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신으로부터의 엑소더스"(Exodus from autos ego)
"내 자신으로부터의 엑소더스"(Exodus from autos ego)
▶ 로마서 7:14-251. 인간의 도덕적 투쟁
수많은 사람들이 선하게 살고 싶어 하여 왔고 또 선을 추구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선을 추구하는 사람들 치고 한결 같이 자기가 가진 힘의 한계. 자기의 무능력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절망의 늪에 빠지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있다는 말을 아직 들어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런 단정적 표현을 사용합니다.
인간세계에 도덕군자가 얼마나 되어왔는지 알 길이 없지만 설사 누군가 고결한 인간으로 살아 왔다고 한다 해도 그것은 대부분 멀리서 바라본 映像에 불과할 것입니다. 인간은 외모로는 그럴 듯하게 보일 수도 있고, 언행이 바로 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접해 본다면 실망을 기대할 것이 전연 없는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산을 멀리서 보면 계곡도 안 보이고 바위도 나무도 잘 안 보입니다. 그러나 가까이 가서 보면 수많은 굴곡과 변화가 있게 마련입니다. 인간도 멀리서 본다면 성인군자처럼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근접하여 보면 상황이 다르게 보이는 것은 우리의 현실입니다.
사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內部 세계를 보면서 절망합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과 양심에 심한 진통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가 고백하고 있는 本文에서 우리는 이러한 공통적인 인간성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을 그린 이 말씀의 眞相은 무엇이며 그 진상의 원인은 무엇이고 바울은 문제의 수렁에서 脫出路를 어떻게 제시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 싶습니다.
로마서 7장 14-25절까지의 본문의 진의가 무엇인지에 관하여는 아직도 논의가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경험과 관련하여 중요한 이슈가 됩니다. 바울이 자기 경험의 어떤 단계를 말하고 있는지, 즉 회심전을 말하고 있는지 아니면 회심후 단계를 말하고 있는 것인지에 따라 우리의 믿음의 생활도 영향을 크게 받을 수 있기에 더 관심이 집중되는 주제가 되기도 합니다. (한국 재림교회 범주에서 찾을 수 있는 좋은 자료는 한국연합회장 신계훈 목사님의 석사학위 논문과 김기곤 교수의 글이 우리의 길잡이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여기서는 왜 내가 로마서 7:25을 해석하는 전통적인 두 입장을 분석하고 그 문제점들을 지적하면서 제3의 입장을 시도하고자 합니다.
2. 回心前說 (Position Ⅰ)
로마서 7:14-25은 바울의 회심전 경험을 서술하고 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이 입장에서는 바울이 本文에서 1인칭 단수 代名詞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나," "내"가 계속 사용되고 있는 점에 비추어 바울은 자서전적인 자기 경험을 진술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1) 주장자들과 주장 내용
다소 이론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만 희랍 교부들, Origen, Wesley, Johannes, Weiss, J. Moffatt, C.H. Dodd, R. Bultmann 등이 주장하여 이 입장을 주장하여 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영국의 성서 주석가들을 비롯하여 많은 학자들이 바울이 자기의 회심 전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들은 대체로 본문에서 중생과 회심의 경험이 없는 하나님과 율법에 반역관계에 있는 인간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바울이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아래 있을 때의 악몽 같은 상황을 그린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고민했던 그리고 이미 버린 과거를 회상한 것이고(Dodd), 이것은 곧 회심전의 그리스도인의 자서전적 모습을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本文은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바울의 자서전이자 모든 신자의 자서전이란 것입니다. John Wesley는 오랜 자기투쟁과 방황하는 영적 암흑에서 34才 시 벗어나 회심을 한 경험에 비추어 바울을 자기 피의 兄弟처럼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서 7장을 회심전의 바울의 내적 고투로 보았고, 로마서 8장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와 기쁨의 회심을 본 것입니다. 그는 로마서 8:2이 이 두 대립적 양상을 요약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8:1에서 "그러므로 이제…"-- 이 표현은 어두운 과거가 지나가고 새로운 장이 펼쳐지는 것을 그린 것이라는 것입니다.
(2) 근거
① "이제(now)" (롬 8:1) - 이 말은 과거와 대조 구분시키는 표현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전에 나오는 7:25의 "그런즉(so then)"과 대립, 반대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제(now)"와 그런즉(so then)"-- 이 두 표현방식이 풍기고 있는 것은 전연 다른 모습을 대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 7:14-25에서는 "그리스도"란 말이나 성령이란 말이 사용되지 않고 있다가 8장에 이르러서는 "이제"와 함께 그리스도와 성령이란 말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란 말이 첫 세 절에 3번이나 나오고, 성령이란 말이 1-16에서 12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② 7장과 8장의 진술은 사상적으로도 대조적입니다. 7장은 과거에 대한 묘사이고, 8장은 그리스도인 경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7:25 에 나오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는 승리의 표현은 삽입구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③ 바울의 그리스도인 경험은 항상 기쁨과 평화에 차있습니다.
④ 로마서 7장이 그린 인간상은 앞서 6장에서 기록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사람(new man in Christ)"과는 판이하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롬 6:22)의 동사 시제는 과거 분사구문으로 현재적 해석을 할 수 없게 한다고 봅니다. 즉 "now that you have made free"이지 "now that you are being made free"가 아닌 것입니다.
⑤ 이 죄에서 해방되어 버린 인간이 어떻게 7:14, 22의 "죄 아래 팔렸도다"고 하고 "곤고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 7:14, 22의 狀況은 6:21, 22 "그때에(then)"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문제점
① 7:25 첫 단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승리적 고백을 하고 이어서 육신으로는 죄의 법에 팔렸다고 합니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건질 것인가"질문에 이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란 확신에 찬 답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절망적인 표현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7장과 8장이 完全히 상반되는 대조성을 띄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Moffatt은 25절의 둘째 단을 떼어서 23절에 옮겨 번역하고 이런 번역 순서가 원문에 더 충실할 것이라고까지 우겼습니다. Dodd도 모팟의 이 문장 재배치 번역을 지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재배치를 지지할만한 사본 상의 증거가 도무지 없다는 한계점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Moffatt은 후대의 모든 사본에 영향을 주는 원천적 실수가 어느 단계에 있었다고 너무 지나친 추정을 합니다.
② 회심경험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이 거룩하다고(7:14) 고백할 수 있는가? 율법은 정죄와 저주를 선고하는데 중생경험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할 수 있는가?
③ 회심경험이 없는 사람이 자기가 그런 것 아니고 자기 속에 있는 악이 그런 것이라고 탄식할 수 있는가? (7:17)
④ 회심경험이 없는 사람이 선을 원할 수 있는가? (7:18) 원하는 선은 행치 아니하고 원치 아니하는 악을 행한다고도 말할 수 있는가? (7:19)
⑤ 회심경험이 없는 사람이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라고 토할 수 있는가? (7:22)
3. 回心後說 (Position Ⅱ)
이는 로마서 7:14-25은 바울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경험을 그리고 있다고 보는 立場입니다. 회심 후에도 죄짓는 것을 그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1) 주장자들과 주장 내용
Augustine, Luther, Calvin, Nygren, Latin 교부들, 종교개혁자들이 대체적으로 이 회심후설 입장을 지지하여 왔다. 여기서는 Nygren의 주장 내용을 대략적으로 살펴보기로 합니다.
① 7장 본문에서 시제 변화에 주목합니다. 7:1-13에서 바울은 계속적으로 과거시제를 사용하고 있다가 7:14에서는 현재시제로 바뀌어 25절에 이르기까지 이 시제가 줄 곧 계속되고 있습니다. 1-13의 과거와 14-25의 현재 시제는 대칭되고 있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14-25이 바울의 現在的 경험을 술회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는 주장을 합니다. 이 지적은 회심후설의 최대의 강점으로 보입니다.
② 7:14-25의 내용은 회심의 경험이 없는 非그리스도인에 관한 묘사를 하고 있는 바울의 다른 기록(例컨대 롬 1:18-3:20)과 차이가 있습니다. 7:14-25을 바리새인으로 살던 때에 관한 진술인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빌 3:6)고 한 점과 비교하면 7:14-25이 바리새인 시절을 회고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③ 7:14-25 主題가 일반적인 그리스도인 主題에 관한 5-8장의 연속이라는 것입니다. 단 여기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인 主題에서 當面하고 있는 그리고 빠져들어 가기 쉬운 도덕적 실패에 관한 영혼의 고민을 심도있게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5장은 진노로부터 구원을, 6장은 죄로부터 구원을, 7장은 율법으로부터 구원을, 8장은 사망으로부터 구원을 말하고 있다고 봅니다.
④ 그리스도인의 內的 긴장과 갈등 경험은 바울이 現在적 狀況을 그린 다른 묘사와 항상 부합됩니다. 그리스도인의 內的 갈등을 그리고 있는 성경절들, 즉 信者의 탄식(롬 8:23),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린다(갈 5:17 )는 말씀을 살펴 볼 때 더욱 그렇다고 합니다.
⑤ 바울은 빌립보서 3:12에서 완전을 "이미 얻었다"고 하는 고백을 할 수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도덕적, 영적으로 영원히 安全한 狀態에 도달한다는 것은 不可能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메시야 왕국의 새 시대(new aeon)에 살고 있지만 동시에 아직도 옛 시대(old aeon)에서도 살고 있어 "의인인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이라는 신분을 홀연히 변화되는 그 날까지 벗어 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믿음의 의란 도덕적 의가 아니고 그것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나님과 함께 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관계 정상화). 믿음의 의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지킬 힘을 주신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율법을 지킬 힘을 준다면 믿음의 의와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 사이에 차이가 없어집니다. 복음이란 율법의 의를 성취할 수단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온전하고도 完全한 의이며 이는 율법 준행과는 상관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성화 과정을 무시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3) 문제점
① 시제를 바꾼 것이 꼭 과거의 경험에서 현재의 경험을 묘사한 것으로 바꾼 것을 뜻하는가? 7:7-25 全部를 시제나 주제변화와 상관없이 한 내용으로 읽을 수 있지도 않는가? 더구나 문법상 현재시제를 역사적 의미 서술시 보다 생동적으로 호소하기 위하여 사용할 수도 있고 완료적 현재 시제도 가능하지 않은가?.
② 로마서 1:18-3:20과 빌립보서 3:6 해석문제
a. 로마서 1:18-3:20은 유대인, 이방인들에게 죄의 보편성에 관하여 진술하고 있으며 그들의 책임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15에서는 이방인 마음 안에서 율법이 새겨져 있어 서로 송사 한다고 합니다. 이런 점들은 7:22과 상응한 표현이 될 수도 있습니다.
b. 빌립보서 3:6은 회심 전 바울 자신의 모습일 것이니 로마서 7장과 상응한 표현으로 보는 것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빌립보서 3:6의 율법에 欠이 없다고 한 표현이 로마서 7장의 율법준수에서 패배감, 좌절감의 표현과는 차이가 있는 것은 ㉠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는 그 동기에 있어서 하나님 심판의 자리에서 말하고 있고, 빌립보서 3:6에서는 (상대방 주장의 허구성을 들어내기 위하여) 유대주의적 율법주의자들을 반대하면서 자기의 사도직 변호 와 복음해석 관점에서 한때 그렇게 欠없이 보였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③ 5-8장이 모두 그리스도인 생활의 묘사인 만큼 7:14-25도 같은 범주에 넣어서 보아야 된다는 점은 무리라고 봅니다. 7:14-25은 삽입적인 부분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런 삽입적 구절이 다른 곳에도 나오고 있습니다. 예컨대 7:7-8은 꼭 그리스도인 관점에서 이해할 말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경견한 유대인들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④ 신자들의 생활이 항상 이런 좌절, 고투와 열매 없는 노력의 연속이란 말인가? 롬 7:7:14-25이 그리스도인 생활에 관한 자기를 낮추는 표현인가?
⑤ 믿음의 의 문제: 믿음의 의가 칭의 중심과 하나님과의 관계 정상화뿐인가? 하나님은 더 이상 인간에게는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물론 바르게 됨(rightness)이 먼저 처음에 오지만 그 다음에 도덕적의가 수반되는 것이 아닌가? 믿음의 의는 도덕적의를 경멸하는가?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다"(요1 3:7 )고 하지 않았는가? 복음은 의로운 생활을 구현하는 수단이 된다고 봅니다. 복음은 우리 안에서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롬 8:4).
⑥ 기타 문제점으로 바울이 말한 이유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즉 승리경험과 패배경험을 교차시킨 이유가 무엇인가 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롬 8:7)와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7:14), 죄 아래 팔렸도다(7:14)와 죄 아래서 해방되어(6:18), 싫어하는 악을 행하는 것을 그칠 수 없고(7:15-23)와 율법의 의가 이루어진다(8:4)와, 죄의 법(7:23)과 죄의 법에서 해방(6:22)되었다는 대칭들을 비교하여 보아야 합니다. 그 외에도 승리경험이 도처에 나오고 있는 진술들이 있는 바(고후 5:17; 갈 2:20; 빌 4:15; 엡 3:20; 엡 4:23, 24, 등)이를 회심한 그리스도인에 적용시킬 때 롬 7:14-25를 마찬가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고 봅니다.
4. “그리스도 없는 자기중심” 立場 (I-Alone Position)
위에서 로마서 7:14-25에 대한 이해가 回心前 理論과 回心後 理論으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두 접근 방식 모두가 문제점들을 내포하고 있는 점도 살펴보았습니다. 여기 제3의 입장(Position III)에서는 위 두 견해를 수렴하면서도 로마서 7:14-25이 非그리스도인으로서 회심전이나 회심후의 바울의 자기 모습이나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그리려고 하는데 그 초점이 있지 않다고 보고 있습니다. 바울은 本文에서 등장한 인물의 代名詞를 "나(I)"로 使用하고 있습니다. 이 일인칭 대명사는 일차적으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유대인으로서 지난날의 자기를 말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기를 유대인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고린도전서 9:30에서 유대인을 얻기 위하여 유대인이 된다고 한 바울의 진술을 연상할 때 이해가 가능한 것입니다. 유대인은 예수 그리스도 없는 율법준수에 광분하였습니다. 本文에서 그 결과가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비그리스도인으로 도덕 추구자나 타종교인들 모두가 이런 스타일에 해당될 것입니다(Ellen G. White은 베데스다 사건을 다루면서 로마서 7:24을 이런 방식으로 적용하였습니다. 시대의 소망, 204).
참고: 바울은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고 하였다. 이러한 부르짖음은 어느 곳에서나 어느 시대에나 죄의 짐에 눌린 자들의 마음에서 발하는 부르짖음이다. 이런 모든 부르짖음에 대한 대답은 다만 하나뿐이니 곧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요 1:29) 함이다. ”(정로, 19)
그 다음으로 바울은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등진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말하고 있다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RSV」에 보면 로마서 7:14-25 본문에 "I"가 27회, "my"가 8회, "me"가 5회, "myself"가 1회 - 1인칭 적인 表現이 모두 41회 나오고 있습니다. 모두 12개의 성경절에 41회나 나오고 있는 점을 보아 경이적이라고 할 것입니다. 또한 심상치 않은 1인칭 대명사 사용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평균 3.4회 (3회 이상) 나오고 있는 특이한 구조입니다. 이는 루스벨의 반역 심리학에 나오는 1인칭 사용과 비교하여 볼 때 유사점이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루스벨의 犯罪 心理를 설명해주고 있는 "내가(I)"와 그 변형은 다음 성경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못별 위에 / 내가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 내가 北極 집회의 山위에 좌정하리라"(사 14:13). "내가 가장 높은 구름위에 올라 / 내가 내 자신을 가장 높은자와 같이 되리라"(사 14:14 ). Lucifer 마음을 휘어잡고 있는 자기중심의 생활,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獨立的인 지위를 확보하고자 하는 모습이 7번씩이나 사용한 1인칭대명사에서 들어 나 있습니다. 여기 14절에서 I myself가 연속해서 나오고 있는 점을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기중심의 哲學이 로마서 7:14-25에도 관통되어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맨 끝 절인 25절에서 그 "내 자신"이라고 하여 그 절정을 들어 내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자기를 강조하는 이 타락 원리는 하늘에서나 이 땅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희랍어로는 아우토스 에고(autos ego)로 아우토스는 "내 자신(myself)"이고 에고는 "나(I)"를 뜻하지요. 희랍어에서는 동사 어미 자체가 주어를 함축하고 있으므로 보통으로는 1인칭 代名詞를 使用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도 代名詞를 사용하고 있으면 그것은 강조용법 구문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을 때도 그 인칭대명사가 나오면 강조된 뜻을 찾아 읽어야 성경을 바로 읽게 된 셈입니다. 그런데 7:25 下端에서 에고, 1인칭 주어를 사용하여 강조하고 있으면서 아우토스까지 더 사용하므로 곱빼기로 강조하는 두드러진 특징이 나온 것입니다.
아우토스 에고(autos ego)번역 용례를 살펴보면 "I myself (내 자신이)," "I of myself," "I in my own nature" 등으로 각각 번역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문장에서 그 진의는 전적으로 자기 힘에 의존하는 "man, entirely on his own," "man, left to himself" 의역에 잘 들어 났다고 봅니다. 그리스도를 등지고 전적으로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법이 요구하고 있는 의를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을 이런 식으로 表現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자기 중심적 표현에 대칭 되는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라"고 말한 삽입적인 表現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a man in Christ)"(고후 12:2)이 아닐까 합니다. 요컨대 아우토스 에고(autos ego)는 "그리스도 없이 나 홀로(I alone without Christ)"를 뜻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7장은 하나님께 거스르고 있는 인간의 경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거절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시도하고 있는 인간 자아상 모습을 그리고 있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Arndt와 Gingrich이 "Thrown on my own resources, I can only serve the law of God as a slave with my mind"로 풀이하고 있는 점은 이러한 시각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영어에 “auto”는 그 어원이 헬라어 아우토스(autos)에서 왔습니다. 이 “auto”가 접두어로 된 합성어들을 생각하여 보면 바울이 사용한 어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automobile--자력 추진의 차량(a self-propelled vehicle),
automatic--자동적인(a self-acting device),
autonomy--자율(self-government),
autograph--자필(a self-writing),
autobiography--자서전(a self-written life history)
이 모든 어휘들이 자기중심입니다. 아우토스 에고에 집착하면 루터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설명하면서 선택한 용어 “자기 밖 외부에서 오는 의”(alien righteousness) 같은 외부의 도움이 필요 없게 됩니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이 아우토스 에고와 대칭 되는 표현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a man in Christ)"(고후 12:2)입니다. 이러한 점들을 감안하여 로마서 7:25을 다음과 같이 번역 한 분이 있습니다.
"So then, I, on my resources, I without Christ, I alone, with the mind serve the law of God, but with the flesh the law of sin."
"그런즉 나는 말입니다. 내가 지닌 자원(힘)으로, 나는 그리스도 없이, 나 혼자서 내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겼습니다."
여기서 "그런즉(oun)은 지금까지 전개하여 온 사상을 종합 요약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것은 회심에 굳게 서있는 사람의 경험이 아닙니다. 중생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권능에 의지하여 또 그 권능을 통하여 모든 것을 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중생한 자라도 순간순간 그리스도부터 등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기로 결심하고 회심의 경험을 한 사람이라도 일순간에 평생토록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은총의 선물을 다 받는 것도 아닙니다. 장로교의 TULIP 교리에서 성도견인론이나 이중 예정론은 성경의 가르침과 거리가 먼 것입니다. 성령침례는 매일 체험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광야생활의 만나 경험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의 순례 生活의 表象인 40년 간의 광야生活을 하는 동안 만나가 매일 내렸습니다. 백성들은 금요일에는 안식일 몫까지 곱빼기로 내려 그날그날 내리는 만나를 依存하면서 살게 되어 있었습니다. 만나를 긁어 많이 모아두고 1달쯤 먹으리라고 생각하고 거둔 자는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는지를 곧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 生活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절 없이 계속하여 하나님께 依存하는 삶입니다. 한순간도 자기 힘으로 해 보겠다고 하는 意志를 포기하고 자기를 처서 복종하면서 지내는 生活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자기 힘을 依存하는 때는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이루어지도록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全的으로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全的으로 신뢰하는 것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배워야 했던 교훈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당한 시험은 바로 이 하나님께 향한 신뢰 여부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힘의 원천입니다.
내 자신 중심의 사람(아우토스 에고)으로부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a man in Christ)"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합니다. 이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에게 오는 승리의 확증이 8장에 잘 나와 잇습니다. 아우토스 에고의 경험은 늘 현재적으로 그리스도인을 위협하고 있는 사단의 구호가 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광야 시험의 체험을 로마서 7장에서 하고 8장에서 승리의 찬가를 부르고 있습니다.
엘렌 화잇은 자기 신뢰를 벗어나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한다고 하며 로마서 7:18을 인용하는 다음의 진술도 이런 아우토스에고로부터의 탈출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 중 어느 누구도 죄가 없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생애한 사람들, 고의로 악행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생명 그 자체를 희생하고자 한 사람들, 하나님께서 거룩한 빛과 능력으로 영화롭게 하신 사람들도 그들의 본성에 죄악이 충만함을 고백하였다. 그들은 육신을 신뢰하거나 자신들의 의를 주장하지도 않았으며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였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모두 그와 같을 것이다. 우리가 예수께 더욱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분의 품성의 순결을 더욱 분명히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욱 더 죄의 극악함을 알게 되고 자신들을 높일 마음이 더욱 더 적어질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계속적인 영혼의 발돋음, 계속적이며 열렬한 죄에 대한 마음을 찢는 회개와 그분 앞에 마음을 겸비하게 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우리의 그리스도인적 경험에 있어서 진보의 매 발걸음이다 우리의 회개는 깊어질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의 충분함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며 다음과 같은 사도의 고백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할 것이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롬 7:18; 갈 6:14).”(행적, 561).
5. 결론
예수께서는 이런 자기 힘 중심의 신앙생활과 난관극복 방식에서 탈출하여야 한다는 점을 무언중에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사건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4:35-41에 나오는 갈릴리 호수에서 큰 광풍을 만난 제자들의 경험이 바로 그것입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어진 제자들이 온갖 方法을 다하여 때아닌 광풍노도를 극복코자 애를 썼으나 결국 죽게된 상황에서 빠져 절망하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 두고 그를 信賴치 않고 자기들의 힘으로 살고자 발버둥을 친 일을 우리들에게도 늘 있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익사하게 된다면 하나님도 익사하게 될 것이데...아니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을 것이었습니다. 가장 예수와 가까운 위치에서 사는 우리들이지만 인생 길에서 광풍 노도를 만날 때 얼마나 많이 자기 힘으로 곤경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을 치는 우리인지…完全히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 자신을 맡기는 것이 신앙의 사활을 좌우합니다. 예수께서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요 15:5 )고 말씀하였습니다. 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3:13 )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31)고 하고 고백하고 잇습니다. 바울은 자기 장례식을 이미 치른 사람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장례식을 날마다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안에 그리스도가 산것이라"(갈 2:20). 결국 우리의 고백은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내가 아니요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고전 15:10)라고 하는 은총의 파라독스의 빛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I…yet not I, but God").
산다는 것은 자기로부터의 탈출이 되어야 하고, 자기가 죽는 경험이야말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삶과 죽음이 교환되어야 합니다. 죽는 길이 사는 길입니다. 자기 죽음은 순례자의 길입니다. 여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점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어느 도시에 걸린 이런 경구에 주목합니다.
I live to die; I die to live.
The more I die, the more I live.
The more I live, the more I die.
“사도 바울의 생애는 자아와 더불어 끊임없이 싸우는 생애였다. 그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하였다(고전 15:31). 날마다 그의 뜻과 욕망은 하나님의 뜻과 의무에 반대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본성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이 될지라도, 그는 자신의 성향대로 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였다.
그는 자신의 투쟁의 생애가 마칠 무렵, 그 투쟁과 승리를 회고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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