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주를 위하여

고전 6:12-13, 13-20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13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 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고전 6:12-13).

1987년 플로리다 템파교회 집회하는 주일에 구경했던 올란도 EPCOT, 거기 걸린 슬로건이 인상적이었다. “If we can dream, we can do it." 미래 이상적인 사회의 체험(Experimental Prototype Community of Tomorrow)하는 엡컷 다운 슬로건이었다.

요즘 세상에는 구호와 간판들이 범람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국제적인 항구 도시에는 여러 인종들이 섞여 살면서 활동하고 있다. 그러기에 여러 가지 생활 습속들이 교차되기도 하는 곳이기도 하다. 갖가지 전위적인, 이색적인 구호와 슬로건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도 하는 곳이다. 본문의 배경이 되는 고린도는 2000년 전 지중해 항해할 때 거치는 국제적인 항구도시이었다. 그 곳 주민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스로건 몇 개가 본문에 아묵적으로 나온다. 1. All things are lawful;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NEB, I am free to do anything. NIV: Everything is permissible.

2. 먹자골목에는 음식은 배를 위하여(food for the stomach)" "배는 음식을 위하여(the stomach for food)" 구호들이 걸려 있었다. 인간과 식생활의 밀착된 관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구호들이다.

3. “몸은 음란(forneia)을 위하여고린도 항구도시의 또 다른 골목에는 몸은 섹스를 위하여(body for sex)"가 걸려 있음직하다(13).

바울은 제2차 선교여행 중 고린도 항구 도시에서 1년 넘게 개인전도를 하면서(18:1-18) 그런 골목을 지나며 구호들을 보았을 것이다. 그는 AD55년 고린도전서를 보낼 때 음식은 배를 위하여" “몸은 섹스를 위하여"를 눈여겨보았던 점을 기억하여 당대의 그런 구호에 능가하는 새로운 구호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몸은 주를 위하여” “주는 몸을 위하여”(body for the Lord, The Lord for body)이다. 복음이 방탕하다라는 뜻을 지닌 고린도에서 승리한다면 어떤 여건에서도 승리할 것이라고 평가한 사람이 있다. 그만큼 타락한 도시이었다. 여기에서 당대 악습의 늪을 피하여 침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지만 옛 습관으로 되돌아간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I. 바울의 몸 신학

플라톤 철학에서 인간의 몸은 영혼의 감옥에 불과하다. 영혼이 이 감옥에서 해방되어 이데아의 세계로 나가는 것이 당대 인간 최고의 소원이었다. 이런 영육이원론 신념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들 수 있었다. 초기 이단에 속한 노스틱주의에서는 이런 헬라 사상을 배경으로 하는 구원론을 전개하였다. 이른바 구원이란 영원불멸하고 불가시적인 영혼을 일시적이고, 가멸적이며 가시적인 몸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몸과 영혼을 완전히 분리하여 인식한 이들의 입장에서는 몸이 어떤 일을 한다고 하여서 영혼에 영향을 입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몸의 감옥에서 해방과 자유를 얻은 자들은 몸으로 무엇을 한들 상관없다는 주장도 하게 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이렇게 하여 방종이 합리적, 합법적인 것으로 둔갑하게 되었다. 영혼만 주를 위하면 되고 육신은 죽으면 썩고 만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선포하고 있다. 인간 몸을 직접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good)”고 한다. 당대의 영육이원론 사조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 바울의 몸 신학이었다. 몸은 영혼을 둘러싸고 있는 외곽, 껍질, 감옥 또는 물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몸은 영원한 자아이다. 인간은 몸과 영이 이루는 하나의 unit라는 것이다. 몸과 영혼은 상호배타적으로 싫어하는 구성요소가 아니라 그 둘이 하나를 이루고 있고 둘로 나뉘면 인격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몸이 영이고 영이 몸이다. 인간의 구원은 몸의 구원도 포함하고 있으며 부활 시에는 불멸의 몸으로 바꿔지게 된다. 몸으로 하는 일 그 자체가 인간의 구원을 좌우한다. 몸이 황폐해지면 마음도 영혼도 황폐해지게 마련이다. 인간의 어떤 행동도 전 인격의 발로가 된다.

어떤 미녀들은 남자 키가 180cm가 안되면 “loser(실패자)”이고, 얼굴이 못생긴 남자를 후져라고 하고 돈이 없으면 커져라고 수다를 떨었다는 보도가 나돌았다. 시카고 Art Museum에 가서 피카소의 괴상망칙하고 기괴스럽게 그린 인간 군상 그림들을 보았을 때 혼돈과 공허를 느꼈다. 못생겼다고 욕하는 자에게 하나님을 비난하지 말라고 응수한 이야기가 있다.

과학자들이 머리를 싸매고 연구하여 얻은 결론은 이 인간의 몸이 정신과 분리할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몸, 영혼 모두 포괄하는 전인적인 존재이다. 그러기에 오늘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몸을 위하여 먹을 것을 주시고, 질병에서 보호하시고, 안전하게 거하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인간 몸에 당신의 자비와 사랑을 부으신다. 이런 사랑과 지비를 받은 몸은 주를 위하여 존재한다. 바울은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 몸을 성전이라고 하고 있다. 재림교회건강신학에서는 신체적 조건과 영적 경험이 상호간 원인-결과의 관계에 있다는 유기적 연계성에 역점을 두고 있다. 몸과 마음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교제하실 수 있는 유일한 매체가 된다. 더 나아가서는 건강 생활을 신앙생활의 한 부분으로 보고 있다. , 재림교회는 이 건강 메시지를 현대진리의 일부로 보고 있다.

II. 성전의 종류

1. 지상 건물 성전(모세 성소, 솔로몬 성전):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께 제사드린 곳이 성소, 성전이다. 성소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계신 곳이다. 이 지상 건축물은 파괴되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2. 예수 성전: 2:20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니...”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옛날 성소를 펼치게 하사 자기 백성들에게 거하신 장면을 전제로 하는 말씀이다. 이 예수 성전은 영원토록 계속된다.

21:22 구속 사업이 끝난 후에도 이 성전은 영원히 이어진다.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3. 하늘 성소)

4. 인간 몸 성전: 메타포적 표현이긴 하지만 인간 몸은 성령의 전이 된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 성령의 전인 몸이다. , 몸은 하나님을 만나는 내전(naos)에 해당한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Don't you know..."이 표현이 고린도전서에 10회 나오고 있는데 그 중 첫 번째가 고전 3:16에 나오고 있다. 이 물음법은 부정할 수 없는 진리를 암시하고 있다. 인간의 몸이 성령의 전이 된다는 것은 그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리라는 것이다.

인간 성전 사상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다. 먼저 고린도교회 신자들이 집합적으로 성령의 전이라는 것이다. 또한 한 사람, 한 사람이 각각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개인적인 의미도 담겨 있다. 그리스도인 각자가 성령의 거처인 것이다. 더 나가서는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2:22).

III. 성전의 특성

1. 값이 지불되었다. 그래서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다.

모세 성소 건축에도, 솔로몬 성전 건축에도 엄청난 희생의 값이 지불되었다. 옛날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다. 그 결과는 3일 온역이었고 7만명이 온역으로 죽었다. 재앙을 가져 온 사사가 아리우나의 타작마당에 있었다. 선지자 갓의 권고에 따라 그 곳에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기로 하고 억지로 값을 주고 그 땅을 샀다. 이 곳이 장차 솔로몬의 성전터가 되었다. 이 땅에 성전이 건축되는 곳마다 눈물겨운 희생이 수반되어 왔다. 성전에는 값이 지불된다. 값이 들지 않은 성전은 없다.

인간 몸 성전을 위하여 그 어떤 것보다 더 큰 값이 지불되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이 지불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구속을 받은 것이다. 예수는 죄인 한 명을 위해서라도 지상에 와서 자신의 생명을 내주셨을 것이다(참조 마 18:12~14; 교회증언, VIII, 73). 인간 몸 성전은 하나님의 몸값이다. 여기에 인간 몸의 소중성이 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온 천하를 얻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셨다. 인간 몸을 단순히 물질로만 보지 않는 성서의 가르침은 인간창조의 원자태를 상기시키고 있다. 하나님이 인간 몸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것이다. 이는 종의 신분이란 소리 나는 도구에 지나지 않은 시대에 인간이 곧 신적 계열에 속한다는 사상이다. 그러나 인간 몸은 죄로 훼손되어 하나님의 형상이 망가져 버린 상태에서 다시 재창조하시고자 십자가에서 값을 지불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중적으로 하나님의 소유가 된 것이다. 먼저는 창조로, 그 다음에는 구속으로 하나님의 성전이 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에 전세 입주하여 살고 있는 셈이다.

2. 신자의 몸은 성령의 내주하는 전이 되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신자를 거듭나게 하시고 침례 받게 하시고 양자로 삼으실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성령께서 그의 거처로 삼으시어 살고 계신다는 것이다. 당대에 초개같은 인간 몸을 성령이 내주하시는 전, 성전이 되었다고 선포하신 것이다.

새언약에는 성령의 내주 약속이 담겨 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28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36:26-28).

예수께서 일지기 이 성령의 내주를 말씀하셨다.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14:17).

바울은 이 사상이 담긴 메시지를 로마교회에도 보내었다.

하나님의 손가락이(성령께서) 불칼로 화강암 바위에 도덕률을 새겨 넣었던 것처럼,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이 DNA를 입력하여 두셨다. 그리하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8:4).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8:9)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외교사절로 신자 안에 거하신다. 신자가 의식하던지 못하던지 상관없이 성령께서는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의 외교사절로 신자 안에 내주하신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내주하시면서 분초마다 깨우쳐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므로 하나님과 바른관계에 머물러 있도록 하신다. 그는 신자를 은혜로 거룩케 하시고, 어두운 마음에 진리로 조명하시며, 닫힌 마음을 열게 하시며, 꺼져 가는 믿음을 일깨우시고 소성시키시며, 죄를 대항케 하고 복음의 통로가 되게 하신다. 시시 때때로 기쁨과 위로를 주시며 우리의 기도를 바르게 하도록 인도하신다. 하나님이 신자 안에 거하시고 하나님 안에 거하는 이 일로 계명을 바로 지키게도 한다(요일 3:24).

외교사절은 본국 정부의 뜻을 받들어 주재국에 알리고 그 뜻을 따라 상호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일을 하신다. 우리가 그 분의 뜻을 거역하고 말을 안 들으면 우리로부터 떠난다. 다윗은 이 사실을 깊이 의식하여 시 51:11의 기도를 올렸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51:11).

3. 성전의 특성은 거룩성에 있다.

거룩이란 말은 구별한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거룩이란 하나님을 위하여 분리될 때 또는 분리할 때 성립한다. 물건이나, 양이나 돈을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할 때 그것들이 거룩하여진다. 분리와 너신이 기본이 되어 있는 것이 거룩함의 뜻에 배어 있다. 시간의 분별은 안식일로 나타나고 있다. 재물의 구별은 십일조로 나타난다. 인간에게 이런 거룩함의 경험이 없거나 약할 때 동물과 차이가 없어지게 된다. 낙태죄를 위헌으로 판시한 헌재의 결정은 거륵함이 실종된 이 시대의 비극을 대표한다고 볼 것이다. 교회에 가는 신자의 옷차림은 그의 성숙성을 보여준다. 마닐라에서 대 예배 시 개가 강단에까지 으스렁 거리는 것을 본 일이 있다. 동물들이 거룩함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1917년에 출간된 루돌프 오토의 저서 성스러움의 의미는 신이나 종교라는 관념대신 종교적 경험의 여러 형태를 분석하고 있다. 그는 경외와 비합리적인 경험의 특징을 발견해 내려고 고심하고 있다, 그는 성스러운 것 앞에서의 두려운 감정,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신비(mysterium tremendum), 압도적인 힘의 위력을 분출하는 장엄함(majestas)을 발견한다. 즉 그는 존재의 완전한 충만성이 꽃피어나는 매혹적인 신비 앞에서의 경건한 두려움을 발견한다. 놀랍고, 무섭고, 떨리는 거룩함은 경외를 동반한 두려움과 신비한 매혹이라는 두 가지 면이 있다. 하나는 경외에 이끌려 불타는 덤불을 바라보는 모세가 경험한 경우(3)에서처럼 두려움이 있다. 또한 시내산의 하나님 현현 이야기(19)에서 거룩한 산의 신비에 이끌리지만, 사람들은 거룩함에 의해 소멸되지 않으려면 경외심과 두려움을 느끼며 뒤로 물러나야 했다. 매혹과 두려움은 거룩함의 독특한 본질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다. 루돌프 오토의 견해로는 거룩함은 단지 신성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전적인 타자, 초월적인 것 등고 같은 단어들로 묘사되는 신비가 아니다. 더욱 근본적으로 거룩함은 이다. 오토는 이것은 sensus numinis (신감)이라고 불렀다. 하나님의 내주로 이런 神感이 형성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륵성이란 그 말씀의 역사적 집행이 없이는 달리 하나님은 만나주시지 않는다. 내 안에 거주하시는 하나님을 시내산 앞에 있던 옛 이스라엘이 두려워했던 것처럼 두려워하고 경외심을 갖는 신감이 필요하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발하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임이라 나는 네 가운데 거하는 거룩한 자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11:9)

벧세메스 사람들이 가로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뉘게로 가시게 할꼬 하고”(삼상 6:20)

성령의 전이라는 사상에는 성별해야 한다는 것까지 포함된다. 성전이 장사꾼의 집이나 강도의 굴혈이 되어 버렸을 때 예수께서는 채찍을 휘두르셨다(2:13-25; 21: 12-13).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타락상을 용납지 않으셨다. 성전 정결 사업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있어서 마치 율리우스 카이저가 자신의 사형집행 영장에 서명하는 행동과도 같다고 표현한 사람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업의 클라이맥스는 이 때 에스카레이팅하게 된다. 예수의 성전 정결은 유대지도자들과 백성들의 획책으로 이 때부터 십자가로 연결되고 예수께서 떠난 성전은 얼마 후 파멸된다.

고린도교회는 타락한 시대의 성범죄에 단호한 입장을 취하여야 했다. 섹스의 도시 고린도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몸을 성령의 전으로 거룩하게 보존하여야 하였다. 성전을 더럽게 하면 보복이 있겠다고 하였다(고전 3:16). 하늘성소 정결 사업이 진행되는 동안 이 땅에서 하나님 백성들의 몸 성전 정결 사업도 계속되어야 한다.

불경한 거래의 혼잡으로 채워진 예루살렘 성전 뜰은 관능적인 욕정과 부정한 생각을 품음으로 더러워진 모든 사람의 마음의 성전을 너무나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세상의 매매하는 자들로부터 성전을 정결하게 하시면서 예수께서는 마음에서 더러운 죄 곧 영혼을 부패하게 하는 세속적인 욕망, 이기적인 욕정, 악한 습관을 제거하시고 정결케 하시는 당신의 사명을 나타내셨다. ”(소망, 161). 하늘 성소 정결 기간은 인간 몸 성전 정결기간이 된다.

고린도교회 문제는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지킨다고 공언하는 자들조차 간음죄를 범한다. 그들의 마비된 감각을 일깨우기 위하여 무슨 말을 해야 할 것인가? 도덕적 원칙은 철저하게 실행될 때 영혼의 유일한 안전책이 된다. ”(2증언, 352). 간통죄가 폐지된 세상이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7:21-23). 성령께서는 이런 것들을 우리 마음에서 쓸어 내시기를 원하신다. 우리 마음에 호랑이, 사자, 여우, 늑대살쾡이를 몰아내기 원하신다.

예화: 1911년 어느 날 아침 샌프란시스코 경찰법정 대기실에는 지난 밤 30여명의 죄수들이 붙잡혀 즉결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술주정뱅이, 질서 교란범, 각종 잡범들 등이 형편 없이 초췌한 모습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지난밤이 악몽 같은 아침이었다. 그 중에는 전국적으로 알려진 오페라 가수도 위조범으로 붙들려 와 있었다. 이 오페라 가수는 저들을 보면서 연민의 마음이 끓어올라 거룩한 성(The Holy City)” 복음성가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나 어젯밤에 잘 때 난 꿈을 꾸었네

그 옛날 예루살렘 성에 곁에 섰더니

허다한 아이들의 그 묘한 소리로

주 찬미하는 소리 참 청아하도다

천군천사 들이 화답함과 같이

예루 살렘 예루살렘

그 거룩한 성아 호산나 노래하자 호산나 부르자

그들 모두에게는 1절에 나오는 어젯밤은 악몽이었다. 2절을 부르기 시작할 때 몇 사람이 눈물을 흐리며 바닥에 엎드려 기도하였다. 판사가 법정에 입장하다가 대기실에서 들리는 노래에 대기실로 들어가 그 노래를 들었다. 오페라 가수가 멈추려고 하자 계속하라고 한다.

거기 대기 중인 죄수들이 모두 엎드렸다.

그 꿈이 다시 변하여 그 길은 고요코 그호산나 찬미소리 들리지 않는다

햇빛은 아주 어둡고 그 광경 참담해

이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때의 일이라

이는 십자가의 달리신 그때의 일이라

예루살렘 예루살렘 그 거룩한 성아

호산나 호산나 노래하자 호산나 부르자

그 꿈이 다시 변하여 이 세상 다가고 그 땅을 내가보니

그 유리바다와 그 후에 환한 영광이 다 창에 비치니

그 성에 들어가는 자 참 영광이로다

밤이나 낮이 없으니 그 영광뿐이라

그 영광 예루살렘 성 영원한 곳이라

이 영광 예루살렘 성 참 빛난 곳일세

예루살렘 예루살렘 그 거룩한 성아

호산나 호산나 호산나 부르자

호산나 노래하자 호산나 오산~~

판사는 재판석에 나아가 한 사람 한사람 피고인들을 모두 다 살펴보았다. 모두가 울면서 뉘우치는 모습이 역연한 것을 확인한 판사는 모두를 훈방 조치하면서 거룩한 성에 들어 갈 수 있도록 살라는 설교조 권고로 판결을 마쳤다. 신자가 거룩성을 상실한다면 천국에 들어 갈 수 없으리라.

호소:

새 언약에는 내 신을 너희 안에 둔다는 약속도 들어 있다. 하나님의 신이 인간 안에 있어 하나님의 영원한 뜻이 서린 하나님의 법을 인간의 마음에 새기신다. 옛날 지성소 법궤 안에 십계명 두 돌판, 만나, 아론의 지팡이를 보존하여 두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십계명 두 돌판을 새기시고, 말씀의 만나를 두시고, 죄를 지적하는 권능과 부활의 막대기를 두시기 원하신다.

성전의 본래의 목적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는데 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내주하시어 이 목적을 구현하시고자 하신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사람의 삶이 본래 뜻하신 위대한 작품이 되어가도록 변화시키시는데 있다. 성도란 하나님의 거룩한 품성을 닮아가는 거룩한 무리들이다.

(예화)

유럽에서 가장 좋은 오르간 중 하나는 스위스의 Fribourg 타운 대성당 안에 있는 비치 된 것이다. 오래 전에 한 젊은이가 그 대성당에 와서 오르간을 보고 싶다고 하였다. 관리자는 그 젊은이가 누군지도 알아보지도 않고 한 마디로 거절하였다. 그 젊은이가 계속 졸라대자 그럼 잠간만 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젊은이가 집요하게 앉아서 한번 연주하고 싶다고 하자 잠간만 해보라고 마지못하여 허락하였다. 그가 앉아 연주를 시작하자 하늘의 음조가 터져 나와 온 성당을 전율시켰다. 관리자가 연주가 끝난 후 당신 누구요?” 하고 물었다. 젊은이는 내 이름은 Mendelssohn입니다고 대답하였다. 관리자는 그토록 탁월한 음악가가 연주하겠다고 하는 것을 거절하다니...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성화를 연주하겠다고 끊임없이 졸라대고 계신다. 우리에게 자리를 달라고 하신다. 그 분이 우리의 삶을 하늘의 삶으로 바꾸어주는 연주를 하겠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연주하면 허탈함과 좌절밖에 남은 것이 없다. 인류 역사에 있어서 위대한 작품을 만드시고 연주하시겠다는 성령님의 애원에 자리를 내어드리자. 우리 몸이 주를 위하는 길이 이 것이다. 그래서 성령의 전이다.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악령의 전이 되어 있는가! 우리가 성령의 전이 된다는 것은 전율적인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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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