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딸의 헌신
서출의 고통
사람이 출생하는 일은 본인의 선택의 결과가 아니다. 첩의 자식으로 태어난 경우 주변의 차별, 구박과 제도적 배척으로 인한 고통과 서러움이 예나 지금이나 심각하다. 이는 출생자의 운명인가? 주먹 왕 김두한과는 다른 길이지만, 길르앗이 기생을 통하여 낳은 입다는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서출(庶出)이 이런 불운을 돌파하자면 싸움꾼이라도 되어야 살게 마련이다. 싸움꾼으로 성장한 입다는 돕 으로 가서 살면서 힘을 길렀다. 당대 버림받은 사람들, 사회적으로 괄시 받는 사람들은 그를 카리스마가 있는 지도자로 떠받들었다. 고통은 또 다른 희망의 출구가 되기도 한다.
주먹보다는 평화와 말씀 선호
그렇다고 입다는 주먹으로만 산 것 같지 않다. 한 때는 자기를 배척한 동족 지도자들이 그에게 외적 암몬의 침입을 막아주면 자기들의 지도자로 모시겠다고 한 제의를 수용하여 그가 펼친 외교 역량을 발휘하여 평화적 해결책을 모색한 것을 보면, 싸움 위주의 인물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그가 조국의 지나간 역사적 사건들을 일목요연하게 전개하여 에돔 왕의 요구의 부당성을 명료하게 제시한 점을 보면, 그는 역사의식이 투철하고 시대를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 자기 변론의 정당성을 판결하여 달라고 기도한 것을 보면(삿 11:27) 그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신앙의 사사(재판관)이었다.
성령은 말씀의 수레를 타고 오는 것이 상도(常道)이다. 구약성경의 역사를 해박하게 펼친 그의 말씀 강론의 수레를 타고 “여호와의 신”이 임하였다(삿 11:29).
그는 하나님 백성이란 언약 백성이란 점을 깊게 의식하였다. 그래서 바락이나(삿 4장), 기드온처럼(삿 삿 6-7장) 곤경에 처한 민족의 안전보장을 위하여 하나님께 서원한 것이다.
서원기도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가로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붙이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whatever)’ (NKJV)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삿 11:30-31).
우리말 번역 ‘누구든지(whoever)’보다는 NKJV의 ‘whatever(무엇이든지)’ 번역이 더 어울린다. 물론 whatever 의미에는 whoever 의미도 포함되어 있지만, 해석상 선택의 여지를 더 넓게 하여주어 바람직하다. 입다는 번제를 위한 희생제물의 선택의 여지를 여호와께 남겨 놓았다. 입다는 “내 집 문에서 나와서“라는 표현에서 꼭 종과 같은 인간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다. 오늘날 고고학자들은 당시 요단 동편에 거주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집 문 어구에 동물들을 매두었다고 한다. (입다는 당시 요단 동편 돕(Tob)에 거주하였다.)
문제는 입다가 승전하고 집에 돌아 왔을 때 터졌다. 무남독녀 딸이 전승하고 돌아온 아버지를 맞이한 것이다.
또 하나의 모리아 산 이야기
“입다가 미스바에 돌아와 자기 집에 이를 때에 그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35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하여금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36 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37 아비에게 또 이르되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용납하소서 내가 나의 동무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삿 11:34-37).
승리의 기쁨이 변하여 슬픔이 되었다. 아버지의 서원 내용을 들은 딸은 어찌 당혹스럽지 않았을까! 자기 인생이 여기까지라고 생각한 딸의 마음 속에 소용돌이치는 고뇌를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딸은 아버지가 하나님께 번제물 희생으로 드릴 것을 서원한 것을 이행할 의무가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냉정을 되찾아 참담해 하는 심정의 아버지를 격려하였다. 외동딸은 모리아 산에서 떨리는 아버지의 손을 붙잡아드리면서 자기를 번제물로 바치라고 격려한 이삭과도 같이(창 22장) 처녀로 죽기로 결심한 것이다. 입다의 자녀 교육은 차원이 높았다. 아버지가 망령이 들어 한 서원쯤으로 여겨 다른 돌파구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을 터인데... 딸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한 모습은 겟세마네에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라고 기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신뢰와 흡사한 것이다. 그렇지만 모리아 산에서와는 달리 이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개입치 않으시고 그냥 놔두셨다. 입다와 딸의 선택과 결심은 희생제물로 자기를 드린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더 가깝게 보인다.
입다는 딸 하나만 두었다. 다른 사사들처럼 그도 권력의 정상에서 얼마든지 처첩들을 둘 수 있었겠지만, 자기가 서출로서 당한 운명을 생각하여서인지 끝내 그런 길을 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사로 재임하는 기간 동안 그가 다른 처첩을 두었다는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딸은 그의 미래 전부였던 것이다. 딸이 처녀로 살다가 죽으면 자기의 후손이 끊기는 것이다. 아버지로서 이 일은 심각한 타격이 아닐 수 없다.
화려한 결혼 축제도 포기하고 자녀를 잉태, 해산하는 기쁨도 단념한 딸은 두 달 동안 애곡하는 시간을 거친 후 자기를 하나님께 바쳐 처녀로 죽기로 한다.
아버지의 결단
“두 달 만에 그 아비에게로 돌아온지라 아비가 그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고 죽으니라 ”(삿 11:39).
이 성경절은 난해 성구 중 하나다. 이 난해 성구의 포인트는 입다와 딸이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비록 자기에게 해가 될지라도 그대로 이행하는 모델이 되었다는 점에 있다. 여호와의 장막에 거할 자는 “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한다(시 15:4). 적국의 외교 사절에게 행한 입다의 인품을 보면 그는 신중한 사람이었다(삿 11:12). 그러나 그는 자기가 서원한 것의 결과를 예견하지 못한 한계점을 지닌 유한한 인간존재였다. 훗날 예수께서는 분별없이 함부로 서원하는 일에 대하여 경계하셨다(마 5:33-37).
번제물의 대상은 동물이지 인간이 아니다(레 1장). 고대 이스라엘 종교 체계에서는 인간을 번제물로 드리는 일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구약성경에 정통한 지도자가 인간 제물을 바치는 것을 금지한 하나님의 법에(레 18:21; 신 12:31) 무지할 수 없다. 상당수 주석들이 입다가 이교도들의 영향을 받아 인간제물을 바친 것으로 본 것은 위에서 이미 지적한 사삿기 11장 전체에 대한 조감도와 하나님이 인간 제물을 원치 않으신다는 점에 맞지 않는다는 점을 무시하고 있다. 더구나 여호와의 신의 감동을 받고 난 후 서원한 입다를 두고(삿 11:29-31), 이교 관행의 포로로 보는 일은 빗나간 해석에 불과하다. 더구나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영웅 목록에 들어간 인물이 아닌가!(히 11:32).
올라(Olah)
입다는 자기 집 문에서 나온 대상이 무엇이 되었던지 번제로 드리겠다고 서원하였다. 번제(olah)는 개인이나 민족이 여호와께 드리는 선물이다. ‘올라’는 ‘올리어 지는 것’을 뜻한다. 제물을 완전히 태워 그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는 데서 ‘올라’라는 명칭이 부쳐졌을 것이다. 그 대상은 수소, 양과 염소,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그리고 문둥병자를 정결하게 할 때 참새로 공여자 대신 죽을 동물들로 제한되어 있다. 번제를 드리는 목적은 공여자의 경배와 감사, 완전한 헌신과 성별, 및 온전한 굴복에 있다. 요컨대, 번제는 ‘나의 전 존재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제사였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는 순간 사실상 아들은 죽었고 아버지는 온전한 경배를 드린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입단의 딸이 처녀로 죽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더 성서적이 아닐까. 구약시대 동물들의 번제는 갈보리에서 인류를 위하여 대속제물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표상한다.
인간 제물 금지법을 잘 알고 있었을 입다는 모리아 산에서도 동물 어린양으로 대체된 사건을 참고하여 동물로 대체하였을 것이며 그 사건을 기점으로 자기와 딸이 평생을 하나님께 성별하여 바치며 날마다 산 제물로 드리는 영적 삶을 살아갔을 것으로(롬 12:1)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성녀처럼 봉사하면서 하나님만을 위하여 살아간 딸로 비친다.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 대신 동물로 대체한 또 다른 경우도 나온다(출 13:13, 15). 이런 시각이 난제를 푸는 정당한 시각이다.
AD 1200년경에 랍비 Kimchi는 인간 제물로 공여한 것이 아니라는 견해를 제시한 이래 후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의 견해에 동조하였다. 본문의 “그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니”는 구체적 행동방식이 나와 있지 않는 포괄성을 띈 메시지이다. 입다가 예외적으로 하나님이 선택하여 준 인간제물을 바쳤다고 풀이하는 것은 “그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니”를 자의적으로 푼 것이 아닌가 한다. 자기의 후손이 끊어지도록 처녀로 죽게 한 사실을 너무 축소시켜 그것이 어떻게 이런 정도라면 아버지가 그렇게 슬퍼할 이유가 없다고 본 것은 너무 안이한 생각이다. 이런 시각은 부모의 미래가 자녀들이란 점과 그 미래가 끊긴 상태를 두고 고통을 겪는 부모의 심정을 별 것 아닌 것으로 보아 버리는 것이다.
입다와 그의 딸이 보여준 올라의 진정한 정신을 받들어 헌신, 성별, 굴복하며 사는 길은 오늘을 사는 우리의 도전이며 과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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