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근원적인 정답을 찾아
자비와 공의의 융합
하나님은 호세아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보고 그들을 영원히 용서치 않을 것처럼 말씀하신다.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사하지 않을 것임이니라”(호 1:6).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금새 말을 바꾸신다.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호 11:8).
어느 쪽이 하나님의 진심일까? 답은 간단하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가지 마음을 다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다. 신학적 패러다임에서는 하나님의 마음이 두 가지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은 단일한 마음을 지니고 계시기 때문이다.
호세아는 먼저 공의의 칼 날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 그런 후에 자비로 감싸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공의의 잣대로 재면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사람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손을 펼치신다.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의 대쟁투 서두에서 루스벨은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는 서로 모순된다고 주장하므로 하나님의 품성을 곡해, 왜곡시키는 일을 설파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에 대한 대답을 궁극적으로 십자가에서 하신다. 십자가에서 공의의 요청도 충족하시면서 인간에 향한 가이 없는 사랑을 펼쳐 오시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당연히 받아야 할 죄 값을 따라 우리를 취급하지 않으신다. 비록 우리의 죄는 정죄받기에 합당하지마는, 그분께서는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연약함과 무지, 우리의 냉담과 고집을 여러 해 동안 참으셨다. 우리가 방황하고, 심령이 완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있을지라도 그분의 팔은 여전히 우리를 향하여 뻗쳐 있다”(화잇주석, 눅 15:8-10).
호세아의 메시지를 십자가에서의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의 완전조화와 융합이라는 거울을 통하여 이해하여야 한다. 그 조화와 융합의 외양은 사랑이 공의를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의는 거룩함이며 하나님과 닮아짐이다...그 의는 하나님의 율법에의 일치이다... 의는 사랑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빛이며 생명이다.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체현되어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그 의를 받게 된다” (EGW, Our Father Cares, 81). 하나님의 율법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님의 의와 사랑이 엉켜 있는 이런 통합적 메시지는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가 잘 조화 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은 이 하나님의 품성을 장차 오는 세계에서 끝없이 배워 나갈 것이다.
부모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
인간에게 두 마음처럼 보이는 현상은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이 자주 체험한다. 불완전하지만, 빗나가 말썽부리는 자식을 둔 부모의 마음에서 호세아서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잔뜩 화가 난 부모는 잘못을 뉘우치기 전에는 용서하고 싶지 않다. 자식이 뉘우치지도 않는데 용서한다면 자식을 버리는 지름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모는 비애를 절감하면서 자식을 용서하고 싶다. 빗나간 자식을 버리고 싶지 않다. 하나님은 빗나간 자기 백성들을 한편으로는 징벌하시고 싶고, 다른 한편으로는 용서하고 싶으시다.
명절이나 생일 당하면 부모는 자녀들을 기다린다. 꼭 보여야 될 자식이 안 나타날 때 부모의 심정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무슨 사정이 있어 못 간다고 알려오는 경우 부모는 이해한다. 그러나 부모 자식 간에 갈등이 있었거나, 형제자매 사이 갈등이 있어서 어느 자녀가 오지 않을 경우 부모의 심정은 멍멍해진다. 그리고 한숨과 함께 “내 인생은 실패한 것 같다”고 허공을 향하여 자괴감이 묻어 있는 한탄을 내 뿜는다. 이런 부모의 심정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흡사하다. 자식은 커서 부모가 되어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부모 심정을 알게 될 것이다. 이 때라도 깨닫는 자식은 그래도 훌륭하다.
부모의 자리에서 부모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배운다. 자녀를 키우면서 미숙한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마음을 더 배운다.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고 하나님과 동행하였다(창 5:24)는 기록의 의미가 부모의 자리에서 자라가는 부모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예언자의 비극적인 결혼
이스라엘은 분단국가로서 외세 침공으로 당한 고난, 그리고 강대국에 조공 바치는 일 등으로 고난을 당한다. 비록 에브라임은 그 우상숭배와 죄악들 때문에 완전히 멸망 받아 마땅하다.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다함없는 사랑과 자비 때문에 자기 백성이 회개하고 개혁하기를 바라며 지속적으로 사랑의 손을 펼치시고 있다고 호세아와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마음이 측은한즉 내가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31:20).
사랑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호세아의 결혼 이야기에서 절절하게 묻어 나오고 있다. 하나님은 호세아의 일생의 반려자를 중매하셨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하나님은 상대 여자의 치명적인 약점을 들추어내시면서 하시는 중매이었다. “음란한 여인을 취하라”(1:2 ). 여기에서 음란은 복수형이어서 고멜의 부정한 행실의 반복성 같은 것을 엿 보이기도 한다. 하나님의 품성에도 어긋나고 명령하신 교훈에도 어긋난 결혼(레 21:1, 7-제사장은 창녀와 결혼 불가)을 명하신 일은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다. 이 여인이 지나간 날을 청산하고 정절 있는 여성으로 살아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의심하면 안 되는 사람을 의심하는 일은 괴로운 일이다. 아내의 바람기에 남편 호세아의 마음은 미어졌을 것이다. 사랑 받는 사람보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 더 괴롭다. 둘 사이에서 탄생한 자녀- 아들, 딸, 아들- 3남매이지만 둘째, 셋째는 다른 사람의 씨로 보인다. 스위트 홈이 어느새 거친 파도가 몰아쳐 오는 가정이 되었다. 예언자는 배우자가 자기를 버리고 부정한 길로 빠져든 것을 보고 분노하였다. 이 때 하나님은 “호세아야, 네가 배반한 처를 인하여 발광할 듯 하냐? 당연한 일이다. 진정 사랑하는 까닭에 노할 것이다. 분할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라. 배반한 처를 사랑하라. 사랑하라.” 호세아서 행간에는 이런 음조가 베여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배반에 대한 하나님의 고통과 신음을 호세아에게 호소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짓밟고 죄로 멍들어 마음대로 살고 있는 자기 백성에 향한 메시지(11:8-11)는 호세아의 결혼에 얽힌 눈물과 고통의 시각에서 이해하여야 하지 않을까 한다.
호세아와 고멜의 관계가 이혼한 상태인지, 고멜이 호세아를 떠나 다른 남자와 동거하는 상태인지, 이방신의 신전창녀(temple prostitute)가 된 것인지, 다른 사람의 여자 노예나 첩(slave-concubine)이 된 것인지 해석이 분분하다. 어쨌든 고멜은 자식들을 낳은 뒤에(1장) 달아나서 간음했고 그리하다가 경제적인 예속 상태에 빠져서 돈을 주고 그녀를 빼내 와야 할 형편이 되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다시 가서” 그 여인을 대려와 사랑하라는 말을 하였다. 이는 매우 충격적이고 무거운 명령이었다. 호세아는 주어진 십자가를 짊어져야 했다. 그리하여 예언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그 여인을 값을 주고 사왔다. 그 값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이었다. 이것은 여자의 통상적인 구매가격보다 싼 노예 한사람의 값에 해당된다(출21:32). ‘절반은 돈으로 절반은 농산물로 지급한 이 값은 이미 천박한 여인 값으로 전락한 것을 보여 준다. 이 때 호세아의 비참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지만 하나님을 등진 인간의 모습이 이런 것일 것이다. 예언자는 자기의 결혼생활에서 반려자의 부정한 행실을 보면서 고통을 당하고 그래도 손을 펼쳐 다시 그 반려자를 품어야 하는 명을 받고 시내산 아래에서 자기의 신부로 맞이한 이스라엘에 향한 하나님끝 없는 언약적 신실함을 보아야 했다.
하나님의 사랑의 호소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 11:8).
에브라임은 이스라엘의 최대 지파이기에 이스라엘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놓겠느냐”는 “포기하겠느냐?”의 뜻이다. 그래서 NKJV은 “How can I give you up?”으로 번역하고 있다. 오늘 우리 시대 쉽게 포기하고 버리는 시대이다. 마치 컴퓨터를 비싸게 주고 샀지만 프로그램에 안 맞으면 미련 없이 버리듯이 소중한 부부의 인연을 물건 버리듯이 버리며 포기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조금이라도 짐 거리가 되면 소중한 사람을 버린다. 사람이 사람을 버린다. 오늘날 인간관계는 마치 타타타의 시작하는 구절처럼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버리는 것으로 끝난다. 이것이 眞如(타타타)이다. 산스크리트어 타타타는 상대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알겠느냐고 한다. 이것이 세상의 진상이다.
호세아의 메시지는 잘 믿다가 교회를 등지거나, 신앙생활은 하지만 사실상 실천적 무신론자로 전락한 신자들에게 주신 기별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는가?
먼저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이다(8절 하단). 자기의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측은한 심정이 여기 나타나 있다. 아드마와 스보임은 아브라함 시대 멸망당한 사해 부근 평야의 성읍들이었다(창 14:8; 신 29:23). 비록 이스라엘도 그런 성읍들처럼 죄를 범하여 진노를 받아 마땅했으나(참조 마 11:23, 24), 하나님께서는 북방 왕국을 그 대적의 손에 넘겨주거나 멸망에 내어주기를 마음 내켜 하지 않으신다는 점을 드러내신다.
이 망한 나라를 언급한 이유는 현재 이스라엘이 그들보다 더 악한 상태라는 점을 시사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대로 둘 수 없다. 이 같이 멸망당하여야 할 백성들을 어떻게 처치하여야 할지 그것은 하나님의 딜레마이었다. 아드마와 스보임은 죄로 말미암아 죽어 마땅하지만 이스라엘을 망하게 둘 수 없었던 하나님이셨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에서 “돌아서”는 ‘들끓어서,’ ‘소용돌이쳐서’의 뜻으로 하나님의 몸부림을 보는 듯 하면서도 진노를 자비에 섞어 융합시키시는 모습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집에 오지 않는 아들을 두고 그가 밥은 제대로 먹고 사는지 온 마음에 아들에 쏠려 있는 아버지처럼 하나님은 자기 백성으로 인하여 심한 상처를 받았지만, 그래도 걱정하면서 죽게 내버려 둘 수 없다는 심정이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는 듯 하는 부모의 심정이다. 사랑은 주는 쪽이 받는 쪽 보다 더 상처를 받는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자식이 부모를 사랑 하는 것을 비교할 수 없다. 하나님은 당신의 생명을 바쳐 자기 백성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이 약점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목숨까지 주는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이용하고자 한다. 하나님은 “내 속에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 붙듯 하도다.” 는 심정이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과는 달리 언약적 사랑에 신실하시기 때문이다. “내가…하나님임이라.” 이는 하나님이 자비로우신 근본적인 이유도 된다. 이스라엘과 맺은 그분의 영원한 사랑의 언약을 존중하고 이행하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 고유의 거룩한 사랑의 품성을 말한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므로, 인간의 보복적인 표준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표준에 의해 평가되어야만 한다(참조 롬 8:37~39; 요일 4:16).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발하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임이라 나는 네 가운데 거하는 거룩한 자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호 11:9). “사람은 멸하기 위해 징벌할지 몰라도, 하나님은 교정하고 고치기 위해 징벌하신다(참조 렘 29:11). 하나님의 진노는 사람의 진노와는 매우 다른 방향으로 분출된다. 사람은 복수를 목적으로 진노하지만, 그분은 화목을 위해 진노하신다”(성경주석, 호 11:9).
“나는 네 가운데 거하는 거룩한 자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호 11:9). 이 말은 왜 하나님이 죄악을 징벌하시면서도 지속적으로 자비를 나타내시는지를 설명해 준다. 죄를 용납할 수 없는 거룩함은 언약적 성실함으로 이루어진 거룩함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내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임이라” – 사람은 감정이 상하면 크게 잘못 나가 심지어 반려자를 버리기까지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속이 썩어가지만 인간처럼 그렇게 자기감정을 제어 못하는 분이 아니다. 이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나 있다. 인간은 십자가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얻는다.
“저희가 사자처럼 소리를 발하시는 여호와를 좇을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발하시면 자손들이 서편에서부터 떨며 오되 저희가 애굽에서부터 새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저희로 각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호 11:10-11).
사자의 울음으로 비유한 하나님의 사랑이 메가톤급 호소로 나오고 있다. 사자의 포효하는 소리는 초원에서 몇 km까지 멀리 퍼져 간다고 한다. 하나님의 돌아오라는 사랑의 음성이 사자의 포효와도 같다.
내 가슴에 절절하게 다가오는 전능자의 음성이 아직도 퍼지고 있다. 사자의 포효는 여호와께서 그분의 백성이 돌아오도록 소집하실 때에 부르시는 소리가 크고 위엄이 대단할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 포효는 또한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이 그들의 유수에서 돌아오도록 부르실 때에 이스라엘의 대적들에게 발하시는 그분의 권위 있는 명령을 의미할 수도 있다. 악행하는 자들을 향한 여호와의 장엄하고 위풍당당한 음성은, 비록 사랑이 가득하지만(롬 2:4) 또한 심판에 대한 엄숙한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에게 그분의 자비 안으로 피하라고 부르실 뿐 아니라, 이르러 올 진노에서 피하라고 호소하신다(참조 마 3:7, 8).
멀리 갔는가? 여호와 발하시는 사랑의 포효소리를 들으라. 그래서 죄악 세상의 상징인 애굽에서, 압제와 고난의 포로 생활의 상징 앗수르에서 그 소리를 듣고 나와야 한다. 동서남북 원근 각지에서 예수를 주로 부르짖는 백성들이 귀소 본능을 지닌 비둘기처럼 돌아 와야 한다.
잘못으로 책망 받은 자녀의 큰 무기는 ‘나 밥 안 먹어’이다. 그는 아버지의 본능적인 사랑을 간파하고 있어서 자기가 밥을 안 먹으면 아버지의 괴로움이 어떨지를 생각하며 그것을 무기로 대드는 식의 반항을 멈추고 돌아서야 한다. 자녀들이 아빠라고 부른다는 시실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권리가 되는지...를 안다는 것이 얼마나 안위요 축복인가? 성도들은 흔히 “나는 하나님 자녀야”라고 하면서 무슨 짓을 해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실 수밖에 없어’ 는 어린 아이의 ‘나 밥 안 먹어’ 식 태도와 다를 바가 없다. 유치한 사랑의 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의 신실하심에 성숙하게 반응하면서 나오는 것이 오늘우리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다.
사랑의 승리 대열로
시대의 총서 첫 머리에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16)(부조, 33)는 메시지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에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한 메시지가 나온다.
“대쟁투는 끝났다. 죄와 죄인들은 없어졌다. 온 우주는 깨끗해졌다. 오직 조화와 기쁨의 맥박만이 온 우주의 만물을 통하여 고동(鼓動)한다. 생명과 빛과 환희가 만물을 창조하신 분에게서 끝없이 넓은 우주로 퍼져나간다. 가장 작은 원자(原子)로부터 가장 큰 세계에 이르기까지, 만물은 생물계와 무생물계를 막론하고 조금도 흠이 없는 아름다움과 완전한 기쁨으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선포한다”(쟁투, 678).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의 대쟁투 역사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승리하신다. 승리로 이끄시는 원동력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사랑의 승리! 이 승리의 대열에 선 사람은 인생 문제의 정답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풀어내는 사람들이다. 호세아서에 나오는 메시지는 이 패역한 역사를 보면서 사랑의 승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고통 섞인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문제들을 풀어갈 수 있는 근원적인 정답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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