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섭리(Providence)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
우리 앞에 전개될 2016년이 어떤 위험한 것을 몰고 올지 모르면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자나간 날 하나님 백성 앞에는 늘 홍해와 광야가 놓여 있어 왔다. 우리는 그런 위험상황이 다가올 때 두렵고 불안하여진다. 그런 때는 오로지 하나님의 섭리의 인도를 받으면서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면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 없는 미래 계획이나 꿈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도 같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계 14:7).
인간의 생애는 짧다. 젊은 날의 실패는 아름답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중년 이후의 실패는 참혹하다. 안개(약 4:14), 풀과 꽃(사 40:6), 밤의 한순간(시 90:4,510), 연기(시 102:3), 베틀의 북(욥 7:6) 같은 한계가 있는 짧은 인생길에 하나님의 섭리의 지도는 절대적이다. 내 계획과 힘만으로 안 된다는 것을 일찍 깨달을수록 안정하게 항해할 수 있다.
I.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모든 것을 돌보고 계신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최고의 존재이시다. 창조하신 분이 그 만드신 것을 보존 보호 통치 관리하신다.하나님은 거대한 우주를 만드시고 관리하시는 분이시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온 우주를 통할하시며 돌보시고 계신다. 하나님은 작은 일이나 큰 일 모두 돌보시는 분이다.하나님은 500억 광년이나 된다고 하는 온 우주를 창조하신 후 보살피고 계신다.지금까지 이 우주는 한 번도 고장이 없어 왔다. 단 한 번도 겨울과 여름이 바뀐 적도 없다. 해가 서쪽에서 뜨는 일도 없었다. 이렇게 큰 우주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아주 작은 것까지 섭리하고 계신다.하나님의 섭리는 철저하고 자상하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상황을 자세하게 알고 계신다.
예수께서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작은 참새까지도 관리하시는 분이시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머리털까지 세신다는 것은 모든 일을 철저하고 자세하게 섭리하시는 분이라는 뜻 이다. 머리털은 대략 흑발 12만개, 적발 9만개, 금발 14만 5천개가 된다고 한다. 그러니 너희는 인생길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30-31). 참새 한 마리까지도 돌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두고 참새보다 귀한 존재라고 하신다.한 앗사리온(assarion)에 참새 두 마리(눅 12:6 다섯 마리에 한 데나리온)라고 한다. 한 앗사리온은 보통 일꾼 하루 품삯의 16분의 1이다. 싸구려로, 그것도 덤으로 얹혀 팔려 가는 참새들까지 돌보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지 않겠는가. 우둔한 인간은 나중에서야아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구나!하고 깨닫는다.홍해 앞에서 애굽 군사들의 추격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히 두려워하였지만 하나님의 섭리를 믿은 모세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인생의 GPS
요즘 자동차 GPS란 global positioning system이라 하여 위성 위치확인 시스템을 말한다. 고도 약 2만 키로 상공에 6개의 원궤도를 만들고 각 궤도에 4개씩 도합 24개의 인공위성을 띠운다. 이용자가 자기위치에서 가장 적당한 위치의 위성 4개를 선택해서 그것들로부터 시각 신호를 수신하여 자기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자기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정해 놓으면 그 목적지까지 최선의 항로를 안내해 준다. 차가 막히는 곳을 피해서 현재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길도 안내해 준다. 우리 인생에도 이 GPS처럼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하는 분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저 하늘에서 우리의 앞길을 정확히 내려다보시면서 우리의 갈 길을 안내해 주시는 GPS가 된다. 그분의 안내를 받으며 인생을 사는 사람이 인생을 가장 잘 살 수 있고, 그분의 안내를 받으며 사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다.
“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1. 섭리의 의미- 하나님의 섭리란 세계와 인간의 생명은 우연이나 운명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배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을 보전하며 피조물로부터 발생하는 사건들을 담당 처리하여 본래의 계획과 목적대로 나아갈 수 있도록 지도하는 삼위 하나님의 계속적인 은혜 활동이다. 하나님의 섭리 사상은 하나님이 현상계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이신론이나 인간의 자유 선택을 무력화시키는 운명론 사상을 배격한다.
예수께서는 청년 시대에“창조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연구”에 힘썼다(치료, 366).
2. 섭리에는 두 국면이 있다.
(1) 보존, 보호하시는 섭리
하나님께서는 창조세계의 만물을 신적 능력으로 존속케 하고 보호, 관리하며 유지하신다. 즉, 그의 현존을 통하여 창조 세계를 계속하여 존재케 하며 유지하신다.
a.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붙드시고 서게 한다.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느 9:6)
“주는 사람과 짐승을 보호하시나이다”(시 36:6).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히 1:3)/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7).(참고: 행 17:28; 느 9:6).
“가장 작은 곤충으로부터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물은 날마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 하여 살고 있는 것이다”(화잇주석, 욥 26:7-10).
창조의 섭리
대학 1학년 자연과학 교수가 한번은 천문학자를 초청, 2시간 특강을 하였다. 특강의 결론은 하늘의 별들의 운행을 보면 그 누구도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천문학자 켈퍼 씨는 천체경을 통해 우주를 볼 때마다 그토록 많은 별들과 태양을 중심으로 정확한 궤도를 도는 별들, 그토록 빠른 속도로 돌면서도 창조 이래 한 번도 충돌 사고 없이 정확하게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동료 중에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태양을 중심으로 해서 여러 유성이 궤도를 따라 도는 태양계의 모형을 만들었다. 마침 그의 친구가 와서 그것을 보고 “야, 참 아름답게 잘 만들었는데, 이거 누가 만들었지?”라고 물었다. 켈퍼 씨는 “아무도 안 만들었어. 스스로 된 거야.”라고 했더니, 그는 켈퍼 씨를 바라보며 “무슨 농담을 하는 거야, 스스로 되다니, 누가 만들었어? 말 좀 해봐.”라고 하였다. 이때 켈퍼 씨는 말했다. “친구여, 하찮은 장난감도 스스로 되지 않거든 하물며 창조 이래 한 번도 충돌 없이 정확하게 도는 저 오묘한 천체들을 만드신 분을 모르겠나? 창조의 위대한 능력과 운행의 위대한 손을 믿지 못하는 자네를 위해서도 하나님은 사랑을 베풀고 계신다네.”
b. 하나님께서 매 순간마다 우리에게 호흡을 주신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행 17:28)./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시 104:29)./“신과 기운을 거두실진대 모든 혈기 있는 자가 일체로 망하고 사람도 진토로 돌아가리라”(욥 34:14-15).
“모든 호흡과 심장의 고동은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행 17:28)는 그분의 편만한 돌보심의 증거이다. 지구가 해마다 그의 소산물을 내며, 태양 주위를 계속 공전하는 것은 고유의 힘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의 손이 유성들을 인도하시고 우주 전역에 걸쳐서 그것들이 제자리를 지키며 질서 정연하게 운행하도록 하신다. ”(부조, 115)
c.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이 유지될 수 있는 근거를 주신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7).
d. 자기 백성을 보호, 보존하신다. 양식이 부족한 이스라엘 족속을 애굽으로 인도하셨고, 만나를 내리셨으며, 산파들을 통하여 모세의 생명을 보존하셨다. 홍해 위기에서 보존 구출하셨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용광로에서 보호하셨다.
(2) 통치하시는 섭리
하나님께서 세우신 목적과 계획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다스린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의지(도덕적 의지 및 비밀한 의지)대로 자연계와 인간세계 그리고 정치세계 다스리신다.
a. 천연 현상을 지배하신다(시 135:5-7). 엘리야 시대 3년 6개월 비가 오지 않도록 천연계를 지배하셨고, 갈릴리 폭풍을 제어하셨다.
b. 인간의 통치와 국가의 운명을 지배하신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행 17:26).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 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 냐 할 자가 없도다”(단 4:35).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시 103:19).
하나님의 섭리의 때가 다가오는데 세상 나라 왕이
“무릇 하늘의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하늘의 하나님의 명하신 것은 삼가 행하라 어찌하여 진노가 왕과 왕자의 나라에 임하게 하랴”(스 7:23).
아닥사스다 I세 7년 직전에 나라가 곤경에 처하였다. 즉, “진노가…나라에” 있었다. BC 463년경에는 애굽이 바사에 반역하여 봉기하였고 이듬해에는 아덴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바사인들을 애굽에서 완전히 몰아냈다. 459년 말에는 아덴의 군대를 강제로 철수시키려고 했으나 무위로 끝났다. 458년에 아닥사스다는 반역한 나라를 회복시키려고 결심했다. 이 때 평소 율법학사 겸 제사장 에스라의 고매한 인품에 감명을 받은 왕은 에스라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여야 한다는 자문을 존중하여 나라의 재난을 극복하는 대책의 일환으로 유대 귀환 여행단이 예루살렘으로 가도록 허가해 주었다. 그리하여 70이레의 예언기간을 이루는 일에 일조를 하므로 나라의 재난을 극복한 것이다.
c. 인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관장 지배하신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잠 16:1).
엘렌 화잇은 베틀크릭의 화재 사건을 두고 “파괴적인 화재에 나타난 주님의 분명한 섭리의 증거”(8증언, 218)라고 하였다. 신자들이 교육기관, 의료기관, 출판기관 등이 설립되어 있는 베틀크릭으로 모여들면서 여러 가지 문제가 유발되고 선교적 사명이 미약해져 가는 시점에 화제사건이 발발한 것은 마치“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는 것(신 32:11)과 같은 섭리가 잠재되어 있었다.
이런 보존과 통치의 섭리는 이교도가 살고 있는 물질세계까지라도 하나님께서 은혜스럽게 관장하며 돌보고 계시며 축복의 원천이 된다는 점을 들어내신다. 또한 그것은 세상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고자 활동하는 자기 종들을 보호하시는 사인을 보여주시므로 최고의 존재인 하나님의 존재와 주권적 지배를 각인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화해적, 선교적 기능을 한다(참고 행 14:17; 17:22-30; 롬 1:18-23).
III. 복음적 신인 협력
A. 하나님의 주도와 개입 및 인간의 선택
a. 하나님께서는 피조물과 인간들이 생명을 유지하며 고유의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 동시에 인간 편에서도 은혜의 역사에 협동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주권성과 인간의 자유성은 상호 대립 개념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성은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으며 인간의 자유 또한 하나님의 주권성을 제한하지 않는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고전 12:6).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께서 인간편의 자유의지를 무시한 일방적인 개입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의 개입 활동과 인간 편의 선택과 결심이 합력하여 이루어지는 합작품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약속을 성취하여 나가시지만 인간은 그 분의 뜻을 분별하면서 순종하여 나가야 한다. 인간이 불순종하여 죄악과 반역의 길을 걸으면 거룩한 섭리의 인도를 떠나는 결과를 초래한다.
룻이 보아스와 결혼한 사건은 장차 다윗왕을 탄생 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섭리가 주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혼인 배경에는 룻의 순종하는 믿음의 결단, 보아스의 선대와 용의주도함, 나오미의 주선이라는 인간의 협력이 포함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아브라함이 시험을 당하였던 것처럼 시험을 당한다. 그들이 하늘로부터 직접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는 않으나, 그분은 당신의 말씀의 교훈과 섭리의 사건들을 통해 그들을 부르신다. 그들은 극기와 고난과 희생의 길인 것처럼만 보이는 길로 들어가기 위하여, 부귀와 공명을 보장하는 직업을 버리며 마음에 맞는 유리한 공동생활을 떠나고 친족과 작별하라는 요구를 받을지도 모른다”(부조, 126).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섭리로써 인간들에 의해서 사업이 이루어지도록 한 방도를 마련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각 사람은 자기의 직무를 따라 현재 해야 할 자기 의무를 행하며, 하나님께서 자기의 지도자이심을 늘 생각할 것이다(복음 488)”(화잇주석, 겔 10:1-22).
b. 하나님께서는 인간 세계의 악을 선으로 바꾸어 나가시기도 한다.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에도 하나님께서는 그 의도하시는 바를 이루어 나가신다. 악의 세력에 의하여 집행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의 순간에 하나님의 새로운 구속사가 완성되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 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이는 저희가 양식과 물로 이스라엘 자손을 영접지 아니하고 도리어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저주하게 하였음이라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그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셨다 하였는지라”(느 13:2).
피조물들은 자유롭게 죄를 범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허용하시므로 당신의 목적을 이루신다. 요셉이 억울한 고난의 길을 오래동안 강요당하였지만 믿음의 순종이라는 발걸음을 옮겨 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얽어맨 온 그 악을 선으로 바꾸셨다(창 50:2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렘 29:11).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II. 섭리의 두 축 - 기도와 말씀 연구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한 가지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 방법들은 흔히 다섯 개의 ‘C. S.’라고 부르는 성경을 통한 명령(Commanding Scripture), 성령의 통제(Controlling Sprit), 상식(Common Sence), 성도들의 조언(Counsel of the Saints), 상황적인 증거들(Circumstantial Signs)이다. 중요한 방법들이다. 그러나 이 중에서 성경연구와 기도가 기본적으로 선행되지 않는 상식, 조언, 상황적 증거, 심지어 성령의 지도까지도 위태롭다. 하나님 뜻을 추구하는 말씀연구와 기도가 중심이 되어서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야기
길을 잘못 알려주어 모자를 죽게 한 사람
오래 전 미국 동부에 혹심한 눈보라가 몰아쳤다. 기차는 제 속도를 내지 못한 채 거북이처럼 천천히 나갔다. 갓난아기를 안은 한 여인이 승차하여 지나가는 열차 차장에게 자기가 어느 역에서 내려야 하는데 초행길이니 그 역에 도착하면 알려 달라고 했다. 그녀는 자신이 내릴 역을 지나치지 않으려고 잔뜩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때 한 신사가 여인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여러 번 이 길을 이용하여 잘 압니다. 내가 내릴 역을 가르쳐 드리지요." 기차는 눈보라를 뚫고 서서히 달렸다. 그런데 기차가 눈보라 때문에 잠시 멈추어 섰다. 신사가 여인에게 말했다. "이곳에서 내리십시오." 여인은 신사에게 몇 번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갓난아기를 안고 기차에서 내렸다. 그런데 다음 역에서 차장이 와서 여기 있는 여인이 어디 갔느냐고 주변사람에게 물었다. 전에 멈춘 곳에서 내렸다고 하자 차장은 머리를 감싸안으며 울부짖었다. 그 친절한 신사도 머리를 감쌌다. 여인이 내려야 할 역은 바로 이곳이었다. 그 신사는 기차가 잠시 멈춘 줄도 모르고 여인에게 길을 잘못 가르쳐준 것이었다. 여인이 내린 철길 옆에는 '아기를 안은 여인'의 모습을 한 눈덩이로 발견됐다. 여인은 철길에서 아기를 안은 채 얼어 죽은 것이다. 사람에게 길을 잘못 알려주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비극적인가. 하물며 영혼을 잘못 인도한다면 어찌되겠는가? 선의의 친절한 조언이 얼마나 위태로운가.
탄자니아 누 떼의 이동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초원에서 수만 마리의 누 떼가 엄청난 양의 먼지바람과 땅이 흔들릴 정도의 굉음을 내며 달리는 광경은 장관이다. 이들은 매년 비가 오지 않는 건기에 새로운 풀을 찾아 1,600km나 되는 먼 거리를 떼지어 이동한다. 그런데 이 누 떼의 이동을 수년 간 지켜보던 한 동물학자는 안타까운 현상을 발견했다. 그것은 누 떼가 매번 지름길을 놔두고 멀고 험한 길을 달리느라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살아남지 못한 누들이 많이 발생하는 것이었다. 원인은 맨 앞에서 무리를 이끄는 누 때문인데 이들은 처음 들어선 길을 좀처럼 바꾸지 않는 습성이 있다고 한다. 이 습성 때문에 약하고 힘없는 다수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방법을 바꾸지 않는다는 이다.
인생 여정도 비슷하다. 잘못된 길을 택한 지도자들을 따라 위태로운 길인지도 모르고 계속 따라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섭리를 위 꼭지점으로 하는 삼각형의 아래 변 좌우의 두 꼭지점은 기도와 말씀연구이다. 기도와 말씀연구는 섭리의 양 날개와도 같다. 여기에서 성령의 안전한 지도가 있을 것이다.
A. 기도
작은 것까지도 기도하여야 한다.모든 것을 하나님이 섭리하시니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실 것이라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토정비결이나 당사주를 믿고 따르는 운명론자와 다를 것이 없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 27:1). 유치하게 성인-어린이(Adult-child)처럼 큰 소리 뻥뻥 치고 자신감 있게 살다가는 큰 코 다치기 쉽다. 구굴 신을 믿으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까?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한 것을 알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인간은 내일을 통제할 수 없다.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다. 하나님이 다음 날을 연장해 주어야 살 수 있다. 자기 신뢰, 자기 의존적인 삶은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것이 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매일 같이 악에서 구하시고 또한 일용할 양식까지 구하라고 하였지 않는 가! 우리 생명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 안에 있다. 아무리 야곱처럼 아등바등 몸부림치며 돌파구를 열려고 하여도 꼬이기만 한다. 그가 얍복강 여울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지난날의 잘못을 고하고 겸비하여져서 자기를 굴복하였던 그 기도의 체험을 할 때 섭리의 손길이 함께 한 것이다. 그래서 앞길이 열렸다.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을 뵈었다. 살기등등하여 죽이려고 400명의 부하들을 대리고 오던 에서의 마음을 바꾸어 놓으셨다(창 32-33장). 하나님께서 섭리의 손길을 펴실 수 있도록 기도하라. 이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우리의 뜻을 정렬시키는 일이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섭리의 길로 가는 방법이다.
야고보는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라고 하였다. 섭리의 믿음을 가진 이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섭리가 이뤄지도록 기도하여야 한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16:9).
기도는 자기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이 기도의 경험이 샇여진 것이 신앙생활이다.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서 그분은 그대가 고통 중에 드린 기도를 그대를 구원하고 당신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는 방향으로 응답하시고자 역사하셨다. 스스로를 모르기 때문에 그대는 그대에게 최선이 아닌 것을 구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대의 진실된 기도를 들으셨으나, 허락하신 축복은 그대의 기대와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다”(3증언, 416).
섭리가 고정 불변이라면 기도할 필요가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많은 경우에 당신의 뜻을 인간의 협력을 통하여 이루어 오셨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또한 구원의 조건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기 역할을 다하지 않을 경우 행동하지 않는다. 믿음이 결여된 나사렛 사람들에게 주요한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다.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6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막 6:5-6).
그러나 하인을 치유하기 위한 간절한 청원을 한 백부장(마 8:5-13)의 요청을 받고 가시던 길을 천천히 행보하신 것은 혈루증 앓던 여인(마 9:18-22)의 진실한 믿음의 간절한 소망을 미리 보시고 이루어 주시고자 하는 섭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것을 주실 것으로 믿고 기도하는 사람은 섭리와 조화되는 기도를 한다. 기도하느냐의 여부가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
“믿음을 가지고 일하며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라. 믿음으로 기도하라. 그러면, 그분의 오묘하신 섭리에서 대답을 얻게 될 것이다. 때로 그대가 성공할 수 없는 듯이 보일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과 소망과 용기를 가지고 노력하면서 일하고 믿으라. 그대가 최선을 다한 후에 주님의 신실하심을 주장하며 주님을 기다리라. 그리하면, 그분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이루실 것이다. 초조해 하며 근심스런 마음을 가질 것이 아니라 담대한 믿음과 흔들리지 않는 신뢰심을 가지고 기다리라(3보감 195).”(화잇주석, 시 27:14).
B. 말씀연구
인간이 하나님의 섭리를 다 알 수 있다면 그 섭리대로 살아가면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모든 섭리를 다 모른다. 여기에 그리스도인들의 고뇌가 있다.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미래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힘이 되고 및이 되며 길이 된다. 그리하여 섭리의 길을 따르게 한다.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기에 적합하게 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뜻을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세 가지 길이 있다. 어떻게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낯선 사람의 음성과 분별해서 알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가 그 음성을 거짓 목자의 음성과 구별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우리에게 나타내신다. 그분의 음성은 또한 그분의 섭리의 역사를 통하여 나타난다”(5증언, 512).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신비가 있고, 그 섭리 가운데도 신비가 있으며, 구속의 경륜에도 사람이 측량할 수 없는 신비들이 있다. 그러나 호기심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욕망과 무한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강한 욕망을 가진 유한한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계시된 뜻이 가리키시는 분명한 길을 따르기를 등한히 하고 창세 이후로 숨겨진 비밀을 엿보려고 한다. 인간은 이론을 내세우고, 참 믿음이 갖는 단순성을 잃고 자부심이 너무 강해져서 주께서 선포하신 것을 믿지 못하며 자신의 자부심을 가지고 스스로를 에워싸고 만다”(화잇주석, 수 6:2-5).
어둔 밤길 같은 세상에서 빛과 등불이 필요하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섭리의 지도를 받으려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뜻을 알아야 한다. 그 것은 하나님 말씀에 나와 있다. 인생 문제의 답은 말씀에 나와 있다. 말씀은 GPS가 되신 하나님 뜻을 밝혀준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사 40:8).
성경을 읽는 것은 Lectio Divina (거룩한 독서)가 된다. 하나님 말씀 묵상은 영성 훈련의 기본적인 길이 된다. 우리 눈으로 말씀을 보고, 입으로 읽으며, 몸으로 그 말씀을 살아가는 말씀이 육화되는 체험 없이는 무미건조한 독서에 불과하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oratorio(입으로 읽고)-meditatio(묵상)-tentatio(적용)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 119:9,11).
말씀을 묵상(黙想)하라.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 1:1-2). 여기서 “묵상”은 “hagah”이다. 이 “하가”의 뜻이 사 31:4에 나온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그 식물을 움키고 으르렁거릴(hagah, roar, growl) 때에 ”(사 31:4). 먹이를 보고 으르렁거리며 달려드는 모습이 곧 “하가”의 본 뜻이다. 하나님 말씀을 이렇게 굶주린 사자가 먹이를 먹고자 달려드는 자세로 읽으면 그 말씀이 나에게 힘을 주시고 나아갈 섭리의 방향으로 이끌 것이다.
성경에 대한 다음 상징적 표현들은 성경의 효험성을 잘 부각시키고 있다.
(1) Lamp -- 말씀은 빛을 비추고 있다(시 119:105). 말씀은 영적 조명, 이해, 및 지도의 원천이 된다. 자연인은 영적 어둠에 쌓여 있다. 말씀이 그 어둠을 몰아낸다.
(2) Hammer--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렘 23:29). 말씀에는 죄를 깨트리는 권능이 있다. 에베소에서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행 19:9-10).
(3) Sword -- 엡 6:17-18 인간의 심령을 해부하는 외과의사의 손에 들린 칼
어느 신학생이 교수에게 한 질문하였다. “성경 붙들고 다닌다고 인생이 변하나요?” 이에 교수가 대답하기를 “단순히 책을 붙들고 다니다고 해서는 안 변하지. 그 말씀이 자네를 붙들어야 자네가 변한다네.”
성경은 생명의 책이다. 여기에 타 종교의 경전과 차이점이 있다. 다음 성경절들은 성경의 생명을 변화시키는 권능과 효능에 관하여 진술하고 있다.“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하나님의 말씀이 내 혼과 관절과 골수를 쪼개야 한다.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1-17).
(4) Seed and milk --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씨는 하나님의 말씀”(눅 8:11)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씨가 된다.
또한 성경은 새로 탄생한 어린 새 생명을 키우는 젖이다.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C. 성령의 지도
섭리를 깨달을 수 있는 성령의 지도가 필요하다. 성령의 지도를 구하는 일에는 말씀과 기도가 수반 또는 선행되어야 한다. 말씀은 성령의 검이 되기 때문이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믿음의 기도와 신앙적인 해석이 필요한 소이가 여기에 있다. 인간의 협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비록 하나님의 섭리를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분이 합당히 여기사 우리에게 빛을 주실 때까지 인내와 겸비로써 기다려야 한다. 우리들은 하나님이 지우시지 않은 책임을 스스로 떠맡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화잇주석, 삼상 13:11).
“만일 우리가 이와 같은 때에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섭리의 의미하는 바를 분별할 수 있다면, 우리는 자신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려고 하고 우리의 발을 영원한 산보다 더 굳은 기초 위에 세우려고 노력하는 천사들을 볼 것이며, 새 신앙과 새 생애가 싹틀 것이다.”(화잇주석, 욥 6:8-10).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섭리로 되는 일을 통하여 또는 사람의 마음에 미치는 성령의 감화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사정과 환경 가운데서 또는 날마다 우리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변환(變換) 가운데서 그것을 깨달으려고 우리의 마음을 열기만 하면 귀중한 교훈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정로, 87).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이 인도하심―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그리고 이 성령은 현실적으로 참된 실제적인 인도자가 아닌가? 어떤 사람들은 성경의 하나님을 그대로 믿으면 마치 무슨 참람된 일이나 되는 것같이 생각한다. 그들은 주의 가르침을 받고자 기도하지만 하나님께서 맹세하신 말씀을 믿기를 두려워하고 우리가 지금껏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 왔다는 것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들이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기쁨으로 배우고자 하는 열심으로 겸손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나아가면서 왜 하나님께서 그분의 약속을 지키신다는 것을 의심해야 하는가? 한 순간도 그분을 의심해서는 안된다. 또 그로 인해 그분께 욕을 돌려서도 안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할 때에 우리의 할 일은 우리가 그분의 뜻을 행하면 우리는 그분의 인도를 받고 지도를 받으며 축복을 받으리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가르침을 잘못 해석하지나 않을까 하여 자신을 불신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까지도 하나의 기도 제목으로 삼고 그분을 믿으라. 온 힘을 다하여 여전히 주를 믿으라. 그리하면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사 그분의 계획과 섭리를 바르게 해석할 수 있게 하실 것이다(편지35, 1893).
영국이 낳은 청교도 신앙가 존 번연이 국왕의 명을 어긴 죄로 감옥에 갇혔던 일이 있었다. 어느 날 옥사장이 번연에게 윗사람 모르게 옥문을 열어주면서 집에 가서 가족들을 잠깐 만나고 오라고 하였다. 번연은 얼마쯤 가다가 되돌아 왔다. 옥사장이 왜 안 가고 왔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호의는 고마우나 성령이 인도하시는 길이 아니라서 돌아왔습니다." 그로부터 한 시간이 지난 후 국왕이 직접 감옥을 시찰하면서 존 번연을 확인하고 돌아갔다. 이때 옥사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동하셨기에 당신도 살고 나도 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마음에 들려오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시고 싶을 때 가셨다가 오시고 싶을 때 오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인생길에는 수많은 선택의 기로가 놓여 있다. 선택하고 결단을 내릴 때 결코 자기 고집이나 방법대로 하지 말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해야 한다. 양심에 속삭여 오는 이 것이 정로라고 하는 성령님의 음성들 듣고 따라 행동해야 한다.
III. 하나님의 섭리에는 기적이 포함되어 있다.
“인간의 극한은 하나님의 기회가 된다(But man's extremity is God's opportunity.)”(AA, 145). 전후 죄우가 막힌 절박한 상황에서 위에 계신 분이 길을 열어주시는 기적을 행하신다.
1. 섭리의 종류- 하나님의 섭리는 보편적 섭리와 특별 섭리와 가장 특별한 섭리로 구분되어 왔다. 보편적 섭리는 피조물 전체 세계에 일반적으로 해당되는 섭리이다. 특별섭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고난당하는 때에 나타나는 섭리이다. 가장 특별한 섭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기 백성을 위한 섭리이다. 특히 마지막 섭리에서 자연법칙을 초원한 기적을 일으켜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고 인도하신다.
인간이 태내에서 조성되어 탄생하는 일 그 자체도 기적으로 보인다. 하나의 정자가 5억분의 1 경쟁에서 난자를 만나 것은 참피온으로 탄생한 것을 말해준다. 그 많은 나머지 499,999,999 마리의 정자들이 다리 역할 내지 길을 놔주어, 즉, 다른 정자들 희생 위에 오늘 내가 된 한 정자가 난자를 만났다.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갈 1:15) 나를 부르셔서 할 일을 맡기셨다.
2. 기적의 정의
기적은 천연계나 역사자적 사건에서 초자연적인 개입 현상이다. 기적은 알려진 자연법칙적인 현상과는 맞지 않은 현상이다. 기적은 인과관계에 토대를 둔 자연과학적 사고의 범주를 넘어 초자연적 현상에 속한다. 물론 사람들은 아직 원인을 포착하지 못한 현상을 두고 기적으로 볼 수도 있다. 이 현상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일 뿐이다.
(2) NT의 기적의 분류 - ①천연계 기적, ② 치유 기적, ③ 역사적 기적, ④ 번성의 기적, ⑤ 파멸의 기적, ⑥ 역전의 기적, ⑦ 옛 창조의 기적, ⑧ 새 창조의 기적
3. 기적의 목적
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② 하나님의 동정과 연민을 표현하고자
③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권능과 목적의 징표를 나타내고자
④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의 발걸음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특히 지나간 여러 세기동안 기적 반대론자들이 넘쳐 났다. 18세기 이신론자들은 기적은 자연법칙에 어긋난다고 주장하였다. 19세기 성서비평주의자들은 기적을 믿지 않았다. 20세기 과학주의자들은 기적을 이성에 반한다고 하여 배척해 왔다. 20세기 심리치료자들은 기적을 반대한다. 20세기 Rudolf Bultmann 같은 부류는 신약성서의 비신화화론을 전개하면서 반대한다. 그러나 자연과학적 탐구를 넘어선 현상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인간이 자연계에 대하여 알고 있는 지식은 유한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헛된 철학과 거짓된 과학의 주장이 하나님의 섭리의 직접적인 개입에 관한 믿음을 파괴하려 하고 있으며, 이런 모든 현상들을 자연적인 것으로 돌려 버린다. 이것은 사단의 궤변이다. 그는 땅에서의 힘있는 표적과 기사들을 가지고 그의 권위를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의 특별한 증거들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사람들은 대기만자가 백성들 앞에서 자신을 이스라엘의 하나님보다 더 높이게 하는 길을 예비하고 있는 것이다.”(화잇주석, 삼상 6:19).
인간 이성으로 이해 못하는 고차원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다. 원인과 결과의 인과관계를 중심으로 사물을 인식하는 합리주의적 세계관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이적을 의심하고 더 나아가 배척하고 있지만, 모든 현상을 인과관계로만 풀 수 없는 불가사의한 초자연적인 영역과 일들이 많이 있다. 사실 이 세계와 인간 존재 그 자체는 과학적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대상이다. 더구나 창조주의 전능한 권능이 특별히 어떤 경우에 작동하는 일이 있다. 그런 것들을 두고 Hume처럼 소위 자연법칙에 어긋난다거나 인지가 발달하지 않은 지나간 날 인간들의 소박한 판단으로 보아 넘길 일은 아니다.
4. 기적의 신학적 의미
기적은 과거에도 그리고 개명한 현대에도 일어날 수 있다. 성경에는 기적에 관한 진술들이 많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세계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불가능한 영역이 없다. 인간에는 돌파하기 어려운 일들이 있다 그러나 창조주되시는 하나님께는 풀기 어려운 현상이나 일들이 없다. 기적은 바로 이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성경은 기적을 “이적(wonder)” 또는 “기사”라고도 표기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기적을 “표적(semeion)”이라는 용어로 표현하고 있다. 기적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적적인 성육신, 부활 없이는 오늘의 그리스도교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이적들은 하나님의 권능, 그의 영광과 사랑을 들어내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적은 자기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권능과 사랑의 현현이다.
복음서가 기록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에는 많은 이적들이 포함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그분의 기적은 그의 능력과 신성을 증거한다. 그의 기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그 초점이 있다. 사실상 예수님이야 말로 기적이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요 2:11).그리스도의 이적은 그의 신성과 메시야성을 나타내는 징표 역할을 하고 있다.
복음서의 이적들은 구속적이다. 구속은 병들고 죽음에 처한 생명을 회복하고 살리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적은 구속의 본질에 대한 선언이다.
이적은 악의 권세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이적을 행하신 일은 마귀를 추방하는 일이었다. 마귀에게는 그리스도의 이적이 성령의 권위를 드러내는 위협이 되었다(눅 11:20).
이적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왜 악을 용인하고 계신지를 보여주고 있다. 악의 지배를 허용하시므로 하나님께서는 구원하는 은혜의 현현을 준비하신 것이다(롬 5장).
이적은 사단이 악의 창시자임을 들어낸다(눅 13:16).
이적은 그리스도의 품성을 들어낸다. 이적은 단순히 그의 초자연적인 권능의 시현이나 자기의 보호를 위하여 하지 않으신 것이다(DA 149). 이적은 인간을 동정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결과이다(마 14:14).
이적은 그리스도의 반대자들의 본성을 들어낸다. 그들은 인류의 보호보다 자기의 이익에 더 관심을 지닌 자들이다.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의 목적은 먼저 개인적인 믿음의 필요성을 고취하는데 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29-31).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적은 하나님을 영화스럽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기적의 수혜자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신약성경에서 최대의 이적은 그리스도께서 사망으로부터 부활하신 사건이다. 이 이적이 없이는 초기교회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초기교회 시대에 사도들이 행한 기적들은 그들의 헌신과 사역의 신뢰성과 영향력을 증폭시켰다. 사람들은 그들의 기적을 하나님의 사역의 징표로 보았다.
“예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행 5:16).
그러나 사단도 기적의 방법을 통하여 일하여 왔다는 사실에 유의하여야 한다. 모세를 대결한 바로의 술사들은 그 표본이 된다. 종말시대에는 그러한 일들이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다.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계 16:14).
기적 그 자체를 모두 다 하나님의 사역의 징표로 볼 수 없다. 기적 중심으로만 판단하지 말고 다른 검증 방법을 통하여 확인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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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20)
“우리가 현위치에 이르기까지 한 걸음 한 걸음씩 전진하며 여행한 우리의 과거 역사를 회고해 볼 때 나는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말할 수 있다. 주님께서 행하신 역사를 바라볼 때 나는 경탄과 우리의 인도자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확신으로 충만해진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해오신 길과 우리의 과거 역사를 통하여 주신 그분의 가르침을 잊어버리는 것 외에는 미래를 위하여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다.”(자서, 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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