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복음 및 율법의 역할
I. 들어가는 말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물질세계와 생물의 세계가 법의 궤도 아래 존재하도록 하셨다. 도덕적 율법 역시 인간 창조 이전에 존재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담이 범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도 율법의 원칙들은 추호도 변치 않았으며 타락한 상태 가운데 있는 인류에게 적응되도록 명확하게 재정되고 표현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아버지와 의논하시는 가운데 희생 제물을 바치는 구속의 복음을 세우셨다. 사망이 즉각적으로 범죄자에게 이르게 하는 대신 하나님의 아들의 위대하고 완전하신 제물을 상징하는 희생 제물에게 사망이 옮겨지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창조 세계가 율법의 제어 아래 있게 하셨으며, 이 율법을 범할 경우 복음의 계획을 마련하여 두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선언을 하심으로 아담에게 처음으로 좋은 소식의 복음을 주셨으며 이 복음은 노아와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대대로 이어서 전해 왔다.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지식과 구속의 경륜을 아담과 하와에게 가르쳐 주셨다. 저들은 조심스럽게 이 중대한 교훈을 간직하였으며 구전(口傳)으로 이 교훈을 저희 자녀와 그 자녀들의 후손에게 전해주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지식이 보존되었다 (1기별, 230).
II. 율법과 복음의 관계
율법과 복음이라는 주제는 성경의 핵심 주제에 속한다. 마르틴 루터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잘 분별할 수 있어야 진정한 신학박사로 보았다. 그는 갈라디아서 2:14 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율법과 복음을 올바로 구분할 줄 아는 지식은 매우 중요하고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의 모든 교리의 종합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에 관한 주제가 율법과의 관계성을 규명하는 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같은 바울 서신을 조금만 읽어도 곧 나타나는 핵심 문제가 됨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리하여 율법이 복음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큰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이에 관하여는 몇 가지 모델들이 제시되어 왔다.
A. 율법폐기론(Antinomianism) 모델
율법폐기론은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을 구약의 도덕률 율법으로부터 해방시켜 더 이상 그것에 순종하거나 전파할 필요가 없다는 율법(nomos, law)을 반대하는(anti, against)입장이다. 율법 주제에 관한 구절을 피상적으로 읽는 자나 왜곡하여 이해하는 자들은 율법 폐기론에 선다. 오늘날 세대주의가 “그리스도의 법”을 인정한다고 강변하나 사실상 이 율법폐기론 방향의 대표적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B. 상호 긴장관계 모델
이 모델은 율법과 복음이 상호 대립 긴장 관계에 있다고 본다. 루터교 신학자(C. F. W. Walther)같은 이는 이런 입장을 대체로 대변하고 있다. Walter는 신구약성경의 교리적 내용은 율법과 복음이라고 하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두 가지 교리에 의하여 구성되어 있다.
C. 상호조화관계 모델
이 모델은 율법과 복음간의 상호 관계에 관한 제 3의 입장으로 상호 계속과 조화의 관계로 보는 주장을 한다. 웨슬리(John Wesley)는 이러한 입장을 옹호하고 있다. 근래에는 풀러(D. Fuller)가 이런 견지에서 책을 펴냈다.
하나님의 주신 두 가지 선물 중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배격한다거나 상호 대립된다고 이해하는 것은, 여호와의 율법이 하나님의 본성이나 품성의 사본이란 점과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품성 내의 상호 충돌을 유발시킨다는 점에서 배격될 수밖에 없다. 또한 옛 성막 안 지성소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하는 법궤 위에 은혜가 서린 속죄소가 있고, 그 아래에는 율법이 들어 있어 율법과 복음이 완전히 조화된 구도를 보이고 있어 양자를 완전 조화 관계로 보는 것이 가능하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는 불가분리적이다.
Walter Kaiser는 “은혜는 항상 율법이 뿌리를 내릴 토양이고, 율법은 그처럼 고귀한 부름과 특권에 대한 자연적 결과이며 유일하게 적합한 응답이 된다”고 하였다.
엘렌 화잇은 같은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갈파하였다.
“율법은 체현된 복음(the gospel embodied)이고, 복음은 전개된 율법(the law unfolded)이다. 율법은 뿌리이고 복음은 그것이 맺어 주는 향기로운 꽃과 열매이다.”
"계명과 복음은 서로 일치하며 서로를 보완해 준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믿음 없이는 계명이 죄를 범하는 자를 구원할 수 없으며, 또한 계명이 없는 복음은 무력하며 무능하다. 계명과 복음은 완전히 하나를 이룬 통합체이다. 구속 역사의 기초를 놓으신 우리 주 예수께서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다. (스가랴 4:7). 그 예수님이 우리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며 일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계명이 조화롭게 혼합되어짐으로 거짓 없는 사랑과 믿음을 창출하게 된다.”
“만일, 우리가 세 천사의 기별이 지니고 있는 정신과 능력을 받고자 한다면, 반드시 율법과 복음을 함께 소개하여야 할 것이다.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땅에 속한 한 세력이 불순종의 자식들을 동요시켜서 하나님의 율법을 폐하고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라는 진리를 유린하는 한편, 위에 속한 한 능력은 충성되고 율법을 높이며 예수님을 온전한 구주로 받드는 자의 마음에 역사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면 거짓 교리와 거짓 사상에 사로잡혀 그리스도와 그분의 의를 잃어버리게 되며, 따라서 그 믿음은 능력과 생명이 없어질 것이다.”(복음, 161).
이런 조화관계에 있어서 Karl Barth는 율법과 복음이 하나님 말씀 안에서 조화된다는 주장을 폈다. 이는 율법을 복음의 형식으로 보거나 율법이 복음 안에 있다고 보는 모델이다. 그래서 ‘율법과 복음’이 아니고 ‘복음과 율법’이라는 순서를 선호한다.
칼 바르트는 율법을 은총의 범주 안에 포함시킨 모델을 강조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율법은 신앙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래서 율법은 복음 안에 있는, 즉 율법이 복음에 포함된 관계를 제시한 것이다. 따라서 양자를 분리시키는 것은 성서의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본다. 그는 율법은 복음과 다르다고 하면서도 같은 하나님의 말씀 배경 안에서 이해하고자 한 것이다. 바르트에게는 율법과 복음, 죄와 의, 죽음과 생명은 하나의 사건이 된다. 즉, 심판과 용서가 동시에 일어난다. 인간은 자신의 공로 없이 의롭게 되었으므로 율법은 정죄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H. Thielicke 같은 루터파 학자들은 이런 모델을 율법과 복음의 연합으로 보아 위험시한다.
III. 율법의 특성과 역할
A. 율법의 특성
1. 율법의 은혜성
근본적으로 성서의 법은 언약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고 올바른 관계를 맺도록 하고자 율법을 주었다. 하나님의 율법이 은혜의 수단이 된 것이다. 출애굽기에는 하나님께서 열조와 맺은 언약(아브라함과의 언약은 창 12: 1~3; 15:18~2; 17:3~8에, 이삭과의 언약은 창 17:21에, 그리고 야곱과의 언약은 창 35:10~12에 나온다)을 준수하는 분이라는 사실을 자주 상기시키고 있다(출 2:2~4; 6:2~5). 모세를 불러 출애굽의 대과업을 맡길 때에도 이 사실을 다시금 되풀이하고 있다(출 3:6). 따라서 출애굽과 시내산 아래에서의 언약은 이 아브라함과의 언약과 연속선상에 있으며, 그 은혜와 약속의 구체화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 시내산 언약은 아브라함과 체결한 은혜 언약의 범주 안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율법 교사(Gesetzlehrer)로 불리운 칼뱅은 이 같은 사실을 인정하여 율법이 거룩한 은혜 언약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지적하였다.
출애굽기 20장에서 구원 순서(ordo salutis)의 첫 단계인 애굽에서의 하나님의 구원을 먼저 말하고(20:1~2), 그 다음에 십계명이 나오고 있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하나님의 법은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단순히 명령을 수집한 것이 아니고 언약 안에 포함된 언약 백성들의 생활 규범이 된다. 어니스트 케빈(Ernest F. Kevan)이 율법의 은혜(The Grace of Law)란 책을 통하여 율법의 은혜성에 관한 청교도의 사상을 밝힌 것은 문제의 정곡을 들추어냈다고 하겠다.
2. 하나님 품성의 복사본
다음으로 이 율법은 하나님의 품성의 복사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뜻을 율법에 폈다. 율법은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다. 하나님이 완전하고 거룩하며 의롭고 선하며 영원하듯이 그의 율법은 완전하며(시 19:7), 그의 계명은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고(롬 7:12), 영원하다(시 119:151, 152). 그래서 율법은 하나님의 품성의 복사본이 된다는 결론이 성립된다.
또한 단순하게 “율법”이라고 하지 않고 “여호와의 율법”, “주의 법”으로 칭하고 있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시 19:7~9; 119:1, 18). 신약성서에서도 “그리스도의 법”(갈 6:2), “하나님의 계명”(계 14:12)으로 표현하고 있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따라서 율법을 “여호와”, “주”,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로부터 분리시킨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뜻으로부터의 이탈이 되며 종국적으로는 “여호와”,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를 의미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칼뱅도 율법이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라는 사실을 통하여, 율법 내용이 “하나님의 완전한 의의 규칙”이 된다고 강조하였다. 하나님의 의로 차있고 신령한 만큼 의와의 관계를 신령한 관점에서 이해하고 해석되어야 한다. 그래서 새 언약에 있어서는 생명과 의에 관한 율법이 성령과 상호간 결속되어 있다(고후 3:6~11). 이 새 언약에서는 성령을 통하여 인간의 마음에 “여호와의 율법”(렘 31:31~33; 겔 36:26)이 기록된다. 이런 점에서 율법의 외형적 준수 이상으로 내적, 영적인 준수가 강조되어야 한다. 이것이 율법의 의를 이루는 비결이다.
산상보훈에서 율법의 심오한 내적, 영적 의미 차원을 크게 부각시킨 그리스도의 해석이야말로 율법에 대한 입법자의 유권적 해석이 된다. 그리스도 중심의 율법 해석은 신약 성서의 정당한 이해를 위한 하나의 관건이 된다.
3. 사랑-율법의 요구
또한 “여호와의 율법”, “그리스도의 법”의 최대 기본 원칙은 사랑이다(마 19:17; 22:37; 눅 10:27, 28; 요 14:15; 요일 3:23). 사랑은 율법의 요구일 뿐만 아니라 그 특성이 된다. 도덕률 십계명이 사실상 “계율화된 사랑(Codified Love)”이라고 한 퍼취(Arthur J. Ferch)의 관점은적절한 통찰이라고 볼 수 있다. 율법은 사랑의 명령을 실현시키기 위한 사랑의 구체화이다.
사랑의 수직적 운동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로, 그 수평적 운동은 인간 상호간의 관계로 확장 발전된다. 의의 첫째 토대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는 것이다. 이것이 십계명의 전부가 되는 처음 네 계명이 갖는 수직적 사랑의 관계를 구체화시킨 것이다. 나머지 여섯 계명은 인간 상호간의 수평적 사랑의 관계를 구체화시킨 것이다.
사랑의 관계의 표현인 율법이 전 우주에 향한 하나님의 통치의 기초가 된다. 이 법칙이 우주내의 모든 지적 존재, 생물 및 무생물 세계의 관계를 형성시켜 주고 있다. 소위 자연법칙이란 것도 하나님이 이 은혜와 사랑의 발동 형식에 속한다. 로빈슨 크루소와 같이 고도에서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인간도 생존을 위하여 자연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한다. 언약(berit)의 핵심이 하나님께서 주도한 신인간 사이의 유대(bond), 또는 관계에 있는 이상등 우리는 율법이 이 관계의 정의(定義)라고 볼 수 있다.
정의된 도덕률적 관계는 사랑의 신호로 된 은혜의 메시지로 시작되고 쌓여 있다는 점을 명심하여야 한다.
B. 야훼의 법의 역할
하나님의 경륜에서의 율법의 원래 역할은 생명에 이르게 하는데 있었다. 이 점은 다음 본문에 잘 드러나 있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롬 7:10).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인하여 삶을 얻을 내 율례를 주며 내 규례를 알게 하였고”(겔 20:11).
“사람이 준행하면 그로 인하여 삶을 얻을 나의 율례를 좇지 아니하며 나의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 니하였고 ”(겔 20:21)
죄가 들어 온 이후 율법의 역할은 그에 상응하여 확장되었다. 바울은 죄와 관련된 기능을 갈라디아서 3:19-29에서 펼치고 있다. 율법의 역할은 멜랑히톤(Melanchthon)이래, 통적으로 세 가지로 파악되어 왔다. 즉, 교육적 또는 신학적 용도(usus elenchticus, pedagogical or theological use), 정치적 용도(usus politicus, political use) 중생한 자를 위한 또는 규범적 용도(usus in renatis, usus normativus)가 그것이다.
루터와 칼뱅은 율법을 보는 시각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다. 루터는 율법과 복음을 긴장 내지 반제 관계로 보았기에 칭의와 관련하여 첫 번째 기능에 역점을 둔 반면, 칼뱅은 율법과 복음의 통일성의 각도에서 두 가지를 하나님의 구속적 활동에 있어서 두 양식으로 보고 성화와 관련하여 세 번째 기능에 강세점을 두었던 것이다.
1. 신학적 용도(The pedagogic use)
율법의 첫째 기능인 신학적 용도는 루터와 멜랑히톤에게 두 번째 용도에 해당된다.
율법은 하나님의 의를 보여 준다. 이 하나님의 의는 믿는 자의 불의를 정죄하며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이것은 마치 인간의 생김새를 있는 그대로 반사시키는 거울과도 같은 기능이다. 이 율법은 죄와 자기 사랑으로 영적인 장님이 된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의 불순결과 불의를 고백케 한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의 말씀은 바로 율법의 기능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롬 4:15; 5:20; 고후 3:6). 로마서 7장은 율법과 죄 아래 있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법은 죄를 격동시킨다. 그리고 죄의 지식을 더하여 준다(롬 7:7). 더 나가서 죄라고 하는 여러 단어들이 율법과 관련되어 있어 율법을 무시하고는 죄 개념을 도출할 수 없다.
율법의 이 거울과도 같은 정죄의 기능은 복음의 필요성을 일깨운다. 복음은 거룩한 율법을 범한 것에 대한 회개를 요청한다. 그리하여 여호와의 율법은 인간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paidagogos)의 역할을 한다(갈 3:24).
율법은 인간에게 완전한 의를 요구하는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구원의 길, 또는 칭의의 방편이 되는 자격은 갖고 있지 않다. 율법의 정죄를 충족시킨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믿고 바라봄으로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과 자유를 얻는다. 로마서 8장은 성령과 율법이 내부에서 조화된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드러내며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필요를 느끼게 하고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활용함으로 용서와 화평을 얻기 위하여 주님께 피하게 한다.”(1기별, 234).
“오직 도덕적인 율법의 의무적인 요구들을 인정하는 사람들만이 대속(代贖)의 본질을 설명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인류 사이에 중재하셔서 당신의 율법에 대한 인간의 충성을 회복시킴으로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오셨다”(1기별, 229).
2. 정치적 용도(The political use)
율법의 두 번째 용도는 사회의 질서 유지와 악에 대한 제재의 기능이다. 모세법에는 도덕법 외에도 국법, 의식법, 건강법이 포함되어 있다. 도덕법은 시대 장소적으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백성의 매일 생활을 규제하는 민사, 형사 및 행정적인 국가법 체재로 필연적인 발전을 할 수 밖에 없다. 이는 한 사회와 그 가운데 살고 있는 구성원을 보호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고대 이스라엘에게 시내산 아래에서 준 국법 체제라는 것은 이러한 정의를 보호하는 울타리의 성격을 포함하고 있다. 국가법을 통하여 악인에게 굴레를 씌우고 고삐 매어 의인을 보호한다는 것은 창조 질서의 보전책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같은 공서 양속(公序良俗)을 위한 브레이크, 굴레 및 고삐의 존재와 같은 기능은 중생한 의인에게는 직접적으로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나 간접적으로 그들을 보호하는 울타리가 된다. 성경은 율법의 이 용도를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의한 자...를 위함이니”(딤전 1:9, 10)란 말로 표현하고 있다. 사랑과 질서는 함께 나가야 한다. 정의로운 사회 질서의 구현을 위한 율법의 이 기능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사랑의 의지의 결과다.
3. 율법의 제 3 용도(The third use)
중생한 자를 위한 용도(usus in renatis)에서 중생(renatis)이란 말은 “다시 태어나다”는 뜻을 지닌 동사(renascor)에서 온 명사다. 따라서 이 제 3의 용도는 중생한 자를 위한 용도가 된다. 칼뱅은 이 용도를 율법의 주 용도로 보았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의 계시이며 의의 표준이 된다(시 19:7, 8). 따라서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은 거룩함의 길이 돤다(전 12:13).
이 용도는 성령의 역사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미 하나님의 성령이 내주(內住) 통치하는 자들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특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율법은 적극적으로 등불과 빛이 된다(잠 6:23). 하나님이 친수로 자기 백성들의 마음 판에 입력 기록하신 율법은(렘 31:33 ; 히 10:16) 그들에게 나침판의 역할을 한다. 율법이 그리스도인 생활의 규범과 지침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바울은 율법의 가치, 타당성 및 계속성을 고양한다.(마 5:17 ; 요 15:10; 롬 3:31; 7:7~12; 13:8~10; 고전 7:19).
개혁 신학자들이나 청교도들이 이러한 율법의 기능을 금, 은의 순분 검증 각인(純分檢證刻印)과 같은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들은 율법의 주 기능을 성화와 관련시켰다. 칼 발트(Karl Barth)도 칼뱅의 신학이 청의보다는 성화에 역점이 있다고 보았다.
율법의 제 3 용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체험한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밝혀 준다. 이런 점에서 율법은 하나님의 도덕적 상담(moral counseling)이나 권고 역할을 한다. 구원받은 자라 할지라도 또한 자기중심적인 시험, 교만과 외식의 시험에서 결코 면제되지 않기 때문에 게으르고 뒷걸음질하는 나귀에게 일하도록 회초리를 사용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육의 짐에 눌린 그들에게 율법의 회초리와 침을 사용하신다.
성령으로 중생하고 비췸을 받은 빛의 자녀들에게는 하나님의 선물인 율법이 기쁨과 감사의 대상이 된다(시 19:7; 119:77). 성령께서는 그것을 지킬 수 있도록 넉넉한 힘을 준다(겔 36:25~27; 요일 3:34). 율법은 그들을 안내 지도하며 지킨다. 따라서 이 율법은 자기 파멸을 벗어나게 하는 성체와도 같고 보루와도 같다. 그리스도인 생활의 요체에는 믿어 순종에 이르게 함이 있다(롬 1:5; 16:26). 이 믿음의 순종이야말로 참 믿음의 핵심적 성질을 드러내는 표현이 된다. 순종이란 말은 율법과 관계된 말이다. 하나님의 뜻이 서린 율법에 순종함이 없는 믿음이란 올바른 믿음이 아니다. 믿음의 순종은 “복음에 대한 총체적 반응”이 된다. 그리하여 구원받은 자에게는 성화와 율법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게 된다.
4. 기다리는 아버지의 교훈
율법의 세 가지 용도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세 가지 일과 연관되어 있다. 즉, 첫 번째 신학적 용도는 구속주로서 하시는 일, 두 번째 정치적 용도는 창조주로서 창조 질서를 보전하시는 일, 그리고 세 번째 중생한 자를 위한 규범적 용도는 성화시키는 분으로서 하시는 일과 각각 일맥 상응한다. 이 모든 기능이 하나님의 의의 반응, 보호 및 성화 촉진과 관계되어 있기는 하나, 처음 두 기능은 정죄와 견제라는 소극적 부정적 면모로 나타나는 것이고, 세 번째 기능은 성령의 통어(統御) 아래 있는 자들을 위한 적극적이고도 역동적인 율법의 본래 취지에 보다 적의한 기능으로 나타난 것이다. 거룩하신 야훼의 모든 명령은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의의 교훈이며 의의 바탕 위에서 구축되어야 할 인간 행복을 위한 아버지의 관심의 결정체가 된다. 이 법은 본래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장벽으로 고안된 것이 아니라 두 사이의 더욱 견고한 유대를 위하여 주어진 것이다. 물론 법이 죽이는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죄된 본성에 맞부딪칠 때 그렇다.
이 율법은 그리스도인에게 명령, 약속, 빚, 은총이 모두 포함된 언약에서의 “완전한 법”(The Whole Law)"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법 없는(anomos) 자”가 되지 않고 “그리스도의 법 안에(ennomos)"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전 9:21). 그리고 그들은 시인처럼 이렇게 탄원, 기도한다.
“저희가 주의 법을 폐하였사오니 지금은 여호와의 일하실 때니이다”(시 119:126).
IV. 바울과 율법의 행위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의롭게 하다”라는 동사형 디카이오(dikaioo)와 “의”라는 명사형 디카오쉬네(dikaiosyne) 어군을 집중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기에 의를 바울 사상의 핵심으로 보는 일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이 있었다(Albert Schweizer 등). 그러나 전통적으로는 의에 관한 메시지가 바울 사상의 핵심이 된다고 보아 왔다. 바울은 하나님의 의를 그의 백상과 맺고 있었던 특별한 언약 관계에서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이 인간을 의롭게 하시는 것이다(롬 3:3 이하 참조).
A. 수건으로 가리워진 영광
그러나 유대주의는 하나님의 자리에 율법을 두었다. 또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죄된 존재라는 점도 부인하였다. 율법을 도덕적 법전으로 전락시켜 버린 탓에 그것이 인간의 불의를 비추어 주는 대신 자기의 의를 증명하는 수단이 되게 하였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왜곡하여 전시주의화, 형식주의화, 계율주의화시켰다. 율법에 관한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율법을 수용한다는 것이 반드시 그 올바른 활용을 보증함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사 6:9; 마 13:14, 15; 행 28:26, 27 참조).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진정한 의미와 역할을 회복시키셨다(마 5:17, 18; 22:36-40). 그는 이러한 유대주의적 율법에 집착한 바울의 눈에서 비늘을 떨어뜨리고 그 마음을 지나간 날의 의의 길에 관한 잘못된 인식과 율법에 관한 곡해에서 벗어나도록 다메섹 도상에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었다. 그는 예수께 돌아섬으로 눈에서 비늘이 벗겨진 다음에야 구약 성경의 메시지를 바로 보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바울은 말한다.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고후 3:14, 16). 유대인들은 이 수건으로 아직도 가리운 채 구약을 더듬고 있었다.
B. 그리스도의 비추심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위에 있는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영광에 관한 이유를 빛의 창조주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었”(고후 4:6)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마귀는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사람들을 장님으로 만들어 버린다(고후 4:4 참조).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편견과 불신의 수건으로 가려진 율법에서 자기들의 영광을 추구하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영광의 하나님을 만나고 시내 산에서 내려온 모세의 광채 나는 얼굴을 가리어 달라고 요구한 사건은(출 34:30, 31 참조). 그들의 죄됨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하나님의 거룩성과 그 위엄성 때문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 광채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율법의 거룩하고 고매한 성질과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복음의 영광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감명 주고자 고안하였다.”
사실상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의식 중에서 자기들이 하나님의 불쾌 아래 있다고 생각하여 그 광채를 피하고자 한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고백지 않고 멸망당할 일을 두려워 하였다. 얼굴에 수건을 가림으로 율법이 더 이상 그 영광스러운 빛을 발하지 않게 된 것이다. 모세와 함께 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덮었던 수건은 자기 의를 버리고 그리스도께 돌아갈 때 벗어진다.
수건을 쓰므로 율법이 성취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하나의 허울이었다. 율법의 외적 성취를 곧 의로 보는 것은 오산이었다. 수건으로 가리워진 영광은 수건으로 가리워진 법이 되었고 입법자와 분리된 법이 되었다. 이것은 비극적 분리였다. 바울의 의중에는 수건으로 가리어진 상태가 유대인 회당 예배 제도에 남아 있었다. 수건으로 가리어진 상태에서는 율법의 요구와 깊이가 더 이상 감촉되거나 보이지 않게 된다.
여호와의 율법을 고양하는 이해 없이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하기 어렵다. 즉, “율법의 경이로운 면모를 바라보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 거룩한 율법의 빛 안에서 죄인은 자비와 동정, 선하심과 사랑이 충만하신 구속주를 바라본다.
C. 구속사의 맥락
바울은 구약 성경 상 구원의 길의 신비인 메시야 예수를 구약 복음의 메시지로 부각시켰다. 구약에 예언된 이 메시아, 즉 여호와 우리의 의에게로 인도하는 것이 그의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래서 로마서 끝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권위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계시로 나타났다고 말하고 있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전부터 감취었다가...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것이니”(롬 16:25).
바울은 그리스도의 화육 사건을 두고 “때가 차매”(갈 4:4)라고 하거나 “말세에”(고전 10: 11; 벧전 1:20; 히 1:1)란 표현을 사용함으로 구속사를 구약으로 소급 연관시키고 있다. 즉, 신약과 구약의 구원을 동일한 맥락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의와 은혜의 약속에 율법을 더하신 의미를 추구하고 있다.
D. 율법에 관한 부정적 진술
율법과 은혜 또는 율법과 복음의 상관성을 취급하다 보면 바울의 율법관에 은혜로부터 분리된 율법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목적을 구약 성경 상 은혜 언약 안에서의 율법의 역동적 기능의 참된 본질을 들추어내는 데 있음을 알아야 한다. 유대주의에서는 율법의 적극적 기능으로 의와 도덕적 힘에 집착했던 반면에 바울은 구약의 율법이 갖는 그 영광스러운 부정적 기능에 역점을 두어 말하고 있다.
구원의 방편으로서 법의 부적합성에 대한 바울의 논리는 랍비들의 법에 관한 이중적 오해를 밝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랍비들이 율법을 그에 일치하는 행위에 의하여 의롭게 되는 방편으로 보았고 죄를 거스르는 무기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유대인들이 율법 자랑과 율법 의지(依持)를 맹렬하게 탄핵하여 율법대로 살지 못하는 그들을 책하고, 율법을 소유하고 있다거나 마음에 영적 할례가 없는 표면적 할례를 받았다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느냐고 한다(롬 2 : 1~3, 20 참조).
유대인들이 이방인처럼 모든 죄를 범하여(롬 2:1~3, 20 참조). 유대인들이 이방인처럼 모든 죄를 범하여(롬 1:18~32 참조)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리 만큼 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이방인들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보고 완악하고 회개치 않은 마음으로 그들의 앞날에 하나님의 진노를 쌓고 있다고 하고 있다(롬 2 :1~12, 17~24 참조).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 두 부류의 어느 하나에 속하는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율법을 무시하여 온갖 죄를 범하는 이방인의 길(롬 1장 참조)과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정교하게 준행하여 자랑의 근거로 삼는 유대인의 길(롬 2장 참조)은 모두 다 소망스럽지 못한 양상들이다.
바울은 죄와 율법에 관하여 유대주의와는 완연하게 다른 사상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유대주의가 각 사람이 죄를 범한다고 하는 죄관에 있어서는 바울과 같은 관점에 서 있지만, 심판시 죄와 선행의 경중을 측정하여 운명을 결정한다는 죄관과 “의는 법으로부터” 라든가, 보상 없는 계명은 없다”는 율법관에서 유대주의와 차이점을 보여 주고 있다.
바울은 율법에 관한 왜곡된 개념을 바로 잡고 있다. “무릇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갈 3 : 10절)라고 하였다. 여기서 “온갖 일”은 70인역의 신명기 27장 26절과 신명기 28장 58절을 보아 “모든 말씀”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율법의 양화(量化)야 말로 율법의 참된 의미를 격하시키는 것이라고 한 점이다. 어느 하나의 죄라도 인간에게는 율법 전체를 범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상은 이미 예수께서 지적하신 것이다(마 5:20 이하, 마 23장 참조)
E. 신앙-윤리의 순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부르기까지는 율법의 의에 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은혜야말로 이 율법의 행위를 결별케된 기초가 되었다.(빌 3 : 4~9 참조). 그리하여 그는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justification)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 : 21)고 선언하고 있다. 바울이 율법의 의를 배척하고 있는 기초는 자기의 주관적 경험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의의 선물인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분명한 것은 율법의 의를 배척하고 있는 바울의 깊은 동기는 윤리적인 데 있지 않고 종교적, 신앙적 차원에 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을 하나님의 계시의 빛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의의 법을 좇아 간 이스라엘은 그 의의 법에 이르지 못하였다(롬 9 : 31 참조)는 것은 확실히 반어적이다. 그들이 율법에 순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다는 것은 그들이 삶을 헛 살았다는 뜻이 된다.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정립한 그 태도가 하나님의 의와 은혜를 위한 여지를 박탈하였다는 것이다.
F. 율법의 행위
그렇다고 율법 그 자체가 장애가 된다거나 필요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바울의 율법과 의에 관한 메시지를 피상적으로 이해한 것에 불과하다. 바울이 반대한 것은 율법을 구원의 방편으로 삼는 데 있지 율법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3장에서 말하고 있는 “율법의 행위”(10절)는 11절과 12절에서 축어적으로 나오는 “율법”과 동질적 의미를 띤 말로 오늘날 말로 표현하면 율법주의를 뜻하고 있다. 성경 어느 곳에도 “율법주의”란 말은 나오고 있지 않다. 바울 시대에는 “율법의 행위”란 말로 오늘날의 율법주의란 내용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율법의 행위”와 그 직후에 나오는 “율법”이란 축어적 표현은 모두 모세법에 관한 제 1세기 유대인들의 왜곡이나 전도이지, 모세법 그 자체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또한 갈라디아서 3장 12절에서 인용하고 있는 레위기 18장 5절도 모세법을 두고 한 말이 아니라, 당대의 율법주의자들의 애용하는 모토와 같은 것을 제시한 것이라는 지적에 경청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갈라디아서 3장 12절에서 율법이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율법주의가 믿음에서 난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는 “어찌 그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존하지 않고 행위에 의존함이라”(롬 9:32)라는 말씀에 비추어서도 분명하다. 율법이 요구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물로 오로지 믿음으로만 받고 인간의 행위나 율법주의적 자세로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공로성 행위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한다(갈 2:21 참조). 하나님의 은혜의 치명적 원수는 율법이 아니라 율법을 통한 의다. 바울이 평가 절하한 것은 율법의 남용과 오용이지 율법이 아니다(갈 3:21 : 롬 7:1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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