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독스

예수 그리스도 : 2015. 8. 28. 06:15

패러독스

이 세상에나 그리스도교의 진리에는 역설적 진리가 많다. 역설(paradox)이란 그리스 단어 ‘paradoxos’에서 온 말로 para(여격과 함께 ‘~곁에,’ 목적격과 함께 나란히’)dokein(‘~으로 보인다,’ ‘생각하다,’ 의견)의 합성어로 곁에 나란히 있는 사상이나 의견을 함축하고 있다. 그 표현 구조상으로나 상식적으로는 두 가지의 반대되거나 모순되어 보이는 것이 들어 있지만, 그 표현 내용상으로 진실성이나 가능성을 담고 있는 표현이다. 역설은 인간의 이성과 상식으로부터 벗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진리인 의견이나 주장을 담고 있다. Walter Bauer의 신약성경의 헬라어-영어 사전은 paradoxos을 두고 모순되는 의견이나 기대,’ ‘놀라운,’ ‘이상한으로 풀고 있으며 ‘paradoxa’중성 복수 표현을 놀라운 일들로 정의를 내리고 있다(2p 615). 성경적 사상에는 이런 놀라운 일들은 인간의 지성이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기묘한 일들이 많이 나온다.

인간 생존세계의 역설

먼저 세상에는 이른바 역설적인 현상들이 많다. 예컨대, ‘풍요 속의 빈곤을 들 수 있다. 먹을 것, 입을 것, 살 집들이 많이 있는데도 굶주리는 자, 헐벗은 자, 집 없는 자들이 많다는 것은 인간 사회의 또 하난의 패러독스이다.

엘렌 화잇은 6T 274-276에서 이런 역설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섭리로서 지구에 넉넉히 주시고 삶의 편리를 위하여 창고를 채워 주셨는데도 결핍과 비참함은 어디에나 있다. 너그러운 섭리의 하나님이 사람들의 손에 모든 사람의 필요를 공급할 풍성한 것을 두셨는데 하나님의 청지기들은 충성되지 않다. 그리스도교계에서 굶는 자를 먹이고 벗은 자를 입히는 일에 사용되어야 할 많은 것이 값비싼 과시를 위해 소비된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입은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이기적 쾌락과 식욕의 만족과 강한 술과 기름진 음식과 호화로운 주택과 가구와 의상을 위해 돈을 쓰는 한편 고통당하는 인류를 위해서는 동정의 한 눈빛이나 말 한마디도 거의 주지 않는다....”

성경에 나오는 몇 가지 역설들

1. 섬기는 삶

세상에는 통용되는 하나의 법칙이 있다. , 생존경쟁의 사회 속에서 '강자만이 살아남는다'고 하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고 있다. 다른 사람을 부리고, 지배하며 다스리는 것을 최고로 치고 있는 것은 인간 사회의 비정이다. 여기서는 사람들이 권력과 재물, 지위와 학식을 잡으려고 안달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세상 방식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것이다.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9:35). 첫째가 되고 싶다면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매우 역설적이다. 그러나 섬기는 삶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이요, 예수 닮은 제자로 빗어지는 길임을 부인할 수 없다. 예수님은 종의 길, 섬김의 길을 걸으시면서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하여 대속제물로 주셨기 때문이다. 종이 될 때 으뜸이 된다는 역설은 기묘한 하늘의 진리를 선포하는 역설이다.

2.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고후 6:10)

고후 6:4-10에는 바울의 신체적 곤경과 재산상황 10가지, 도덕적 상황 4가지, 종교적, 영적 상황 4가지가 나온다. 배척 당하기도 하고 인정 받는 이중적인 교차도 나온다. 그리고 외적 모습과 내적 모습의 상치가 “~같으나 ~이다라는 문학적 어구에 잘 나타나 있다. 무엇 같아 보이나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이 당한 겉으로 보이는 사실은 진실과는 다르다. 형식과 내용이 다르다. 실상(fact)과 진실을 바로 알아야 한다. 사실이라는 외형 내면에 다른 진실이 들어 있다는 점을 이해하여야 한다. 중요한 것은 내면적인 진실이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 같은 사실로 판단한다. 그러나 사실이 전부라는 인식, 즉 착각을 벗어나야 한다. 진실을 찾아 가져야 한다. 외형적으로 보면 내 놓을 것이 없는데도 진실은 모든 것을 가진 자, 삶의 비결을 지닌 자이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자이다.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는 앞의 여러 진술들을 한 마디로 요약 결론을 내린 말씀이다. 바울은 혈혈단신이었으며, 천막 만드는 일과 여기 저기 있는 신앙동지의 도움으로 살아가, 가난하였지만, 영생의 복음 지식에는 모든 것을 가진 자였다. 마찬가지로 신자는 하나님이 주신 Master key를 가진 사람이다.

3.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7-10).

바울은 자기의 약함을 고린도후서에서 여러 번 자랑하였다(11:30; 12:5). 세상에서 살아가자면 강해야 한다. 사람들은 자기 약점을 감추기 원한다. 그런데 바울은 능욕 받는 일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함을 기뻐하고 자랑한다.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은혜와 은사를 경험했지만, 육체의 가시가 하나 있었다. 하늘나라 삼 층천까지 가볼 정도로 신비한 경험을 한 바울이었지만, 육체의 가시, 그것이 안질이든 간질이든 간에 그것 때문에 몸과 마음이 아주 힘들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수차례에 걸쳐서 자신의 질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No!”의 응답을 주셨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8,9).

육체의 가시를 자랑하는 이유는 자신이 약한 그 때가 하나님의 강하심이 드러나는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확실하게 역설적 진리이다. 마음과 몸이 약해졌는데, 어떻게 강할 수 있는가? 고난이 닥치고 박해가 닥치고 궁핍한데 어떻게 강할 수 있겠는가? 바울이 기도할 때마다 ‘yes’로 응답 받고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을 겨우 얼마나 자기가 영적으로 교만하여 질 것을 깨닫고 약하기 때문에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더 의존하게 되니 약한 것을 자랑한다고 한 것이다. 이는 신앙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역설적 진리이다.

주님을 잘 믿으면 시련과 고통이 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너무 커서 영적으로 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고통이 주어졌다. 고통은 교만의 제어장치다. 이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도록 하나님께서는 영적 축복을 고통으로 위장하여 두신 것이다. 고통은 영적 성장을 위한 하나님의 수단이 되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뿐만 아니라 약한 것들모두를 놓고 의 응답 속에 서린 하나님의.섭리적인 의미를 보았다. 자기의 약점을 늘 생각게 하고 하늘을 향하여 무릎을 꿇게 하는 것 이것이 고통이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종으로 쓰시려고 이 고통을 주셨다고 생각하고 위로 받기 바란다. 시련의 한 복판에서 궁극적 축복을 바라보고 확고한 믿음으로 나가기 바란다. 죽는 그 날까지 이어질 육체의 가시를 축복으로 삼으라. 우등생, 학벌, 부귀, 권력, 명예, 반반한 얼굴--이런 것들이 교만의 요인이 되고 있다. 이로 인한 교만으로 자기도 괴롭고 남도 괴롭힌다.

 

역설적 기독론(paradoxical christology)

1. 성육신의 역설-중심적 역설

베일리(D.M. Baillie) 그리스도론<God Was in Christ>(1982)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의 신비한 결합이라는 것을 두고 그리스도의 비밀(Mysterium Christi)이라고 하면서 이 비밀을 역설(paradox)이라고 하는 논리로 풀고 있다여기서 이 비밀의(신비한) 역설의 요소를 배제한다면 성육신은 결코 존재할 수가 없다고 본다어떠한 인간의 언어로도 또는 어떠한 인간의 유한한 사상의 범주로도 하나님 이 밀 개념을 완전히 해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래 전 칼케돈 신조는 참으로 역설이 깔린 미로 같은 인상을 풍기는 어휘를 이용하여 신조의 틀에 넣고 있다. 그리스도교 2000년의 역사를 통하여 이 비밀을 풀고자 여러 가지 시도를 하여 왔다. 아래로부터 기독론과 위로부터의 기독론이 부침하여 온 것은 크게 보아 이런 시도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신비에 특히 민감했던 사람은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믿는다고 고백한 테르툴리아누스, 마르틴 루터. 키에르케고르 등이다. 어떤 의미에서 베일리의 역설적 기독론적 사고는 새롭거나 독창적인 것이 아니다기독론에 관한 교리가 역설적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교 초기부터  인식되어  사실이기 때문이다. 베일리가 기여한 점은 기독론적 성육신의 역설을 성경의 중심적인 패러독스로 보면서 그것을 기독론적 역설에만 국한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패러독스로 확장하여 설명하여가고 있는 점에 있다, 성육신의 역설이라는 원천과 다른 역설들의 유기적 연계관계를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창조의 역설

베일리는 만물이 로부터 창조(creatio ex nihilo) 되었다는 것을 창조의 역설로 보고 설명하고 있다.. 과학은 창조를 다 설명할 수 없다. 하나님의 창조를 역설로 보는 이유는 무로부터 창조된다는 것이 인간이 경험하는 과학적 세계와는 모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에서는 만물이 기존하는 선행물질로부터 유출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제한된 인간의 지성의 한계성 때문에 경험의 담을 뛰어 넘을 수 없어서 진화론 등 온갖 추리들이 등장하여 왔다. 그러나 하나도 없는 없음에서 삼라만상이, 온 우주가, 생명이, 인간이 창조된 것이다. 원인이 될 수 없는데서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는 논리로, 이성으로 수긍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에서 물질계 즉, 이 나왔다고 하면 불교도의 空卽是色, 色卽是空 사상은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한 역설을 희미하게 나마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이 성육신의 역설을 통하여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역설을 풀어가는 일은 소망스럽다..

3. 섭리의 역설

 역설은 인간 삶의 모든 사건들이 경험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원인과 결과로 짜여 지는 것, 즉 일차적 작인과 이차적 작인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성경학도들은 자연법칙과 인간들의 행동으로 일어나는 수평적 현상들을 하나님의 섭리적 의도 아래 진행되어 가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세계에는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악한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어 성경학도들에게는 이 현상이 역설적이 아닐 수 없다. 나를 해치는 일들이나 사회에 만연되고 있는 악의 현상을 보고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시키거나 범신론을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만물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너한 일이 되도록 협력하게 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에게 임하게 하는 패러독스로 파악해 가면 수많은 어려움들이 풀려가게 마련이다. 인간 죄인들이 예수를 정죄하고 십자가에 매단 추악한 사건을 하나님의 섭리로 보면 가장 선한 일이 된다. 성육신의 패러독스가 기반이 되어 섭리의 역설을 풀어가는 열쇠로 삼는 일이 소망스러운 것이다.

은혜의 역설

 역설은 우리가 행하는 모든 선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이지 우리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는 그리스도인의 확신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얻은 모든 미덕, 우리가 얻은 모든 승리, 또 모든 거룩한 생각이 오직 주님의 것이라”(p. 115). 바울의 다음 고백은 이 신앙적 은혜의 역설을 요약적으로 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베일리는 "내가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 한 진술을 중심으로 하여 이렇게 제안하고 있다. " 은혜의 역설은 우리들의 어떤 다른 경험보다 성육신의 신비 자체에 이르는 더 좋은 방법을 제시하여 주며 길을 밝혀주고 있다. 또한 우리들 자신의 그리스도인의  속에 단편적형태로 나타나는  은혜의 역설은 우리의 그리스도인 전체적 삶이 의존하고 있는 성육신에서이루어진 하나님과 인간과의 완전한 연합을 반영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완전한 연합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단서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만일 사람들이 잠간이라도 이 성육신의 사람을 통하여 그와 하나님과의 긴밀한 연합 속으로 들어가서 단편적으로나마 은혜의 패러독스를 직접 경험하고 나서어쩔 수 없이 그것은 내가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 말하게 된다면 이것이야 말로 패러독스가 극치를 이루고 있는 완전한 삶을 이해하는데 단서가 되지 않을까?"(p. 117).

베일리의 제안은 성육신 자체의 비밀 역설을 선명하게 증명하거나 밝히는데 있지 않다. 성육신 신비의 역설을 그리스도의 은혜의 역설을 통하여 믿음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기여를 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 완전한 신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성육신의 역설을 꼭 같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시켜 또 다른 성육신한 인간이 되라고 한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모델을 북극성 삼아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모셔서 그리스도와 연합을 지향케 하는데 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셨던(고후 5:19) 것처럼 하나님은 성도들 안에서 행하시기 원하신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2:13)라고 권고하는 바울의 의도가 그리스도의 성육신적 역설의 적용일 것이다. 우리는 양자로 삼아주는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지만 우리는 본래부터 하나님의 아들 되신 분을 통해  은혜를 받는다( 1:12).  우리는 은혜의 수령자이고 그는 은혜의 제공자 또는 중재자이다( 1:17).우리의 삶은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는 순례자의 여정과 같다. 자기에게 밀려오는 상황은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로 차 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 삶의 문제들이 그리스도의 은혜의 권능으로 섭리적으로 해결되어간다. 없는 것에서 있음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파라독스는 나를 구원하시고자 성육신의 은혜의 파라독스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고 계신다.

 

우리에게 영광과 욕됨이 따르고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이 동시에 부쳐질 수 있는 역설 가운대에 살고 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한량없는 은혜로 우리를 채우셔서 이를 극복하여 가게 하신다.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어야 하고 무명한 자 같으나 하나님의 유명한 자로 살아가야 한다. 죽는 자 같으나 우리는 살아야 한다. 징계를 받는 자 같 문제가 우리에게 있지만 거기 빠져 죽임을 당해서는 안된다. 근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우리는 항상 기뻐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 살아 갈 수 있도록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아가야 한다.

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