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신비를 너머(수정)
침묵의 신비를 너머
욥기는 악의 실존 앞에서 고통 받으며 왜를 절규하고 있는 인간, 그리고 그 단말마적 고통을 하나님의 정죄와 심판의 징벌로 풀이하면서 의인을 사정없이 몰고 가는 주변 인간들의 차가운 논리 사이클이 반복되고 있는 책이다. 이 책에는 악의 실존 앞에서 하나님을 옹호하는 神正論(theodicy)과 억울한 인간의 관점에서 자기를 옹호하는 人正論(anthropodicy)이라는 두 개의 음조가 交唱되고 있다. 그리고 이 인정론은 하늘 차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책머리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 회의에 사단도 참석하여 욥이 ‘하나님이 보호하여주어서 섬기느냐’ 아니면 그런 이기심 없이 ‘하나님을 사랑해서 섬기느냐’의 쟁점이 초점이 되어있다.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말씀하신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욥 1:8-11).
이 문제에 대한 입증을 위하여 그토록 무서운 온갖 고통을 당하여야 하는 경건한 의인이 그 샘플로 제시되고 있는 중에 인간 세계에서는 인간이 만든 철학, 신학, 도덕, 전승들의 온갖 잣대로 이를 풀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이다. 거룩하신 존재는 신비이며 은닉이다. 사람들은 그 신비 너머에 있는 의미를 찾는 일에 골몰한다. 그러나 고산준령의 높은 봉우리 위에는 침묵이 덮여 있다. 마음 너머에 침묵의 신비가 있고 그 침묵의 신비 너머에 하나님의 자비가 있다.
욥기 3-31장까지는 욥과 고통의 원인을 욥의 죄악에서 찾고자 하는 세 친구들, 즉, 철학적-신학적-신비주의자 엘리바스, 역사적-법률가적 전승주의자 빌닷, 그리고 도덕론적 교조주의자 소발과의 징벌 여부에 관련된 긴 논쟁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그 이후 엘리후가 등장하므로 지금까지 전개시켜온 두 음조의 교창에 대하여서 다른 또 하나의 음조인 고통 연단론을 끼워 넣고 있다. 지금까지 자기 시각에서 인정론을 거듭 주장하여 온 욥은 놀랍게도 이 제3의 음조에 대하여 어떤 응수도 하지 않으면서 듣기만하고 있다. 욥은 자기가 연단을 받고 있어 연금술사 하나님께서 자기를 정금같이 변모시킬 것이라고 이미 말한 바 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욥 23:10).
젊은 세대에 속한 엘리후는 세 연장자들의 변론 강화와 욥의 답변을 조용히 듣기만하고 기다려 왔다. 이 엘리후가 등장하여 연장자들을 향하여 시작하는 말을 살펴보면 그는 인내성 있게 그들의 토론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드디어 자기의 의견을 개진할 때가 다가왔을 때 그는 존경하는 어투까지 사용하고 있다(욥 32:4).
엘리후의 강화에 나오는 세 연장자들에 대한 반응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강화>
네 사람모두에게(32:6-9)
세 연장자들에게(32:10-14)
욥에게 (32:15-33:33)
<들째 강화>
세 연장자들에게(34:1-15)
욥에게 ((34:16-37)
<셋째 강화>
욥에게(36:1-37:1)
세 연장자들에게(37:2-13)
욥에게 (37:14-24)
엘리후가 네 강화에서 모두 욥의 말을 광범위하게 인용하고 있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강화>
33:9a “나는 깨끗하여” (비교, 6:10; 9:21; 10:7; 12:4; 16:17; 31:6)
33:9b “죄가 없고 ”(비교, 13:23; 23:11), 33:9c “허물이 없으며 불의도 없거 늘”(비교, 9:20-21; 10:7; 27:6)
33:10 “하나님이 나를 칠 틈을 찾으시며 나를 대적으로 여기사”(비교, 10:6; 13:24; 19:11)
33:11 “내 발을 착고에 채우시고 나의 모든 길을 감시하신다 하였느니라”(비 교, 13:27; 7:17-20; 10:14; 13:27)
<둘째 강화>
34:5 “내가 의로우나 하나님이 내 의를 제하셨고”(비교, 9:15,20; 27:6; 19:6-7; 27:2)
34:6 “내가 정직하나 ...나는 허물이 없으나 내 상처가 낫지 못하게 되었노라” (비교, 10:7; 31장; 6:4; 16:13)
34:9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나 무익하다 하는구나”(비교, 21:15)
<셋째 강화>
35:2 “네가 하나님보다 의롭다 하여”(비교, 13:18; 23:7)
35:3 “유익이 무엇인고 범죄한 것보다 내게 이익이 무엇인고 하는구나”(비교, 21:5)
<넷째 강화>
36:23 “주께서 불의를 행하셨나이다”(비교, 19:6-7)
특히 엘리후는 욥의 세 친구들이 쏟아낸 풀이들에 대하여 낱낱이 따지려 하지 않고 한 마디로 지혜를 지녔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들의 응답이 정곡을 찌르지 못하고 있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32:3, 12-14). 물론 그 역시 욥이 자기변호에서 자기의 의를 주장한다고 지적하고 있으며(욥 32:2), 얼음장처럼 차가운 논리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34:34-37) 그리고 하나님의 의로우신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침묵을 일일이 따지지 말고 수용하라는 권고가 깔려 있다(34:29).
엘리후는 욥의 세 친구들의 변론에도 동조하지 않으면서 욥이 지나치게 자기 주장에 집착하는 것을 제어한다. 엘리후는 다른 3친구들의 정죄논리에 동조하지 않으면서 욥이 당하는 고난은 개인적인 죄에 대한 심판의 징벌이 아닌 하나님의 연단을 받고 있다는 제3의 논리 음조를 전개하여 나간다(33:30; 35:10-11).
지금까지 정죄와 심판의 주장들을 펼쳐 온 친구들에게 반론을 제기하였던 것과는 달리 욥이 엘리후의 주장을 묵묵히 듣고만 있고 가타부타 어떤 대꾸도 제기하지 않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욥은 잠시 변론을 멈추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허락하신 고난의 목적을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준비기간이 흐른 다음에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다.
엘리후의 강화의 핵심은 아마도 33:24에 나오는 “내가 대속물(koper)로 얻었다”(33:24)고 하는 주장에 함축된 것으로 보인다. 엘리후는 욥이 고백한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19:25)라고 한 신앙의 빛을 더 밝은 빛의 조명 속으로 인도하고 있는 셈이다. 욥은 여기에서 자기의 대속자의 대리적 고난을 터득할 길이 열리고, 그 분의 신비한 고난의 은혜를 궁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해시키기 위하여 대리적 고난과 징계를 받을 대속자의 빛(고후 5:20-21 참고)을 자기 고통에 오버랩하므로 욥은 회개와 인내의 길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의 은혜로 나갈 새 빛이 더 영롱해져가는 체험을 하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난의 이유나 목적에 관하여 욥이 토한 탄식과 자기의 정당성 주장과 3친구들의 여러 각도에서의 질타성 변박들을 다 듣게 한 후에 새로운 장르가 펼쳐진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의 침묵을 깨시고 개입하시어 제38장에서 말씀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욥의 3 친구들을 질책하셨다. 그러나 이 질책 속에는 엘리후를 끼워 넣지 않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엘리후의 변론 기사를 후대에 덧 부친 것이라고 하는 추측성 주장도 하고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의 관심사는 하나님께서 엘리후의 강화 음조를 두고 왜 아무런 언급을 하고 있지 않느냐에 있다. “하나님 곧 사람으로 밤중에 노래하게 하시는 교육”(35:11)과 대속물 사상이라고 한 놀라운 통찰까지도 제시하고 있는 엘리후의 논리에 하나님께서도 놀라워하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욥기에 함축된 또 하나의 신비한 사건은 왜 하나님께서 그토록 긴 시간동안 말씀하시는 일을 참고 계시었느냐 하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오래 기다리시고 난 후에 나서서 말씀하신 일에는 어떤 목적과 섭리가 들어 있다. 이 시점에 이르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이유가 무엇이던지 간에 오래 침묵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다가 제 38-39장에서 하나님이 나서신 것은 반어적으로 욥의 친구들처럼 인간은 말을 많이 한다는 점이다. 인간 사회에서 오고가는 그토록 수많은 논리와 주장들 속에 하나님께서 파묻히셔야 할까? 제 각기 차원 깊은 수사학적 강화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는 말을 쏟아 놓지만 그 어느 것 하나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쏟아낸 강화의 분량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 분량과 비교하면 그 몇 배가 된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시자, 욥은 자기의 개인적인 고통으로부터 눈을 돌려 하나님의 위대함과 그 분의 심오한 경륜으로 향한다. 일련의 메타포적, 수사학적 질문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엘리후의 변론을 중단시키고 욥에게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욥 38:2)고 하신다. 이 물음을 욥에게 적용시키면 “내 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게 말하지 않았다고 하신 말씀(42:7)과 모순되어 보인다. 그러나 아무리 경건한 의인일지라도 하나님의 하시는 이치를 다 터득할 수 있을까? 인간 사회를 뒤덮고 있는 구름 너머의 찬란한, 그리고 신비한 세계를 다 알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변박하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과 변론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두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하지도 아니하겠고 대답지도 아니하겠나이다”(욥 40:2-5). 인간은 말을 멈추고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들어야 한다.
욥은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 42:3)고 고백한다. 그리고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6)라고 한다. 세 친구들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과 뜻을 왜곡시켰다. 엘리후는 하나님의 섭리의 오묘성(33:13-18), 자비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像(33:24-30)을 펼치고. 성도의 고난 현상을 징벌론적으로 풀지 말고 하나님의 연단으로 풀어나가야 한다(33:29-30)는 음조를 높이며 천연현상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36:1-37:18)를 지적하고 있다. 그가 다른 친구들보다 훨씬 더 욥의 상황에 대한 평가를 하늘의 뜻에 근접시키고 있어 하나님께서는 그의 불완전한 음조를 보강, 완전케 하시고자 오랜 침묵을 멈추신 것이다. 제4의 음조인 하늘의 음조 속에는 잘못된 판단을 해 온 친구들을 위하여 번제를 드리는 자비의 음조가 들어 있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오랜 침묵을 그치시고 하늘의 인정론 근저에 놓인 자비와 사랑의 완성방향으로 향하게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욥기는 고난의 네 가지 음조가 교창이 되고 있는 콘서트처럼 비쳐지기도 한다. 그러나 마치 4중주 같은 이 콘서트 교창을 리드하는 주된 음조는 하늘의 인정론 음조일 것이다. 욥기에 인정론과 신정론의 완전한 조화가 넘실거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자비의 구원을 준비하고 계신 하나님의 침묵은 침묵이 아니다. 그 분의 침묵 속에 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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