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악과 하나님의 대응 방식

죄의 본성

죄의 본성에 관하여 전통적으로 缺性이나 결핍(privation)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Augustinus 은 죄를 선한 것 안에 생긴 선의 결핍이나 상실로 보았다. 그는 인간이 원래 볼 수 있는 시력이 있었으나 그 시력을 상실하여 눈먼 상태와 같거나 부상당한 팔과 같다. 피조적 존재는 그 제한성 때문에 이러한 결핍을 안고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타락 전 이런 결핍은 문제될 것이 없다. 죄의 필연적 결과로 인간의 존재 그 자체는 결핍을 지닌 존재로 전락하였다. 완전한 상태의 결핍에서 시작한 이 결핍성은 인간을 무제한의 욕심꾸러기로 만들고 있다.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1:7).

Schleiermacher는 죄를 감성(sensuous nature)에 기인한 신의식의 결핍이라고 보았다.

전통적으로 죄를 결핍으로 보는 시각은 근원적 존재에서 이탈한 존재원천의 결핍 즉, 독립성으로 보는 방향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Ritschl 이 무지에서 기인된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결핍으로 본 것은 이런 시각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죄를 선의 상실이나 결핍 정도로만 보는 것은 아직 부족하다. 죄는 근원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능동적 반역이나 반항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죄를 幻影이나 환상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Spinoza는 죄의식이 인간의 제한성, 즉 지식의 불충분에서 기인한 환영이나 환상으로 보았다. 따라서 인간의 지식이 고차원 수준으로 상승되는 경우 죄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각은 죄를 부인하는 천박한 이해에 불과하다.

 

죄의 본질적인 특성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죄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죄에는 독립성이 없다. 죄는 존재가 아니다(Sin is not "is."). 죄는 존재의 반대이다(Sin is opposite of "is."). 죄가 독립성의 결핍이라는 점은 실재(reality)를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것도 된다. 일치신조(Formula of Concord)는 루터파 신학자 Matthias I. Flacius(1520-1575)가 죄를 분리된 독립적인 본체라는 주장을 배척하였다.

 

(2) 죄는 항상 하나님과 그의 뜻에 관계되어 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일을 참회하는 고백을 할 때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51:4)라고 고백하였다. 그는 인간에게 한 범죄를 곧 하나님께 행한 범죄라고 인식을 하였다. 모든 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이 된다. 죄는 하나님과 그 뜻에 대한 관계에서 일탈하는 것이 된다. , 죄에는 관계적 특성이 있다.

죄는 하나님의 도덕률인 십계명 율법에 일치하지 못하는 범법 행위이다. 인간 마음 판에는 보편적인 도덕률이 새겨져 있다. 보편적 도덕성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도 들어 있다(2:14-16).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3:2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7:7).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2:9)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일 3:4)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8:7)

죄는 도덕률과 연관 되어 있어 절대적 특징을 지녔다. 죄가 되던지 안 되던지 둘 중 하나이지 중립지대는 없다.

(3) 죄는 마음속에 그 근원을 갖고 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4:23).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17: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15:19).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6:45).

마음은 인격체의 모든 기능이 집중되는 중심부로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지반이 된다.

Augustinus는 죄는 인간의 의지 속에 그 근원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의지 그 자체가 죄의 첫 원인이 된다.

 

(4) 죄는 행위뿐만 아니라 내적인 상태, 생각까지 포함하고 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5:28). 갖가지 죄악들이 인간의 마음에서 나온다. 하나님의 법을 마음판에 새겨야 한다는 지적은(8:10; 10:16) 마음에 이는 생각을 경계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죄는 행위뿐 아니라 생각까지도 포함한다. 자주 죄는 구체적이고도 가시적인 범법 행위에 국한해서만 거론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어떤 이를 향하여 분내는 사람은 십계명의 여섯째 계명, "살인하지 말지니라"(20:13)를 범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음욕적인 욕구는 "간음하지 말지니라"(20:14)는 명령을 범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죄는 분명한 불순종 행위뿐 아니라 생각과 욕구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5:16-17).

여기서 육체의 욕심은 금지된 것들에 대한 욕구 즉, “죄된 본성의 욕망들(epithumian sarkos)"이다.

이 내적 상태에는 아담의 죄가 후손들에게 물려준 유전적인 뿌리도 포함된다.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58:3).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51:5).

 

아담은 그 후손들에게 죄된 불순종의 내적 타고난 성향을 물려주었다(5BC 1128).

만일 어린 아기를 출산하기 전에 어머니가 방종하거나 이기적이고 조급하며 흥분적이면 그런 기질들이 아기의 성질에 반영될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자녀들이 거의 극복할 수 없는 악의 성향(性向)들을 상속물로 물려받았다. 그러나 만일 어머니가 확고하게 바른 원칙들을 따르고, 절제하고 극기하면, 또한 그가 친절하고 온유하고 이타적이면, 그는 그와 같이 고귀한 모든 품성의 특성들을 아기에게 물려 줄 수 있다.”(치료, 372-373).

 

(5) 죄는 죄책(guilt)와 오염(pollution)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사람은 유죄가 된다. , 죄책이 성립되어 형벌을 받아야 한다. 죄책에는 두 가지가 있다. , 유전 받은 잠재적 죄책(potential guilt)과 죄된 행위를 한 결과인 실제로 범한 죄책(자범죄, actual guilt)이다. 하여 죄책을 짊어진 죄인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다(1:18).

죄는 죄책을 가져온다. 성경적 관점에서 죄책은 죄를 지은 사람이 형벌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내포한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에 온 세상은 "하나님의 정죄 "(3:19, 난외주) 아래 놓여 있다.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경우에 죄책감은 육체적, 정신적, 영적 기능들을 고갈시킨다. 또한 해결하지 못할 경우에 궁극적으로는 사망을 가져온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6:23)이기 때문이다.

오염은 인간 본성의 타락성, 도덕적 성질의 부패를 지칭한다. 인간은 이 타락성을 지닌 채 탄생한다(51:5; 14:4; 2:3).

 

(6) 죄의 뿌리에는 교만이 도사리고 있다.

죄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막고 자기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생각하고 판단하게 한다. 자기 중심 또는 자율적 존재로서의 인간상 그 자체는 교만의 터 위에 구축되어 있다. 이는 루스벨이 범한 길을 따른는 것이 된다(딤전 3:6).

인간 타락의 근본 동기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에 있다. 루스벨은 첫 조상을 유혹할 때 선악과를 먹으면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유혹하였다(3:5). 성자 하나님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자기를 낮추어 비천한 중에 탄생하셨다. 이 그리스도의 빛에 비추어 볼 때 죄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교만이다. “하나님과 같은 인간(homo sicut Deus)” 이 되고자 하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고자 예수께서는 인간으로 자신을 낮추시어 그것도 말구유에서 탄생하신 것이다.

교만은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반역이며 그 분의 율법을 파괴한 인간은 자기 욕망을 무한대로 추구하는 존재로 전락되어 버렸다. 이리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가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만은 죄의 일부가 될 정도를 넘어서 틸리히가 지적한 대로 죄의 전체가 된다.

 

(7) 죄는 일반적으로 가면을 쓰고 있다.

죄는 그럴듯한 이유로 저지른다. 그리고 자기 죄는 숨기고 남의 죄를 극대화시킨다.

 

(8) 죄는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그 나름대로의 특성을 지녔다.

Sin is "sui generis." -->Sin is "of its kind," "one of its kind,' or "unique type of its kind."

 

(9) 죄는 세력(power)이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존재(being)이지만 (존재론적 의미), 죄는 존재(being) 이 아닌 세력이다.

a. 죄는 부정적인 세력이다. 죄는 언제나 부정적으로 역사하는 힘이 된다(negative power).

b. 죄는 자기파멸적 세력이다(suicidal power). 죄는 항상 자기 파멸적 힘이 된다. 이는 마치 모든 수를 곱하면 제로로 만드는“O"과도 같다.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34:21).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우리로 소멸되게 하셨음이니라”(64:7). “죄의 삯은 사망”(6:23)이다.

 

c. 죄는 기생적 세력이다(parasitic power).

 

 

성서적 죄악기원론(The Demonic origin of sin)

1. 하나님은 죄악의 창시자가 아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이다(6:3; 32:4; 92:15; 1:13, 14).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시며(1:18) 구속의 경륜을 세 우셨다. 성경은 하나님이 죄와 악의 원인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1:13). 하나님은 선한 것만을 창조했다. 그가 창조한 것은 그가 보시기에 좋은 것이었기 때문이다(1:1-31). 그뿐만 아니라 죄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죄를 범하는 인간에게 있음을 밝히고 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1:14-15).

현대신학자들이 죄악의 근원 문제에 대해 다양한 해결책을 제시하여 왔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신적인 인과율에서 바르트는 혼돈과 무에서, Reinhold Niebuhr는 유한성에 대한 불안에서, Paul Tillich는 인간의 실존적 소외에서, 그리고 해방신학은 억압과 소유의 불균등과 같은 경제적 갈등에서 죄악이 기원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견해들은 전통적인 원죄 개념을 재해석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일반적인 특징이며 죄의 근원을 자유의 남용과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으로 간주하는 전통 신학과는 달리 인간의 현실적 구조와 상태로부터 죄의 원인을 찾으려고 시도했다. 이들은 부분적으로 성경에 근거하고 있으나 성경보다는 인간의 경험이나 철학 사상에 더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현대신학의 죄관들은 그 핵심적인 점에서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2. 죄악은 천사의 세계의 반역에서 일어났다.

하나님께서는 루스벨을 완전하게 창조하셨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 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들어났도다”(28:15). 전지하신 하나님은 빛의 담지자 루스벨의 미래를 예견하셨다. 죄와 악은 하나님이 허락하시어 존재하게 되었다. 그런대 왜 그러한 허락을 하셨는가? 루스벨의 본성(nature)과 의지(will)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본성을 완전하고 선하게 창조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의지를 강요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본성에 대한 책임을 지셔야 했지만, 자유의지에 대하여서까지는 책임을 지실 수 없다. 의지를 잘못 사용한 것은 루스벨 자신의 책임에 속한다.

창세기 3장의 인간 타락 사건은 천계의 타락 사건을 전제로 하고 있다. 천계의 반역 시 기는 성경에 나타나지 않았다. 성경은 인간의 반역과 구원에 관한 것을 집중적으로 다 루고 있어 천계에서 일어난 사건을 제한적으로 다루고 있을 뿐이다.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였다(8:44). “처음부터는 인간 역사의 시작을 뜻하기 때문에 루스벨의 반 역은 인간 창조역사 이전이라야 한다. 참고: 벧후 2:4

천상에서의 반역 타락한 천사 루스벨을 두고 성경은 사단(Satan, satanas, “대적자”)(4:10) 칭호를 사용하고 있다. 또한 마귀(Devil, diabolos,“비방자,” “참소자”)(4:5, 11; 12:9)라고도 한다. 빗대서 불렀던 칭호로는 바알세불 (Beelzubul, “똥의 君主”)(12:24, KJVVulgate의 영향을 받아 에크론의 신 바알세붑(Beelzebub, 파리의 君主로 표기하고 있다.), 벨리알(Belial, “무가치함,” “사악함”)(고후 6:15), “공중의 권세 잡은 자”(25:41), “이 세상의 신”(고후 11:15), “이 세상의 임금”(12:31), “악한 자”(13:19), “시험하는 자”(4:3), “미혹하는 자”(20:10), , 뱀 등의 칭호가 있다. 루스벨 추종자들은 하늘 별 삼분의 일”(12:4)이니 된다. 악한 천사들, 또는 귀신들로도 칭하여 지고 있다. 이들은 그 우두머리인 사단을 도와 하나님을 대적하고(25:41; 6:12), 인간 사회에 재난과 질병을 일으키고(1:5-10; 5:4), 도덕적 불결을 일으킨다(1:23-27; 4:33).

 

3. 천사의 반역 원인은 루스벨의 자기 높임(self-exaltation)과 교만(pride)에 있었다.

Lucifer(Light-bearer) 영어 칭호는 계명성(Day Star, 14:12-15)KJVLucifer로 번역한 것에서 기인된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Lucifer이 반역한 것을 두고 하나님과의 동등한 지위로 격상, 즉 자기 높임과 교만에 그 목적이 있다고 보고 있다.

(1) OT--자기 높임 (self-exaltation) (28:11-17; 14:12-15)

(2) NT교만.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딤전 3:6). “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1:6).

(3) Ellen G. White은 반역 동인인 교만 외에 시기와 질투를 추가하고 있다(3SG 36; PP 36).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로 주어진 경고는 반항심을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루스벨의 질투심은 더욱 굳어 갔다. ”(부조, 36).

4. 루스벨의 반역의 전략 논리

(1) 하나님 폭군론과 율법폐기론--하나님이 절대적인 거룩한 율법에 순종을 천사들에게 요구한 것은 하나님의 독재성을 드러낸다. 참된 자유는 하나님의 율법의 기속에서 벗 어 나는 것이다.

(2)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는 상호간에 충돌하는 개념들이다.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하는 공의는 자비를 배척한다. 루스벨은 하나님께서 율법의 요구인 공의의 충족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해결하는 것을 예견하지 못하였다. J.S. Mill은 창조주 안에 서 무한한 공의와 자비를 조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의 완전한 조화 방식으로 구원의 길을 제시하였다. 하나님의 율법과 십자가의 복음은 상호간 완전 조화된다. 거룩하신 사랑은 무한한 자비와 무 한하신 공의로 정의된다.

(3) 그리스도의 죽으심이야 말로 하나님의 자비가 공의를 파괴하였다. 그리하여 그리스 도의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율법이 폐기되었다.

 

 

6. 천상세계에서의 반역 결과

(1) 하늘의 전쟁 (12:7-9)--루스벨은 하나님이 사용할 수 없는 기만과 궤변, 아첨과 허위를 사용하였다.

(2) 하나님의 인내

하나님께서는 불만의 정신이 성숙하여 공공연한 반역의 행동이 나올 때까지 사단이 그의 반역을 추진하도록 허용하셨다. 그 까닭은 사단의 계획들이 충분히 발전되어 그것들의 참 본질과 의도를 모두가 볼 수 있게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름부음을 받은 그룹인 루스벨은 매우 높은 지위에 있었으며 그는 하늘의 존재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으며, 그들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하나님의 정부는 하늘에 거하는 자들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세계들도 포함하였다. 루스벨은 하늘의 천사들을 반역에 가담시킬 수 있다면 다른 모든 세계도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는 그 문제를 자기의 관점에서 교묘하게 제시하고 천사들을 자기에게 이끌기 위하여 궤변과 기만을 사용하였다. 그의 속이는 능력은 매우 컸다. 거짓의 가면으로 자신을 가장함으로 그는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그의 모든 행위들은 너무도 신비에 싸여 있었으므로 천사들에게 그의 행위의 진상을 알게 하기는 어려웠다. 그의 행위가 충분히 발전하기 전에는 이것이 악한 일이었다는 것을 나타낼 수 없었으며 그의 불만은 반역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충성스러운 천사들조차도 그의 품성을 완전히 분별할 수 없었으며 그의 일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몰랐다. ”(부조, 41).

 

(3) 지구에까지 확장된 대쟁투

타락한 천사 루스벨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죄를 범하게 하므로 인하여(3:1-7) 그가 지구의 통치자, “세상의 임금이 되었다.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12:31; 참고 요 14:30).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2:2).

 

(4) 사단과 타락한 천사의 운명

루스벨은 천상의 반역과 대결에서 패하여 땅으로 추방되었다.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쫓기니라”(12:9).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속죄로 인하여 사단의 운명은 파멸의 유황불로 전락하 게 되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 라”(10:18).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12:31)

사단은 천년기에는 결박당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재림 시까지는 활동한다.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 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20:2-3).

천년기에 성도들이 타락한 천사를 심판한다.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일이랴”(고전 6:3).

천년기 끝에 유황불 못에서 파멸 당한다(20:14).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 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 가라”(25:41-42).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20:10).

 

7. 루스벨에대한 즉각적인 처벌이 없었던 이유

루스벨의 반역의 논리가 정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들추어내는 일에는 시간이 걸린다. 하늘 거민들은 죄의 참 성질과 그 결과를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더구나 루스벨은 반역 시 궤변과 기만의 방법을 사용하였다. 루스벨의 이 반역 진상이 충분히 나타나 그 참모습과 의도를 온 우주가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조화된다는 것을 완전하게 드러내야 한다. 하나님의 정부는 공의롭고 그의 율법이 완전한 것이 온 우주 거민들 앞에 증명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독재자라고 선동한 반역 논리가 거짓임이 드러나 온 우주의 오해가 없도록 하여야 한다.

 

8. 죄악의 기원의 오묘성과 이해의 한계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28:15).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지은 피조된 존재 루스벨이 어떻게 창조주를 반역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

첫 조상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것은 그들 부부 마음 안에서 일어 난 것이 아니고 외부에서부터 온 것이었다. 그러나 루스벨의 반역은 자기 안에서 일어났다. 완전하게 지음을 받은 천사의 마음속에서 어떻게 자고하는 교만한 마음과 불만족한 마음이 일어났는지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루스벨의 반역은 오묘한 사건 중의 하나가 된다. 이 점에서 악의 기원(시작)에 대한 설명이 막힌다. 그러나 성경에 흐르는 사상은 하나님께서 악을 창조하지 않았으며 그 악을 원하지도 않았다고 하고 있다.

 

그래서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죄의 시작과 그 존재 이유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수수께끼가 되어 있다. 그들은 악의 소위(所爲)와 그 무서운 결과로 생기는 불행과 파멸을 목격한다. 그리고 그들은 무한한 지혜와 능력과 사랑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통치아래 이런 일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의심한다. 여기에 그들이 설명할 수 없는 신비가 있다. 불신과 의심에 싸여 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분명히 나타나 있고 구원에 필수적인 진리에 대하여 눈이 멀어 있다. 죄의 존재에 관하여 질문하면서 하나님께서 결코 계시하지 않으신 것까지 알아내고자 노력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이 가진 어려움을 해결하지 못한다. 의심하고 트집잡기를 좋아하는 기질에 의하여 행동하는 자들은 그것을 구실로 성경의 말씀을 거절해 버린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유전과 그릇된 해석이 하나님의 품성과 그분의 정부의 성격과 하나님께서 죄를 처리하는 원칙 등에 관한 성경의 교훈을 모호하게 만들어 버린 까닭에 악에 관한 큰 문제에 대하여 만족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죄악의 시작은 그 존재 이유와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죄의 시작과 죄의 최종적인 처분, 악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가 완전히 나타나게 되는 것에 대하여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성경에 무엇보다 분명히 알려져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가 들어온 것에 대하여 전혀 책임이 없으시다는 것, 하나님의 정부에는 반역을 일으킬 조건이 될 만한 아무런 결함이 없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를 강제적으로 거두어 버린 일이 없다는 것 등이다. 죄는 하나의 무단 침입자이다. 그것이 나타나게 된 데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죄는 오묘한 것이며,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그것을 옹호하는 것이다. 만일 죄의 원인과 그 존재 이유를 밝힐 수 있으면 죄는 죄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죄에 대한 유일의 정의는 죄는 불법이라”(요일 3:4)는 말이다. 죄는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가 되는 위대한 사랑의 율법에 대항하여 싸우려는 정신의 표현이다.”(쟁투, 492-493)

 

우리는 창조 세계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 그리고 악의 실재를 확인할 수 있다. 악의 현존은 유한 인간의 불완전한 눈에는 완벽하게 다 이해될 수 없는 미스테리에 속한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악의 실재를 보면서 대처하여 나가면 된다. 이 신앙의 눈의 요체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그러나 이 전능성은 무엇이든지 다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악에 대한 즉결처분이 전능성의 발휘로 생각하는 시각은 하나님의 전능성을 인간화시키는 것이 된다.

(2) 하나님은 첫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셨다. 이 선택의 자유를 마음대로 제한시키는 일은 전제적이고, 비논리적인 일이 된다. 하나님이 인간을 로봇 같은 인조인간으로 만드셨다면, 인간의 자원하는 사랑과 기쁨의 순종을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 타락 이래 인간은 죄로 멍든 의지를 하나님께 바친 후 하나님으로부터 의지를 다시 받아야한다”(MB 32).

사람의 품성(형성)에 있어서 그처럼 요긴한 요소를 이루는 이 의지는 타락으로 사단의 지배하에 들어가 버렸다. 그리하여 사단은 언제나 그 자신이 기뻐하는 뜻을 따라 역사함으로 사람의 완전한 멸망과 불행을 도모해 왔다. 그러나 하나님의 무한한 희생은, 그분의 독생자 예수님을 주셔서 죄를 위한 희생제물이 되게 하심으로 그분의 정부의 원칙을 하나도 깨뜨리지 않고 그분으로 하여금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게 한다. “그대 자신을 나에게 바쳐라. 그 의지를 내게 달라. 나는 그것을 사단의 지배에서 빼앗아 내가 소유하겠다. 그렇게 될 때 나는 나의 기뻐하는 뜻을 따라 그대 안에서 역사할 수 있다.” 그분께서 그대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주실 때, 그대의 뜻은 그분의 뜻과 같아지고, 그대의 품성은 그리스도의 품성과 같이 변화된다.”(5증언, 515).

(3) 하나님이 즉시 악을 척결하였다면 그 자체가 악이 될 수 있다. 힘을 가진 자가 마음대로 힘을 발휘하는 것은 공포와 비극을 몰고 온다. 고통과 일정한 과정을 거친 후에 더 높은 차원의 선을 위하여 악의 척결을 적당한 때까지 유예시킬 수 있다.

(4) 죄악으로 오염된 현재의 세계와 죄악이 없었던 원 창조 시의 세계 사이의 차이성을 감안하여야 한다. 비정상적인 카오스 속에서 완전하신 창조를 재단하는 일은 바르지 않다.

(5) 성경은 선의 궁극적 승리를 말하고 있다. 유한한 인간은 하나님의 섭리를 전부 다 알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악 문제를 완전한 지식으로 이해 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9. 왜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천사들을 격리시키지 않았는가?

 

하나님께서 타락한 천사들을 격리시킨다고 해서 문제가 근원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시험이 천사의 마음 안에서 일어났다. 존재의 내부에서 의혹과 교만의 파문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지적 존재들의 세계에서 격리 수용한다고 해서 예방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 루스벨은 불신과 의혹의 씨를 퍼트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선의 해결책은 격리보다는 피조적 지성들이 죄악 세계에서 죄와의 싸움에서 죄악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는 면역체계로 대응케 하는 것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속과 최후적 회복이라는 원대한 경륜에 따라 역사를 이끌어 가는 긴 여정을 택하신 것이다. 죄악의 정체를 충분히 들어 나게 하시므로 죄악을 공의롭게 근절하시는 방책이 우주를 영원히 안정되게 하는 길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죄 용서를 받은 의인이지만 거짓의 아비 (8:44)가 계속하여 그 용서 받은 의인 안에 죄악의 욕심을 잉태시키는 일의 지대에서 살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선악이 혼재한 이 세상에서 악을 대항하여 승리하기 위하여 끊임 없이 은혜의 능력을 의존하여 나가야 하는 도전을 받고 있다.

 

10. 하나님의 루스벨 반역 대처 방식

위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죄의 뿌리에는 교만이 그 원동력으로 들어 있다. 죄는 피조적 존재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대신에 자기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생각하고 판단하는 자기중심 또는 자율적 존재가 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즉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에 서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에 있다 이 교만은 루스벨 반역의 주 동인이었다(딤전 3:6). 그리스도께서는 루스벨에게 자기 높임의 반역의 길로부터 돌아서도록 탄원하였으나 루스벨은 이를 무시하였다.

인간 타락의 근본 동기도 이 교만에 있다. 첫 조상은 선악과를 먹으면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한(3:5) 루스벨의 유혹의 마수에 빠졌다. 하늘회의에서는 하나님의 위상을 추구한 인간을 구원하고자 한 구속의 경륜에 관한 논의에서 성자 하나님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자기를 낮추어 비천한 중에 탄생하여 겸손, 즉 자기 낮춤의 모본을 보이고 인간을 위한 희생제물이 되겠다고 자원하셨다. 이 그리스도의 빛에 비추어 볼 때 죄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교만이다. “하나님과 같은 인간이 되고자 하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고자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신 그리스도께서는 아들로 오셨고 종의 형체로 죽기까지 순종하셨다(2:5,6).

교만은 하나님의 전 영역을 침범하는 반역이며 그 분의 율법을 파괴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욕망을 무한대로 추구하는 존재로 전락시켜 버린다. 이렇게 하나님의 원수가 된 인간을 구원하고자 자기를 비하시킨 예수께서는 죄의 전체가 되는 교만을 부수는 길로 존재론적으로 동등하신 하나님의 신분을 성부께 종속시키는 선택을 자원하셨다.

카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의 교회교의학 현대신학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자들 문하에서 양육을 받았지만, 목회에 쓸모없는 자유주의 신학을 철저하게 거부하였다. 자펜빌 작은 교회에서 말씀봉사를 위한 성서 천착이 장래의 교회교의학의 바탕을 마련해 주었다. 다수 어용 신학자들에게 환멸한 그는 새로운 신학적 모델을 창출하였다. 1968년 사망 시 까지 교회교의학 13권을 저술하였으나 미완으로 끝났다. 그러나 그의 교의학은 실로 한 시대를 가르는 역작으로 남았다. 그의 위상은 1962년 타임지가 표지 기사로 삼을 만큼 되었다.

그는 교회교의학 제4권에서 하나님의 비하는 인간의 승귀(exaltation, 높임)로의 교환을 가져온다. 이 교환설 진수에는 비천한 상태가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고, 승귀의 상태는 인간과 관련되어 있다. 4-1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으로 비하한 제사장이 되고, 죄를 교만으로 보아 하나님의 비하에 대비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을 위한 객관적 칭의가 이루어졌으며, 주관적 구원론으로 믿음을 제시하고 있다. 바르트의 하나님의 비하와 인간의 높임의 교환 구도가 루스벨의 교만으로 인한 반역과 직접적인 연관을 안 시키고 있지만 죄에 대한 하나님의 대처 핵심을 어느 정도 잘 갈파하고 있는 셈이다.

성경에 이른바 그리스도의 역할론적, 또는 종속론적인 본문들이 나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죄에 대한 대응에서 제시한 구속의 경륜인 자기 비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자기 신원을 감추시기를 택하신 성령께서도 보냄을 받은 분으로서의 모습이 성경에 맥맥하게 흐르고 있다. 여기에서 구속의 경륜을 수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께서는 루스벨이 걷고 있는 길과는 정반대의 겸비의 길을 걸으심으로 전 인류에게 보석처럼 빛나는 모범이 되고 있다는 점이 삼위일체라는 진리의 핵심으로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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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