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와 메신저의 관계에 나타난 성경 영감의 실상
메시지와 메신저의 관계에 나타난 성경 영감의 실상
-성경 영감에 관한 재림교회의 이해를 중심으로-
성경은 계시와 영감의 소산물인 것이 확실하지만 그 계시와 영감의 본질에 관한 확연한 어떠한 규명을 진술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다양한 이론이 등장하기 마련인 것이다.
성경은 메시지와 메신저, 그리고 그들 상호 간의 관계를 담고 있다. 성경 계시와 영감에 관한 이해의 관건은 이 메시지와 메신저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 메시지와 메신저의 문제 이해의 방향에 따라 성경 계시와 영감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가늠할 수 있다. 성경의 메시지는 여러 가지 계시-영감의 모델들을 통하여 기록되었다. 이 논문은 영감에 관한 여러 모델들을 고찰함으로 성경의 계시-영감의 진상이 메시지나 메신저의 상호 관계와 맞물려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아울러 메신저인 인간의 한계성을 분석하면서 성경 영감의 바람직한 이해를 추구하고자 한다. 단, Ellen G. White의 메신저로서의 영감 모델을 기축으로 하여 논술코자 한다.
I. 영감에 관한 성경의 모델들
인간의 입신(入信) 경험이 다양하듯이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말씀하신 방법도 다양성을 띄고 있다(히 1 : 1-3 참고). 성경 기록의 모든 경우를 어느 하나의 계시나 영감의 방식으로 꼴 지우고 그 꼴을 통하여 나왔다고 보는 것은 성경의 여러 진술에 부합되지 않는다. 따라서 어느 한 선지자의 영감 방식을 모든 성경에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혼란만 야기시킨다.
전통적으로 계시(revelation)란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메시지를 선지자에게 교류하시는 내용을 묘사하는 뜻으로, 영감(inspiration)은 하나님께서 선지자가 받은 바 메시지를 자기 백성에게 교류하는 과정, 즉 기록하는 일을 돕는 뜻으로 사용되어 왔다. 조명(inlluminition)은 인간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일에,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는 일에 사용되는 말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선지자와의 정보 교류를 하는 일에 있어서 계시, 영감, 조명이라는 말들이 복합적으로 활용되어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또한 계시, 영감 및 조명이란 말은 대부분 같은 현상에 연관되어 있고 때를 따라서는 상호간 중첩된 의미와 기능을 가진 용어들이기 때문에 상호 구분은 되나 분리하여 이해할 성질을 띤 말들이 아니다. White는 영감이나 조명(illumination)을 거의 동의어적으로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영감에는 다양한 모델이 나타난다. 이 모델들은 메시지와 메신저의 상관관계를 엿보게 하는 디딤돌이 된다. 다음에 성경상의 여러 모델들을 성찰키로 한다.
1. 계시(이상) 모델(The Visionary Model)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선지자의 이상, 꿈 등을 통해 전달하며 드러내시는 방법이다. 이 경우에는 선지자가 초자연적 능력을 힘입는 현상이 수반된다. 이 초자연적 현상으로는 호흡 중지, 초능력 부여 등이 포함된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여호수아는 여리고에서 거룩한 존재의 현존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이렇게 메시지를 받은 경우에는 실제 상황이 이상이나 계시를 초극한다. White의 경우도 이런 현상이 수반된 바 있었다.
신적 현현(Theopanies) 수반, 즉 천적(天的) 존재가 임재하거나 하늘 소리 등의 현상도 있었다. 게하시의 눈을 열어 불말과 불병거를 보게 하는 대쟁투의 면모를 보여주신 사건(왕하 6 : 15-17)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이 모델의 경우 어떤 경우에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구별이 어려운 경우도 있다. 예컨대, 바울은 계시 속에서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모른다고 했다(고후 12 : 1-4). 이러한 경우에 선지자들은 “내가 보았는데(I saw)," 혹은 ”내가 들었으니(I heard)" 등의 표현을 사용하여 기록하고 있다(사 6 : 1,8 참고). 다니엘, 에스겔서 및 요한 계시록은 이 모델의 대표적 성경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상과 계시적 꿈이 많이 나와 있다 하더라도 개인적 증언이나 역사적 기록이 혼합될 수도 있다는 점을 유의하여야 한다. 또한 역사서나 개인적 서한에서는 이러한 이상과 꿈이 나오지 않을 수 있다는 점도 유의하여야 한다. Carl Henry는 이러한 계시 모델도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점을 일찍이지적하고 몇 개의 유형으로 고정시키는 것이나 그 하나가 다른 하나에 비하여 우열관계에 있다는 시각을 배제하고 있다.
2. 증인 모델(The Witness Model)
선지자가 보고들은 바를 설명할 때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어 증거케 하는 모델이다. 이 모델은 요한서신에 나타난다(요일 1 : 1-3). 이 경우 선지자는 가감 없이 보거나 감지한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특색이다. 타인이 자기에게 준 의견이나 판단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주께서는 증인을 사용하신다. 이 경우 이상이나 꿈 없이도 선택된 선지자들의 증언 기록을 감동하신다.
마태복음과 요한복음도 이러한 모델 형태에 속한다. 그들에게 예수의 이야기를 전할 초자연적 계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이야기의 한 부분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복음서들이 타 모델에 비하여 덜 영감적인 것은 아니다. 이들은 다른 방법으로 성령의 감동을 받은 것이다. 즉, 성령께서 다른 종류의 영감 모델을 사용한 것이다.
위의 제 1 모델에 비교하여 이 증인 모델의 등급이 낮다고 볼 수 없다. Chal Henry는 비록 비판받는 신정통주의의 주장이기는 하지만 “증언의 형태로의 계시”개념을 계시의 다양성 범주에서 진술하고 있다. 주의 메신저가 되는 White의 경우에 증언들(Testimonies)을 기록하고 재림운동에 관련된 기사를 마련할 때 그는 동 사건에 참여한 증인으로서 증언하였다. 이것은 증인모델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재림교인들은 이 증언에 영감이 함께 한 것에 곤혹스러워 하지만 이는 잘못된 시각이다.
3. 역사가 모델(The Historian Model)
사복음서 모두가 다 전통적인 계시의 모델 결과가 아니다. 위에서 본대로 마태와 요한복음서들은 증인의 모델의 소산물이다. 나머지 두 복음서인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이른 바 역사가 모델을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누가모델(Lucan model)은 그 전형적 예가 된다고 볼 수 있다(눅 1 :1-3).
선지자들이 오로지 이상 중에 본 것만을 말하거나 기술하지는 않는다는 것은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벧전 1 : 10)라는 말씀에도 시사되어 있다. 흔히 이 모델은 연구 모델(Research model)로도 칭해지고 있다. 이 역사가적 연구에는 한 신앙 공동체(교회)와 하나님과의 상관성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이 가능하다.
이 역사가 모델에서는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역사적 자료나 목격자의 설명, 또는 구두나 기록된 자료들의 수집과 같은 방식으로 정보를 조사하도록 고취하고 감동을 주신다.
이 모델에서 문제시되는 것은 선지자가 이런 수집 자료와 역사적 기록들을 활용할 때 그 역사적 사건 묘사를 정확하게 하느냐는 점에 있다. 즉 인간의 약점같은 것이 문제가 될 수 있지 않느냐 하는 점이다. 사실상 영감의 전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의 신뢰와 확신의 문제에 달려 있다. 즉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감동하여 말씀하고 올바른 자료를 사용하도록 감동을 준다는 확신은 영감성의 생명선이 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확신하고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영감을 준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종을 인도하여 적의(適宜)한 사람에게 가도록 하고 적당한 질문을 하게 하며 적절한 자료를 선택케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혹자는 세속 자료가 영감된 메시지의 일부로 인용되는 것을 의문시하고 있으나, 성서 시대 선지자들도 이러한 세속자료를 사용하였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신약 성경 완성 후에 예언적 은사가 지속된다고 신봉하는 사람들은 예언적 은사를 받은 사람이 세속 자료를 영감된 자료 안에 포함 시킨다는 것에 관하여 하등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러한 역사가 모델을 상정하여 White가 심지어 세속적 역사 자료를 활용하여 영감된 자료 안에 포함시키는 일을 한 것을 별 문제시 하지 않는 소지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요컨대, 성경 영감 모델에서 역사가 모델을 배제시키는 제한론은 비성서적이다.
선지자가 세속적 자료를 인용한 경우 그 인용한 부분을 연금술적으로 변형시키지 않아도 영감된 기록의 일부가 될 수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기별의 최종 목적을 명료화시키고, 또 완성시키고자 선지자에게 그 사용의 자유를 주시기 때문이다.
어떤 역사가가 주제의 총괄적 견해를 간결하게 보이기 위해 사건들을 분류하였거나 또는 편의상 세부들을 요약한 것이 있는 경우에는 그 역사가의 말을 인용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인용하는 것은 그 저자를 권위자로 소개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다만 그의 설명하는 바가 주제를 설명하는데 이미 마련되어 있는 쉽고도 힘있는 표현이 되기 때문이다.
영감에 관한 이 역사가의 모델을 통하여 볼 때 메신저가 이상이나 예언적 꿈 이외에 다른 종교적 자료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가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에 관련된 정보 탐색상 여러 인간과 문헌 자료를 접한 것처럼 White도 이상이나 예언적 꿈에 본 주제들을 “이미 마련되고 힘있는 제시를 위하여” 여러 종교적 자료와 여러 문학 형태에 접근하였던 것이다.
4. 상담자 모델(The Counselor Model)
이는 선지자가 개인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충고자 내지 권고자로 활동하는 모델이다.
이 모델의 고전적 예는 고린도 전서에 나온다. 바울이 가족 문제를 두고 어떤 경우에는 주께 받아 명한 경우(고전 7 : 10)가 있고 또 다른 경우에는 특별 계시를 받지 못하였음을 시인하는 경우도 있었다(고전 7 : 25). 이 특별 계시가 없는 경우에라도 그는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한 마음으로 영감적인 권고를 하였다(고전 7 : 40). 즉 바울은 특별 명을 안받았어도 영적 권고를 한 것이다.
바울은 특별 계시가 있을 때든지 없을 때든지 고린도 교인들에게 솔직하게 권고하고 있다. 고린도 교인들은 특별 명령을 받아 권고한 것을 더 중한 것으로 생각할 수는 있겠으나 바울 자신은 모든 경우에 다 같은 마음, 즉 하나님의 영에 감동받은 심정에서 나온 것으로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White의 대부분의 저술은 이 모델로 분류될 수 있다. 많은 경우에 “내가 보았는데(I saw)"를 사용하여 부모와 교사들, 어린이와 청년들, 목회자와 행정자들에게 권고하고 있으나 더 많은 경우에는 그런 표현을 사용치 않고 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가 판단하도록 감동을 주신 것이다. 이 경우에 그 권고의 가치 등급이 더 낮다고 볼 수 없다. 하나님은 한 가지 방식으로만 자기의 뜻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에게 그러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에게 감명을 주어 선지자 자신의 판단을 활용케 하신다. 선지자는 이상과 꿈을 주신 같은 성령에게 감동받아 영감적 판단을 내려 권고를 하고 상담에 응한 것이다.
5. 서한 모델(The Epistolary Model)
신약 성경상 이 모델은 선지자와 교회 사이의 가장 통상적 교류 방식에 해당된다. 신약의 사도들, 즉 베드로, 야고보, 요한, 바울은 각기 관련된 교회들에 서한을 보내어 당대 교인들에게 교훈과 시정을 촉구하며 질책도 하고 또한 헌신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서한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같은 권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에게 보낸 서신을 공공의 메시지로 삼은 경우 윤리적, 도덕적 문제는 없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개인 서신이 경전이 된 경우(디모데 전․후서, 빌레몬서, 요한 삼서) 애당초 바울이 동 개인의 서신들을 공적 사용을 전제로 그 개인 서신들을 기록하였느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설사 바울이 그런 의도가 없었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동 개인 서신들을 경전화시켜 수신자와 유사한 위치에 있을 후대 사람들을 위한 교훈과 권고로 삼게 하셨다.
White는 자기 기록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5,500여 통의 편지들을 보냈다. 그 편지들이 여러 편집 간행물들과 CD-ROM에 수록되어 있는 상황에 대하여 혹자는 의아하게 여길지 모르나 바울의 개인 서한이 신앙 공동체를 위하여 활용된 것에 비추어 이해하여야 한다. 사실상 White도 가정 문제, 개인 문제 등을 다룬 서신이 공동체에 활용되도록 의도치 않았을 것이다. 화잇 유산 관리 위원회에서 당므 두 가지 원칙을 중심으로 이를 다루었다.
첫째로 특정 상황에 처한 다른 사람에게도 유용한 교훈이 되고 교정과 개혁의 자료로 격려할 수 있다는 점을 중시하였다. 왜냐하면 White는 어떤 개인들의 위험, 과오 및 죄들은 모두를 위하여 경고와 견책과 권고가 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인들은 같은 죄를 반복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자기 마음을 살피고 교정하는 자료로 삼는, 즉 마치 자기 자신들에게 보내진 기별로 보아야 한다고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바울의 개인 서한이 정경에 포함되어 광범하게 읽혀지도록 한 원리가 White 선지자의 경우에도 적용되어 정경은 아니지만 공동체 내에 고아범위하게 읽혀지도록 하여 유사한 문제들에 당면하게 될 개인들에게 교훈과 교정을 촉구하자는 것이었다.
성서 시대의 서한 모델을 통하여 선지자가 수신자에게 자기 의견과 사상을 전할 때 선지자가 꼭 이상과 계시적 꿈에 기초하여 상대 수신자의 정보를 입수한 것이 아니라 어느 개인들을 통하여 정보를 입수한 것을 두고 선지자의 영감성에 의아심을 가질 수 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내에 일어난 분쟁 및 기타 문제들을 글로에의 집 편으로부터 듣고(고전 1 : 11), 걱정하며 이에 대처하는 서한을 보낸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 일어난 반도덕적 범죄들에 대하여 책망까지도 하였다.
물론 성령께서 고린도 교회의 동 문제들에 관한여 특별 계시나 이상을 주신 것은 아니지만 바울에게 그러한 대응을 하고 서한을 쓰도록 고취하였다. 그러나 이 메시지는 단순히 목양자적 관심의 발로 정도로만 볼 수는 없다. 바울이 자기의 가르침이나 전한 것이 성령의 가르침의 결과인 것을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고전 2 : 1-13 참조).
성령의 분별, 성령의 나타남으로 White도 개인 서한들에서 여러 가지 권고를 하고 있다. 많은 경우에는 이른바 “내가 보았는데(I saw)"란 표현을 쓰고 있지 않다. 이 경우 그것들은 순전히 개인적 감정이나 의견에 불과한 것으로 처리할 수 없다. 그러나 White 자신은 다음의 글에서 자기의 기록의 원천이 어디서부터인지 잘 인지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내가 콜로라도에 갔을 때 나는 그대에 관하여 부담을 느껴 몸이 약하지만 그대가 장막 집회에서 읽을 수 있도록 여러 페이지를 기록하였습니다. 약하며 떨리는 가운데 나는 그대에게 서한을 써 보내고자 새벽 3시에 기상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진흙을 통하여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그대는 이 글을 단순히 서한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께서 촉구하시어 내게 보여진 것들을 그대 마음에 생각나게 합니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편지들, 즉 증언들에서 나는 주께서 내게 제시하신 바를 그대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나는 글에서 내 자신의 생각을 단순히 표출하며 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이상 중에 내 앞에 열어 보이신 것들 입니다.
오컨대 서한 모델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관심과 부담을 표현하는 자유를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관심과 부담을 두고 권고와 조언을 할 때 하나님의 성령의 완전한 지배를 받도록 하고 있다는 점이다.
6. 문학 모델(The Literary Model)
이 문학 모델에서는 성령께서 선지자에게 느껴진 정서와 감정을 시와 산문의 문학 형태를 통하여 표출하도록 감동을 주신다. 이 모델의 전형적 예로 시편을 들 수 있다. 이 시편에서 다윗 등 여러 저자들은 시적 언어 구사를 통하여 자기들의 심성에 일고 있는 거룩한 감정을 표출하고 있다. 솔로몬도 자기의 문학 작품들을 위하여 “묵상하고 궁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arranged, KJV) 아름다운 말을 구하였다”(전 12 : 9,10)고 하였다.
혹자는 낙심된 모습을 보이거나, 분노와 혐오, 또는 저주의 감정이 가득 담겨 있는 시가 과연 영감받은 것인지 의혹의 눈길을 보낼 수 있다. 물론 이런 시들을 이상이나 예언적 꿈의 소산물로 보는 예언적 모델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들 작품은 또 하나의 영감된 문학 모델로 보아야 한다.
이미 처음에 제시한 대로 하나님께서 “옛적에 선지자들과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셨다”(히 1 : 1)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시적 달란트를 활용하여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케 하시는 문학적 모델을 허용하신 것이다.
White는 시인은 아니었지만 자기의 마음에 이는 여러 정서나 감정을 담은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글을 그의 일기에 기록하였다. 개인의 일기들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일이 윤리 도덕적으로 바람직하느냐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 메신저에게 조용한 틈을 타서 자신의 내밀한 감정을 기록한 글을 쓰도록 감동을 주셔서 그것들을 감화, 교훈, 교정 및 위로와 격려로 사용하실 수 있는 것이다.
Achtemeier가 성경 영감의 모델을 단순화시키는 것은 적당치 않고 소망스럽지도 못하다고 한 말은 의미심장하다. 따라서 성경 영감의 실상을 다양하게 접근한다는 것은 영감의 실상을 올바로 파악하는 방편이 된다.
위의 여러 모델들을 통하여 나타난 사실은 하나님께서 성경 시대 선지자들과 그 이후 예언적 은사를 받은 메신저들에게 여러 가지 다양한 모델들을 통하여 자기의 메시지를 말씀하고 계신다는 점이다. 이 다양한 모델들은 White의 저술들에도 적용될 수 있다. 특히 선지자가 직접적으로 영감을 받지는 않았으나 하나님의 일과 사상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르치고 또 기록하여 성경의 일부가 되게 하였다는 점은 이런 다양성 중의 하나로 보아야 한다.
II. 성육신 모델과 메신저의 한계성
1. 성육신 모델
성서 영감에 관한 신학적 혼란은 거의가 메시지와 메신저의 관계에 관한 적절한 이해의 결핍에서 야기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메시지와 메신저에 관한 상호 관계에 대한 그 동안의 고찰은 항상 바람직한 것이 아니었다. 이 양자의 상호 차이성을 바로 인식하고 수용하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교류 체계 이해의 첫 관건이 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메시지는 완전하고 무류하고 영원하다. 그러나 메신저는 불완전하고 틀릴 수 있으며 유한한 가멸적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때 인간들을 사용하실 뿐만 아니라 인간 언어도 사용하신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인간과 그 언어는 완전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불완전한 통로가 된다. 이 불완전한 인간 통로나 언어 매체가 하나님의 완전한 메시지에 어느 만큼 영향을 끼치느냐에 관하여 논의가 있어 왔다.
이 논의는 성경이 신성과 인성의 연합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 착안하고 있다. 하나님 말씀이 기록된 형태로 육화(肉化)된 것이다. 흔히들 이것을 성육신 모델(Incarnational model)이라고 한다. 화란 신학자 Herman Bavinck는 로고스(Logos)가 육신(Sarx)이 되고 말씀이 성경이 된 사실이 평행적이 될 뿐만 아니라 내밀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육신이 되신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계시가 피조 인간의 삶과 역사에 진입하였다고 하면서 그 말씀이 문서화함으로 인하여 인간 저술이 갖는 변천에 예속된다고 지적하였다. 그리하여 성경은 선지자와 사도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전적인 작품이 됨과 동시에 전적으로 저자들의 작품이 된 것이다. 즉, 하나님은 성경의 저자가 되고 인간은 그 기자가 된다. 이런 점을 전제로 하여 성경의 이중(二重) 저작성을 말하고 있다. Charl Henry는 성경에 대한 신성과 인성의 연합적 접근방식, 즉 성경이 신인적인 책이라고 부르는 것은 성경을 중간물(tertium quid)화 시켜 혼란을 야기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성육신과 성경의 문서화(inscripturation) 사이의 유비관계를 배격한다. 예수의 죄 없으신 인성이 구전과 기록의 선포에 있어서 과오가 있고 죄가 있는 인간이 상호 유비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성육신 모델에는 여러 유형들이 있다. 인간적 요소, 즉 약점과 과오에 역점을 둔 Alden Thompson의 좌경적 분석 유형이 그 중에 하나가 된다. Thompson은 White는 성경 영감을 성육신 모델에 기초를 두었다고 하고 저술가들은 인적 요소나 신적 요소 중 어느 한 쪽에 치우쳐 있고 조화성을 유지하지 못한다고까지 평하면서도 그 자신 역시 그의 전 책에서 인간적 측면을 분석 강조하는데 몰두하고 있다. Thompson의 논리 전개에 있어서 White의 글을 선별적인 활용을 하고 있는 결과 신적 요소와 인적 요소 사이에 통일성을 확립하는 일에 실패하였을 뿐만 아니라 차이성이 있어 보이는 성경 기사에 역점을 두었다. 즉, 통일성보다는 차이성(differences)에 중점을 둔 분석을 펼처 나갔다. 통일성을 언급하였지만 그것은 이론적 통일성(Theoretical unity)에 불과하였다. 또한 성육신 모델이라면 성경의 통일성과 동인력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의 중심으로 이해되어야 마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대치하고 있다. 이러한 모델 유형이 무오주의자인 Rene Pachè, Eta Linnemann, 자유주의자인 James Barr, 신정통주의자인 Karl Barth 등에 나온다.
또 하나의 유형은 신적 요소와 인적 요소를 균형시킨 White의 유형이다. 이 성육신 모델에서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각성시키고 사상을 고취하시며 기록되어야 하는 문제의 방향을 유도하고, 메신저는 자신의 언어와 문체 및 자신의 문학적 능력의 수준에서 기록하며 그 기록에서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며 자신의 경험과 인격적 배경에 이끌리어 기록한다. 그러나 성경은 “계시된 진리”로서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
White의 모델은 이 조화와 균형의 특색을 지닌 유형이 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모델, 즉 인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하나의 통일성(unity)을 지닌 성육신 모델을 상정하고 있다. 이 모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의 통일성과 원동력을 주는 중심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 성경을 연구한 학도였지만 어떤 모순이나 차이성이 있다는 점을 제시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결합의 독특성에서 그 인성이 인간의 연약성으로 의식된 바와 같이 그는 성경 영감의 성육신 모델도 이 인성의 연약성 시각에서 파악하고 있다. 이점은 G. C. Berkouwer가 한때 신적 요소와 인적 요소의 공류적(共流的, confluently) 이해를 하였지만 기능론적 영감론에서 원용(accommodation) 개념과 인적 형식 문제에서 비목적 주변성의 부정확성과 상치성, 실수들을 강조하는 사상적 변화를 함으로 인하여 그 조화성을 깨고 있다는 점과도 대비된다. 이러한 Berkower의 사상에 John Goldingay는 동조하고 있다. White은 이 성육신 모델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고 당신의 손으로 친히 쓰셨다. 십계명은 근본적으로 신령한 것이며 인간의 작문으로 꾸며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들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 성경은 신성과 인성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연합은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사람의 아들이기도 하셨던 그리스도의 본성 가운데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요 1 : 14)셨던 그리스도께서 참되셨던 것처럼 성경도 참된 것이다.”
White는 성육신 모델에서 이와 같은 인적 요소의 문제성에 관하여 Berkouwer의 원용 이론이나 Thompson의 모순이론을 극복하여 그 조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몇 사람의 기자가 어떤 문제를 각기 다른 관점과 관계에서 소개하는 경우에 피상적이고 부주의하거나 편견을 가진 독자들에게는 서로 모순되거나 불일치한 것처럼 생각될지 모르나 명백한 통찰력을 가진 사려 깊고 경건한 연구자는 거기에 존재하는 조화를 발견하게 된다.
또한 그는 언어구사, 논리전개, 자료사용, 예증사용 등에 있어서 자유가 성경 기자에게 주어졌으나 동시에 성령의 완전한 지도와 감독을 받는다고 하였다. 성경에는 신적 요소와 인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 신적 계시의 진리가 인간의 언어와 사상으로 꼴지워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성경이 기계적, 축어적으로 영감되었다는 주장을 배척한다. 1886년에 그는 “성경 기자들은 하나님의 필자(penmen)이지 하나님의 필촉(pen)이 아니다”고 하였다. White는 이어서 인간 영감 및 사상 영감 차우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경의 말씀 자체가 감동을 받은 것이 아니라 감동을 받은 것은 사람들이었다. 영감은 인간의 언어나 표현 방법에 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인간 자신에게 작용하는 것이며 그는 성령의 감화로 말미암아 그의 사상이 그 감화에 스며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는 개인적인 정신의 감명을 받게 된다.”
성경은 여려 책의 인간 저작성도 인정한다. “다윗이...말하기를”(막 12 : 36 ; 눅 20 : 42 ; 행 2 : 25 등), “모세가 말하기를”(롬 10 : 19 ; 마 22 : 24 ; 막 7 : 10 ; 행 3 : 22 등), “이사야가 말하기를”(롬 10 : 20 ; 요 12 : 39 ; 롬 9 : 27 ; 막 7 : 6)등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표현은 이같은 인간 저작성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께서 여러 기자의 메시지의 실제적 저자임을 말하고 있다. 즉,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였다는 것은(행 1 : 16 ; 벧후 1 : 21 참조) 이 하나님의 저작성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의 참여가 설명하기 어려운 신비스러운 화육, 즉 혼합을 이루고 있다. 이 사실들을 중심으로 하여 볼 때 성경의 원천은 하나님에게 있고 인간은 그 기자가 된다. 그리고 기록된 메시지는 인간 언어로 표현된 하나님의 사상을 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선택하시고 봉사를 위해 준비시키시며 성령을 통하여 그들에게 독특한 정보와 지식을 드러내 보이시고 그들이 접근 가능한 자료 선택을 감독하신다. 성경 기자들이 가지들의 문학적 능력과 양식과 언어에 따라 표현 하지만 성령께서 그 마음을 비추시고 그들의 생각을 고취하며 진리를 찾을수 있도록 도우신다. 메신저가 메시지를 기록하고 전달할 때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도우시므로 그 최종 문학작품은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2. 메신저의 인간적 한계성
Luis Alonso-Schökel은 영감 이론들을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보고 있다. 그것은 말하는 이(speaker)를 하나님의 도구로 보는 입장, 저자는 인간이되 그 인간은 구수받는 자라고 보는 입장(근대 초기의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 신학자들) 및 말하는 이는 하나님이 보낸 메신저라는 입장이다.
이 세 번째의 메신저 입장은 성경 영감의 이론을 이해하는 관거이 된다고 본다. 그러나 메신저인 선지자의 삶에는 인간적 연약성, 또는 한계성이 나타나 있다. 이것을 성찰하는 일은 그다지 소망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메시지를 전달할 도구로서의 메신저가 되는 인간 편의 특성을 경시하고서는 올바른 계시와 영감관을 구축할 수 없는 것이다.
영감받은 것은 인간이지 언어가 아니다(벧후 1 : 21). Pieper는 Martin Luther가 성경의 인간적 측면(human side)을 이해하고 있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루터의 인간적 차우너에 속하는 것은 사소한 것들, 인간의 일상적 일들에 국한시켜 제한적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면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을 때 나타나는 인간적 한계성의 양태는 무엇인가?
A. 선지자 자신의 부족 의식
모세는 하나님께서 위탁하신 과업을 이행하기에 자기 자신이 부적합하다는 깊은 의식을 가졌다(출 3-5장 참조). 이사야도 하나님의 거룩성에 비추어 볼 때 자신의 부정함을 깊이 느꼈다(사 6 : 1-5).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메시지의 권능과 영광을 비교하면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고후 4 : 7)라고 하며 자기 자신을 토기로 보았다(고후 3 : 5-8 ; 4: 5-7).
B. 성경 기자의 인간적 행위 특성
선지자들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벧후 1 : 21)이다. 이 구절을 KJV에서는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로 번역하고 있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하나의 약점도 없는 완전한 존재들은 아니었다. 성경은 그들의 약점을 솔직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 하나의 예로 다윗을 들 수 있다. 그는 제왕이면서도 선지자였다(행 2 : 30).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죄를 범하였던 것이다. 다윗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교정하고자 다른 선지자를 그에게 파송하였다(삼하 12 : 1-13). 다윗이 회개한 후 하나님과의 교류가 재개되어, 주옥같은 참회시를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하였다(시51편 참조).
C. Ellen G. White의 개인적 약점들
White은 자신의 완전무결성과 무오성을 결코 주장하지 않았다. “무오성에 관하여 나는 그것을 결코 주장하지 않았다. 하나님만 무오하시다. 그분의 말씀은 진실되고 그분은 「변함이나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 : 17).”
White는 완벽한 분이 아니었다. 이것은 선지자를 폄하하고자 한 의도에서 한 말이 아니다. 예언적 말씀의 권위가 선지자의 무흠한 생활과 완전한 행동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선지자에 대한 확신이 무흠한 생활 위에 구축되는 것을 지양하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성서시대 선지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White는 보기 드문 모범적 생활, 즉 좋은 어머니로, 훌륭한 선교사와 설교자로, 인정미 있는 이웃으로, 상냥하고 자애로운 부인으로 사신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가 완전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에게는 약점과 단점이 있었다. 그의 일기와 개인 서한에 비추어 보면 그는 어떤 때는 풀이 죽어 있었고, 또 어떤 때는 남편에게 한 무례한 표현에 대하여 여러 번 용서를 구하여야 하였다. “나는 무류성(infallibility)이나 심지어 그리스도인 품성의 완전성을 지녔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나는 내 삶에서 실수(mistakes)와 오류(errors)를 범하는 것에서 벗어난 사람이 아니다. 내가 구주를 더욱 가까이 따랐더라면 그부느이 사랑스러운 형상에 미치지 못한 나의 모습에 그토록 애통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3. 선지자들이 잘못을 범한 경우들
하나님의 메시지가 완전하고 무류한 특성을 그대로 인간 메신저에게 적용하여 그도 완전하고 무류하다고 보는 자들에게 잘못을 범한 선지자의 모습을 상정한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과 증언들에서 잘못이나 과오를 탐색하자는 데 그 초점이 있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것을 취급하시고 있는 지를 성찰하고자 한다.
A. 선지자의 선입 관념
성경상 선입 관념을 지닌 선지자를 하나님께서 교정하신 사례가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되는 세계 선교의 폭을 제한시킨 문제를 성령께서 해결하신 경우를 들 수 있다. 모든 사도들이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구원받게 된다는 신념의 포로가 되어 있을 때, 성령께서 이 신념을 복음이 온 세상에 파급,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교정하셨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교정해 주실 때까지는 느헤미야 13 : 1-3과 호세아 2 : 23같은 구절들을 그릇된 선입 관념으로 해석하였다. 또 사도들은 스가랴 3 : 7과 이사야 53 : 7-8을 오해하였다(막 9 : 31, 32 참고). 베드로가 비몽사몽간에 본 이상(행 10-11장)과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는 특별 계시(엡 3 : 3-6)를 본 것은 이 사도들의 잘못된 선입관념, 또는 고정 관념을 깨우치신 것이다. 그래서 복음이 이들을 통하여, 또 전 그리스도 교회를 통하여 이룩되어야 하는 관념으로 교정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성경 이해는 성숙하여 갔다(눅 24 : 25, 26 ; 요 20 : 8,9 ; 행 1 : 6).
재림운동에 있어서 우리의 메신저가 지닌 선입 관념이 교정된 사례가 있다. 그 대표적 예로 세계 선교(global mission)를 들 수 있다. 재림운동이 세계 선교 지향이란 것은 명약관화 하였으나(계 10 : 11 ; 14 : 6), 재림교회 선구자들은 밀러 운동의 유산으로 인한 신학적 과오를 범하여 이른바 받힌 문 교리(shut-door doctrine)를 수용하여 선교의 폭을 제한시켰다. White도 이 닫힌 문 교리를 한 때 신봉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1844년 실망 후 한 때 나는 재림신자 단체와 마찬가지 입장을 취하여 온 세계의 자비의 문이 영원히 닫힌 것으로 보았다”.
혹자는 White가 이러한 교리를 신봉하였다는 것에 당혹스러워할 것이다. 그렇지만 성령께서 연이은 이상 중에 먼저 선지자의 고정 고나념을 교정하였고 같은 선지자를 통하여 전 재림운동의 향방도 교정하셨다.
B. 하나님 앞서 달려간 선지자들
성경상 선지자 나단은 다윗이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겠다는 제안에 동의하였지만 밤 이상 중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교정하여 다시 가서 다른 메시지를 전하게 하였다(대상 17 : 1-4).
재림운동에 있어서 White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남부 출판 사업을 폐쇄하는 것에 동조하였지만 그 다음날 밤에 하나님께서는 메신저를 교정하셨다. 그래서 White는 전의 메시지와는 다른 메시지를 써 보내야 했다.
“책임있는 지위에 있는 나의 형제들에게 : 1902년 10월19일 내 집에서... 인터뷰를 가진 다음날 밤중에 주께서는 남부 지역 사업에 관하여 제가 잘못된 입장을 취하였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C. 주의 오심을 열망한 선지자들
신약 성경에는 거의 모든 선지자들이 주께서 오실 시간이 박두하였다는 확신을 하고 있었다. 성령께서 이 주제에 관하여 어떻게 취급하였는가에 관한 정확한 연대기적 방식을 제시할 수 없다 해도 사도들이 추가된 정보를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4 : 15에서는 살아서 주의 오심을 맞을 수 있다는 기대에 젖어 있으나 데살로니가후서 2 : 1-4에서는 주께서 즉각적으로 오시리란 기대를 하지 말도록 권고하고 있다.
사도 요한도 “마지막 때”(요일 2 : 18)에 살고 있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주께서 오시기 전에 혹독한 박해 등의 사건이 있을 것을 말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사랑의 제자 요한의 마음에 일어난 여러 의문점을 파하는 답변서라고 볼 수 있다.
재림운동에 있어서도 이와 유사한 일이 일어났다. White는 1856년에 어떤 신자들이 예수께서 오시기까지 살아있을 것을 말한 바 있다. 그러나 1858년에 White는 대쟁투 계시를 보고 앞으로 가야 될 여정에 고나한 추가 정보를 주고 있다. 또한 “불순종 때문에 우리는 더 많은 해 동안 여기 이 세상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도 그에게 계시되었던 점도 유의해야 한다.
III. 불완전한 언어와 완전한 메시지
A. 축자 영감 대 사상 영감
재림교회는 현재 축자 영감론을 신봉하고 있지 않다. 몇 사례들(예컨대 십계명)을 제외하고는 모든 영감된 저술들은 선지자에게 이상, 인상이나 감화, 권고, 또는 판단으로 감동을 주신 성령과 그것을 문장화시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선지자 자신과의 협동 노력의 소산물이 된다.
메시지가 영감된 저술의 하나님 차원이 되는 반명 언어는 하나님과 인간의 정보 교류의 인간 차원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가 원하는대로 언어 선택에 관한 한 완전한 자유를 주신다. 성경의 문학적 기법이나 표현 방식이 각기 다르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White의 성경 언어에 관한 다음의 기사를 보자
성경은 어떤 장엄한 초인간적 언어로 꾸며서 우리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처하여 있는 그 위치에 이르시기 위하여 인성을 쓰셨다.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어야만 하였다. 인간에게 속한 모든 것은 불완전하다. 같은 말로서 뜻이 서로 다른 여러 가지 표현을 할 수 있다. 각기 뚜렷한 사상을 표현함에 있어서 한 마디 말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실제적인 목적을 위해서 주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유념해야 할 것은 사상 영감이란 차원에서 기록된 단어들이 경시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선지자들이 언어사용에 있어서 성령의 지도를 받지 않았다면 성경의 주석적 연구는 상대적 가치를 지닐 따름이다. 성서적, 문법적, 역사적 연구를 중요시하면서 사상 영감성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B. 불완전한 언어수레(전달수단) 안에 있는 완전한 메시지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그 자신의 언어를 구사하도록 허용하심으로 인하여 도 인간적은 것은 모두 불완전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불완전이나 과오가 영감된 본문 내에 존재할수 있음을 인정한다. 이 사실은 성경에서도 White의 저술에서도 모두 나타나고 있다. White에 있어서 이것은 다음 두 가지 점에서 살펴야 한다.
첫째, 그는 오린 시절부터 배워온 일상적 언어를 사용하며 연구, 독서, 여행 등을 통하여 그것을 발전시켜가고 있다는 점이다. 사용된 언어가 초자연적이거나 “신적”이라고 볼 수 없는 소이가 여기에 있다.
둘째, 그는 철자법에서나 문법상 과오를 범하였다. 도한 실언(lapsuslinguae)이나 (기억)착각(lapsus memoriae) 등과 같은 불완전한 언어 사용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실언이나 (기억)착각은 출판 전에 편집자에 의하여 교정될 필요가 있는 사항들이다. 편집자는 영감된 메시지를 교정하는 것이 아니고 영감 받지 않은 언어를 교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 편집자들은 영감된 글을 교정하는 일을 곤혹스러워 한다. 다음 사례들을 보자.
마태가 스가랴 대신 예레미야의 말로 인용한 은 삼십에 관한 기사는 lapsus memoriae로 보인다(마 27 : 9; 슥 11 : 12; 렘 32 : 6-9). 바울의 말을 베드로의 말로 인용한 다음의 White의 기사는 lapsus linguae로 보인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라고 사도 베드로는 선언하였다. 이것은 열성적 제자들에게 복음 사업에 있어서 끈질긴 노력을 경주활 동기가 되었다.
C. 성령의 불완전한 인간 언어 교정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교회가 진리 이해에 있어서 반대의 노선에 서 있을 때 성령께서는 선지자의 사상이나 신념을 교정하셨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선지자가 그 자신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셨다. 불완전한 메신저는 물려받은 타락한 본성의 약점에 순복한다. 그러나 성령의 직접적 지도하에서 메시지를 제시하는 때는 완전히 신뢰할 수 있고 무오한 것이다.
성령께서 중요 문제이 있어서 선지자를 교정하신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성령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관장하시고 있다는 것과 메신저로 하여금 올바른 자료원에서부터 올바른 자료를 선택하도록 영감을 줏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White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여러 사람들이 각기 표한한 만큼 진리도 그 다양한 면들을 나타내고 있다. 어떤 저자는 문제의 한 가지 면에 대하여 더욱 강력한 인상을 받으며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자신의 식별력과 감상력에 잘 조화되는 점들을 포착하게 된다. 또 다른 사람은 또 하나의 다른 국면을 포착하고 각자가 성령의 지도를 따라서 자기 정신에 가장 강력하게 인상받은 것을 증거한다. 각자가 받은 진리 가운데는 서로 다른 면이 있으나 모든 진리를 통해서 완전한 조화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처럼 계시된 진리들은 전체적인 완전성을 이루기 위하여 연합하여 생애의 모든 환경과 경험 가운데서 인간의 요구에 순응하도록 적용되었다.”
White는 “인간에 속한 모든 것은 불완전하다”라고 하였고 또 하나님은 “불완전한 언어로 인간에게 말씀하신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불완전(imperfection)이란 말은 White가 같은 문단에서 해석한 것처럼 “무한대에 속하는 사상이 유한한 이간의 사상 전달의 수단으로 완전하게 표현될 수 없기 때문”이란 의미를 띄고 있음에도 유의하여야 한다. 즉, 불완전은 자격이 모자라거나 성숙치 못한 성경 기자의 유오성에 그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Norman Gulley가 강조한 것처럼 인간의 불완전성을 신적 요소와 분리시키는 아리우스적 성육신 모델을 취하는 것도 경계하여야 한다.Achtemeier가 성경 연감의 실마리를 풀고자 한 것도 사실은 신앙 공동체에 행한 성경 메시지의 중요서을 의식하였을 것으로 추정 되기도 한다.
Ⅳ.결론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메시지를 기술하게 하셨다. 예언적 꿈이나 이상은 메신저들이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여러 가지 많은 형태의 모델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각 기자들이 성령의 지도를 받아 진리의 다양한 주제들에 관하여 그 중 어느 특정 측면들을 더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성령의 임재로 분별되고 고양된 선지자 자신의 판단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권고하시고 경고하시는 데 사용하는 또 다른 하니님의 방식이 되어 왔다. 증인으로서의 메신저의 개인적 증언이나 성령에 이끌려 올바른 정보를 탐색하고자 한 역사가적 기법도 구속의 경이로운 메시지를 알리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채택되어 왔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개인 서한이나 일기가 담고 있는 내적 감정이 시나 산문 형태로 표출되어 영감된 저술의 궁극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성령의 거룩케 하는 감동에 마음을 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감화, 교훈, 교정 및 위로를 주신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의사 소통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불완전한 인간을 부르사 메신저로 삼아 오셨다. 선지자의 생애 전체에서 전면적인 거룩함이나 완전성을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선지자들이 불완전한 언어를 구사, 활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연약성을 통하여 자기 백성들에게 완전한 메시지를 전달하신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고후 4 : 7)에서 시사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웅대하고 심원한 메시지라는 보배가 인간적 언어라는 질그릇 안에 담겨있다.여기서 한 메시지가 메신저에 선행한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선행할 뿐만 아니라 그 메시지를 판단하는 척도로 삼아야 한다. 이렇게 할 때 메시지는 완전하고 메신저는 불완전하다는 역설과 긴장을 극복할 수 있다. 성경의 권위성은 이 메시지의 완전성에 그 기본적 근거를 두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말씀하지도 않았다. 신약 성경 역시 구약 성경이 과오를 범하였다고 하지 않는다. 불완전한 인간적 요소를 강조하기 보다는 완전한 신적요소, 부조화보다 다양성 안에서의 조화성과 통일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성경 영감은 하나님의 메시지의 완전성과 인간 언어 수레의 불완전성의 역동적 긴장관계에서 올바른 방향을 정립할 수 있다.
(미주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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