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의 신학적 의미
칭의의 신학적 의미
I. 서론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6-17).
칭의는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또한 그것은 바울 사상의 핵을 이루고 있다. 신앙과 신학의 근거와 출발점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의 계시에 있다. 칭의는 이 구원 사건을 설명하는 것이 된다.
초기교부 시대에는 기독론과 삼위일체 교리가 신학의 핵심 이슈로 부각되었다. 중세시대의 교회는 칭의와 성화가 함께 가는 것으로 보아 칭의에서 인간의 책임과 선행을 강조하였다. 종교개혁 시대 마르틴 루터는 바울의 칭의의 교리를 재발견하는데서 출발하였고 그것을 성경의 중심교리로 보았다. 칭의 교리는 그리스도교와 타 종교와의 차이점이 된다.
II. 인간의 소원과 탈죄의 길
A. 인간의 소원
사람들의 소원은 갖가지이다. 그 모든 소원에는 그런대로 이유가 있고 가치도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최대의 소원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을 송두리째 에워쌓고 있는 죄의 짐에서 어떻게 벗어나고자하는 소원일 것이다. 내면적 죄책감에 쌓여 발버둥을 치는 삶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큰 죄, 작은 죄에서 벗어나는 일, 언제 죽더라도 영원한 생명의 보장을 받을 수 있는 소원이다. 인간 현존의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의롭게 되는가에 있다. 인간은 죄책감 때문에 고민하는 존재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유대인이나 비유대인 모두가 죄의 권세 아래 살면서 모두가 죄악적인 삶, 반역적인 삶을 살아가가고 있다. 바울은 이런 상황을 로마서 1-2장에서 심도 있게 다루고 난 다음에 그들 모두가 창조의 원자태인 영광, 즉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는 점을 과거 시제, 특히 집합적, 역사적 부정과거 시제로 나타내고 있다.
죄책감은 암과도 같다. Abrams와 Finesinger의 “Guilt Reactions in Patients with Cancer"(1953) 연구에서 암환자 60명 환자 중 56명이 자신에게나 다른 누구에게 잘못한 것을 감지하고 있다는 조사 보고를 하고 있다. 암과 죄책감이 상호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감성 작용 때문에 암을 ‘더러운 질환(an unclean disease)’으로 명명하기도 한다.
Stephenson과 Grace의 “Life Stress and Cancer of the Cervix"에서 삶의 긴장과 경부암 과의 관계를 연구하였다. 경부암 여성 환자 100명과 타 부위 암 환자 100명 여인들의 personality를 비교한 연구였다. 경부암 환자 경우 비정상적인 성격특성이 여러 면에서 발견되었다.
Rudolph와 Ashby는 암으로 죽는 비율이 일반병원에서보다 정신병원에서 훨씬 더 많다는 보고서를 냈다.
B. 탈죄의 길은 없다
죄에는 과거의 죄, 현재의 죄, 그리고 앞으로 저지를 미래의 죄가 있다.
1. 과거의 죄--과거의 죄가 어떤 죄이던지 미해결의 장으로 남아 있는 한 인간을 괴롭히게 마련이다.
인간은 이 과거의 죄에서 벗어나고자 여러 가지 노력들을 한다.
(1) 선행--어떤 종교, 어떤 사람들은 선행으로 지난날 죄를 덮어버리려고 한다. 그러나 공덕을 아무리 태산처럼 쌓는다고 지난날 죄의 업보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선행은 과거의 죄를 지우는 지우개가 아니다. 100만년이 지나도 그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2) 망각--사람들은 지난날 죄를 잊어버리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의 골방 한 구석에 박힌 과거의 죄에 대한 영상은 지워지지 않는다. 마치 물체에 그림자가 따라가듯 죄의 기억은 계속 남아 있다. 빌라도가 아무리 세수 대야 물로 손을 씻어도 양심의 가책은 그 남은 평생을 옥죄었다. 그는 자살로 인생을 마감하였다. (논산 훈련소의 체험)
(3) 죄 부정--죄를 병적인 과민한 신경현상, 진화단계에 있어서 불완전한 단계 등으로 처리하여 죄를 부정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만유인력의 법칙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일뿐이다.
인간은 지난날의 죄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이는 절망적인 일이다.
2. 현재의 죄--인간은 현재 죄의 사슬 아래 매여 있는 슬픈 존재이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현재의 죄와의 처절한 투쟁과 그 고민을 묘사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수양, 도덕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다. 그렇다고 죄를 범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고 자위하는 일은 천박한 자세에 불과하다. 어떤 사람은 종교는 하나님께 이끌어 올리고, 도덕은 인간을 짐승으로 타락하는 것을 막아준다고 하였다. 그러나 도덕이 인간을 짐승이 되는 길에서 막아주는 사례가 얼마나 되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더구나 오늘처럼 도덕과 죄 사이의 경계선이 분명하지 않는 상황에서 도덕이라는 외형적인 것 내면에 죄가 얼마든지 도사리고 있을 수 있다. 성경은 가장 완전하다고 자부하는 인격 그 자체가 죄 덩어리라고 못 박고 있다.
3. 장래의 죄--인간은 미래의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설사 어느 누구가 지난날 죄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현재 무죄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미래의 죄로부터 안전할 수 없다.
EGW--"We cannot say, 'I am sinless till this vile body is changed and fashioned like unto His glorious body.'" ST March 23, 1888
인간은 탈죄의 길을 마련할 수 없다. 형제를 미워하지 않고,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지 않는 인간이 얼마나 될 것인지 ...
C. 탈죄의 길은 있다
성경은 탈죄의 길을 설명하는 생명의 책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이 생명의 길이 나타났다.
1. 하나님이 준비하여 두셨다.
칭의는 죄의 용서에서 보여주듯 인간이 하나님과 그의 뜻을 부정한 것을 부정하는 하나님의 선언이다. 바울은 ‘용서하다(aphiemi)'라는 동사를 단 한번(롬 4:7), 명사형 ’용서(aphesis)'는 2회(엡 1:7; 골 1:14), ‘용서하다’를 뜻하는 다른 동사 charizomai를 2회(엡 4:32; 골 2:13) 사용하였다. 참 인색한 용례 빈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용서’라는 의미가 확실하게 내포된 다른 어휘를 수없이 사용하고 있다. 즉, 명사 ‘의,’ 동사 ‘의롭게 하다’라는 어휘가 곧 그것이다. 그는 동사 dikaioo 14회, 명사 dikaiosyne 52회 이상 사용하고 있다. dikaioo의 기본적인 뜻은 “의롭다고 선언하다”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사건을 창세전부터 준비하여 두신 결과이다. 사도 바울은 칭의를 중심 이슈로 부각시켰다.
2. 윤리적이기 보다는 관계적 용어이다.
이 용어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를 지칭한다. dikaiosune는 신자의 윤리적 특성보다 오히려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천명한다. 의는 법정 언어로 재판장의 의롭다는 선언이다.
의(칭의)는 어느 한 개인의 주관적인 의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모든 죄책으로부터 방면하였다는 선언이며 모든 정죄와 형벌로부터 해방시켰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예수께서 죄인들의 죄와 죄책을 대신 법적으로 담당하시어 죄인이 의롭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의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III. 칭의의 의미, 기초, 수단 및 특징
A. 의의
칭의는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한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거나 의로운 것으로 간주하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칭의 반대어는 정죄이다. 즉 이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를 신자들에게 전가시키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인간은 그리스도의 보혈과 의의 공로를 통하여 즉각적이고도 항구적으로 값없이 죄 용서하심을 받는다. 신자들은 이 칭의로 인하여 율법의 형벌을 받지 않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회복된다. 칭의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변제, 용서, 무죄 석방, 의로 여기심이 그 핵심을 이루고 있다.
B. 칭의의 두 측면
칭의에는 객관적, 보편적, 임시적, 비인격적, 집합적, 법정적 선언이라는 국면(universal legal justification)과 주관적, 개인적, 인격적, 항구적, 체험적인 국면(subjective justification)이 있다. 전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심으로 무조건적으로 이루어진 객관적 사실을 보는 시각에서 나온 것이며 로마서 3:24-25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칼뱅은 이 점을 강조하였다. 1888 Message Study Committee 는 이 보편적-법적 칭의가 모든 사람에게 제공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Arnold Wallenkampf 는 두 가지 국명을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런 객관적-보편적 칭의는 1863년 1월 1일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300만 노예들을 해방시킨 령을 예로 들어 설명되기도 한다. 다음 날 해방령을 모른 사람과의 주고 받은 대화는 이 해방령의 실체를 잘 부각시키고 있다.
“그들이 자유의 몸이 된 것을 어떻게 아느냐?”
“그들이 노예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노예였던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그들의 피부 색갈이 그것을 말하고 있다.”
후자인 개인적-체험적 칭의는 회개와 자복 및 믿음의 역동적 현현의 결과로 그리스도의 의의 은혜를 믿음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개별적으로 오는 국면으로 로마서 5:17과 스가랴서 3장에 나오는 대제사장 여호수아 사건에 나타나 있다.
값없이 준 선물 칭의의 개인적-체험적 국면은 펜실베니아 한 촌락 농장 일에 진절미가 나 가출한 아들이 용서를 구하면서 귀가를 환영하면 흰 천으로 표시하여 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자 부모가 온 집을 흰천으로 뒤 덮었고 그 천을 보고 귀가하였다는 사건에 잘 나타나 있다.
멜랑히톤은 루터의 칭의 사상을 법정적 칭의 시각에서 보았지만 사실상 루터는 주관적 칭의도 강조하였다. 1888년 운동을 전개하는 사람들은 주관적인 칭의에 역점을 두고 있다.
C. 칭의 창시자
칭의 창시자는 하나님이시다. 인간은 칭의의 창시자가 아니다. 인간을 의롭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서 이 칭의가 나왔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롬 8:33)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D. 칭의 기초(cause)
칭의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이다. 그리스도의 사역만이 우리의 죄책을 대속한다. 인간 밖에서 오는 생소한 의 즉 그리스도의 의만이 우리를 의롭게 한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1-24).
바울은 위 본문의 시작하는 어구 "nuni de, but now"에서 이전까지의 이방인과 유대인들의 죄의 상황 및 정죄 사상과는 대조되는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사적 전환점이 되는 “이제는”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서 “nuni de”는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위하여 행하신 놀라운 일이 되는 어떤 일을 행하신 시간적 의미가 담겨 있다. 이 어구는 율법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독립적인 구원의 새 길을 시사하고 있다. 이 구원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하나님의 의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 1:7). 현재 시제, 직설법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인간 밖에서 오는 낯선 의로 보았다. 이 낯선 의는 밖으로부터 부여되어 인간이 수동적으로 받는 의라는 점에 그 역점을 둔 표현이다. 칭의의 지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서의 속죄적인 죽으심에 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7-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8-9).
E. 칭의 수단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이외 어떠한 외적인 의식과 제도들은 우리를 의롭게 하지 못한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 칭의 수단은 그리스도의 보혈에 향한 믿음이다. 믿음은 구원의 기초가 아닌 수단이다.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9)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F. 칭의 본질
(1) 칭의는 즉각적이다. 칭의는 과정이 아니다.
(2) 칭의는 항구적이다. 칭의는 단번에 모든 사람에게 항구적으로 주어진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3) 칭의는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운 선물이다(롬3:20; 4:2-6; 6:33; 엡 2:8-9; 딛 3:5).
(4) 칭의는 사법적이고 선언적이다.
(5) 칭의는 체험적이어야 한다.
G. 칭의의 축복
(1)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회복되어 그의 축복을 받는다.
(2) 칭의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 된다The (imputation of the righteousness of Christ)
(3)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된다(갈 4:4-5).
(4)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된다(롬 6:14; 8:1; 갈 2:19).
(5) 하나님과 화평케 된다(롬 5;1).
(6) 하나님과 언약관계로 진입된다(고후 11:2; 사 54:5; 엡 525, 29).
H. 사례
아브라함 (창 15:6; 롬 3:21; 4:1-3).
IV. 바울의 칭의론 이슈
A. 보편적 칭의와 체험적 칭의
칭의론은 사도 바울의 박해자가 그리스도교의 선교 챔피언으로 변신한 삶과 체험에 근거하고 있다(행 9:1-9; 갈 1:15). 그의 회심의 체험은 단순히 옛 것을 말소시키는 죄의 사면에 머문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새 것을 위한 부르심을 받은 사건이었다.
하나님 앞에서 죄책만을 인간의 문제라고 보는 좁은 의미에서 보다는 법정적 칭의인 죄책에서 해방과 실존적인 고뇌, 근심, 걱정에 억눌린 인간을 포괄하여 해결하는 방향에서 이해하는 것이 칭의론의 과제를 돋보이게 한다. 부적절한 인간의 삶을 적절한 인간의 삶으로 전환시키는 일이야 말로 칭의론의 목표가 된다. 멜랑히톤이 루터의 칭의를 법정적 칭의로 국한시킨 것은 문제성을 내포하고 있다. 법정적 칭의가 성화와 갱신의 문제와 분리되면서도 긴밀한 연관성이 있는 것이다. 이 점을 간과하여 법정적 칭의 일변도로 나간다면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축소시키는 꼴이 될 것이다. 양자를 구분은 하되 분리할 수는 없는 관계로 보아야 한다(distinct, but inseparable).
A. Osiander의 중생에 역점을 둔 효과적(고유적) 칭의론은 법정적, 전가적 칭의론과 대립하는 개념이다. 그는 전가적 칭의가 인간에게 실재적이고 내면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지 못한다고 보았다. 그는 하나님에게만 긍정적이고, 자기 자신에게 긍정적이지 못하는 칭의 개념에 대하여 비평적이었다.
Arnold Wallenkampf가 Justified...에서 보편적 칭의와 체험적 칭의를 구분하면서 접근하는 것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인간의 의는 하나님 앞에서의 의와 불일치할 수도 있다. 죄책의 면제를 받은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4).
바울은 유대의 제의법의 기독론적 성취로 폐지된 것들이 있는 것으로 보았지만(갈 1:7; 5:1), 도덕법의 계속적인 중요성과 의미를 부각시켰다. 그렇지만 바리새인들처럼 구원의 방편으로서의 도덕과 윤리에 대하여는 거부하였다. 또한 무엇이나 예수의 이름으로 한다고 해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다. 재난을 당하여 자기의 의로움을 변호한 욥도 불경스러운 자였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회개한 후에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욥 42:6).
마르틴 루터가 “하나님의 의”를 깨닫고 칭의를 바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 배경에는 시편 31:2에 나오는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와 로마서 1:17에 나오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의 메시지가 중심 역할을 하였다. 그는 사죄권이 교황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고 보았다. 의롭게 되는 것이 종교적 의식을 통하여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B. 바울의 믿음과 야고보의 행함의 문제
1. 바울과 야고보의 메시지
(1) 바울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2) 야고보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 바 이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 2:21-24)
2. 상호 대립으로 보는 입장--루터의 야고보관, 바르트의 대립론
3. 조화론적 접근
(1) 대상의 차이 -- 바울은 당대 율법주의자들을 상대로 하고 있으나 야고보는 신앙을 지적 승인 정도로 보면서 말씀대로 살지 않는 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2) 행위 개념의 차이 -- 바울은 구원의 방편으로 여기는 “율법의 행위”들을 말하고 있는 것에 비하여 야고보는 신앙의 열매로서의 순종하는 “행위들”을 언급하고 있다.
(3) 바울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 5:6)과 “믿어 순종”에 이르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롬 1:5; 16:26)을,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순종의 믿음을 말하고 있다(약 2:21; 창 22장). 바울은 살아 있는 믿음을, 야고보는 죽은 믿음을 각각 말하고 있어 상호간 근본적인 통일성이 있다.
V. 칭의의 시제
1. 과거 시제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11)
2. 현재 시제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롬 5:1)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9)
3. 미래 시제
“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갈 5:5)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계 22:11).
칭의는 종말론적이다. 이 종말론적으로 죄를 용서해 주시는 칭의가 역사적으로 과거에 발생하였고 그것이 현재 나에게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의는 미래의 구원으로 완성된다. 미래 세대에 속한 이 칭의가 현재적인 실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미래 심판에 속한 구원의 축복이 악한 현 시대에 침투하여 나의 경험이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미래가 현재가 된 것이다. 유대주의는 미래적인 것으로만 고착시킨 구원을 그리스도교는 현재적인 확실성으로 부각한 것이다.
VI. Simul justus et peccator
그리스도인은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의인이 되어) 정죄에서 철저하게 자유해방이 되었다하여도 그는 아직 죄인이다.
(1) 한 인격이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다. 과거에 죄인이었던 존재가 이제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미래적 존재가 되었다. 그는 과거에 묶인 존재가 아니라 더 밝은 미래를 지향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철저하게 의롭게 된 존재라도 그 안에는 마귀의 세력이 꿈틀거리는 세력이 도사리고 있다.
(2) 서술법이면서 동시에 명령법적 의미를 담고 있다.
죄스러운 과거에 죽고 의의 옷을 입은 존재는 계속하여 죄와 자기를 죽여야 하고 의의 옷을 입어야 하는 존재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날 홀연히 죄된 육이 변화되기 까지 죄 없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죄 용서를 받았다고 하여 죄와의 투쟁이 끝났다는 뜻은 아니다. 용서 받았지만 위험지대가 도처에 있고 자기 안에도 있다. 칭의는 완성을 지향하는 새로운 출발 지점이 된다.
(3) 그리스도인들의 의로운 존재에 대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약속을 의미한다. 의롭다하는 축복을 받았다 하여도 현실적으로 죽는 그 순간까지 죄인의 상태를 벗어날 수 없는 죄인이라는 실존적 상황에 대하여 그래도 의롭다고 하여 주시는 약속을 하셨다(고후 7:1). 칭의에도 미래 희망을 약속하는 시제가 있다.
'구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와 하나님의 율법 (0) | 2015.03.15 |
---|---|
평화의 의논과 구속언약 (0) | 2015.03.12 |
그리스도인 完全에 관한 신학적 의미 (0) | 2014.10.25 |
죄악과 하나님의 대응 방식 (0) | 2014.09.03 |
할례 의식 (0) | 2014.04.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