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그리고 자유

하나님 : 2014. 8. 20. 22:00

성경 본문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8:32-36).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5:1, 6)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5:13).

815일 태극기를 매달면서 이날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살고 있는 동네를 가로 질러 걸으면서 우리 집만 태극기를 매달아 내가 이단아처럼 느껴졌다. 설마 환희의 그날의 감격이 사라진 듯 하는 분위기를 느낀 사람은 나만이 아닐 것으로 믿고 싶다.

1910829일에 한일 병합 조약(韓日倂合條約)이 공포되어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191931일 민족대표들은 낮 12시쯤부터 태화관에 모여들었고, 탑골공원에도 수천 명의 시민·학생들이 모여들었다.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들은 시간이 되어도 민족대표들이 나타나지 앉자 학생대표 세 사람이 태화관으로 가서 민족대표들에게 탑골공원으로 가자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탑골공원에서 기다리던 백성들 중에서 후에 위생병원장을 역임한 정사영 박사 선친 정재용이 단으로 나아가 안 주머니에 간직한 독립선언서를 꺼내 읽었다. 이어서 수많은 학생들과 군중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종로로 행진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이 독립만세 사건은 전국적으로 열화같이 번져 갔지만 독립운동은 일제의 억압으로 1945년 해방이 되기까지 지하로, 해외로 피하여 갔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탈하여 내선일체라는 구호로 합병, 잔혹한 통치를 이어간 것이다. 우리 민족은 69년 전 (1945) 815일 감격적인 자유해방을 맞이하였다. 이 자유해방은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었다. 이 시대에 일제는 우리나라 백성들에게 종의 멍에를 씌웠다.

일제의 강압 통치는 그 끝이 가까워 올수록 더 혹독하여 갔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 1938년 황거요배, 신사참배, 황국신민서사 제창, 일본어 사용 강요, 1939년 창씨개명 령, 일제의 1941128일 하와이 기습공격으로 태평양전쟁 발발 ..등 큰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나는 이런 시대에 탄생한 것이다. 당시 일제는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라는 <야마토다마시(大和魂)>을 강조하면서 전쟁을 미화하였다. 나는 ‘454월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에 입학하였다. 8.15광복을 맞이하기까지 모든 백성들이 삼엄하고 궁핍한 전시 체제 하에서 신음하였다. 내 나이 8 살 때 당시 초등학교 1학년, 그래서 풀뿌리 캐 먹던 일, 문고리 놋 그릇 공출당한 일, 아버지가 벼를 땅 속에 숨겼다고 감옥 갔던 일, 아주머니들이 딸 정신대 끌려가지 않도록 속히 결혼시켜야 한다고 수군수군하는 일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된다. 4월 학교에 입학하여 줄서기 훈련을 받으며 <가다가나>를 배우고 아침 조회 시간 마다 도쿄 쪽을 향하여 덴노헤이카 반자이(천황폐화만세)를 부르고, “나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이다. 나는 마음을 합해 천황폐하께 충의를 다한다.”는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 암송하였다. 공원에 신사 짓는다고 가파른 언덕길에 일렬로 서서 벽돌을 아래 학생으로부터 받아 위 학생에게 옮기는 일도 기억난다, 어쩌다가 일본 순사와 마주쳤을 떼 그는 고라 바가야로”(이 명청한 놈, ばかやろう)하면서 야단을 치고 지나갔다. 우리 집안에서는 아무도 하지 않았는데 누군가 우리 가족 이름들이 일본식으로 창씨개명이 되어 그 흔적은 중고 시절까지 호적부에 남아 있었다. 점점 시국이 흉흉하였다. 라디오를 가진 어느 집에서 일왕의 항복 선언 소식이 온 마을에 파급, 사람들의 열광하는 광경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어느 날 밤 이웃 살던 일본 사람이 갑자기 사라진 일도 기억난다. 69년 전 일이다. 나는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 부르는 것이 어떤 뜻을 지녔는지도 모른 채 따라하였다. 김구 선생께서 우리 고을에 순회하는 일도 있었다.

자유의 의미

구약성경에는 자유해방을 말하는 사건들과 제도가 나타난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사건은 애굽의 억압으로부터의 탈출이었다. 안식년과 희년은 자유해방이 그 기조가 되어 있다. 이 안식년과 희년은 종들이 자유를 얻고 토지가 원주인에게 복귀하던 자유해방의 은해의 해가 되었다.

예수께서는 이 자유의 선물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 그는 자기의 사명을 몸, 마음 영혼이 사단에게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4:18)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예수의 복음은 가난한 자에게는 구제를, 무지한 자에게는 빛을, 고통 받는 자에게는 그 고통의 경감을, 죄의 노예들에게는 해방을 의미한다. 갈라디아서는 그리스도인의 마그나카르타라고 한다.

자유!!! 자유는 어떤 것으로부터 억압이나 제약을 받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가? 만일 자기가 원하는 대로 다 할 수 있다면, 그 자유 속에는 혼란과 파멸의 씨앗이 담겨 있다. 마음대로 하는 것이 자유가 아니다.

자유에의 길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8:32-36). 진리 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에릭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 에서 자유의 양면적 의미를 규명한 이래 윤리학 교과서들이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가 무엇인지를 파헤쳤다. 프롬이 "수백만의 독일 사람들이 그들 선조들이 자유를 위하여 싸운 것과 같은 열성으로 자유를 포기하였으며자유를 찾는 대신 그로부터 도피하는 길을 찾았다." 이처럼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싸워 온 사람들이 막상 자유와 독립을 맛보게 되자 불안에 싸인 무력한 존재가 되는 모순에 관해서 에리히 프롬은 심리학적 분석을 시도한 것이다.

1. 외적 억압에서의 자유- “..으로부터 자유(freedom from...)”

(1) 외적 제약(특히 봉건 속박 사회)으로부터 해방되는 소극적 자유, 정치적 자유- 이 자유를 얻고자 인류는 많은 피를 흘렸다. 자유 민주주의 역사는 피를 마시고 자란 나무와도 같다. 출애굽 사건은 외적 억압으로부터의 자유의 표본이 된다. 헤겔은 역사를 자유의 확대 과정이라고 보았다.

2000년대 초 Washington Mall에 있는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물(the Korean War Veterans Memorial)을 방문한 일이 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돌비에 새겨진 Freedom is not free(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라는 유명한 말이다. 또 이런 문구도 새겨져 있다. "Our nation honors her sons and daughters who answered the call 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a people they never met.(조국은 결코 알지도 못하고 만나보지도 못한 나라를 방어하라는 부름에 응한 우리의 아들과 딸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야외 기념 조각물에는 1950년대 초, 완전군장을 하고 판초우의를 쓴 19명의 미군 소대원들이 비가 내리는 한국의 들판에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조심스레 수색하고 있는 모습의 조각품들이 있다. 참으로 머리가 수그러지는 대목이었다.

구약성경에서 선민을 해방시키셨던 예수께서는 정치적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쟁취하시고자 오시지 않았다. 한 인종적, 국가적 선민인 이스라엘이 그 사명에 실패하자 예수께서는 영적 이스라엘을 부르시는 일을 하셨다. 따라서 더 이상 국가적, 정치적 자유해방을 목표로 하여 일하실 필요가 없으셨기 때문이리라. 유대나라가 로마의 억압 아래 살고 있을 때 오신 예수께서는 당대 지도층과 민중이 그렇게도 바랐던 정치적 자유의 전사가 되시지 않았다. 예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 62:1, 2을 인용, 강론하실 때 신원의 날을 의도적으로 빼신 것이 (4:18, 19) 당대 지도층과 민중이 예수를 배격하였던 주된 이유가 되었다.

오히려 예수께서 추구하고 또한 바울이 추구한 자유는 율법주의적 의식제도의 멍에로부터의 해방시키는 일이었다.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이는 종의 올가미에 걸리지 말라는 뜻이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의 복음을 받아들였을 때 우상의 속박에서 벗어났다. 만일 그들이 유대주의 속박 속으로 들어간다면 그것은 종의 멍에를 다시 매는 격이 될 것이었다. 이것은 사실상 그리스도를 전면적으로 부인한다는 뜻이었다. 이 억압에서 해방시키고자 하나님의 아들이 생명을 바쳤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율법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이 가만히 들어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라”(2:4)고 하였다. 그들은 장로들의 버거운 유전들(23:4; 참조 막 7:1~13 주석)과 그들의 죄악들에 속박되었다(2:17~24; 참조 롬 6:14; 4:21).

흔히 386세대나 486 세대들이 민주화 운동의 화신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데모를 진두지휘하여 이 나라를 민주화시켰다고 으스대는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되고 정부의 중책을 맡은 그 정치가들이 한 때는 이 나라의 민주화에 기여하였지만 그들의 그 파괴적이고 부정적 자세가 오늘날 이 나라를 더 혼란스럽게 하고 위태롭게 한다는 지적이 많다. 투쟁을 부르짖고 문제를 강성 데모로 풀어가는 사람들의 품성은 망가져 간다. 외적 해방을 쟁취한 전사들이 그 다음 단계로 나가지 못하고 오히려 미래를 망가트리는 것에 이 나라의 비극이 있다.

그러면 참된 해방과 자유는 무엇인가?

(2) 내적 죄로부터의 자유- 진정한 해방은 자기중심적인 내적인 본능적인 자아(ego)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는데 있다. 특히 죄의 속박에서 해방되는 때 진정한 영적 자유를 향유할 수 있다(8:34). 악을 선택하는 것은 곧 이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다. 복음은 인간에게 참 자유를 준다. 이 자유는 그리스도의 선물이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는 해방자가 되신다(8:32). 예수는 인간을 죄악의 사슬로부터 자유케 하러 오셨다. 진리를 받아들인 자들에게 자유가 약속되어 있다(고후 3:17; 5:1).

유대인들이 종이 아닌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할 때 대답하신 말씀 -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죄로부터 자유한 의인이 없는 세상이다. 15세 여학생이 다른 여학생을 살해한 사건, 윤 일병을 죽인 사건 등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세상은 인생교육이 사라진 교육의 필연적 귀결이다.

14:3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디오게네스 정직한 사람 찾는 이야기: 그는 아테네 광장에서 대낮에 등불을 켜서 들고 배회하였다.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자 그는 정직한 자를 찾고 있다고 대답하였다. 그는 정직한 자를 찾지 못하고 악당들만 보았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자유란 죄의 멍에에서 해방시키는 자유이다. 이것은 근원적인 자유이다. 예수께서는 이 자유를 주시고자 오셨다. 죄로부터의 자유, 물질의 노예로부터의 자유, 정욕으로부터의 자유, 사탄의 지배에서 해방시키신 자유, 죽음으로부터의 자유가 더욱 절실한 현실이다.

8:34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8: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진리가 자유케 한다.

사례1- 중풍병환자 사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중풍 환자가 아직 집에 있을 동안에 구주께서는 이 사람의 양심에 죄를 깨닫도록 하셨다. 그가 죄를 회개하고 자기를 온전케 하실 수 있는 예수의 능력을 믿었을 때에 구주의 생명을 주시는 자비하심이 먼저 그 갈망하는 심령에게 복을 주셨었다. 예수께서는 최초의 희미한 믿음의 빛이 예수가 죄인에게 도움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는 믿음으로 자라나는 것을 주시하셨으며, 그 믿음이 예수 앞에 나오고자 노력할 때마다 더욱 강하게 자라나는 것을 보셨었다. 이제 구주께서는 환자의 귀에 음악과 같이 들리는 말씀으로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절망의 짐이 병자의 심령에서 떠나고 용서의 평강이 그의 마음에 임하고 그의 용모를 환히 비췄다. ”(소망, 268)

윤동주의 시가 시사하고 있듯이 우리는 내적으로 부끄러움이 없는 자아가 못된 것을 괴로워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러움을 없기를 /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육체의 욕망을 제어하여야 한다. 죄의 마수에 끄려 다니는 인간의 종말은 비참하다. 유혹의 마수가 있는 곳에 맴돌면 걸린다. 인간의 가치는 그가 누리는 자유에 있다. 인간의 행복도 이 자유의 범주에 비례하여 행복한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이 밖으로 탈출하려고 자기 머리카락을 잡아 올린다고 되는가? 밖에서 밧줄을 던져주어 그것을 잡아야 가능하다.

외적, 내적 억압에서 자유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죄가 인간의 자유를 죄를 짓는 자유로 만든 것을 본래 대로 은혜가 자유의지를 회복시키고 참된 자유를 향유케 한다. 그리스도께서 은혜로 주신 이 죄로부터 자유야 말로 참자유의 출발점이 된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도록 하시고자 골고다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2. 적극적 자유

진정한 자유는 “...을 위한 자유 (freedom for ...)” 곧 적극적 자유로 나간다. 이는 곧 사람에게 결단과 책임을 요청하는 적극적 자유이다. 개인적 자아의 실현을 위하여 개인의 지적 감정적 감각적 잠재력의 표출을 추구하지 않는 현상이다. 인간은 책임적인 자유의 존재로 부르심을 받았다.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5:13). 적극적 자유는 사랑의 종이 되는 결단과 책임을 요청한다. 참다운 자유를 위하여 많은 짐을 져야 한다. 사랑으로 서로 섬기는 일이 진정한 자유이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자유의 길이다. 승리의 길이다.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는 이 적극적인 자유가 자유의 목적이며 소명이 된다. 우리는 우리가 추구하는 이 적극적 자유만큼 행복하게 되어 있다.

삼육학교의 교훈 사랑과 봉사 구호에 느낀 점, 인생의 목적이 출세가 아니고 섬기는데 있다. 전통적으로 교육의 목적은 출세, 입신양명에 있었다. 그리스도교 교육 목적은 지나간 우리 역사의 교육의 목적을 뒤집어 엎어놓은 것이다.

해방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자유는 역설적으로 다시 자아가 성령에 기속되어 부름 받은 종의 신분으로 이어진다. 이는 창조적 자유이다!!! 참된 자유를 수호하고자 자기의 자유를 제한시키고 사랑의 종이 된다.

진리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셨다. 진리를 삶의 지표로 삼고 가는 사람은 감사하며 겸손히 섬긴다.

인간창조의 목적

이 적극 적 자유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14:7).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으로 창조되었다(고전 11:7). 하나님께 영광광 찬송을 돌리도록 창조되었다(1:14).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5:16).

첫째 천사의 메시지는 이 창조적인 자유를 자기의 삶으로 구현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도리는 것도 포함된다. 세계적인 어느 석학이 어느 교회에 나오면서 자기가 할 일은 무질서하게 놓인 신발을 정리하는 것으로 일고 봉사한 미담이 전하여 온다. 안식일 점심식사를 열심히 준비하는 여 집사님들과 설거지하는 장로님들 모습은 아름답다. 밥맛이 난다. 자기 시간과 재물을 바쳐가며 섬기는 곳이 교회이다. 이것이야 말로 섬김을 받고자 오신 것이 아니요 섬기려고 오신 우리 주님이 걸어가신 발자국을 따르는 제자의 길이다.

하나님의 신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므로 이 적극적 자유를 행케 하신다(3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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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