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행복의 조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아담과 하와는 신체적, 정신적, 및 영적인 자질에 있어서 모두 완전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가장 이상적인 아름다운 환경 에덴 동산에서 살도록 하셨다. 이 거룩한 부부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스럽고 영광으로 가득한 아름다운 세계를 바라보았다. 초록색 카펫으로 뒤덮힌 천연계에는 여러 종류의 거대한 나무들이 제 각기 과일들을 맺고 있었고 계속하여 피어나는 여러 가지 꽃들의 향연으로 가득하였다. 에덴은 하늘의 축소판이었다. 첫 인간은 이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을 명상하면서 지냈다. 자비하시고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이들 부부에게 과일, 씨 맺는 채소, 곡류를 식품으로 주셨다. 아담과 하와의 마음에 만족과 건강을 주는 건강식품들이었다. 이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계속적으로 돌보시는 사랑의 증거들이 되었다.

비록 의와 거룩함으로 완전하게 창조되었다 해도 첫 인간은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께 충성하는 시험을 거쳐야 하였다. 그들은 먼저 일하지 않고는 행복할 수 없었다. 행복과 노동은 상호 불가분리적으로 연계되어 있었다. 아담과 하와는 의와 거룩함을, 그리고 마음을 계속하여 발전시키면서 고상하게 다듬어 가야 했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이 그들의 첫교사가 되었고 천사들이 그들의 동료 친구들이 되었다. 인간은 자기의 행복과 창조주의 영광을 위하여 굳건한 완전한 품성으로 꼴지어 가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 세계의 어느 생물보다 탁월한 마음의 능력을 주셨다. 그렇지만 천사들의 능력 보다는 약간 아래에 있었다.

아담과 하와가 배워야 할 첫 번째 큰 도덕적 과제는 자기 부인(self-denial)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기 다스림(self-government)이라는 과제를 주신 것이다. 이 자기부인과 자기 다스림 아래에서 아담은 지구의 임금의 역할을 다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선악과나무는 그들에게 이런 자기부인과 자기 통치라는 훈련을 위한 시험이 되도록 하였다. 그토록 많은 것들을 다 허용하셨지만 단 한 가지 선악과 나무의 열매를 금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선악과 나무는 그들에게 충성과 자기 다스림의 방편이 되도록 하신 것이다. 이 선악과 나무는 동산의 다른 나무들처럼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웠다.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매력이 있다고 해서, 사랑스럽다고 해서 다 허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선악과 나무는 자기 제어의 제동장치 역할을 한셈이다. 그 나무의 열매를 먹는 때 죄악의 지식을 체험하는 불순종이 되는 것이었다.

하와는 남편 곁을 떠나 걸으면서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었다. 지식의 나무 근처에 이르렀을 때 하와의 마음 속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왜 지식의 나무에 대한 금지라는 제한 조치를 내리셨는지 의아한 생각이 일었다. 저토록 아름다운 나무 열매 속에 죽음이 함유된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자하는 호기심이 발동하였다. 이 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3:1)라는 자기 속에서 일고 있었던 생각을 들추어 내는 뱀의 소리가 반복적으로 들려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와는 뱀이 자기 생각을 간파하고 있을 만큼 지혜가 있다고 여겼다.

이 때 하와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3:2-3).

뱀이 이에 대답한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3:4-5).

여기서 거짓의 아비는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을 펼친 것이다. 사단은 하와에게 불멸의 존재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죽을 가능성이 있을 수 없다는 보증을 한 것이다. 사단은 하와에게 금단의 열매를 먹는 날 인간의 지식이 개발, 발전 향상되어 하나님 수준으로 올라갈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금단의 나무 열매라는 것을 두고 하나님과의 동등성을 막고 인간을 종속적인 존재로 만드는 방편에 불과한 것이라고 일깨웠다. 이 단계에서 하와는 하나님의 금단의 조치는 불공정한 것으로 보게 된다. 뱀이 그 금단의 열매를 먹으면서 맛있다고 하와를 부추겼다.

하와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을 과장하였다. 하나님께서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고 아담과 하와에게 말씀하셨다고 하였다. 하와는 뱀과 논쟁하는 중에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는 구절을 덧붙였다.”

하와의 이 말을 빌미로 삼아 뱀은 자기의 간교성을 들어낸다. 그리고는 금단의 열매를 따서 만저도 죽지 않고 먹어도 죽지 않는 다는 점을 시연하였다. 하와는 이 단계에서 뱀처럼 금단의 열매를 만저 보았고 그 다음에 맛보았다. 아무런 도 안 나타났고 죽지도 않았다. 하와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3:6).

죄에 대한 무지가 인간의 행복을 위한 길이었다. 그러나 금지된 것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이 죄악과 불행의 홍수문을 열어재킨 것이었다.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조건에 매여있다.

 

(참고: 위 내용은 Ellen White1874224일 자 The Advent Review지에 기고한 글 전반부를 바탕으로 기술한 것이다.)

 

2. ‘만지지도 말라는 누가 한말인가?

이 구절을 두고 근래 몇 사이트에서는 안식학교 교과서 저자가 제6과의 풀이에서 마치 오류를 범한 것처럼 묘사를 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하나님께서 주신 본래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2:17)

그러나 하와는 위 말씀을 다음과 가티 표현하였다.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3:2-3).

성경적으로 보면 하와의 진술은 본래의 하나님의 말씀을 과장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약화시켜 죽을까 하노라라고 회의적인 의도를 깔았다.

엘렌 화잇은 1864년과 1870년 진술에서 하와의 말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보았지만, 1874년에는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를 하가 덧부친 구절이라고 규명하였다.

1864 - “동산 중앙 생명나무 근처에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가 서 있었다. 이 나무에 관하여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첫 부모에게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고 명령하셨다 (In the midst of the garden, near the tree of life, stood the 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evil. Of this tree the Lord commanded our first parents not to eat, neither to touch it, lest they die.)”(3SG, 35).

  1870 - “동산 중앙 생명나무 근처에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가 서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나무를 특별히 자기에게 향한 그들의 순종, 믿음, 및 사랑의 서약이 되도록 디자인하셨다. 이 나무에 관하여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첫 부모에게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고 명령하셨다 (In the midst of the garden, near the tree of life, stood the 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is tree was especially designed of God to be the pledge of their obedience, faith and love to him. Of this tree the Lord commanded our first parents not to eat, neither to touch it, lest they die.”)(1SP, 27).

살아남은 이들(The Story of Redemption) 은 위 진술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p. 24).

위 인용문 진술들과 1874224Review지에 기고한 글 사이의 차이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두 진술은 상호 모순되는 가? 엘렌 화잇이 초기의 입장을 후기 바꾸었는가? 초기의 글은 비영감적인 글이고 후기의 글은 영감 받은 글인가?

상반되어 보이는 두 진술 사이에는 조화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 있다. 1874년의 글에 나타난 사건 전개의 흐름 과정에서 그 단초를 찾아야 할 것이다. 화잇 여사는 뱀과의 논쟁 중에 하와가 만지지도 말라 죽을까 하노라는 구절을 추가하였다 (In Eve’s controversy with the serpent, she added the clause, ‘Neither shall ye touch it, lest ye die.)”고 풀이하였다. 제6과의 문맥은 이 시각과 궤를 같이한다. 그 문맥의 흐름을 보면 추가하였다는 것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여자가 매력적인 금단의 과일에 호기심을 품고 하나님의 제한 조치를 두고 의아하게 생각할 때 사단에게 유혹의 빌미를 주어 자기 부인이나 자기 다스림을 짓밟아 버릴 수 있다는 점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비쳐진다. 여자의 과장된 말이란 표현은 이런 심리과정 내재된 상황과 맛물려 있는 것이다.

사실상 금단의 나무와 그 열매를 가까이 하고 만지는 일을 통하여 유혹에 쉽사리 걸려 넘어질 수 있기 때문에 만지지도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일 수도 있고, 직접적인 명령은 아니라 해도 함축되어 있는 명령으로 볼 여지도 있다. 인간은 누구나 시험 받을 수 있는 환경에 자기를 두지 말아야 하고, 금지된 것을 만지면서 이렇쿵저렇쿵 따지면서 만지는 일은 벌써 함정에 빠져들 어 자기 다스림의 꼬삐를 풀어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금지된 영역을 두고 의혹을 품으면 행복의 조건인 순종과 충성이 무너지는 입구에 서는 것이 된다.

 

하와의 추가 구절을 두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릇 인용하거나 왜곡시키는 방향으로 과도하게 풀이하는 것에 역점을 두지 말아야 한다(6과는 이런 점을 노출하였다).

인간은 오늘날도 수없는 명령과 금지의 갈림길에서 선악과나무를 만나고 있다. 그리고 왜?라고 묻기를 좋아하고 호기심에 팔려 넘어진다. 사단은 인간이면 누구나 자기 안에 일고 있는 호기심과 의혹에 맞추어 또는 그것을 이용하여 하나님 말씀에 정면적으로 배치되는 풀이를 한다. 선악과 이야기는 오늘도 이 함정 근처로 자기를 두는 일이야 말로 자기의 행복을 무저갱에 더져버리는 위태로운 순간이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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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