Wahre und falsche Propheten, 1952).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의 판별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판별하기 어려운 이유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히브리어 원문 성경은 거짓 예언자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 한글 성경에 나오는 거짓 예언자라는 표현은 70인역에 나오는 ‘pseudoprophetes (거짓 선지자)’를 그대로 번역한 단어이다. 13:2에 나오는 거짓 선지자가 그 대표적 사례가 된다(기타 렘 2:8; 23:18 등 참조). 13:2 한글 번역에서 거짓을 작은 활자로 표기한 것은 원문에 없는 표현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여기에는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6:13)에 나오는 것처럼 서술 문맥상 거짓 선지자로 유추되는 경우도 포함된다.

 

2. 예언자를 뜻하는 nabi’란 단어가 참 예언자는 물론이고, 거짓 예언자에게 사용되고 있다. 더 나아가서는 바알신의 선지자에게도 이 말이 사용되고 있다(왕상 18:19).

 

3. 거짓 선지자들도 참 선지자처럼 똑 같은 메신저 양식(messenger form)을 사용하였다.

이 메신저 양식에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Thus says Yahw),” “여호와의 말씀이라(ne’um Yahweh)” (23:31)이 있다. 짝퉁 선지자의 참칭은 백성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다. 짝퉁의 포장지가 진짜를 뺨칠 만큼 되어 있어 백성들은 쉽게 속아 넘어간다.

4. 거짓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여 예언하였다.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14:14). 이것은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충돌에서 잘 나타나 있다(27-28).

 

5. 하나님께서는 참 예언자뿐만 아니라 신앙의 시험자 역할을 위하여 거짓 선지자의 활동도 허용하셨다(14:9). 벧엘의 한 늙은 선지자가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우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왕상 13:18). 이로 인하여 참 예언자가 거짓 선지자에게 속임을 당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기까지 하였다.

이들 거짓 선지자들은 권력자 귀에 솔깃한 예언을 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는 철로 뿔들을 만들어 가지고 말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 하셨다 하고 모든 선지자도 그와 같이 예언하여 이르기를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하더라”(왕상 22:11-12).

 

구약성경에 나타난 거짓 선지자들의 실상

 

바알신이나 다른 신의 이름으로 예언하였다(2:8; 23:13; 18:20).

우상숭배를 하게 하는 메시지를 전하였다(13:1-5; 23:27).

거짓을 예언하고 거짓을 행하였다(8:10; 23:26, 32; 27:9-16).

예언의 증험이나 성취가 없다(18:22; 28:9; 33:33).

백성들의 죄를 책망하고 회개시키는 일을 촉구하지 않았다(23:1, 21). 백성들의 중재자들로서의 모습이 안 보인다.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불의에 큰 부담을 느끼지도 못하고 탄핵하는 메시지를 발하지 않았다.

위기를 당하여 참 예언자들이 악에 대하여 민감하여 백성들을 괴롭게 하고 사회를 불안케 며 백성들의 죄악상을 들추어냈다 (7:9-15)한 것과는 달리 거짓 예언자들은 사실상 샬롬(shalom)이 없는 상황에서 샬롬을 말하였다(3:12; 6:14; 8:11; 28:8-9; 13:10).

백성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전하였다(30:9-10).

참 예언자의 말은 자기들의 가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의 말을 전하였다(23:16, 26, 28; 18:20). 여호와의 회의에 참석하지도 않고 자기의 말을 하였고(23:18-22), 자기의 허탄한 꿈을 말하고, 거짓 복술을 행하였다(23:25-32).

도덕적으로 타락하였다. 돈 때문에 부패하였고(3:5, 11-12; 13:19), 간음을 행하였으며(23:14), 경솔하고 간사하였다(3:4).

 

오늘날의 참 예언자 비판

참 예언자들을 비평하는 일은 옛날 거짓 예언자들이나,. 당대 권력층만은 아니다. 오늘날도 과학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다. 아브라함 헤셸은 예언자를 뜻하는 nabi는 미친 듯이 게거품을 물고 큰 소리로 말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 본디의 뜻은 광기,’ ‘정신이상이었다는 해석을 소개한다(예언자들 569). 심지어는 J. Pedersen나비라는 말을 두고 무아경에서 지껄여대는 횡설수설에서 나왔다고도 한다(Israel, III-IV). 정신병리학적 증상인 노이로제 또는 정신분열적 퇴행의 시각에서 예언자의 심리를 분석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털옷을 입고 가죽 띠를 맨 엘리야를 비정상적으로 폄하하거나, 호세아가 성 강박관념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고 하거나, 에스겔을 두고 편집증으로 보거나, 이사야를 알몸과 맨발로 활동한 비정상적인 행태로 보거나(20:3-4), 예레미야를 이중 자아로 분열되었다고 신경증환자나 간질환자로 폄하하는 논란들이 있어 왔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엘렌 화잇의 초자연적 계시 현상에 수반되는 현상을 두고 간질병으로 비평하는 무리들이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런 모든 비평들은 예언자의 시대의 경험과 태도를 현대인적 표준에 맞추어 재단하는 짓에 불과하다.

 

짝퉁 놋 방패

르호보암은 나라가 견고하고 세력이 강하매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니 온 이스라엘이 본받은지라 2 저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므로 르호보암 왕 오년에 애굽 왕 시삭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오니”(대하 12:1-2). “애굽 왕 시삭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치고 여호와의 전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몰수히 빼앗고 솔로몬의 만든 금방패도 빼앗은지라 10 르호보암 왕이 그 대신에 놋으로 방패를 만들어 궁문을 지키는 시위대 장관들의 손에 맡기매 11 왕이 여호와의 전에 들어갈 때마다 시위하는 자가 그 방패를 들고 갔다가 시위소로 도로 가져갔더라 12 르호보암이 스스로 겸비하였고 유다에 선한 일도 있으므로 여호와께서 노를 돌이키사 다 멸하지 아니하셨더라”(대하 12:9-12).

르호보암은 패배라는 재난으로 겸비하기는 하였지만, 금 방패 같지는 못하였다. 그는 놋 방패에 만족하며 예전의 정금 같은 믿음의 방패를 추구하지 않았다. 짝퉁에 만족하는 경험은 남은 생애를 예전 같은 결정적인 전환점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르치고자 노력하신 교훈을 잊어버리고 자기 나라에 형벌을 초래한 죄악에 다시 빠져 들어갔다. 짝퉁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자살골을 가져온다. 마찬가지로 짝퉁 선지자를 따르는 것은 그들의 가르참에 따르는 것이 되고 급기야는 도덕적, 윤리적 파탄으로 이어져 바벨론의 멸망으로 빨려들어가는 길이 된다.

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