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서 잠간 쉬라

-6:30-32-

안금영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과 많은 시간을 천연계에서 지내셨다. 그들의 활동 그 자체가 소풍이었으며 코이노니아 교제였다. 천연계에서 이끌어낸 자료들이 그 분의 메시지에 넘쳐난다. 아름다운 갈릴리 호수를 넘나드는 모습은 이동식 수업이고 수학여행처럼 보이기도 한다.

큰일을 시작하기 직전 고요한 정적의 시간을 갖는 일이 종종 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향한 장도에 오르기 전에 시내산 기슭에 닻을 내리고 1년 정도 체류하면서 애굽에서의 혹독한 노역으로 찌들어진 육체와 심령을 새롭게 하여야 했다. 여기서 그들은 하나님을 만나 결혼하였디. 하나님을 신랑으로 모시며 사는 법을 배워야 했다.

 

I. 때와 장소

A. - AD 30년 유월절 수 일전, 3월 말 또는 4월 초, 풀밭에 앉았다는 점에 비추어 봄의 신록이 우거진 때로 보인다. 예수께서 지상의 3년 반 동안 봉사기간 동안 이 유월절에만 예루살렘에서 지키지 않았다. 신록이 짙어가는 아름다운 계절이었다. 침례 요한이 죽임을 당하였다. 정치적 환경은 긴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되어 가고 있었다. 헤롯을 포함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역시 혁명을 획책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그를 죽이고자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5천명을 먹인 행복하였던 갈릴리 사업도 파국으로 끝나가는 시기였다. 이에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은 원수들의 추적을 피하여야 했다.

B. 장소한적한 곳(eremos), 즉 광야였다. 갈릴리 호수 북편, 요단강이 갈릴리로 흘러 들어가는 지점에서 동편으로 벳세다 근처(El-Batitha 들판), 신록의 아름다움이 펼쳐있는 한적한 곳이었다. 여기는 헤롯 빌립의 영토에 속한 곳이었다. 요한복음 (6:3)에서는 디베랴 호수 건너편 이라고 하고 있다. 아마도 야산이나 언덕 정도를 의미할 것이다. 공관복음(14:13; 6:32; 9:12)에서는 한적한 곳으로 나온다. 도시의 번잡함을 피하고 교통의 혼잡함이 없는 격리된 아늑한, 인가가 없는 곳으로 보인다. 그리스도와 제자들에게 평화로움과 즐거운 느낌을 주기에 적합한 환경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분노와 방해 소리와 비판의 공격소리가 없는 곳이다.

예수의 일하신 모습은 도시로 갔다가 한적한 곳(eremos)으로 철수하는 이중 구조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일하다가 군중들을 떠나 한적한 곳으로 철수 하시는 일이 반복된 것은 하늘의 능력으로 재충전 받기 위하여서다. 내영혼의 한적한 곳은 어디인가?

II. 벳세다 근처 한적한 곳으로 가신 목적--Retreat 목적

A. 쉼과 교제

1. -- “와서 잠간 쉬어라.”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분주한 봉사의 긴장과 수고에서 벗어나 쉼이 필요하였다. 그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사람들을 위해서 활동하였으므로 심신의 힘은 소진되었다. 이제는 쉬어야 하였다. 쉬는 것이 그들의 의무이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밤과 아침을 주셨다. 밤에는 쉬고 잠을 잔다. 낮엔 일하고 활동한다. 창조주간의 리듬은 편히 쉬는 밤과 일하는 낮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힘써 일한 후엔 안식을 하는 제도를 세우셨다. 쉼이 없는 노동은 곧 자기 파멸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그리스도인 신앙생활의 리듬도 이중구조로 구성되어 있어야 한다. 이는 먼저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부터 하나님께 나아가며, 그 다음 하나님 앞에서부터 사람들에게로 나아가는 시계추의 진자운동과도 같다.

잘 쉬는 것이 건강의 길이며 공부 잘하는 길이고 사업에 성공하는 길이다. 안식일 말고도 또 특별한 쉬는 축제의 날들이 있다.

병들면 공부도 못하고, 사업도 못한다. 흔히 오락이나 노는 것을 두고 영어로 recreation이라고 말한다. 이는 단순한 놀이가 아닌 재창조를 뜻한다. 재림교회에서는 이 단어를 休養으로 번역한다. 휴양은 편안히 쉬면서 심신을 보양한다는 뜻이다. 휴양의 목적은 하늘의 생기를 받아 생명력을 활성화시키는데 있다.

분주하게 일만하는 것은 위험하다. 개인의 경건성이 소홀히 되고 정신과 심령과 육체의 능력이 지나친 부담을 받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희생적 봉사를 하여야 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분주하게 일하므로 말미암아 사단이 인간의 약점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훼손시키지 못하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workaholic 빠져 burn-out 되어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안식일의 쉼은 하나님의 축복의 초청이다. 쉬는 것은 십계명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녹슬어서 없어지는 것보다는 달아져서 없어지겠다는 선구자들의 모토는 멋져 보이지만 창조의 리듬인 쉼을 무시한 문제성을 내포하고 있다.

소음이 온 세상을 채우고 있는 시대이다. 너무 요란한 소리에 파묻힌 세상에서 나올 필요가 있다. Pascal우리의 감각은 어떤 극도의 상태를 용인하지 못한다. 너무 시끄러운 소음이 우리를 혼란케 한다. 너무 휘황찬란한 빛이 우리를 어지럽게 한다. 너무 가까이에 있거나, 너무 멀리서 있는 것은 우리의 시야에 장애요인이 된다. 너무 장황함도 너무 간결함도 우리의 논증을 약화시킨다. 너무 쾌락을 탐닉 하는 일은 고통만을 가중시킬 뿐이다고 하였다. 오늘도 황금 같은 메시지이다. 일상적인 환경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마련하신 초장에 들어가 채움을 받아야 한다.

오늘날은 암이 우리의 화두가 되어 있다. 미국에서 1분에 한 사람이 암 환자가 되어 가고 있다는 보고가 있다. 과학자들은 암에 걸리는 원인을 3 가지로 압축하여 설명하고 있다. (1) 부적당한 먹을거리로 1/3이 암환자가 된다. (2) 유해 화학물질 환경 때문에 1/3이 암에 걸리고 있다. (3) 나머지 1/3은 스트레스 때문에 암에 걸리고 있다. 이런 3대 이유로 면역 체계가 약화되어 암 세포를 패퇴시키지 못하고 있다. 전쟁이란 일련의 공격과 반격으로 진행된다. 암과의 전쟁도 마찬가지이다. 면역체계가 암세포를 패퇴시키자면 음식물 개혁, 창조의 세계로 삶의 호나경을 전환시키면서 휴양하는 일이 필요하다. 천연계 환경 속으로 들어가 안식하는 일이 2/3 문제 해결책이 된다.

 

34%의 노인들이 불면증에 빠진다는 보고가 있다. 그래서 눈은 떠 있어도 피곤 증에 고통을 당한다. 놀라운 것은 피곤하기 때문에 잠을 더 설친다는 것이다. 불면증에는 여러 가지 원인(죄책감, 공포, 근심, 쓰라림, 억울한 일 당한 것 등)이 있다.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태양 볕이 내리 비치는 야외로 나가자. 인체 안에서 멜라토닌이라는 호르몬이 줄어들거나 결핍될 때 불면증으로 이어진다. 이 멜라토닌은 천연 수면제로 밝혀졌다. 그래서 제약회사들이 이 멜라토닌을 만들어 팔기 시작하였다. 멜라토닌을 생성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은 찬란한 태양이 비치는 천연계로 나와 활동하는데 있다. 장사꾼들의 농간에 빠져 무슨 강도처럼 온 얼굴을 마스크로 가린 복면의 여성들이 산야를 누비고 있다. 다 벗어 제키고 밖으로 나가자. 그리고 운동하자. 운동할 때 멜라토닌이 증가한다. 식물성 식품에 멜라토닌이 들어 있다. 휴양은 천연계에서 한다. 미디안의 모세, 유대 광야에서의 다윗, 그릿 시내가의 엘리야처럼 천연계에서 지내는 체험이 필요하였다.

한적한 천연계는 하나님이 마련하신 동영상 예술작품이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작품으로부터 기쁨과 즐거움을 찾아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라. 신앙생활을 고통과 슬픔이나 우울한 것으로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우울케 하는 현장을 떠나 아름다움과 멋이 감도는 하나님의 솜씨를 감사하면서 기뻐하는 법을 배우라. 흐르는 강물을 보면서 하나님의 치유의 은혜를 받자.

침묵의 소리를 듣자.

2. 교제

(1) 코이노니아--교회의 본질은 성도의 교제(koinonia)에 있다. 교회는 믿음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 소망의 공동체이다. 성도들 사이에 교제가 원만할 때 교회는 부흥하고 성장한다. 거짓과 위선을 버리고 진실과 진실, 진리와 진리가 교류하는 성도의 교제의 시간은 교회 연합의 기조가 된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이 된다(딤전 3:15). 교회가 진실과 진리를 떠 받들고 있을 때 영혼들이 그 우산아래 모여든다.
가장 매력적인 진리의 교제가 이어지는 교회는 지친 길손들에게 거친 세파에서 안식처가 된다.

제자운동의 기본은 먼저 교제에 있다. 전도는 교회의 사명이지만 교제가 약화된 사명 촉구는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 매력적인 교제의 시간이 넘쳐 나는 곳에는 사람들이 몰려든다.

신자들 사이에 서운한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한 마디 자극적인 말을 듣고 교회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돌아서는 일이 비일비재 한다.

고독과 격리는 질병과 고통을 일으키게 하는 사단이 주는 불행한 라이프스타일이다. 고독과 격리는 음주 흡연보다 더 질병감염의 위험을 높인다. 특히 심장 질환을 3배나 더 일으키는 장본인이다. 절망적인 사람에게는 좋은 친구가 필요하다. 고독한 영혼들을 이해하고 동정하며 사랑을 나누는 교제 길을 트는 일은 선하다. 이것이 선의 길이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가!(133:1)-이는 시인의 감동이며 감격이다. 형제가 연합하여 지내는 그 자체가 이다. 도덕의 완성을 선이라고 한다. 개인적 인격 중심의 선을 넘어선 신앙공동체의 선을 추구하여야 한다.

피곤한 자 곧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잊어버린) 자를 그 벗이 불쌍히 여길 것이어늘(친구의 헌신이 필요하다)”(6:14)

(2) 침례 요한의 제자들을 위로하고 지도하는 일--“이제 그들의 선생이 죽자 그들의 큰 슬픔을 위로받고 장래의 사업에 대한 지도를 받고자 그들은 예수께 나와 그분의 사업에 협력했다. 그들에게도 또한 구주와 사귈 조용한 한때가 필요하였던 것이다.”(DA 361).

(3) 성공과 실패의 나눔-이 교제에는 갈릴리 제3차 순회 전도회 보고와 함께 제자들의 성공과 실패의 나눔이 수반된 교제의 시간대였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성공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실패의 쓰라린 잔을 마신 분들도 있다. 성공한 분들의 체험을 들으면서 힘을 얻어야 하고, 실패한 사람의 눈물을 위로하면서 그 길을 걷지 말아야 할 교훈도 얻는다.

전도 여행에서 돌아온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DA 359).

a. 성공, 승리한 체험--“저희의 활동에 성공을 거둔 제자들은 자신을 의지하고 영적 교만을 품음으로 사단의 시험에 빠질 위험이 있었다. 그들 앞에는 큰 사업이 있었으므로 무엇보다 도 먼저 그들은 그들의 능력이 그들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배워야 하였다. ”(DA 360).

b. 반성과 지도 받는 일 필요--제자들이 그리스도를 떠나서 일하면서 투쟁과 시련의 고통과 기쁨을 체험한 일에 대한 보고와 반대와 어려움을 당한 때의 극복 방향을 지도 받는 일, 실패한 체험과 과오를 범한 것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였다.

마음놓고 말하는 직설법적 대화의 시간과 환경이 필요하다. 주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마음을 터놓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효과적인 전도를 위하여 직설법적으로 가르치셨다. 원수가 책잡고자 따라붙는 곳에서는 비유와 상징적 언어를 사용하셨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는 시간대이다. 제자들도 마음 터놓고 이야기하는 시간대와 장소가 필요하다.

 

B. 새언약적 체험, 그리스도와의 거룩한 영적 교류, 신비스러운 성스러움 체험,

쉬어라(anaphausasthe)”--이 말은 육체적 쉼도 되지만 영적으로 쉬면서 힘을 얻는 것을 뜻한다. 분주하게 사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이 단어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힘을 공급 받으라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 하나님과의 내밀한 교류의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영적인 힘과 활력을 부어주실 시간을 드리지 않고 살아간다.

30:15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

성공에 따른 교만의 유혹에서 보호 받고, 새언약적 결심을 하며 개인적으로 조용한 시간을 얻어 구주로부터 말씀하시는 소리를 들어 그들은 이제 생명의 떡을 먹을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예수와 더불어 사귀고 장래의 사업에 대한 교훈을 받을 수 있는 한적한 곳에 갈 필요가 있었다.”(DA 360).

우리는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기 위하여 열심히 활동하는 동시에 명상과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할 시간을 내지 않으면 안 된다. 많은 기도를 함으로써 성취되고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하여 성결함을 받은 사업만이 결국에는 선을 위해 효력이 있었다는 것이 판명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이런 경건의 체험이 필요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부르짖음은 무한하신 긍휼을 가지신 하나님 아버지께 상달되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인성이 신성과 인성을 연결시킬 하늘의 전류로 충전되기까지 하나님의 보좌를 향하여 탄원하셨다. 예수께서는 끊임없는 교통을 통하여 하나님에게서 생명을 받으셨는데 이는 그가 세상에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예수의 이 경험은 우리의 경험이 되어야 한다.”(DA 363).

우리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11:28) 안식의 초청을 하시고 있다. 오늘 우리는 안식이 실종된 시대에 살고 있다. 어린아이가 엄마를 잃었을 때 그 불안과 당황해 하는 모습을 회상해 보라. 어머니 품을 찾기까지 쉼이 없는 어린아이처럼 인간은 창조주의 품에 안기기까지 참된 안식이 없다. 어거스틴은 내가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기까지는 참 안식이 없다고 고백하였다.

시편 23:1, 2 나님은 인간이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시편 23편 시작하는 메시지는 한 평생의 행복을 약속한 구절이다. 양의 생명은 목자에게 있다. 돈이 목자도 아니고 권력도 목자가 아니다. 나 자신도 목자가 아니다. 양을 보호하시는 하나님, 차고 넘치는 축복의 초장으로 인도하시는 목자가 계신다.

잠간 와서 쉬라는 초청에는 미래의 다가오는 위기를 대비하는 시간대였다. 갈릴리 선교 활동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 예수께서 가시는 길에는 점점 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제사장들과 랍비들은 예수를 죽일 계획을 꾸미고 있었고 정탐꾼들은 예수의 발걸음을 따라다녔으며, 각 방면으로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가 증가하여 가고 있었다. 갈릴리 온 지방에 사도들이 복음을 전한다는 소식이 헤롯에게 들어가서 예수와 그 사업에 대한 헤롯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DA 360).

헤롯은 자기를 왕좌에서 끌어내려서 유대 국가에서 로마의 속박을 끊어버릴 목적으로 혁명이 비밀리에 진행되지나 않을까 하고 항상 두려워 하였다. 백성들 사이에는 불만과 폭동의 정신이 충만해 있었다. 갈릴리에서의 그리스도의 공적 활동이 오래 계속될 수 없으리라는 것은 분명하였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고난의 사건들이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혼잡한 군중에서 떨어져 있기를 원하셨다.”(DA 360-361).

와서 잠간 쉬라는 말씀은 미래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를 내다보는 눈을 기르는 시간대이다. 삶은 현재라는 시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 현재, 및 미래로 구성된다. 잠간 와서 쉬라는 말씀은 희망의 미래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지 준비시키는 곳, 미래적 삶의 영광을 바라면서 새로운 계획, 청사진을 펼쳐서 걸어가야 될 길을 확인하고 결심하는 새언약의 거룩한 시간대로의 초청의 말씀이다.

 

와서 잠간 쉬라는 말씀은 아름다운 하나님 동영상 품속에서 眞善美를 느끼며 감격하면서 더 나아가서는 새 언약에 이르는 거룩한 안식의 체험을 하라는 초청의 말씀이 된다. 이 진선미는 을 추구하야야 한다.경이 우리에게 추구하도록 한 궁극적인 교훈은 거룩함의 체험이다. 독일의 Rudolf OttosDas Heilige(The Idea of the Holy)에서 거룩함을 잘 풀어 전하고 있다. 신앙의 중심에는 누우메나 되는 하나님의 성스러움을 체험하는 것이 담겨 있다. 나와 하나님이 일체가 되어 하나님의 임재 내지 하나님의 오심을 내 안에서 체험하는 길이 곧 새언약을 체결하는 것이 된다. 재림교회 명칭에 나오는 안식이 하나님의 임재와 결부되어 있는 머은 여러가지를 시사하고 있다. Advent는 하나님의 임재나 현존 그리고 하나님의 오심을 뜻하고 있다. Advent는 단순히 재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이루어 지는 안식은 하나님의 임재의 체험으로 이루어 진다.

히브리서 3-4장에는 고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십계명이 담겨져 있는 언약궤를 앞세우고 요단강을 마른 땅으로 건넌 이스라엘의 역사는 새 역사의 장엄한 시작이 되었다. 그러나 그 초심을 잃고 강팍한 마음에 빠져 살아간 까닭에 그들은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법궤란 하나님의 법이 담겨 있어서 법궤이다. 그 법궤 안에 있는 법은 공의와 사랑의 화체이다.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는 때에 언약궤가 된다. 새언약의 체험을 할 때 언약궤가 되고 증거궤가 된다. 안식일을 그토록 철저하게 지키고자 안간힘을 썼던 유대민족이 안식에 이르지 못하였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시고 거룩한 언약의 체험을 갖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십계명의 내용이 내 삶에 그대로 구현되는 모습을 보여줄 때 증거궤가 된다. 비록 가난하다해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시는 진실한 부모를 보는 자녀들은 그 부모님의 가치관 감격하고 부모가 섬기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언약궤의 가족 우산 아래 들어 온다. 링컨이 받은 유산은 성경과 어머니의 신앙이었다. 하나님 안에서 참 안식의 체험은 실존적인 구원의 체험이다. 새언약의 놀라운 체험이다. 천연계 하나님의 품속에서 창조주와 구속주 되시는 우리 주님이 주시는 안식을 체험하자. 이런 체험을 하는 신자는 절대적 안식, 영원한 안식에 들어간다.

진선미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이 사는 길이다. 이것은 이상구 박사가 암 치유 길이라고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본 본문에는 이 진선미가 나온다. 하나님의 동영상 아름다운 품에 파묻혀서 에서 진실과 진실이 교류하는 쉼과 교제, 이웃을 보살피고 그들과 정분을 나누는 선의 길이 곧 진선미의 길인 것이다. 진선미는 그 자체로 끝나서는 안 된다. 거룩함()을 목표로 하여 그것을 추구하여야 한다. 하나님과의 새언약적인 교제는 거룩함의 체험이다. 진선미에 토대를 두고 그 것을 거룩함()으로 이어 나가야 한다. 진선미성 - 이 모든 것이 뭉뚱그려진 그리스도의 새언약적 안식의 초청에 응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 축복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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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