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직한 신관을 찾아

 

I. 신관 개요

신의 존재 유무와 관련하여 유신론(Theism), 이신론(deism), 무신론(atheism), 범신론(pantheism), 불가지론(agnoticism) 사상들이 있다. 비기독교 세계관에는 불가지론, 무신론, 범신론, 궁극적 실재는 정신과 물질을 종합한 단자(Spinoza)나 중성적 요소로 보는 자연주의, 궁극적 실재를 정신적인 것으로 보는 관념론(Hegel), 다신론, 유물론 등이 있다.

 

1. 유신론과 이신론은 최고 궁극적인 영적 존재의 실재를 신봉한다.

2. 이신론은 17-18세기 영국에서 Herbert Cherbury를 중심으로 제기된 일종의 유신론이지만 초자연주의를 배격하고 인간 이성 중심으로 정제된 자연종교를 강조하였다. 한분의 초월적 최고의 존재를 신봉하는 이신론은 예배의 필요성, 윤리적 행위의 당위성, 회개의 필요성, 신적 보응과 징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삼위일체, 성육신, 성경의 신적 권위, 속죄, 이적 등을 배척하였다.

 

3. 유한신론은 유한적이며 인격적이신 하나님을 주장한다. 하나님의 형이상학적 속성을 제거하고 도덕적 속성만을 인정하며, 절대자의 한 부분이라고 주장함. (브래들리, 제임스).

 

4. 추상적 관념신론은 단순한 추상적인 관념을 인격화하여 내재적이며 비인격적인 하나님을 인정한다. 하나님은 우주적인 과정이며, 보편적 의지 능력, 숭고, 관대한 이상의 상징이라고 한다 (해리엘마반스, 쉐일러 매튜스).

5. 무신론에는 고전적 무신론(classical atheism), 실천적 무신론(practical atheism), 교의적 무신론(dogmatic atheism), 역사적 무신론, 철학적 무신론, 유물론적 무신론 등이 있다.

 

(1) 고전적 무신론은 다른 나라의 신을 배척하는, 즉 특정한 한 나라 중심의 신의 존재를 거부한다.

 

(2) 실천적 무신론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삶의 방식에서 하나님 없이 무신론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지칭한다.

(3) 교의적 무신론은 신의 존재를 절대적으로 부인한다. 이는 일종의 확신 무신론이다.

 

(4) 역사적 무신론은 정치, 경제, 사회적 차원에서 발생한 것으로 인간이 자신을 복종시 켜야 하는 신의 존재를 장애물로 생각하여 이데올로기적으로 그 존재를 부인한다.

(5) 유물론적 무신론은 궁극적 실재를 물질로 본 무신론으로 고대 희랍철학에서 등장하였으나 근대에 이르러 칼 마르크스가 발전시켰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잘못된 의식(환각)에서 신 개념이 나왔다고 본다.

 

6. 불가지론(agnoticism)은 초월적 실재에 대한 합리적 인식을 거부한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논리적 실증주의자들은 전통적인 인격신관에 회의적이다. 인간은 실제 자기가 경험한 것밖에는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이 계신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Thomas Huxley, Spencer, Hume, Kant 등은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증거가 빈약하다고 보아 그 판단을 유보하는 불가지론자들이다. William James는 이 같은 불가지론을 두고 불충분한 증거라도 유신론 논증이 될 수 있다고 비판하였다. 하나님에 대한 불가지론적 논증 원칙은 다음과 같다.

(1) 인간은 유추법(analogy)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의인화시켜 알 수 있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

(2) 전체를 알아야 실제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전체를 아는 위치에 있지 않다. 전 체를 알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알고 있으면 참 실제를 알 수가 없다.

(3)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때 소극적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개념을 가질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4) 우리의 지식은 모두 주관적인 인식과 연관되어 있다.

인간은 주관적인 지식만을 가지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주관적이다.

 

7. 범신론은 신을 비인격적으로 보고 우주 만물에 편재한다고 본다. 범신론에서는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구분이 없다. 범신론은 초월신을 배격하고 우주만상에 편재하는 신을 추구한다. 범신론은 하나님과 세계를 동일시하며, 모든 피조물에 하나님이 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초월적 하나님을 부인한다. 내재적이며 비인격적인 하나님을 주장한다 (슐라이에르마허, 브룬너).

 

만일 그들의(범신론의) 논리적 결론을 따르게 되면 이와 같은 이론들은 전반적인 그리스도교의 체계를 일소해 버리게 된다. 그 이론들은 속죄의 필요성을 일소해 버리고 사람을 자기 자신의 구주로 만들게 된다. 하나님께 대한 이와 같은 이론들은 그분의 말씀을 무효로 만들고, 그 이론들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마침내 성경 전체를 하나의 꾸며낸 이야기로 간주하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그들은 덕성을 부도덕보다 더욱 좋은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정당한 통치자의 위치에 계시도록 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없이는 전혀 무가치한 인간의 능력을 의지하게 된다. 아무런 도움을 받지 않는 사람은 악을 저항하고 이길 진정한 힘을 전혀 갖지 못할 것이다. 영혼의 방호벽은 무너지게 된다. 사람은 죄를 대항할 방어책을 갖지 못하게 된다. 일단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제지가 거부될 때, 우리는 사람이 얼마나 깊이 죄에 빠지게 될 것인지 알지 못한다.”(치료, 428-429).

 

II. 만유내재신론 주장과 평가

만유재신론은 하나님 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고(All in God), 모든 것 속에 하나님이 들어 있다(God in all)고 주장한다. 우주와 세상은 하나님의 몸이다. 하나님과 세상은 상호 의존적이다. 세상은 무로부터 창조된 것이 아니고 물질로부터 창조되었다고 본다. 또한 역사는 끊임없는 진보과정에 있다는 낙관주의에 서 있다.

A. 범신론과 만유내재신론의 차이

만유내재신론은 신(하나님)에서 이 세상을 빼도 남는 부분이 있다. , 신과 이 세상은 완전히 융화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범신론은 신과 이 세상을 완전히 융합시켜 남는 부분 없다. 범신론은 세상과 신을 동일시한다.

 

B.만유내재신론 주장자들

1. 만유재신론자의 주장:

"신과 인격적(personal)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나 신은 하나의 인격(a person)이 아니다. 신은 인격과 비인격을 초월하면서 동시에 양면을 다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신은 보통 존재와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존재"라 할 수 없고 차라리 "비존재"라 하는 것이 더 낫다. 틸리히의 말처럼 하느님에 대해 말할 때 상징적인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 나는 신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믿는 panentheism (만유재신론, '만유내재신론')자이다. 만유내재신론자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생각하는 것은 '율법주의적 신관'이라고 한다." “만유재신론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있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계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저 위에도 게시고 여기에도 계신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 됨을 내 안에서 체험하고, 그와 하나 되는 체험이 가능하다.”

 

위 주장은 마치 요한복음 15:4에 나오는 말씀처럼 들리나 내용을 알고 보면 판이하게 다르다.

 

범신론이 만유와 동일시되는 점과는 달리 만유재신론은 만유가 신 안에 내재하고 있으며 신은 만유를 포괄하면서도 초월한다는데 있다.

 

2. 크라우제(Krause)는 만유재신론이 범신론까지 포괄하는 도식으로 보고 있다. 크라우제는 Schelling의 범신론적 세계관의 개념을 신적 인격 개념과 결합시켜 범신론을 주장하였다. 만유재신론은 범신론을 포용하고 있다는 점에 문제성이 있다.

3. Hegel'이 세상이 없으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다'라는 명제를 제시하면서 하나님과 세계의 불가분성을 역설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철저히 인간의 현실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역사철학>에서 하나님께서 세계의 역사를 통치하며 현실 세계의 구체적인 역사를 관장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이 세계 안에서 매일 발생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올 뿐만 아니라 하나님 없이는 발생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 자신이 하신 일이다(4: 938). 그의 도식은 후에 많은 신학자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4. Charles Harthone의 신의 변화론 및 감정이입론 사상("Standpoint of Panentheism," PSG, pp. 1-25) 을 여러 사람들이 다듬어 놓은 것은 법재신론의 철학적 바탕이 되었다.

5. John B. Cobb, Jr.은 과정철학자 Whitehead의 논리를 발전시켜 하나님을 더 인간화 시켰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궁극적 실재에 관하여 계시된 말씀을 상징으로 보면서 동 실재를 알려지지 않는 분 또는 알 수 없는 분으로 보았다.

 

6. 슐라이에르마허는 그의 <기독교 신앙>에서 이 만유재신론의 신관을 피력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을 이 세상으로부터 혹은 세상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을 반대한다. “세계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 의존에서만 존재한다.” 하나님과 세계는 전적으로 다르나, 하나님은 자신을 세계에 전달한다. 처음에는 하나님과 세계는 동일한 것으로 보았으나 범신론의 비판이 일자, 후에는 하나님이 그 범위에 있어서 세계와 같고, 그 본질에 있어서는 다른 것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하나님을 악의 창시자로 보았으며 죄는 구속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의 신관은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신관 모델이 되었다. 하나님을 멀리서 이 세계를 다스리는 어떤 위대한 인간과 같은 존재로 생각하여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어떤 객체로 생각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7. Paul Tillich 역시 헤겔의 도식선상에서 만유재신론적 주장을 하여 하나님과 세계는 동일시할 수 없지만 상호간에는 긴밀하게 뒤엉켜 있다고 본다.

 

8. 세속신학에서도 personalistic panentheism을 주장한다.

 

9. Moltamann은 초월성과 내재성을 모두 추구하는 종말론적 삼위일체적 만유재신론(eschatological, trinitarian panentheism)을 주장하며 초월성과 내재성을 모두 추구한다.

 

10. Rahner는 하나님과 세계는 차이성 속에서 통일성을, 통일성 속에서 차이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고 타종교의 신들이 그리스도의 다른 표현들이라고 본다. 그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말하였다. Hans Kung 도 위험스러운 만유재신론의 신관을 주장하고 있다.

 

C. 평가

 

1. 만유내재신론(Panentheism)하나님 안에 모든 것이 들어있으며’(all in God), 동시에 모든 것속에 하나님이 들어있다’(God in all)고 주장한다. 이는 얼핏 보면 하나님이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4:6)라는 말씀에 근거를 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4:6)는 말씀은 만유 위에 계시며 편재하시면서 연합의 원천이 되시는 아버지되심을 강조하고 있다.

만유재신론의 가장 큰 문제점은 모든 만물, 즉 자연 속에도 하나님이 있다는 데 있다. 만유내재신론은 크게 보면 범신론 그룹에 속한다. 그래서 만유내재신론은 전통적인 신관인 하나님의 자존성을 파괴하고 있다. 세계와의 연계 토대 위에서 의식된 신관이기 때문이다. 자연 속에 하나님이 있다는 주장은 비성서적이다. 동양종교의 범아일체의 사상으로 나가게 하는 가교역할을 하기마련이다.

 

2. 만유내재신론은 하나님이 두개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 하나는 하나님의 잠재적 본성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실제적 본성이다고 한다. 잠재적 본성이라 함은, 하나님이 당신의 존재안에서 영원하며, 완전하며, 불변하며, 불멸하며, 무제한적임을 의미한다. 실제적 본성이란 일시적이며, 상대적이며, 불완전하며, 변하며, 소멸하며, 제한적이며, 의존적이다. 자연이 없다면 하나님의 존재는 우리 인간에게 무의미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상대적 신일 뿐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초월하신 분이신 동시에 인간 또는 자연에 의해서 존재의 의미를 부여받게 되는 비인격적 존재라 함은 자가 모순적인 신관논리일 뿐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재단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세상은 존재론적으로 구분되나, 동시에 존재론적으로 서로 붙어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라는 논리는 인간에 의한 하나님 본성 규정이다. 세상은 하나님께 의존하고, 하나님은 세상에 의존하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을 담아내는 용기(容器)가 되어 그릇이 없다면 하나님도 없게 된다.

만유재신론에서는 하나님이 자연을 품고 있지만 그 근원적 특성은 자연의 일부가 되고 만다는 점에서 성경적 신관의 전부라고 볼 수 없다. 세계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하는 것이지 그분이 세계의 일부가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세상 안에서 일하고 돌보고 계시지만 그 일부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과 세상의 관계를 종속적 관계가 아닌 상호 보완적 관계로 대등하게 보는 이 시각은 피조물의 신격화에 불과하다.

3. 만유내재신론은 세상은 무로부터(ex nihilo)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물질로 부터(ex material) 창조되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세상의 창조자가 아니라, 우주의 감독관이 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창세기 1-2장의 창조주 하나님을 배척하는 꼴이 된다. 몰트만은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 개념을 받아들이나, 전통적 신론에서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재해석하여 받아들인다.

4. 만유내재신론은 역사는 끊임없는 하나님의 진보의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과정신학자들처럼 하나님은 더 완전성을 향해서 변화하고 있으며, 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결국 역사는 하나님과 인간이 공동의 창조자로서 존재하는 진화적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이 개념은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적 신개념에서 개발된 것으로 모든 실재(實在, entities)들이 경험에 의해 완성되듯이 하나님 또한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완성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실제적 존재이다.

과정철학자 화이트헤드의 하바드 대학 직계 제자인 하트숀은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적 신개념을 더욱 심화 개발하여 과정신학 이끌어간 인물이다. 그는 하나님의 완전성에는 변하지 않는 완전성과 변하는 완전성이 있다고 본다. 하나님의 영원한 자기 정체성은 완전하다. 그러나 시간이 감에 따라 하나님의 이전의 완전성의 상태 또한 업그레이드 되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완전하지 않다. 이는 인간화시킨 말 작란 같은 신 개념에 불과하다.

5. 내재적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 임재를 가슴 저리게 느끼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원이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 또한 인간이 재단한 존재인데도 신적 경험적인 앎만을 주장하는 일은 무속적 정령 신관으로 전락하가 마련이다. 무속은 불분명하거나 비인격적인 대상을 향한 일체의 종교행위이다.

힘써 하나님을 알자”(6:3)--하나님을 아는 것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기초가 되어 있다.

 

6. 만유내재신론자들은 칼 라너의 말처럼 부처나 알라나 시바를 그리스도의 다른 이름으로 본다. 예수는 여러 신들 중 하나로 전락한다. 고유명사 그리스도를 보통명사화시켜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구원자의 칭호로 본다.

 

7. 만유내재신론자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중의 하나로 본다. 힌두교적 신관이 물씬하게 담겨 있는 사고로 흐른다. “예수가 내 안에 내가 예수 안에라는 성서의 기별은 내가 예수께 굴복한다는 개념이지 인간이 곧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니다.

 

III. 재림교회 신관 <기본신조 2>

 

한 하나님이 계신다: 성부, 성자, 성령 곧 동일하게 영원하신 세 신격의 통일체 하나님은 불멸이시고, 전지전능하시고, 만유 위에 계시고, 항상 존재하신다. 그분은 무한하시고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분이시면서도 그분의 자기 계시를 통해 알려지신다. 그분은 모든 피조물들에게 영원히 경배와 숭배와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IV. 하나님에 관한 지식

1. 하나님을 설명하고자 하는 수많은 이론들과 그분의 존재에 대한 수많은 찬반 논리들이 있지만 인간의 지혜로는 신성을 꿰뚫어 볼 수 없다. 인간의 지혜만을 의지하여 하나님에 관해 알고자 하는 것은 별자리를 연구하기 위하여 확대경을 사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수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지혜는 "감취었던 것"(고전 2:7)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비밀이다. 바울은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고 기록했다.

성경의 가장 기본적인 계명 중 하나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다(22:37; 6:5, 참조), 우리는 아는 바가 전혀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찾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깊은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11:7).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창조주를 알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가?

 

2. 하나님은 사랑과 동정으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알리셨다. "기독교는 인간이 하나님을 탐구한 것에 관한 기록이 아니라, 당신 자신과 당신의 목적들을 인간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계시의 산물"*이라는 점을 성경은 밝혀준다. 이러한 자기계시는 반역적인 세상과 돌보시며 염려하시는 하나님 사이의 구렁 위로 다리를 놓기위해 계획된 것이다.

3.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사랑은 그의 최고의 계시인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표현되었다. 예수를 통하여 우리는 아버지를 알 수 있다. 요한의 말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하"(요일 5:20)셨다.

또한 예수님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17:3)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좋은 소식이다. 비록 하나님을 완전하게 아는 것이 불가능하긴 하나, 성경은 우리가 그분과 더불어 구원의 관계속으로 들어가기에 충분한 그분에 관한 실제적 지식을 제공해 준다.

 

3.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얻는 자세

다른 지식과는 달리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두뇌에 관계된 것인 만큼 마음과도 관계된 일이다. 이것은 지성만이 아닌 전 인격을 포함하고 있다.

(1) 성령께 마음을 열어 놓아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7:17; 11:27, 참조).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5:8)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불신자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바울은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상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0, 21).

(2)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탐구할 때에 우리는 그분의 자기 계시인 성경의 권위에 복종해야만 한다. 우리는 하나님 위에 우리 자신을 세워 놓을 수 없으며, 하나님을 분석하거나 측량할 수 있는 것처럼 취급할 수 없다. 성경은 그 자체가 해석자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이 제시하는 원칙들과 방법들에 대해 우리 자신을 굴복시켜야 한다. 이러한 성경의 지침이 없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예수님 시대의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파악하는 일에 실패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성경을 통한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굴복시키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별을 그릇되게 해석하고 그들의 구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들의 문제는 지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지성을 어둡게 만들고 영원한 멸망을 초래한 것은 그들의 닫힌 마음 때문이었다.

(3) 믿음의 선행 조건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11:6) 하기 때문이다.

 

3. 하나님 지식을 얻는 방법에 대한 여러 견해들

 

(1) 스콜라 신학

하나님의 어떤 부분에 대하여는 인간이 자연을 통해 알 수 있으나, 다른 부분은 신앙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알 수가 없다. 즉 은총과 믿음에 의하지 아니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2) Martin Luther

루터는 숨겨진 하나님(hidden God)과 나타나신 하나님(revealed God)을 구별하면서, 죄인은 전자인 숨겨진 하나님을 잘 알 수 없고, 후자인 계시된 하나님은 알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여 주신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3) John Calvin

죄인은 하나님을 다 알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본성, 존재를 알려고 하는 것은 사변적 일 뿐이다. 하나님에 관하여 알 것은 그 분의 속성에 대하여 안다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알아야 하는 영역이다. 그 때에야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식은 절대적이지만 사람의 지식은 상대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4) Karl Barth

바르트는 자연신학(Natural Theology)과 자연계시(Natural Revelation)을 부정하였다. 하나님은 자연이나 역사, 인간의 어떠한 경험 속에서 발견되어지지 않으며, 오직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된 특별계시 속에서만 발견된다.

 

(5) Ellen White

지식의 탐구, 곧 학문의 연구에 따르는 가장 큰 위험 중의 하나는 인간의 이성(理性)을 그 참된 가치와 적절한 범위 이상으로 높이고자 하는 경향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불완전한 과학의 지식으로 창조주와 그분의 업적을 비판하고자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본성과 속성과 권한을 측정하고 무한하신 분에 관한 추리적 이론에 빠지고자 노력한다. 이와 같은 연구 분야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금지된 땅을 밟고 있다. 그들의 연구는 가치 있는 결과를 가져 오지 못하고 다만 영혼을 위태롭게 하는데 불과할 것이다.

우리의 첫조상은 하나님께서 갖지 못하게 한 지식을 욕망함으로써 죄에 빠지게 되었다. 그 지식을 얻고자 노력하므로 그들은 소유할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치료, 427)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29:29).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주신 그분 자신에 관한 계시는 우리의 연구를 위한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그 이상의 것은 우리가 간파할 수 없다. 가장 높은 지성이 지칠 때까지 하나님의 본성에 관하여 추측할지라도 스스로 혹사만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노력은 허사가 될 것이다. 이 문제는 우리에게 해결하도록 맡겨지지 않았다. 어떤 인간의 정신도 하나님을 이해할 수는 없다. 유한한 사람은 그분을 설명하기 위하여 시도하지 않아야 한다. 어떤 사람도 그분의 본성에 관해서 추상적인 생각에 빠져서는 안 된다. 여기에는 침묵이 웅변이다. 전지 하신 분은 토론의 대상이 아니시다.”(8증언, 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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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