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성소가 실재하는가?
하늘 성소가 실재하는가?
성소론 교리는 재림교회의 정체성을 표명하는 중추적 교리가 되어 왔다. 특히 하늘 성소에 관한 올바른 이해는 재림교회의 신앙의 기초가 된다. 이 사실을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다.
“하늘 성소에서 사람을 위하여 진행되는 그리스도의 중보 사업은 구원의 경륜에 있어서 십자가상에서의 그분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본질적이다. ”(쟁투, 489)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을 불러 이상 또는 꿈을 통하여 하늘에 관한 것을 보여 주셨다(민 12:8). 이 예언자의 이상과 꿈에는 많은 상징이나 영상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그 상징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예언이나 표상의 의미를 오히려 모호하게 전락시켜 버린다.
예언자들은 자기들이 본 상징들을 대부분 설명하지 하지 않은 채 묘사하여 왔다. 예컨대, 엘렌 화잇은 사단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묘사한 바 있다.
“사단이 보좌 곁에 나타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하려고 했다. 그들은 보좌를 쳐다보며 ‘아버지여,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부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 사단이 그들에게 거룩하지 못한 영력을 불어넣어 주었는데 그 안에는 빛과 큰 능력은 있었지만 자비로운 사랑과 기쁨과 평안이 없었다. 사단의 목적은 그들을 속이고 꾀어서 그들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미혹케 하려는 것이었다.”(초기, 56).
이 진술을 두고 비판이 일자 화잇은 후에 다음과 같이 해명하였다.
“나는 또한 ‘사단이 보좌 옆에서 하나님의 사업을 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기록하였다. 같은 쪽 다른 구절에 ‘나는 아직도 보좌 앞에 엎드려 기도하던 무리를 돌아보았다’고 기록했다. 이 무리들은 보좌 앞에 꿇어 엎드려 죽을 육신을 쓴 이 땅위의 사람들이었다. 나는 결코 이 사람들이 새 예루살렘의 거민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나는 사단이 실제로 새 예루살렘에 있다는 사실을 내가 믿었다고 추측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지도 않았었다. 나는 사단이 실제로 새 예루살렘에 있다는 사실을 내가 믿었다고 추측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지도 않았었다. 요한도 하늘에 커다란 붉은 용이 있음을 보지 않았던가? “또 하늘에 다른 이적이 있으니 볼지어다 일곱 머리를 가진 붉은 큰 용이 있어”(계 12:3). 하늘나라에 괴물이 있다니! 내가 기록한 이 구절이 나의 저서를 평하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조롱할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는 듯하다.”(초기, 92).
예언자들은 계시를 받는 중에 자주 실재적인 것을 대표하는 것을 보지만 그 본 것이 사실 그 자체가 아닌 것이다. 모세가 지상성소에 관하여 기록한 것을 보면 4회씩이나 산에서 보여준 패턴(式樣, tabnit)에 따라 성소를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다 (출. 25:9, 40; 26:30; 27:8). 모세가 본 것은 기구들이 갖추어진 두 칸의 텐트 이었다. 모세가 지시를 받아 만들게 한 것은 천막식 성소이었다. 그렇다고 하늘에 천막식 성소가 있다는 의미가 아닌 것이다.
솔로몬 성전은 다윗이 하나님으로 받은 지시에 따라 건축된 성소이다.
“다윗이 전의 낭실과 그 집들과 그 곳간과 다락과 골방과 속죄소의 식양을 그 아들 솔로몬에게 주고 또 성신의 가르치신 모든 식양 곧 여호와의 전의 뜰과 사면의 모든 방과 하나님의 전 곳간과 성물 곳간의 식양을 주고”(대상 28:11-12).
“다윗이 가로되 이 위의 모든 것의 식양을 여호와의 손이 내게 임하여 그려 나로 알게 하셨느니라”(대상 28:19).
그렇다고 다윗이 지시 받은 대로 지은 솔로몬 성전처럼 하늘에 돌로 건축된 성전이 있다는 뜻인가? 우리는 그렇게 신봉하지 않는다. 하늘에 성소가 있긴 하지만 그것은 하늘에 있는 재료로 건축된 것이지 지상의 재료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하늘성소는 인간이 만든 지상 천막식 성소나 돌로 축조된 성전과 비교하면 훨씬 더 크고 광대하며 훨씬 더 아름다운 모습이다. 모세와 다윗에게 보여진 성소는 하늘 성소의 지상적 모델에 불과하다. 하늘성소는 모세나 다윗이 살았던 시대와 지리적, 환경적 상황에 맞추어 건축하도록 적응시킨 그 지상적 대표라고 할 수 있다. 하늘 성소는 성막이나 돌 재료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하늘 용적이나 크기에 따라 된 것이다.
“손으로 지은 성소는 “참 것의 그림자”요,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히 9:23, 24)이다. 즉 우리의 대제사장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생명을 희생 제물로 바치신 후 죄인을 위하여 봉사하기로 되어 있는 하늘 성소의 축소판(축소형 모델)이다”(부조, 343).
엘렌 화잇은 하늘 성소를 두고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봉사하시는 하늘에 있는 성소는 큰 실체(實體)이며, 모세가 지은 성소는 그것을 모방한 것이었다”(쟁투, 413-414).
“이와 같이 찬란한 지상의 성막은 우리 앞서 가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서 봉사하시는 하늘 성소를 인류가 볼 수 있도록 해주신 것이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을, 수종하는 자가 천천이요 시위하는 자가 만만이나 되는 만왕의 왕이 거하시는 곳(단 7:10참조), 그 시위하는 영화로운 스랍들이 경배하고 머리를 숙이는, 영원한 보좌가 있는, 영광으로 충만한 하늘 성소와 비교하면 그것이 아무리 화려하고 장엄한 건물일지라도, 그 무한한 영광과 웅장함에 대한 극히 희미하고 미약한 반영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는 지상의 성소와 그 봉사를 통하여 하늘 성소에 관한 중요한 진리와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거기서 진행되는 주님의 봉사를 배우게 되었다”(쟁투, 414).
지상성소는 하늘성소의 “무한한 영광과 웅장함에 대한 극히 희미하고 미약한 반사에 불과하다. ”하늘 보좌실, 즉,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정부의 통치본부에는 시위하는 천사들이 천천이요 만만인데 지상 성소가 어떻게 이를 다 담아 낼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초월적 세계를 인간 언어로 묘사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하늘 성소를 신화적으로나 영적으로 풀어가는 이해 방식에서부터 탈피하여야 한다.
신구약 성경에는 하늘 그 자체가 하늘 성소 또는 성전이라고 하고 있지도 않다. 하늘 안에 하늘 성소가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The Lord’s throne is in heaven)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시 11:4).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who is seatedat the right hand of the throne of the Majesty in the heavens) 2 성소와 참 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히 8:1-2).
신구약 성경 기자들은 하늘에 있는 하늘 성소의 실제성을 확고하게 신봉하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그 어디서도 하늘 그 자체를 성소와 동격으로 보고 있지 않다. 그들은 하늘과 성소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하늘성소의 크기를 투시하는 묘사를 이렇게 하고 있다.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계 5:11).
엘렌 화잇은 이를 두고 확실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요한은 하늘에 있는 성소를 보았다고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봉사하시는 성소는 참 성소이며 모세가 지은 성소는 그것의 모형이었다. 만왕의 왕께서 거하시는 하늘의 성전에는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단 7:10), 그 성전은 영원한 보좌의 영광으로 충만하였다. 빛나는 수호자인 스랍들이 경외심을 가지고 그들의 얼굴을 가리우는 그 곳은 지상의 어떠한 건물을 가지고도 그 크기와 영광을 나타낼 수 없다. ”(부조, 357).
그러면 하늘 성소는 지상 성소처럼 두 칸으로 나뉘어져 있는가? 스데반과 바울이 본 하늘 성소 모습에 비추어 보면 그 답은 ‘아니다’로 보아야 한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행 7:55-56).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이런 시각은 에베소서1:20도 나오고 있다. 히브리서에는 이 점을 분명하게 제시하면서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성소 봉사의 완전함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 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히 9:24).
무어(Marvin Moore)도 하늘 성소에는 한 칸 밖에 없다고 한다. 예수께서 대제사장의 일을 하시며 날마다 아버지 앞에 나아가는데 가운데 휘장 있을 필요가 없다고 한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들어가신 하늘 성소에는 하나의 칸 밖에 없다는 것이다. [Marvin Moore, The Case for the Investigative Judgment: Its Biblical Foundation (Nampa, Idaho: Pacific Press Publ. Assn., 2010), p. 277.).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 집, 곧 하늘 성소에는 거할 곳이 많다고 했다(요 14:2). 이는 하늘 성소에 많은 방이 있다는 암시도 들어 있다. 그러나 성소를 그리스도의 승천 후 이어지는 중보사업 시각에서 본다면 지상성소처럼 하늘 성소의 두 칸을 상정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하늘 성소에 휘장에 있다는 진술이 있다고 해도 그 휘장은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를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다. 성경과 엘렌 화잇이 하늘 성소에 두 칸을 이야기한 의도를 하늘 성소의 지리학적 묘사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두 칸이 지닌 상징적 의미인 그 역할과 기능에 있다는 점을 중심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봉사가 두 큰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하늘 성소에서 각 봉사마다 일정한 시간과 구별된 장소를 가지는 것처럼 이 지상의 예표적인 봉사도 매일의 봉사와 연례적인 봉사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고 각 봉사에 성막의 한 칸 씩이 바쳐졌다”(부조, 357).
예수 그리스도의 하늘성소 봉사의 두 국면에 그 초점을 두어야지 하늘 성소의 건축 구도에 역점을 두어서는 안 된다.
하늘 성소에 대한 인간의 완전한 이해에는 한계가 있다. 유한이 무한을 품을 수 도 없고 다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 하늘성소는 인간의 그 어떤 건축물과도 비교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오묘한 진리를 이해시키고자 하는, 즉, 하나님의 인간 구속을 위한 영원한 진리가 담겨 있는 성경 진리의 총화 관점에서 하늘 성소를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리하여 성막과 후에 그 대신 성전의 봉사에서 백성은 날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봉사에 관한 위대한 진리를 배웠고 해마다 한 번씩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의 대쟁투의 종국의 사건들 곧 우주에서 죄와 죄인들을 최종적으로 제거하는 사건에 그들의 마음이 이끌려갔다”(부조, 358).
(이 글은 전화로 하늘성소가 실재하느냐고 물어 온 분에게 대답한 내용이다. 2014년 Perspective Digest - a publication of the Adventist Theological Society, Volume 19, Issue 3에 게재된 Gerhard Pfandl의 “The Reality of the Heavenly Sanctuary”를 많이 참조하여 작성하였다. 그러나 동의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하여서는 필자의 시각에 따라 수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