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에 관한 엘렌 화잇 여사의 입장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에 관한 엘렌 화잇 여사의 입장
1888년 미네아폴리스 회의기간 동안 주어진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기별과 관련하여 엘렌 화잇 여사는 다음과 같은 논평을 하였다.
“1844년 이후 엘렌 G. 화잇 여사가 제시해 왔던 진리 ― 이 집회에서 나는 율법과 연관된 그리스도의 의의 위대한 주제를 제시함을 통해 가장 고귀한 빛이 성경으로부터 비춰 나왔으며 그것은 죄인의 앞에 구원의 유일한 희망으로서 끊임없이 제시되어야 함을 증언했다. 이것은 내게 새 빛이 아니었다. 이는 내게 지난 44년 동안 보다 높은 권위자로부터 이것이 주어졌기 때문이며 나는 그분의 영의 증언을 통하여 펜과 목소리로 우리 백성에게 이것을 제시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주제에 대한 증언에 동의한 몇 사람들 외에는 이에 대해 호응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이 위대한 문제에 대하여 말해지고 쓰여진 것이 매우 적다. 어떤 이들의 설교는 그리스도가 없는 가인의 제물과 같다고 묘사해야 옳을 것이다.”(3기별, 168-169).
화잇 여사는 미네아폴리스 총회를 마치는 날(1888년 11월 4일)에 가족 중의 한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편지는 미네아폴리스 총회에 대하여 내린 화잇 여사의 평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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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우 자유롭게 20회 가까이 말했으며 우리는 이 집회가 매우 좋은 결과를 가져오리라고 믿는다. 우리는 미래를 모르지만 예수께서 키를 잡고 계심을 느끼며 파선하지 않을 것이다”(3기별, 177-178).
화잇 여사는 솔직한 언어를 구사하여 이렇게 쓰고 있다. “한 사람의 병든 마음이 대총회 회의에 지배적인 능력을 행사하였으며, 목사들은 그것이 건전하고 사업에 좋은 것이라 하여 버틀러 목사의 그림자와 메아리가 되어갔다. 시기, 악한 추측, 질투가 누룩처럼 작용하여 온 덩어리가 발효된 듯하였다…”(3기별, 178).
1888년 전후하여 나타난 세 가지 이해 방식
노장측과 그 지지자들의 충돌적인 인품,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율법, 열 뿔에 해당되는 나라들의 정체 – 이런 문제점들이나 이슈들을 넘어서 소장파 측이 제시한 죄인이 구원 받은 길에 관한 이슈가 보다 더 근본적인 이슈가 된다. 여기서는 이에 관하여 세 가지로 각각 다르게 이해하거나 접근한 방식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전통적 이해 방식
첫 번째 이해방식은 이른바 전통적인 견해(traditional view)이다. 이 견해는 1888년 이전 30여 년 간 발전되어 온 시각이다. 이는 1888년 총회 후 약 6개월 후 Uriah Smith가 1889년 6월 11일 자 Review and Herald 지에 기고한 논설문 “우리들의 의(Our Righteousness)”에 잘 나와 있다. 이 견해는 1888년 총회에 참석한 대표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에 관한 이해를 들어낸 것이다. 이 견해는 1888년 미네아폴리스에서의 웨고너와 존스의 가르침을 반박하는 의중을 들어낸 것이다. 그 기본적 특색은 율법폐기론적 공격으로부터 율법을 보호하고자 하는 논증을 끼워 넣는데 있었다. 논설문 처음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서 재림 신도들로부터 존경 받은 James White의 글을 인용하므로 논조의 신빙성을 높이고자 하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그러면서 그는 은근하게 제임스 화잇과 엘렌 화잇의 견해 차이를 들어내고자 하고 있다. Smith가 제시한 몇 가지 대목을 다음에 인용한다.
“율법은 신령하고, 거룩하고, 의로운 것으로 의의 신적 표준이 된다.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은 의를 발전시킬 것으로 그것은 인간이 의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연합을 깨트렸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순종의 길로 돌아오기 전...주어지는 본성으로 감염되어버렸다....그리스도께서 오시어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이 심연을 잇고자 희생제물을 드림으로 과거의 죄를 없애고 새로운 신령한 본성을 제공하신다.”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의 전 목표는 우리로 하여금 율법으로 돌아오게 하는데 있어야 하며 우리의 율법에 향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그 의가 성취되게 함에 있다. ...우리가 천국을 보기 위하여 ‘우리의 의’라고 일컬어지는 의를 지녀야 한다. 이 의는 하나님의 의와 조화되는 상태에서 온다.”
스미스는 자기의 논증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우리가 지녀야 되는 의는 계명을 행하고 가르치는 것으로 확보된다.” 논설문이 여러 가지로 묘사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하는 점은 의의 과정에서 그리스도의 개입의 위상은 개개인이 실행하는 모양새를 고양하는 점에 비교하여 낮다는 점이다.
이 논설문은 1888년까지의 대부분의 재림신도들 의식 저변에 깔린 사상을 대표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전통적인 시각에 대하여 웨고너가 1888년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었다. 물론 그는 1888년 직전에 이미 문제를 제기하여 물의를 일으킨 바 있었다. 그래서 스미스의 논설문이 출판 된 직 후, 사람들이 화잇 여사에게 스미스의 논설문에 대한 논평을 요청하는 질문들을 보냈다. 당시 화잇 여사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에 관한 일련의 부흥집회를 이끌어가고 있던 중이었다. 질문에 대하여 화잇 여사는 ‘스미스 씨는 자기가 진술하고 있는 것을 잘 모른다“고 딱 잘라 말하는 반응을 보여주었다. 이런 점에 비추어 1888년 이후에도 스미스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에 관하여 아직도 비타협적인 태도를 확실하게 보여준 것을 시사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에 관한 선구자들의 전통적인 견해는 칭의에 대한 객관적 견해를 강하게 견지한 형태이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는 루터가 주장한 것처럼 인간 밖에서(outside of man), 인간을 위하여(for man), 인간의 행위 없이 행하여 진 점에 역점을 두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 나아오는 죄인을 의롭다고 선포하는 신적인 행위이다. 죄책을 짊어진 죄인은 아무 공로도 없어 무죄하신 그리스도께서 속죄를 통하여 죄인과 대치(또는 置換)하신 결과 결코 이전에 죄를 범하지 않은 신분을 받는다. 이것이 전가(轉嫁), 즉, 입혀주신 칭의가 된다.
선구자들에게는 그러한 칭의는 회개한 죄인들에게 이루어진 하나님의 처음 무차별적, 포괄적인 행위에만 국한된 것으로 죄인을 과거의 죄로부터 전적으로 정결시킨 것으로 품성에는 적용이 안 된다고 보았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는 과거를 정화시킨 것이어서 죄인을 천국 문지방에 세운 단계로 이제는 앞으로 방해 받지 않고 전진해 갈 수 있는 지점이 된다. 그러한 칭의는 구원을 위하여서는 아직 충분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이제 앞으로 정결단계로 향한 예비 단계일 뿐이다. 대총회 고문서실 연구관인 Bert Haloviak에 따르면 이 단계는 하나님 앞에서의 수동적 단계에 속한다. 이 전통적 입장은 칭의의 대리적, 객관적(현대적 표현으로는 ‘법정적’) 진술에 해당된다.
칭의는 성화의 앞 현관일 뿐이다. 성화에서는 의롭게 된 인간이 성령의 내주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칭의가 과거에만 적용이 되기 때문에 구원의 초점은 아무래도 성화일 수밖에 없다. 이 성화에서는 바울이 말한 것을 잘 못 인용하여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에서 품성의 변화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중심관심사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과거에 행하신 것으로부터 인간이 하나님과의 협력할 수 있는 것으로 옮겨 간다. 이런 점에서 의는 순수한 행위의 의가 아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사역은 최소한으로 축소되고 인간의 협력에 강세점을 두고 있는 의가 된 셈이다. 스미스 목사가 “우리들의 의”라고 한 표현이 꼭 행위에 의한 구원을 신봉한 것은 아닐 것이다. 더구나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에 관한 그의 진술을 살펴보면 외양적으로는 그리스도교 정통적 인식의 옷을 입혀 놓은 셈이다.
2. E.J. Waggoner의 이해 방식
E.J. Waggoner는 그의 부친 J.H. Waggoner는 칭의 교리를이어 받아 설명하고 있다. 칭의는 인간을 위한 사역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칭의를 완성시키기 위하여 인간 안에서 행하는 사역이다. 징벌(penalty)을 대치자 위에 놓는 행위는 율법의 위엄성을 옹호하는 반면에, 마음 내지 성향의 변화, 생활의 철저한 수정이라는 미래가 요청하는 것을 보증해 줄 뿐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는 이 모든 것을 포용한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부족하다면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 질 수 없다.
칭의는 단순히 신자의 법적 변화 이상이다. 각인이 일단 죄를 범하면 그는 더 이상 율법을 행하는 자가 아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칭의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에게 과거에 지은 죄를 제거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된다. 용서 받은 사람은 죄를 범하지 않은 것처럼 된다” ("The Lord's prayer," ST 13 (may 5, 1887): 263.). 그러면 어떻게 의롭게 되는가? 웨고너는 그리스도의 의가 그러한 죄를 취하여 감으로 사면되었다고 한다. 이 방법으로 인간의 전 생명이 하나님의 율법과 완전히 조화되는 것‘이라고 한다.(“Justified by Faith," ST 12(March 25, 1886):183).
인간이 의롭게 되자면 그는 죄를 정죄하는 율법의 공의를 알아야하고 죄를 회개하여야 하며 율법에 대한 순종을 약속하여야 한다.(ibid 184). 화목의 행위는 인간 편에서 하나님의 요구에 순복하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화목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을 포함한다. 그것은 죄된 옛 생활을 벗어 던지고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므로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되는 것이다.
미국에서 1880년대 일요일법 법제화 운동과 종말이 임박하였다는 강한 의식 기류가 감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회심한 재림신도들이 위로 향하는 성화의 과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할 권능을 받을 것이라는 사상과 특별한 백성이 된다는 것은 매력적이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목적에 걸 맞는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 할 것이며 승천 준비를 다할 것이다. 칭의는 과거를 정리하고 현재 품성의 변화를 이루어 앞으로 주의 오심을 준비케 하는 것이다. 요컨대, 구원은 하나님의 율법에 충성스러운 순종하는 중 전 과정의 절정에 이르게 한다.
1888년 이후 웨고너와 존스의 일련의 믿음의 의의 주제를 강력하게 펼치어 북미주 교회를 부흥시켜 갔다. 이들 믿음의 의의 기수들의 신학적 사상은 인간 행위 중심으로부터 그리스도의 활동을 중심으로 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 옮겨 갔다. “우리의 의”라는 표현 대신에 그리스도의 의가 강조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는 인간의 과거의 죄를 바로 잡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현재적 삶에 이어지고 있어, 인간의 공로가 율법 순종으로 획득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로부터 전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신학적 변화는 半펠라기우스주의 내지 아르미니우스적 입장으로부터 아우구스티누스적 내지 개혁파적 입장으로의 경도(傾度)라고 볼 수 있다. 존스의 메시지를 한 마디로 압축한다면 의란 하나님의 선물임과 동시에 생명이어서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얻으려는 시도는 실패를 자초할 뿐이라는 것이다(A.T. Jones Sermon, 1889, Ottawa, Kansas).
존스와 웨고너의 메시지를 예리하게 고찰 분석한 Haloviak는 이들 믿음의 기수들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 즉 그리스도의 의가 인간에게 전가된다는 때 나오는 용어인 “impute” 사용함에 있어서 혼동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 두 믿음의 의의 기수들은 이 단어를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라고도 하고, 동시에 그 의를 개인에게 주입된다고도 한다. 개인적인 순종이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만 그것은 개인의 행위가 아니고, 오히려 개인에게 “믿음의 행위”로 돌려 준(credited)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므로 종교개혁자들이 순수하게 객관적인 의미로 본 “impute”를 주관적인 것으로 사용하게 되어 그 의미를 모호하게 변질 시킨 셈이 된다. 이렇게 주관적 의미로 전용 변질시킨 것은 용서라는 것을 한 개인 안에서 일어나는 거래로 전락시키는 결과가 된다.
이런 논리적 혼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칭의와 성화의 활동의 중심점을 인간으로부터 그리스도에게로 옮기고 그리스도의 선물로 본 점은 믿음의 의에 관하여 문제점이 심각한 전통적인 신학적 해석을 바로 잡는 역할을 하여 환호를 받은 것이다. 전가된 의가 과거를 덮는다 할지라도 구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척도는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것에 있다. 이는 그동안 인정 받아온 완전한 표준으로서의 하나님의 율법을 거스른 척량 과정이어서 얼마만큼 표준에 잘 충족시켰는지 여부를 고려해야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 확인 결과는 노상 절망스럽기만 하다. 율법과 인간의 행위 사이를 대비하여 보면 아무리 좋은 환경 아래에서라도 항상 간극이 있기 때문이다. 그 목표는 영원히 파악하기 어렵다. 특히 감성적 기질의 인간에게 그렇다. 칭의와 성화가 그리스도의 공로에 기초를 두고 있고 선물로서 임한다고 하는 메시지는 문제를 해소시킨다. 복음에 관한 이 새로운 이해는 그렇게 달콤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는 특징을 지녔다. 그래서 이 메시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새로운 국면을 전개시킨 것이다.
이미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웨고너와 존스의 신학은 1888년에서 보다는 오히려 그 이후 이어지는 여러 해 동안에 계속적으로 주관적 과정을 발전시켜갔다. 동 교리의 핵심은 하나의 주입물(infusion)로 그리스도의 믿음이라고 일컬어지는 권능에 의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에게 몰려(침입하여) 들어가(invaded) 신자 안에서 선량한 행동을 하게 하는 상태라고 가르친 점에 있다. 존스의 표현을 빌리면 “그리스도의 선량함이 신자에게 임하여 신자를 선하게 하거나” “권능이 신자에게 임하여 신자를 의롭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침입 권능이 객관적인 용어들로 구사되어 있다 해도 주관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상은 처음에 광범위하게 수용되어 확산되어 가는 중 관통, 침입하는 힘이 신자 안에서 때에 맞게 만개하여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방식으로 신자들의 신체가 거룩하게 된다는 방향으로 나갔다. 그리하여 복음의 진수는 새 christs의 창조, 즉 새 화육들이 된다는데 있다. 즉, 예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사실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범위 안에 당신 자신을 두셨다는 것이다. 이는 믿음의 의의 기수들이 사용한 언어가 양적으로 되어갔다는 뜻이다. 존스는 설교문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드디어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신적 본성을 지녀, 화살이 과녁을 맞힐 만큼 강력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할 수 있게 되었다...하나님의 계명을 사실상 준수할 수 있는 날이 이를 때 우리는 결코 죽지 않게 될 것이다. 계명을 지키는 것이 의가 되고 의와 생명은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May 18, 1889).
3. Ellen White의 이해방식
화잇 여사 견해는 위에서 살펴 본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에 관한 두 개념을 어떻게 보았으며 그 위상은 어디쯤에 놓여 있는가? 그는 과거의 죄에 관한 칭의 개념과 행위에 역점을 둔 성화 사상을 전개한 스미스의 “우리들의 의”에 관한 전통적 입장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가 1888년 미네아폴리스에서의 웨고너의 메시지를 지지하였지만, 웨고너의 신학 편에서도 빛을 보지 못하였다고 논평하였다.
그러나 화잇 여사는 1888년 제시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메시지는 율법을 격하시키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못 박았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유일한 힘의 근원으로 높이며 인간의 죄책을 그분에게 부과함과 그분 자신의 의를 인간에게 입혀 줌을 통하여 그분의 비할 데 없는 사랑을 제시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율법을 폐기하거나 그 권위를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율법을 올바른 빛이 비취는 곳에 놓고 영화롭게 한다. 이것은 갈바리의 십자가로부터 반사되는 빛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율법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구주로부터 비추는 빛 안에서 제시될 때에만 구원의 위대한 계획에 있어서 완전하고 충만하다. 이것은 영적으로라야만 분별될 수 있다. 그것은 바라보는 자들의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그의 의라는 열렬한 믿음, 소망, 기쁨을 불붙인다. 이 기쁨은 예수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지키는 자들만을 위한 것이다”(3기별, 176-177).
화잇 여사는 미네아폴리스 총회 이후 이어지는 3년 동안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를 자주 언급하였다. 그리고 그가 남긴 글들에서도 동 주제를 다루고 있다. 화잇 여사는 죄인이 의롭게 된다(are justified)는 것, 즉 객관적으로 의롭게 되고(made righteous), 인간이 내적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 것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치자(substitute)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받으신 것이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받으신 것이 아니다. 이 점은 우리가 성령의 권능에 힘입었다 해도 그렇다.
“칭의는 죄에 대한 충분하고 완전한 용서이다. 죄인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그 순간 그는 용서를 받고 그리스도의 의가 그에게 입혀진다.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화잇주석, 롬 3:24-26).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하나님 앞에서 정죄 받지 않는 자로 선다. 그리스도의 의가 그의 의가 된다.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순종이 그에게 전가된다.”(FE 429). 여기에서는 그리스도의 권능 아래에서 의로운 행위를 해야 한다는 언급이 없다. 죄인 밖에서 이루어진 행위가 있을 뿐이다.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를 신자에게 전가시키시며 온 우주 앞에서 그를 의롭다고 선언하신다”(1기별, 392). 의에 도달하기 위하여 행하신 분은 그리스도이지 신자가 아니다.
물론 화잇 여사 회심의 경험에서 변화시키는 특성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하시는 행위에 대한 반응이다. 혹자는 이것이 칭의라고 하면 성화란 무엇이냐고 물을 것이다. 이에 화잇 여사는 용서 다음에 따라오는 단계를 다음과 같이 응답하고 있다. “이루어져야 될 또 다른 사역이 아직 있다. 이것은 발전적인 특성에 속한다. 영혼은 진리를 통하여 성화되어야 한다. 이 것 또한 믿음을 통하여 성취되는 것이다. 품성이 변화될 수 있는 것은 믿음을 통하여 우리가 받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하여서 만이다” (ST Nov. 3, 1890).
화잇 여사는 신학적인 미세한 것들에 대하여 따지는 일을 두고 適宜한 경고를 하고 있다.
“칭의와 성화 간의 미세한 구별점들을 엄밀히 정의해 보려는 잘못을 범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 두 용어의 정의에다 자신들의 생각과 사색의 소산을 덧붙이는 경우가 더러 있다. 영감의 말씀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관하여 정의한 것보다 왜 더 자세히 정의하려 하는가? 마치 영혼의 구원이 이 문제에 대한 그대의 이해 여부에 좌우되기라도 하는 것같이 무엇 때문에 모든 세부 사항을 다 풀어내려 하는가? 모든 사람이 다 같은 선상에서 볼 수는 없는 법이다”(원고 21, 1891; 화잇주석, 롬 3:24-28).
화잇 여사가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것은 그리스도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데 있다.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신자들이 선한 삶을 살도록 인도 받을 때 칭의와 성화가 모두 그리스도의 선물인 것이다.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은혜 사역인 칭의는 처음 믿을 때에만 일어나는 대 전환인 단회적인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대 전환이 일어난 후에도 현재와 미래 시제도 있는 평생 소 전환들이 계속되어가는 그리스도의 은혜 사역이다. 이 점은 다음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가 예수께 더욱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분의 품성의 순결을 더욱 분명히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욱 더 죄의 극악함을 알게 되고 자신들을 높일 마음이 더욱 더 적어질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계속적인 영혼의 발돋음, 계속적이며 열렬한 죄에 대한 마음을 찢는 회개와 그분 앞에 마음을 겸비하게 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우리의 그리스도인적 경험에 있어서 진보의 매 발걸음마다 우리의 회개는 깊어질 것이다”(행적, 561).
성화도 그리스도의 은혜사역이다. “인간은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어야 한다. 그 때 그리스도의 의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죄 없이 설 수 있다”(Ms. 5, 1889). 그러나 화잇 여사는 존스가 의의 길에서 어떤 조건도 없다고 강조하는 것을 배격하면서 “우리가 의롭다 하심과 거룩하게 됨과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는 데는 엄연한 조건들이 있는 것입니다”(1기별, 377) 한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거룩함의 길에는 “인간이 하나님께 의지를 바친 후 하나님으로부터 의지를 다시 받아야 한다”(MB 62). 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의지로 하나님과 협력하여야 한다. 성화 사역에 있어서 복음적 협력은 품성형성의 관건이 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재능과 능력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일하시며 그분이 인간에게 나누어 주신 재능과 함께 협력하신다. 그러므로 인간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사업을 함으로써 승리자가 되어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믿음, 26)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인간의 협력이 없이 인간을 위하여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자기를 이기는 위대한 일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아무것도 없다는 견해를 나타내지 말 것이다. 또한 그대들이 인간적인 최선을 다한 이후에 예수님께서 그대들을 도우실 것이라고 말하지도 말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말씀하셨다.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은 하나님과 동역자가 되어야 한다. 성령께서 인간의 심령에 역사하시지 않는 한, 우리들은 매 발자욱마다 걸려 넘어질 것이다.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으며 무가치한 것이다. 다만 그리스도와의 협력만이 승리를 의미한다”(1기별, 381).
화잇 여사는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면서도 상호 분리할 수 없는 관계로 보았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이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성화라고 볼 수 있으리만큼 양자 공히 계속되어지는 그리스도의 은혜사역으로 보았다.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는 노장측이 주장한 전통적 이해인 율법 순종에 역점을 둔 객관적, 형벌 대치적 속죄도 아니고, 정도를 일탈한 소장측 웨고너와 존스가 복음을 내적, 주관화시킨 가르침도 아니다. 그 대신 화잇 여사는 칭의와 성화에 있어서 예수의 공로를 모든 최고선의 원천으로 높이는데 있다. 구원하시고자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하시는 은혜를 허락, 시여하시는 것을 고양하였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이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성화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만 얻어진다. 여호와의 율법을 고의적으로 짓밟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성결과 생애의 성화를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나 그분의 율법에 관한 구원의 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 (RH, March 8,1881).
엘렌화잇 여사는 1890년에 기고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나는 이 문제를 어떻게 사실 그대로 제시할 수 있을지 묻는 바이다. 주 예수님은 역시 하나님의 선물인 산 믿음으로 인간이 당신의 의를 붙잡을 수 있도록 제시해 줌에 있어서 모든 능력과 모든 은혜와 모든 회개와 모든 성향과 모든 죄의 용서를 주신다. 만일 그대가 사람에게 있는 선하고 거룩하고 고상하고 사랑스런 모든 것을 함께 모아서 그것들이 인간의 영혼의 구원이나 공로에 한 몫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천사들에게 제시한다면 그 제안은 반역으로 간주되어 배격당할 것이다. 천사들은 그들의 창조주 앞에 서서 그분을 두르고 있는 비길 데 없는 영광을 바라보면서 창세 이후로 굴욕의 생애가 주어진 하나님의 어린 양이 죄 많은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시고, 멸시를 받으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셔야 했던 것을 보고 있다. 어느 누가 그 무한한 희생을 측량할 수 있겠는가!”(믿음, 24).
화잇 여사가 1888년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에 관련하여 특히 수없이 강조한 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신학 이론적인 사상으로만 접근하면 안 된다고 하는 점에 있다. 웨고너와 존스가 다분히 이론적, 체계적 접근을 하고 있는 점에 대비하여 화잇 여사는 삶의 현장에서 살아 있는 체험적, 실용적 접근을 하여 구원하는 믿음(saving faith)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하는 참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한다....신조는 신뢰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신뢰에서 생성된 확신은 믿음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권능에 관한 지식이 주어진 모든 죄인들은 체험 중에 전진할 때 더 큰 정도(등급으)로 이 신뢰를 나타낼 것이다”(ST Nov 3, 1890).
“산 믿음은 작은 의무들을 수행하는 매일의 경험에 황금실처럼 얽혀져야 한다”(6T 171).
화잇 여사는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는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복음적, 영적 완전한 신뢰가 매일의 삶의 현장에 이어지는 일에 주 관심을 둔 것이다. 따라서 교리적 명료성이 화잇 여사의 종국적 목표가 아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라는 영적 필요성을 신자들의 실존적 반응으로 연계시키는 일을 중시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진술에는 루터가 그랬던 것처럼 역설적인 것과 긴장이 함께 나타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 영적인 체험이야 말로 생명선이 되고 죄악이 기득찬 현재를 살아가가는 힘이 될 것이며 미래를 열어가는 희망이 될 것이다. (이 자료는 대총회 성경연구위원회 소장을 역임한 George W. Reid 박사의 ‘Ellen White and Minneapolis’에 대부분 의존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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