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와 하나님의 율법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와 하나님의 율법
2015년 3월 14일 안교 교과 주제는 “믿음으로 살아감”이다. 원문의 제목은 “Living by Faith”이다. 번역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감”으로 하였더라면 저자의 원 의도를 살려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잠언서에도 창세기 15:6과 하박국 2:4에 나오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사상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크게 강조 되었고, 종교개혁자들이 이를 개혁의 원리 중 하나로 삼아 역자적 대 전환을 이룬 것을 우리 모두는 다 알고 있다. 두칸 박사는 잠언서의 기조에 이 구원의 원리가 들어 있다고 보는 풀이를 하여 돋보인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6~17).
“사람을 두려워하면(경외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잠 28:5).
“악인은 공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잠 28:5).
의인이란 “여호와를 찾는 자”이며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이다. 단순히 찾고 의지하는 정도가 아닌 진실한 찾음과 의지이어야 하기 때문에(참고, 렘 29:13) 본과의 타이틀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들은 철학자나 사상가 다른 종교의 창시자들이 그 어떤 주장을 하였든지 그것들은 생명을 파멸로 이끄는 올가미에 불과하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상이나 감정이 아니다. 믿음은 인간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믿음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를 선택케 하는 일에 심대하게 영향을 끼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은 토라(율법), 즉 계시적 교훈, 말씀에 토대를 두어야 한다. 토라에는 하나님의 의지가 형상화 되어 나와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를 찾는 일 없이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율법주의로 전락된다. 반대로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는 일 없이 여호와를 찾는다는 것은 외식, 위선으로 전락된다.(Keeping the law without seeking the Lord is legalism; ◾Seeking the Lord without keeping the law is hypocrisy.). 그래서 잠언서는 그 하나의 예로 재산 증식문제를 곧 다루고 있다. “여호와를 찾아”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길을 구한다. 성서 기자는 “율법‘이란 표현을 사용하기보다 그 원천이 되는 ”여호와“ ”하나님“을 앞에 부착시켜 여호아의 율벚, 하나님의 율법 등 으로 표기하므로 사람들로 하여금 율법의 쏘스가 되는 하나님께 향하게 한다.
두칸 박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기란 여호와의 율법과 어떤 관계를 지녔느냐 하는 것으로 전개시킨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거룩한 율법을 지키는 일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기와 어떤 관계를 지녔는가?
루터는 이 용도를 율법의 3가지 용도 중 핵심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의 이 신학적 내지 교육적 용도(pedagogical use)를 율법의 둘째 기능으로 분류하였다. 율법은 인간의 죄악의 상태를 여지없이 폭로하고 정죄한다. 율법(토라)이 신앙생활에 아무리 중요하다 할지라도 그것 자체는 생명의 근원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은 죄를 가리키고 죄는 사망으로 이어진다(롬 7:7~13 참고). 율법을 등지고서는 죄를 알 수 없다(롬 3:20; 7:7). 신자 불신자 할 것 없이 인간의 내면상태를 비추어내는 정죄기능은 마치 거울의 기능과도 같다. 이 율법은 중생치 못한 자를 “몽학선생”에게 에스코트한다. 그것은 어린 아이를 그 스승에게 인도하는 몽학 선생의 역할을 한다(갈 3:24). 따라서 율법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칭의)을 받는 길로 나가게 한다.
율법의 정치적 용도는 인간을 보호하는 울타리 같은 역할을 지적한다. 루터에게 있어서 이 용도는 율법의 제일용도가 된다. 인간 사회의 질서유지와 창조질서 보존을 위하여 율법은 재갈과 채찍, 또는 몽둥이 역할을 한다. 시민사회의 각종 입법 활동은 이 부류에 속한다. 두칸 박사는 이 용도를 다루지 않고 지나간다.
두칸 박사는 이어서 율법의 제3용도를 강조하고 있다. (참고 잠 6:23; 롬 13:8-10; 롬 7:7-12). 칼뱅에게 있어서 이 제3 용도는 율법의 핵심 용도가 된다. 이를 Usus Normatious (Usus in Renatis)라고 한다. 이는 규범적 또는 교훈적(didactic) 기능이다.
엘렌 화잇은 이 용도를 하나님께 향한 믿음의 순종의 표준이 된다고 본다. 율법은 일종의 나침판의 역할을 한다. 구원 받은 자들이 계속하여 추구하는 거룩한 품성의 형성에 있어서 규범과 지침이 되는 이 용도는 성화의 결정적 요건이 된다. 성령께서는 마음판에 하나님의 거룩함과 그의 가르침을 새겨 넣는 일을 하신다.
“하나님의 율법은 올바른 것을 판단하는 데 가장 근본적인 기준이 되며 율법을 지키는 자들의 행복을 촉진시키는 뼈대가 된다.… 종교는 인간을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로 이끌며 배타적이 되지 않게 하는데 이는 하늘의 원칙이 인류를 돕고 축복하며 살아가는 데 있기 때문이다”(하나님의 아들과 딸들, 267).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삶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가?
“악인은 공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잠28:5).
답: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율법을 지키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요 음식을 탐하는 자와 사귀는 자는 아비를 욕되게 하는 자니라…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 28:4,7,9).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 7 율법을 지키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요 탐식자를 사귀는 자는 아비를 욕되게 하는 자니라/ 9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28:4,7,9] ).
우리는 선악을 식별하기 위해 거룩한 율법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지혜의 습득은 지적 또는 영적 단련에 좌우되지 않는다. 지혜는 본질적으로 율법에 대한 순종과 관계가 있으며 그러한 순종은 우리 자신과 우리의 문화, 개인의 심리와 욕구를 초월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은 결국은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 원리를 깨닫는 방향으로 나가기 마련이다. 율법과 복음은 상호 적대관계가 아니다. 어느 한쪽의 폐기론으로 나가게 하는 것은 사단의 올가미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복음은 상호간에 완전 조화 관계이며 “완전한 조화를 이룬다. 복음은 율법을 높이고, 율법은 복음을 높인다. ”(화잇주석, 고후 3:7-18)
“원수는 항상 율법과 복음을 분리시켜 놓으려고 애쓰고 있다. 그들은 나란히 행할 것이다(원고 11, 1893). ”(화잇주석, 롬 3:31).
“웨슬리는 율법과 복음의 완전한 조화를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그러므로 율법과 복음은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 율법은 끊임없이 복음을 위한 길을 만들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로 가도록 지시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복음은 항상 우리를 인도하여 율법을 더욱 정확히 성취시키도록 한다. 예컨대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온유하고 겸손하고 성결하기를 우리에게 요구한다. 우리는 그와 같은 모든 요구에 대하여 부족함을 깨닫는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으로는 불가능하지마는 이처럼 사랑을 주고, 겸손하고 성결케 하는 하나님의 언약을 보게 된다. 우리는 복음, 곧 기쁜 소식을 붙들게 된다. 그런데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루어진다. 곧 ‘율법의 의’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지게 된다.””(쟁투, 263)
“셋째 천사의 기별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은 선포되어 왔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은 같은 중요성을 가진 것으로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 교인들에 의하여 선포되어 오지 못했다. 율법과 복음은 함께 나아간다. 나는 이 주제를 완전히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한다.”(3기별, 172)
“누구든지 복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율법을 올바로 소개할 수 없으며, 또한 율법이 없이는 복음을 바르게 소개할 수 없다. 율법은 체현된 복음이며 복음은 율법을 펼쳐 놓은 것이다( The law is the gospel embodied, and the gospel is the law unfolded.). 다시 말하면 율법은 뿌리가 되고 복음은 향기나는 꽃과 그 꽃이 맺는 열매 이다.”(실물,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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