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만유재신론자의 주장:

"신과 인격적(personal)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나 신은 하나의 인격(a person)이 아니다. 신은 인격과 비인격을 초월하면서 동시에 양면을 다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신은 보통 존재와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존재"라 할 수 없고 차라리 "비존재"라 하는 것이 더 낫다. 틸리히의 말처럼 하느님에 대해 말할 때 상징적인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 나는 신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믿는 panentheism (범재신론, 사실은 '만유재신론' 또는 '만유내재신론')자이다. 하나님을 왕으로 생각하는 것은 '율법주의적 신관'이다." “범재신론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있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계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저 위에도 게시고 여기에도 계신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 됨을 내 안에서 체험하고, 그와 하나 되는 체험이 가능하다.”

위 주장은 마치 요한복음 15:4에 나오는 말씀처럼 들리나 내용을 알고 보면 판이하게 다르다.

만유재신론(Panentheism)은 문자적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안에 있고, 하나님안에 모든 것이 있다는 뜻이다(all-in-God, 또는 God-in-all). 만유재신론은 만물과 하나님을 동일시 하여, 그것의 일부마다 하나님의 다른 모습이 있음을 강조하는 범신론(Pantheism)과는 구별된다. 범신론이 만유와 동일시되는 점과는 달리 만유재신론(범재신론)은 만유가 신 안에 내재하고 있으며 신은 만유를 포괄하면서도 초월한다는데 있다.

크라우제(Krause)는 만유재신론이 범신론까지 포괄하는 도식으로 보고 있다. 크라우제는 Schelling의 범신론적 세계관의 개념을 신적 인격 개념과 결합시켜 범신론을 주장하였다. 만유재신론은 범신론을 포용하고 있다는 점에 문제성이 있다.

Hegel'이 세상이 없으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다'라는 명제를 제시하면서 하나님과 세계의 불가분성을 역설하였다. 그는 <역사철학>에서 하나님께서 세계의 역사를 통치하며 현실 세계의 구체적인 역사를 관장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이 세계 안에서 매일 발생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올 뿐만 아니라 하나님 없이는 발생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 자신이 하신 일이다(4: 938). 그의 도식은 후에 많은 신학자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Charles Harthone의 신의 변화론 및 감정이입론 사상("Standpoint of Panentheism," PSG, pp. 1-25) 을 여러 사람들이 다듬어 놓은 것은 법재신론의 철학적 바탕이 되었다. John B. Cobb, Jr.은 과정철학자 Whitehead의 논리를 발전시켜 하나님을 더 인간화 시켰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궁극적 실재에 관하여 계시된 말씀을 상징으로 보면서 동 실재를 알려지지 않는 분 또는 알 수 없는 분으로 보았다.

슐라이에르마허는 그의 <기독교 신앙>에서 이 범재신론의 신관을 피력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을 이 세상으로부터 혹은 세상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을 반대한다. “세계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 의존에서만 존재한다.” 하나님과 세계는 전적으로 다르나, 하나님은 자신을 세계에 전달한다. 처음에는 하나님과 세계는 동일한 것으로 보았으나 범신론의 비판이 일자, 후에는 하나님이 그 범위에 있어서 세계와 같고, 그 본질에 있어서는 다른 것으로 발전시켰다. 그의 신관은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신관 모델이 되었다. 하나님을 멀리서 이 세계를 다스리는 어떤 위대한 인간과 같은 존재로 생각하여서는 안된다. 하나님을 어떤 객체로 생각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Paul Tillich 역시 헤겔의 도식선상에서 범재신론적 주장을 하여 하나님과 세계는 동일시할 수 없지만 상호간에는 긴밀하게 뒤엉켜 있다고 본다. 세속신학에서도 personalistic panentheism을 주장한다. Moltamann은 종말론적 삼위일체적 범재신론(eschatological, trinitarian panentheism), Rahner는 하나님과 세계는 차이성 속에서 통일성을, 통일성 속에서 차이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고, Hans Kung은 위험스러운 범재신론의 신관을 주장하고 있다.

만유재신론 사상은 만유재신론자 가운데서도 다양하게 풀이되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만유재신론 사상에는 네가지 기본적인 특징들이 함유되어 있다.

1. 하나님은 두개의 극(poles)을 가지고 있다. 한 극은 하나님의 절대적, 잠재적 본성을 말하며, 또 다른 극은 하나님의 상대적, 실제적 본성을 말한다. 잠재적 본성이라 함은, 하나님이 당신의 존재안에서 영원하며, 완전하며, 불변하며, 불멸하며, 무제한적임을 의미한다. 실제적 본성에서의 하나님은 존재속에서 일시적이며, 상대적이며, 불완전하며, 변하며, 소멸하며, 제한적이며, 의존적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세상을 초월하신 분이신 동시에 인간 또는 자연에 의해서 존재의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자연이 없다면 하나님의 존재는 우리 인간에게 무의미하다. 하나님은 상대적 신일 뿐이다. 하나님을 완전과 불완전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성서적 신관과는 거리가 말다.

2. 세상은 하나님의 몸이다. 한 극이 하나님의 몸이라면 세상은 또다른 극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과 세상은 존재론적으로 구분되나, 동시에 존재론적으로 서로 붙어있다. 세상은 하나님께 의존하고, 하나님은 세상에 의존하는 존재가 된다. 이 세상은 하나님을 담아내는 용기(容器)가 된다. 고로 그릇이 없다면 하나님도 없게 된다. 세상이 하나님을 담아내는 용기라는 이해는 무한을 유한에 담아내겠다는 발상에 불과하다.

3. 어떤 만유재신론자는 세상이 무로부터(ex nihilo)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물질로 부터(ex material) 창조되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그리해서 하나님은 세상의 창조자가 아니라, 우주의 감독관이 된다. 그러나 몰트만은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 개념을 받아 들이나, 전통적 신론에서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재해석하여 받아들인다. 이는  무로부터의 창조를 말하고 있는 성서의 창조사상과 배치된다.

4. 역사는 끊임없는 하나님의 진보의 과정이다. 하나님은 더 완전성을 향해서 변화하고 있으며, 성장하고 있다. 결국 역사는 하나님과 인간이 공동의 창조자로서 존재하는 진화적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이 개념은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적 신개념에서 개발된 것으로 모든 실재(實在, entities)들이 경험에 의해 완성되듯이 하나님 또한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완성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실제적 존재이다. 이는 역사가 심판과 파멸로 나가고 있다는 성서의 종말론에 배치된다.

 만유재신론은 무엇보다도 전통적인 신관인 하나님의 자존성을 파괴하고 있다. 세계와의 연계 토대 위에서 의식된 신관이기 대문이다.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 임재를 가슴 저리게 느끼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원이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 경험적인 앎만을 주장하는 일은 무속적 신관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무속은 불분명하거나 비인격적인 대상을 향한 일체의 종교행위이다.

힘써 하나님을 알자”(6:3)--하나님을 아는 것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기초가 되어 있다.

범재신론에서는 하나님이 자연을 품고 있지만 그 근원적 특성은 자연의 일부가 되고 만다는 점에서 성경적 신관의 전부라고 볼 수 없다. 범재신론자들은 칼 라너의 말처럼 부처나 알라나 시바를 그리스도의 다른 이름으로 본다. 예수는 녀러 신들 중 하나로 전락한다. 고유명사 그리스도를 보통명사화시켜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구원자의 칭호로 본다. 범재신론자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중의 하나로 본다. 힌두교적 신관이 물씬하게 담겨 있는 사고로 흐른다. “예수가 내 안에 내가 예수 안에라는 성서의 기별은 내가 예수께 굴복한다는 개념이지 인간이 곧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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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