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역사적으로 그 뜻을 달리하여 왔지만, 인간의 이성을 중심으로 현상계 배후에 있는 보편적인 근본원리, 우주와 인생의 최고 원리를 추구하는 일을 주로 해 왔다. 이는 Goethe가 <Faust>에서 “이 세계를 심오의 深奧에서 통할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이 알고 싶다”고 한 것에서 잘 나타나 있다. 과학은 이성을 통하여 현상계의 객관적 사실을 검증 판단하는 일을 그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신학은 게시에 토대를 둔 신앙을 통하여 영원한 진리의 세계를 추구한다. 그러면서도 신학은 과학의 세계에서 이성적 검증과 판단을 통한 객관적 사실을 수용하지만 이를 절대시하지 않고 계시된 진리 체계와 통합적으로 보면서 철학과 과학을 넘어서는 영원한 진리를 지향한다. 철학, 과학 및 신학의 상호관계는 결국에는 이성과 신앙의 관계로 압축된다.
A. 신학과 철학의 상호 관계
1. 절대자를 찾는 방법의 차이
신학과 철학은 양자 공히 눈에 보이는 현상에 머물지 않고 현상의 배후에 있는 절대자 내지 존재에 관한 근원적 지식을 추구하는 학문이다. 신학이 추구하는 초월적 하나님을 철학은 절대자 내지 존재(실재)라고 한다. 철학은 인간의 삶(생명의 길)과 세계 역사의 의미를 인간 이성을 기초로 하여 탐색한다. 그러나 신학은 인간의 불완전성과 죄된 성향을 지닌 한계성을 절감하고 계시와 영감의 범주를 지반으로 한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에 향한 신앙을 기본으로 하고 이성을 활용하여 삶의 의미와 목적을 규명한다.
2. 신학과 철학의 관계 유형들
신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하여는 전통적으로 Carl Henry가 요약한 Tertullian, Augustine 및 Thomas Aquinas 세 가지 유형 방식이 수용되어 왔다. 여기서는 동 3대 방식을 개괄하면서 몇 가지를 추가한다.
(1) 상호 무관 유형
이는 Tertullian(c. 160-230)이 말한 방식이다. 그는 철학의 본산지 아테네와 신학의 원산지 예루살렘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고 보았다. 신학적 지식과 철학적 지식은 완전히 상호간 다르고 상호간 분리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둘 사이에는 충돌이 있을 뿐이다(Credo quia absurdum--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 I believe because it is absurd). 이 테르툴리아누스적 방식은 계시 진리와 형이상학적/과학적 지식 사이에는 날카로운 대립을 강조한다. 아카데미와 교회 사이에는 어떤 관계도 없다. 이교도와 그리스도인 사이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입장에서는 철학은 신학에 대하여 기여할 것이 없다. 이 유형은 철학이 그리스도교에 대한 반대 내지 박해 논리를 예리하게 세워 갈 때 이런 유형의 입장이 강한 기류를 보였다. Martin Luther 도 일반적으로 Thomas Aquinas 철학을 배척하면서 이러한 상호 무관 유형을 선호하였다. 근대철학은 철학을 신학에서 분리시켜 나갔다.
(2) 상호유관 유형
① Augustine은 철학에 대한 신학 우월 유형 방식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Anselm 및 Calvin이 이에 동조하였다. Anselm은 Credo ut intelligam (나는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 I believe in order to understand.)를 제창하였다. 이는 믿음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계시는 인간의 이해를 위한 전제 조건이 될 뿐만 아니라 그 출발점이 된다. 신학은 먼저 진리의 출입구 문인 성경으로 시작하여야 한다. 그 다음에 신학은 철학적 방식을 빌려 그 표현을 명료화 시킨다. 그리고 신학은 철학적 표현이 추구하는 것의 의미를 신학적 용어로 해석한다. 신학이 Plato의 보이지 않는 이데아(the Unseen Idea)를 사실상 실재인 하나님으로 해석하는 것은 그 단적인 예가 된다.
② 철학적 신학 유형--이는 Thomas Aquinas의 방식이다. 그는 Intelligo ut credam (나는 믿기 위하여 이해한다. I understand in order to believe.)의 입장에서 신학을 하였다. 철학은 성경 계시 진리를 위한 준비가 된다. 그리고 신학은 철학에 의하여 확립된다. Thomas Aquinas는 Summa Theologica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빌려 성경에 안 나오는 유신론적 논증을 구축하였다. 이 경우 철학은 신학에 신뢰성을 부여한다. 중세시대 철학은 신학의 시녀 역할을 하였다.
③ 철학으로 검증된 신학 유형--이신론자들처럼 신학이 학문으로 성립하자면 철학적 검증이 있어야 한다.
④ 철학이 신학의 내용을 공급한다는 유형--헤겔의 관념론이나 변증법이 기독교 신학에 차용된 경우
(3) 상호보완적 유형
신학과 철학의 건전한 관계유형이다. 철학은 그리스도인 신앙의 자연적 이유를 제공한다. 철학은 기독교 신학의 계시를 탐구하는 일을 지향한다. 때로는 하나님의 존재와 지배를 중심으로 한 우주이해에 있어서 철학이 신학의 내용을 제공하기도 한다. 신학적 내용을 철학적 방법으로 이론화, 체계화시킨다. Carl Henry 와 M. Erickson 은 이 입장에서 그리스도교 세계관을 구축하고 있다. 그러나 상호 보완 유형이라고 해서 철학을 주로 하고 계시를 보완하는 방법을 추구하는 것을 止揚한다.
철학의 목적은 진리와 비진리를 판별하는 표준을 추구하는데 있다. 따라서 철학은 진리의 방편이지 내용이 아니다. 철학은 신학적 개념 이해를 보다 더 예리하게 하며, 그리스도교 사상체계의 배후에 있는 전제를 탐색한다. 철학은 신학적 관념의 적용을 돕고, 신학적 진리를 시험할 필요성을 제공한다.
B. 이성과 신앙의 상호 연계성
교권에 의한, 교권을 위한, 교권의 신앙
프톨레마이오스가 확립한 체계에 따라 천체의 움직임을 이해하던 우주관이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등장하므로 인하여 무너졌다. 코페르니쿠스는 1530년에 지구가 정지해 있고 태양이 움직이고 있다는 가설 대신에 태양이 정지해 있고 지구를 포함한 행성들이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지동설 책을 저술하였다. 이는 당대에 혁명적인 이론이었다.
1610년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지지하였다. 1616년 당시 교황청 세력의 주류들은 갈릴레오 주장이 가톨릭의 교리 신앙에 어긋나는 것으로 보아 침묵을 강요하였다. 그의 책 <천문학 대화>는 금서목록에 들어갔다.
1965년에 로마 교황 바오로 6세 시대에 갈릴레오 재판에 대한 재평가를 하고, 1992년 로마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갈릴레이 재판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인정하고, 갈릴레이에게 사죄하였다. 이는 갈릴레오가 죽은 지 350년 후의 일이었다. 2003년 9월 로마 교황청 교리성성의 안젤로 아마토(Angelo Amato) 대주교는 우르바노 8세가 갈릴레이를 박해하지 않았다고 하는 주장까지 하였다. 이런 일련의 역사 전개 과정이 남긴 것은 교권에 의한, 교권을 위한, 교권의 신앙이 이성의 발견을 재단하고 단죄하던 시대는 지나갔다는 것이다.
2. 이성과 신앙의 조화적 이해를 위한 자세
하나님이 인간에게 품부하신 이성의 합리적 기능을 증오하는 것보다 더 큰 악은 없다. 따라서 지성의 고지를 등진 신앙 일변도적 시각 역시 모레 위의 성을 구축하는 일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신앙을 이성적 지식의 용기 속에 한정시킨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대수 방정식으로 이해하려는 것과 차이가 없다. 이성을 배척하거나 신앙을 무시하는 것은 모두가 한편으로 치우친 위험한 발걸음에 불과하다.
현대 분석철학을 주도한 Bertrand Russell, G. E. Moore, Ludwig Wittgenstein(1889-1951), A.J. Ayer(1910-1989) 등은 논리실증주의와 기능적 분석의 두 단계로 발전시켜갔다. Vienna 대학교에서 출발한 논리실증주의는 언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일(“그것으로 무엇을 뜻하고 있는가?” “그것이 어떤 종류의 진술인가?”)을 철학의 주 목표로 삼고 있다. 특히 Wittgenstein은 철학은 명제를 명료화시키는데 있다고 강조한다. 이 비트겐스타인 제자들은 논리적 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를 발전시켰다. 이 논리적 실증주의에 따르면 주어 안에 술어가 포함되어 있는 수학적 진리(예: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이다)와 경험할 수 있는 경험적 진리(예: 책상 위에 책이 놓여 있다)만이 논리적 진리이다. 논리실증주의는 논리경험주의에 머문다. 경험할 수 없는 진리는 술어가 주어 속에 들어 있지 않다. 신학적 진리는 내용이 공허하고 무의미한 지식일 뿐이다.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신학과 윤리학 영역의 형이상학적 명제들을 분석, 검토 대상으로 보아 공허한 주장으로 비판하고 있다. 분석철학이 언어의 명료화라는 점에서 신학에 기여할 수는 있지만 분석이 가치중립적이며 꼭 경험할 수 있어야 하느냐 하는 근원적 문제를 안고 있다. 더구나 신학적 언어의 토대가 되는 계시된 진리를 주관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인본주의적 판단일 뿐이다.
신앙은 너무 지고한 것이어서 논리의 체로는 걸러지지 않는다. 이성은 모든 것의 척도도 아니며 인생의 모든 것을 좌우하는 힘도 아니다. 또한 인간의 이성적 재단이란 인간이 의지할 모든 확신의 궁극적 아비가 되는 것도 아니다. 상처 입은 한 인간의 처연한 고통과 비애는 논리적 사색물이 아닌 것이다. 신앙의 타당성이 과학적 사변과 비평의 은쟁반 지반위에서 산출되어야 유효하다는 주장은 독단일 뿐이다. 두 사이에서 일어난 역사적 갈등관계 때문에 Schopenhauer처럼 신앙을 절대의존의 감정으로 보아 신앙을 느낌 정도로 보아버리는 일은 신앙세계에서 전능자에 향한 응답을 무시하고 만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섭리의 역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성은 아는 것으로 모르는 것을 통합하고자 하며, 계시에 토대를 둔 신앙은 신적 은총으로 모르는 것을 통합하고자 한다. 그러나 신앙이 신조로 변형될 때 이성의 비판과 검증의 대상이 된다. 어느 신조가 맹목적인 신앙의 병풍 뒤에 숨는 것은 초합리주의와 손잡고 안주하는 것이 되어 갈릴레오의 등장을 예고하는 일에 불과하다. 진리는 이성을 두려워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편향된 믿음으로 제한 받아 아첨하는 이성은 단명하기마련이다. 계시에 의하여 밝혀진 진리와 이성으로 얻어진 것 사이에는 아무런 갈등이 없다. 이성과 계시가 모두 실재를 창조하시고 모든 진리를 아시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이성 없는 신앙은 벙어리요, 신앙 없는 이성은 귀머거리이다.
그러나 인간 사회에 침투한 죄가 이성을 흐리게 하고 왜곡시키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비추어 주심과 선행적 사랑의 은총의 빛 안에서 회복된 이성이 계시에 굴복하는 응답이 요청되는 것이다.
“개인적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지식을 얻은 사람은 자연과학을 연구할 준비가 된 것이다. 그리스도에 관하여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기록되어 있다(요 1:4). 죄가 들어오기 전에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밝고 아름다운 빛, 곧 하나님의 빛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 빛은 그들이 접근하는 모든 것을 비쳐 주었다. 하나님의 품성과 솜씨에 대한 그들의 지각을 어둡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유혹자에게 굴복하게 되자, 그 빛은 그들에게서 떠나갔다. 거룩한 의복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그들은 천연계를 비쳐 주던 빛도 잃어버렸다. 그들은 더 이상 천연계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솜씨를 통하여 그분의 품성을 분별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인류는 스스로의 힘으로 천연계의 교훈을 올바르게 깨달을 수 없다. 하늘의 지혜로 인도되지 않으면, 그는 천연계와 천연계의 법칙들을 천연계의 하나님보다 더 높이게 된다. 이것이 과학에 관한 단순한 인간적 이론이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과 너무도 자주 상치되는 이유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천연계가 다시 빛을 비추어 준다.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통하여, 우리는 천연계의 교훈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치료, 461-462).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과 확신은 그 분과 그 분의 법도에 합일하려는 열정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곧 이성적 신앙의 응답의 길이다. 신앙은 하나님이 주신 씨앗이다. 이 씨앗이 자라 성장하여 열매를 맺는 길고 긴 성화의 여정은 신적 법도에 합일하려는 열정이 자제와 순복으로 그리고 인내성 있는 충성의 경건으로 이어진다. 이런 경건의 행동양식이 결여된 신앙은 야고보가 말한 죽은 신앙의 유령일 뿐이다.
'계시와 영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메시지와 메신저의 관계에 나타난 성경 영감의 실상 (0) | 2015.10.01 |
---|---|
누가 모델(The Lukan Model), 역사가 모델(The Historian Model) (0) | 2015.04.03 |
Sola Scriptura 원리 (0) | 2012.08.04 |
성경과 경전 (0) | 2012.03.30 |
영적인 단순한 공명식 식사 메뉴 (0) | 2012.03.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