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25

세상에는 선생이 많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에 대하여 다소 냉소적으로 선생은 많으나 스승은 없다고 한다. 선생과 스승이란 말 사이에 하늘과 땅 만큼이나 의미의 차이를 지니고 있는지 의문이 없지 않으나 확실히 이 시대는 선생의 과잉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정규적으로 초등학교 선생, 중학교선생, 고등학교선생, 대학교선생이 있고, 비정규적으로 과외 선생이 온 세상에 들끓고 있는가 하면 피아노등 악기선생이 있다. 그런가 하면 상대방을 선생으로 호칭하기도 하고 있다. 여하튼 이 시대는 지식의 폭발시대이기에 각분야별 선생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는 시대다.

 

새학기는 학생들이 각급 학교의 선생을 찾아가는 철이 된다. 그러나 사실상은 학생들이 선생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학교를 찾아간다. 학생이 선생을 찾아간다는 것은 까마득한 옛날이야기가 되었다고나 할까? 학생들이 선생을 찾아간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컴퓨터 조작으로 학교가 배정되고 어느 누군가의 조작으로 반이 배정되고 이렇게 하여 만나는 대상이 선생이 된 교육구조에서 6년 혹은 3, 그리고 3년을 지나 이제 자기 선택으로 대학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자기가 지망하는 전공분야에 누가 선생으로 있는지, 그리고 그 선생은 어느 정도 자격을 지녔으며 일생의 운명을 좌우할 최고학부의 적정수준의 선생이 있는지 여부를 가릴 것없이 자기 실력에 따라 대학과 전공을 선택하였을 뿐이다. 오늘날 거대한 조직체의 하나의 도구에 불과한 존재가 바로 선생이다.

 

이렇게 선생이란 존재가 거대한 조직의 부품이나 일회용 반창고로 전락했다 해도 그 선생의 존재는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좋은 선생을 만나며 인생일대의 행복이나 잘못된 선생을 만나는 것은 최대의 불행한 것 중의 하나이다. 나폴레옹과 같은 사람은 초등학교 선생 때문에 그러한 인간으로 꼴지어졌다고도 한다. 오늘 나는 특이한 선생을 소개하고 싶다. 그것은 몽학선생이다.

몽학선생 - 한국어 사전에서 蒙學(몽학)”어린아이의 공부라고 하고 있고 몽학훈장은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훈장으로 풀이하고 있다.

영원한 진리를 말하고 있는 책중의 책 -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는 비유가 많이 나와있다. 영원한 진리를 직설적으로 설명하는 것 보다 일상 생활에서 맞부닥치는 여러 가지 사건이나 사물에 빗대에 설명하는 것이 비유이다. 예수의 교훈 중 상당부분이 이 비유로 되어 있다. 바울도 여러 비유로 진리의 교훈을 주고 있다. 그중에 하나가 오늘 읽는 성경절에 나오는 몽학선생도 비유적인 표현이다. 이 몽학선생을 영어로 school master(학교 선생, KJV) custodian(후견인)으로 번역하고 있다. 또는 trainer(훈련자), 헬라어로는 παιδαγωγος로 이는 παιδος철모르는 어린아이αγωγος 인도자의 합성어로 παιδαγωγος어린아이를 인도하는 사람을 뜻한다. 영어의 pedagogy(교육학), pedagogue(교육자)도 이 말에 연원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고대 사회에서의 후견인, 몽학선생

우리나라 옛날 양반 가정에도 이 몽학선생이 있었다. 고대 헬라문화권에서도 이 제도가 있었다. 어린아이는 말썽 꾸러기이다. 얌전하게 지내는 어린아이가 있다면 그것은 비정상적이다. 아브라함 링컨도 교회에 나가서 어린아이가 말썽을 피우자 밖으로 대리고 나와 아이에게 벌을 주었다고 한다. 그런 나이에는 자연도 미워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어린아이가 나무든지 꽃이든지 가리지 않고 마구꺽기 때문이다.

고대 헬라 문화권에서는 몽학선생이 믿은 어린아이들의 연령을 6세부터 16세까지 였다. 16세도 위험한 시기여서 그 나이에도 몽학선생을 둔 것이다.

이 몽학선생은 어린아이가 가는 곳은 어느곳이나 따라다니면서 그의 행동을 감시하고 학교에 가는 길이나 집에 돌아오는때에 그 어린아이를 인도할 책임을 진다. 귀족층이나 부유층은 어린아이를 잘 양육시켜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10여넌간을 이 몽학선생의 지도하에 두었다. 고대 한국 사회에서 몽학선생이 하는 일은 천자문과 의법을 가르쳤다. 어린아이의 언행전부를 모두 간섭하여 가르친다. 아침에 눈뜨면서 밤에 잠자리에 들기까지의 일을 다 가르친다. 아침에는 부모님께 문안드리고 절을 하게 한다. 어린때 부터 이일이 몸에 베게 한다. 고대 헬라와 로마의 몽학선생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가 어린아이가 학교를 오가는 일과 출입시 동행하면서 그 아이의 모든 활동을 다 체크하고 지도한다. 16세가 되어서야 이 후견인이 없이 혼자 다닐수 있게 된다. 사실상 세상은 안전한 곳이 별로 없다. 유혹하는 곳은 마낳고 위험한 곳도 많다. 개같은 동물도 있다. 이러한 곳에 어린아이 혼자다닌다 하는 것은 위험하다. 지금도 미국에서는 어린아이를 방치하면 문제 삼고 있다. 오늘날 유괴범이 많고 불량만화가 득실거리고 또한 자동차 홍수시대이므로 더욱도 옛날못지않게 이 후견인이 필요하다고 보겠다. 분별력이 없거나 아직 발달치 못한 어린아이에게 후견인이 어떻하느냐여하에 따라 일생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하겠다. 후견인 아래서 생활은 구속 받는 생활이다. 후견인은 아이를 감시, 견제한다. 23절에 συγκλειω은 매인바 되고 갇혔다라고 말하고 있다. 율법에 매인바된다는 표현은 우리를 속박하여 가주에 두는 것을 뜻한다. 어린아이 입장에서 보면 자유가 없다. 감옥 생활이나 다름이 없다.

41절에서 이 후견인 아래에 있는 자는 종노릇하였다. 인간세계에 도리란 것이 있다. 요한은 태초에 Logos-도가 있었다고한다. 이 도는 인간생활의 규칙, 원칙이 된다. 이 원칙을 무시하는 자가 강도요, 폭행자요, 거짓말쟁이요 사기꾼이다. 이들은 몽학선생없이 사는 자다.

바로 살자면 몽학선생아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질서가 있고 평화가 있고 행복이 있다. 한 인간이 복음의 찬란한 빛 가운데 들어가기까지는 유치하다, 위험하다, 더럽다. 그러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몽학선생을 붙혀준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 몽학선생이 간섭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Paul 사상은 율법과 은혜 또는 복음에 관한 올바른 이해를 하는데서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Martin Luther의 사상도 마찬가지이다. Luther는 율법과 복음에 관한 올바른 이해를 하지 못하고서는 신학박사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Paul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즉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이루어 진다는 것이다. 인간의 존재는 은혜의 존재다. 그런데 이러한 삶의 방정식에 대하여 유대인들에게는 장애가 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이 율법으로 구원받는 것으로 보았고 이 법이야 말로 인간의 소망이 된 것이다.

그런에 Paul은 이 율법을 몽학선생으로 묘사하고 있다. 몽학선생인 율법이 인간을 감금하고 보호하여믿음이 오실때까지라고 하면서 결국은 우리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게하려 함이라고 한다.

율법과 은혜가 적절한 조화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를 키울 때 부모는 아이를 적당히 대리고 적당히 칭찬하여야지 조화가 되지 않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아이를 망친다. 너무 매질을 하며 아이를 의기소침하게 만들고 너무 아이를 받들어주기만하고 사랑하면 버릇나쁘게 된다. 그래서 루터는 왼손은 율법이고 오른손은 은혜가 된다고하며 하나님께서 이 두가지를 가지고 우리를 인도하신다고 하였다. 왼손으로 대리고 오른손으로 어루만지는 조화와 균형이 있어야 한다. 율법은 몽학선생이다. 율법은 선생이다 . 그리스도께서 인도하는 선생이다.

대학에 처음들어오게 되면 어떻게 해야된다든가 또는 안된다든가하는 수많은 권고나 명령과 금지를 받았다. 삼육대학이 다른 대학과 상통하는 일반성도 있는 반면에 다른 대학과는 아주 다른 독특성도 있기에 일반성만을 전제호 한 다른 대학과는 비고가 안되리만큼 많은 규칙 법을 제시하였다. 지금까지 제시한 것이 그전부가 아니다. 앞으로 더 있으리라고 기대해도 좋다. 지금까지 타율적생활영역에서 이제는 대학의 자율적 생활영역에 들오 온줄 알았는데 정작 그렇재 못하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율도 타율이 아닌 신율이 그촛점이 된 것이 삼육대학이다.

법의 표현은 하라, 하지마라라 둘중의 하나다. 그런데 십계명에서 보듯이 후자인 하지말라가 압도적으로 많다. 삼육대학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여러 가지 권고, 금지, 명령들은 삼육대학의 몽학선생이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 모두가 성숙한 어른 신자들인데 그들에게 몽학선생을 이야기 하듯이 삼육대학교회는 이제 청운의 꿈을 가지고 대학 문을 두드린 여러 청년학도들에게 몽학선생을 이야기하고 있다. 청년시대지켜야 할 여러 가지 규칙이 바로 몽학선생이다.

한 조직사회, 공동사회에 소속한 사람들이 그 사회의 표준대로 아직 자라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 있을 때 그들은 율법에 매이는 것이 당연하다. 대한 민국 국민이 대한민국의 여러 법에 매이듯이 말이다. 삼육대학에 갓들어 온 학도들이나 처음 예수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에는 마음으로는 삼육대학교 학생이 되었다거나 또 예수를 믿고 싶다고 하더라고 그동안 살아온 삶의 배경에서 형성된 성서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오랫동안의 습관이 아직 남아 있어 우리의 말과 행동은 그 버릇과 타성에 머물러 있기 쉽다.

어린 시절 집에 늦게 들어오거나 잘못된 행동을 하면 호되게 야단 맞아야 그 아이가 장래 잘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도 율법의 엄한 명령과 금지하여 연단을 받아야 신앙생활을 바로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인생의 경기장에 서 있다. 경기는 규칙에 따라 진행된다. 그 규칙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반칙을 범하는 것이다. 옛날 경기장에서 이런 것을 관찰한 사도 바울은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한다”(딤후2:5)고 하였다.

(마라토너가 상당거리를 차타고 갔다가 실격된 이야기)(한 부자 법관)(Winston Churchill과 교통법규위반)

 

생애의 진로를 좌우하는 대학 생활문턱에들어선자에게 오늘 아침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대학생활을 인생의 Rule안에서 전개해 보라는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교육부가 어느 대학이 우수한 대학인가를 재는 자에 학생이 Rule을 지키는 대학생활을 하느냐가 들어 있는지 의문시된다.

규칙은 몽학선생이다. 성경상 몽학선생에는 희생제사제도 의문율과 도덕율인 십계명이 모두 포함된다.

십계명의 존재의의:기능

이 세상에는 변함없는 법칙들이 많이 있다. 만유인력과 같은 자연법칙을 외면하면 생명의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을 잘 활용하면 인간에 많은 도움을 준다. 이 자연법칙외에도 도덕법칙이 있다. 인간은 충동이나 본능으로 또 욕망으로 살아 갈 수 없는 인격적 존재이다. 인간은 양심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참된 자유는 이법칙들을 지킬 때 있다.

젊은 날은 몽학선생이 필요하다. 젊은날의 하늘 같은 이상과 꿈은 엄한 몽학선생아래서 이루어진다. 타율적으로 지배하는 것에서 있다가 스스로 몽학선생의 기능을 파악하여 생활에 적용하는 자율적적용에서 예수 그리스도 믿음안에서 신율이 되는 몽학선생의 내재화가 필요하다.

 

몽학선생의 역할

1. 인간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있다.

인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적라나하게 들추어내어 인간을 절망시킨다.

대학 2학년 마치고 성경을 처음읽을 때 NT을 몇장읽고 더 읽어 나갈 수 없었다. 그 교훈이 하늘처럼 높고 자신을 개미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때에 세상의 어느 책을 읽었을 때 느끼지 못한 절망감에 사로잡혔던 경험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성경이 모든 것을 죄아래 가두었다. 성경은 인생의 안내 지침서이다. 이 지침서는 어느면 몽학선생의 역할을 한다.

2. 그리스도에게 인도한다.

인간세계의 수많은 삶의 규칙은 그리스도안에서만 바로 이해되고 바로 문제를 풀게한다.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규칙-이것이 몽학선생이다. 삶의 규칙이 그리스도를 만나기까지는 괴로움이고 짐이 된다. 그러나 일단 기쁨과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면 그 규칙들은 그리스도안에서 행복을 주는 지표로 둔갑된다. 몽학선생이 인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면 그것으로 사명을 다하여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경우도 있으나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후에는 그 Rule은 인간 영적 생명의 세포로 변하여 더 이상 짐이 되지 않고 자연스러운 삶의 태도로 바꾸어 진다. 규칙이 내재화도어 신율이 된다. 새언약이 된다. 예수 잘 믿으면 지금까지 귀가 아프도록 들은 규칙들은 생활 속에서 삶의 토양, 궤도가 되어 경쾌하게 살아가게 한다. 예수를 만나면 그리고 그가 자기안에 거하면 그 변화된 삶에서 십계명의 원리가 자연스럽게 구현되어 간다는 것이다. 몽학선생없이도 인생의 길을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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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l Barth는 이 원리를 깊이 의식하고 율법과 복음이라고 하지 않고 복음과 율법이란 말로 표현하였다. 물론 본래는 그리고 통상적으로는 율법과 복음의 순서이다. 그러나 예수를 잘 믿을 수 없는때 우선 몽학선생에 집착하라. 인생의 Rule을 바로 지키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는다. 삼육대학이 미국 큰 대학에서 이미 실험하여 실패한 길을 걷지 않으려면 구조적으로 몽학선생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100여 년 전에 J.H.Kellogg이 세운 병원이 세계적으로 그 이름을 날렸다. 각국의 저명한 정치가, 사상가등 유명인사들이 Battle Creek Saniturium에 잇달아 방문하였다. 버나드 같은 사람도 방문하였다. 당시 재림교회 의료수준은 5년이나 앞섰다. ? 어떤 보건의학적 연구결과가 EGW Message와 일치하면 Kellogg은 곧 그것을 무조건 채택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병원은 그 연구결과가 완전히 검증되기까지 기다렸다가 적용하였다. 그 검증기간이 대략 5년이었기 때문에 SDA5년을 앞섰던 것이다. 몽학선생에 무조건 따르면 다른 사람에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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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