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적 은사의 종말론적 현현
예언적 은사의 종말론적 현현
I. 서론
성경은 예언적 은사의 결정체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언적 은사를 예언자에게 주셔서 자기의 뜻을 선포하고 자기 백성을 지도하여 오셨다. 하나님께서 계시와 영감을 통하여 자기의 뜻을 선포하시고 자기 백성을 지도하시는 일이 정경시대에만 국한되는지 아니면 정경 완성 이후의 시대에도 계속되느냐 하는 문제는 그리스도 교회의 해묵은 과제가 되어 왔다. 특히 하나님께서 종말론적 시대에 이 예언적 은사를 주시는지 여부는 신학적 사조에 따라 그 찬부를 달리 하고 있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예언적 은사의 지속론의 이론적 근거를 분석하고 특히 그 종말론적 현현의 가능성 여부에 대한 성서적 고찰을 하기로 한다.
인간의 삶에 수반된 절망과 비극 그리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은 미래를 투시할 수 있는 자들의 존재를 불러왔다. 그래서 인간 역사이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등장한 신접자, 귀신점쟁이 또는 거짓 예언자들이 수 없이 등장하여 많은 인간을 오도하여 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에게 자기의 뜻과 사상을 전하고자 참 예언자들을 불러 그들에게 예언적 은사를 주셨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다른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셨으나 그 중에서도 이 예언적 은사는 중추적인 것이 된다. 이 예언적 은사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장 전형적인 교통수단이 되어왔다. 이를 두고 아모스는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암 3:7) 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에게 이상과 꿈으로 말씀하셨다(민 12:6). 사가랴는 하나님께서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구주의 오심을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눅 1:70).
그러나 종말시대에 성령 운동의 결과로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유사 예언 운동의 대두와 더불어 이른바 차등 은사 계속론에서는 예언적 은사의 현현을 지나치게 신학적으로 이완시키고 있어 이에 관한 검토가 요구되고 있다. 이 요구에 대답하고 동시에 하나님께서 부르신 참된 예언적 선물의 종말론적 등장을 어떻게 확립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 답하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
II. 예언자(선지자) 개념
예언자를 가리키는 신․구약성경 용어들은 다음과 같다.
A. ה(rō’eh)
이는 “선견자”(삼상 9:9,11,18; 사 30:10) 즉, “보는 자(seer)”다. 이 어휘는 눈으로 보는 것을 가리키는 일상적인 동사 האָ에 그 어원을 두고 있다. 이 동사가 예언자에게 적용될 때에는 꿈이나 이상 중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보는 행위에 그 특징이 있다. 따라서 이 ה(rō’eh)는 하나님께서 예언자의 눈을 열어 정보가 되었던지 기별이 되었던지 간에 그가 이해하여 백성에게 전하는 자란 의미가 담겨있다.
B. ה(ḥōzeh)
마찬가지로 이는 구약성경에서 “선견자”(삼하 24:11; 암 7:12; 왕하 17:13)로 번역되고 있는 단어로 ה (rō’eh)보다 더 일반적인 용어다. “본다”는 동사 ה(ḥāzâ)에서 파생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용어 역시 보는 것에 그 특징이 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이상을 주신 경우 ה(rō’eh)와 ה (ḥōzeh)는 모두 하나님의 기별을 수용한다는 것에 그 강조점이 있다.
C. אי(nāƅȋ’)
“선지자” (삼상9:9)를 뜻하는 이 용어가 구약성경 전체에 지배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ה(rō’eh)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그 기본적인 뜻은 “권위 있는 대언자”에 있다. 이 용어의 초기 용례는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 입에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의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출 4:15, 16)에 나와 있다. 여기서 모세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하는 아론은 대언자로 곧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말하는 자다. 이 말씀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너는 네 형 아론에게 말하고 그는 바로에게 말하여 그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보내게 할찌니라”(출 7:1,2)에서 더 분명하게 나와 있다. 요컨대 아론은 모세를 위한 대변인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모세에게 주시고 모세는 그 말씀을 아론에게 전하며 아론은 그 기별을 바로에게 선언해야 했다. 이 점에서 선지자는 자기 생각을 말하는 자가 아니고 자기를 부르시고 선택하신 하나님의 사상과 기별을 위한 대변인이 된다.
D. προφηήτης (prophētēs)
이 말은 구약성경의 אי(nāƅȋ’)에 대한 LXX의 대응 번역이 되었다. 또한 신약성경에서 “선지자”를 이 어휘로 표기하였다. 오늘날 영어 prophet도 이 헬라어에서 파생되었다. προφητης는 “앞에(before)”, “위하여(for)”를 뜻하는 전치사 προ(pro)와 “말하다”란 동사 φημι(phēmi)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이 말은 전언자(前言者), 대언자(代言者), 예언자(豫言者)를, 또는 이 모두를 함축한 예언자(預言者)를 뜻한다.
일반적 의미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을 위한 대변인이다. 성경에서 참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영감을 받아 하나님을 위하여 선포하는 대변인이다. 이 점에서 nāƅȋ’/prophet에는 그 역할에 있어서 하나님의 대변인으로서 전달 측면이 강조되어 있다.
선지자는 최고의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영감을 받아서 말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 기별을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자며 그분의 뜻을 해석하는 자다. 그러나 직접 하나님께로부터 영감을 받지 아니할지라도 선지자 학교의 생도들처럼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하시는 일과 길을 가르치기 위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도 선지자로 불리었다. 이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총명이 있고 근면한 일단의 청년들”이고 “선지자들의 아들들”이었다. 선지자 학교 생도를 선지자로 부르는 경우는 거룩하신 분의 뜻을 가르치고 권고하는 교사로 부름 받은 의미에 국한된다. 그러나 이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선지자가 아니다.
하나님을 위한 대변자가 되는 예언자의 의미가 하나님을 위한 설교(preaching)개념으로 변질되기도 하였다고 보아 신약성경에서 이 예언 은사를 가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주석설교(expository preaching)로 관련시킨 주경가도 있다. Alfred Plummer가 고린도전서 13:2의 “예언”을 “영감적 설교”의 은사로 본 것은 이 광의적 의의에 집착하는 소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2-14장의 문맥에서 활동적으로 “예언하는 일”이 특출한 설교형태로 보인다 할지라도(고전 14:3) 그 설교가 하나님의 계시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이지 사람이 성령의 조명을 받는 정도의 은사를 받아 하나님을 위하여 설교하는 것으로 평가 절하할 것은 아닌 것이다. 이런 점에서 Wayne A. Grudem이 예언자란 어휘가 광의 내지 협의로 사용된 이상 그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본문의 배경이라고 보고 고린도전서 14장에서는 동 용어를 광의적, 일반적 의미로 이완된 형태로 사용되었다고 한 주장은 문제시된다. 그것은 동 예언이 계시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고전 14:26, 30).
Grudem은 고린도 교회에서 행하여진 예언을 광의적 예언이라는 전제하에 경전적 “예언”의 권위와 비 경전적 예언의 권위 사이에 등급(차등)이 있다고 한다. 후자인 비경전적 예언에는 인간적 요소가 들어있어 성령께서 예언자의 마음에 역사한 것을 예언자가 보도할 때에 경우에 따라서는 부분적으로는 과오가 잠재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예언 은사 등급론(차등론)은 비경전적 예언자 직분을 교사 직분 정도로 보는 시각에 토대를 두고 있다. 물론 이 시각에서는 교사 직분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회중을 위한 광의의 예언으로 희석시키는 것은 예언의 은사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오는 것을 받아 성령의 역사에 따라 선포하는 점, 예언 자체에 초자연적인 현상이 수반되는 점, 미래 일어날 일을 예고하는 일이 수반될 수도 있는 점, 예언자의 권고하고 가르치는 것은 일반적인 권고와 가르침의 영역에서 하는 것이 아닌 예언적 은사로 하는 일이라는 점에 비추어 볼 때에 조화되지 않는다. 따라서 예언적 은사가 광의의 개념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은 일방적 단정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신약성경은 말씀 봉사와 예언적 봉사 사이에 구별을 하고 있다. 즉 “교사”와 “선지자”를 구분하고 있다(엡 4:11; 고전 12:28)는 점도 유의해야 할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의 구원 주제에 관한 전도설교는 같은 선교 팀이기에 동종이거나 유사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권위로 말하고 있고(갈1:11,12), 같은 선교 팀이었던 바나바는 기록된 말씀의 권위를 가지고 말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요컨데 신약성경에서 “예언하는 일(prophēteuō)”이 설교의 영역에 관한 것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특별계시를 받고 하는 범주에 속한 것일 진데 그것은 예언자의 기능에 속한다(눅 1:25-38; 행 11:27, 28; 13:1; 15:32; 21:9 참조)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III. 신약성경상 예언적 은사의 역할
신약성경에서는 영적 선물 즉 은사(charismata)를 은혜의 선물로 보고 있다(고전 12:4; 엡 4:7-8). 성령께서 이 영적 선물을 각 교인들에게 주신 목적은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엡 4:12)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데”(엡 4:13)있다. “각각 은사(charisma)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charis)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봉사하라”(벧전 4:10). 이 예언적 은사를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 이 땅에서의 교회의 사업을 진전시키는 일을 위하여 사용해야 한다. 이처럼 신약성경은 이 성령의 계속적 선물이 성도를 온전케 하고 교회가 그 봉사의 일을 완수하도록 하기 위하여 주어진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성령의 선물에 관한 기본 목록에서 예언적 은사는 두 번째로 나열되어있다. 첫 번째가 사도들의 은사이고 그 다음이 예언자들의 은사이며 세 번째가 교사의 은사이다 (고전 12:28-30; 엡 4:11). 이 예언적 선물은 사도들의 역할을 배척하거나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기능은 일반적으로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교회 신도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베드로, 요한, 마태 등 사도들은 그 특수한 신분에 비추어 이 예언적 은사도 받은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사도와 예언자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구약성경 시대에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대변자가 되었고, 하나님의 목적을 들어냈으며(암 3:7) 통치자들을 지도하고 그들의 활동을 강화하였으며(사 36:2; 37:6,7) 백성들에게 충성하도록 격려하였고(수 24:20-23) 여러 가지 악행들을 저지 내지 대항하였으며(미 2:1-3; 말 3:8-10) 파멸과 건설이란 이중 책임 등을 수행하였다(렘 1:10). 신약성경 시대에 예언자의 활동도 구약성경 시대의 그것과 궤를 같이 한다. 그러나 탈 신정정치 시대인 신약성경 시대의 예언자의 활동이 당연히 선교 중심적이었고 교회 중심적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Frank B. Holbrook은 신약성경 시대의 예언적 은사를 받은 사람들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다고 본다.
(1) 다가오는 위기나 곤경을 미리 경고하는 일(행 11:27-30; 20:23; 21:10-14)
아가보가 천하에 흉년이 도래한다는 예언과 그 성취는 이방인 신자들이 기근 구호를 보냄으로 유대 그리스도인 신자들과의 사이에 끈끈한 형제애를 보여 주었다.
(2) 외국 선교활동 개시
이 예언적 은사로 안디옥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구별하여 선교여행을 위촉하였다(행 13:1,2). 성령께서는 바울의 선교지 방향을 유럽으로 돌리도록 하였다(행 16:6-10). 또 바울의 2차 선교여행에는 선지자 실라가 동행하였다(행 16:40; 15:22, 32).
(3) 교리적 위기에서 참 교리 확인
예루살렘 총회 시(행 15장) 유대주의적 의식이 이방인 개종과 구원의 요건이 되는지 여부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 총회는 성령의 지도에 조화되는 결정을 했고 선지자들(유다와 실라)은 이 결정을 여러 말로 형제들에게 권면하고 굳게 하였다(행 15:32).
(4) 교회를 세우고 권면하고 안위하는 일
예언하는 자는 신자들에게 말하며 교회의 영적 생활을 세우고 격려하고 안위하게 한다(고전 14:3).
(5) 교회를 참 믿음 가운데 연합케 하고 거짓 교리에서 보호하는 일
하나님께서 사도,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와 함께 예언자를 세우신 것은 성도를 온전케 하고 봉사의 일을 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며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일과 믿는 일에 하나가 되게 하고 교회를 그릇된 교훈에서 보호하는데 있다(엡 4:11-15).
(6) 사도들과 함께 교회의 기초를 놓는 일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스도 모퉁이 돌과 함께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졌다 (엡 2:20). 여기서 한 묶음으로 표기된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그리스도 교회의 기초로서의 구약시대의 선지자와 신약시대의 사도들을 지칭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두 어휘의 순서가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아닌 사도들과 선지자인 이상 여기 선지자들은 신약시대의 선지자로 보인다. 이런 시각은 후에 나오는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는 것 같이”(엡 3:5)의 용례에서도 확인된다.
IV. 예언적 은사의 계속성 여부에 대한 이론들
복음주의 내에 오늘날 예언적 은사의 지속성 여부에 대하여 상이한 견해가 대립되어 왔다. 신약성경에 제시된 영적 은사 모두가 오늘날 계속 될 수 없다는 중단론과 이를 반대하는 계속론 및 중도론이 있어 왔다.
A. 중단론(cessationism)
예언적 선물이란 특별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받은 메시지로 신약 정경 완성과 더불어서 성경의 충분성의 원리에 입각하여 예언적 선물이 중단되었다는 주장이다. 이 예언적 선물은 교회 건립과 형성 초기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사도와 예언자의 터 위에서 교회가 세워졌으므로 사도의 역할이 끝난 것처럼 예언자 역할도 종료되었다는 것이다. 은사 중단론자들은 고린도전서 13:8-13, 특히 13:10에 비추어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예언 은사도 폐하여 진다는 주장을 한다.
중단론은 예언이 이적성(miraculous nature)을 띈 선물이고 권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완벽하게 정확한 내용을 지녔으므로 그것이 과오의 개연성을 포함하거나 회중이 그것을 수용 또는 배척할만한 재량을 갖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즉 이와 같이 권위 있고 정확한 내용의 예언적 은사는 A.D. 1세기 말 사도시대의 종료와 함께 끝났다는 주장이다. 예언은사의 중단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상당수의 세대주의자들과 개혁신앙과 언약신학 노선에 서 있는 자들이다. 이 중단론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에 관하여는 예언적 은사의 계속에 관한 성경적 논거에서 더 성찰키로 한다.
B. 비중단론(noncessationism)
성경 어느 곳에서도 예언 은사들이 사도시대 까지 한시적으로 주어졌다고 한 기사가 나오고 있지 않다. 오히려 성경은 이 예언적 은사가 계속될 것은 여러 가지로 시사 내지 단언하고 있다. 먼저 “온전한 것이 올 때까지”(고전 13:10)란 표현이 함축하고 있듯이 이 은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시까지 지속된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오순절 때 베드로가 요엘 2:28-32를 인용하면서(행 2:16-21) 성령을 부어주심과 예언 은사 약속의 성취로 지적하였다. 요엘의 이 예언은 문맥자체가 오순절 당시와 마지막 때에 성령의 부어주심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동 은사의 지속성을 확실하게 하고 있다.
비중단론은 예언적 은사가 초기교회 이후에도 지속되어 왔다고 본다. 역사적으로 고대의 Montanus 운동, 20세기의 초엽 소위 “첫 번째 물결(the First Wave)”인 고전적 오순절주의(Classical Pentecostalism), 1970년대에 요원의 불길처럼 로마 카톨릭교회를 포함하여 범 교단적으로 번져간 소위 “두 번째 물결(the Second Wave)”인 은사 운동(Charismatic Movement) 및 1980년대 이후에 등장한 소위 “세 번째 물결(the Third Wave)” 또는 “표적과 이적 운동”으로 불리는 포도원 운동(Vineyard Movement) 등이 이 비중단론 내지 계속론의 입장에 서 왔다.
특히 오늘 이 시대에 예언적 은사제도의 당위성을 논증하는 출판물들이 전에 없이 그리스도 교계에 범람하고 있다. 그 중에 대표적인 몇 사람을 들면 다음과 같다.
a. John Wimber
빈야드 운동의 사실상의 창설자 및 협회장을 역임한 인물로 교회가 복음전도의 대사명의 진전과 완수하는데 신약성경에 진술된 모든 영적 은사들이 매 예배 때마다 구현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피력하고 있다. D. A. Carson의 “신약성경상의 표적들과 이적들의 목적(The Purpose of Signs and Wonders In the New Testament)”과 Ken L. Sarles의 글 “표적과 이적 운동의 평가”에 이 표적과 이적운동의 개관이 잘 나와 있다.
b. Wayne Grudem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의 교수를 역임한 Grudem은 신약성경과 오늘날 예언은사라는 저서에서 이 오늘날 예언은사 운동의 당위성과 아울러 신약성경 시대의 예언은사와의 차별성을 피력하고 있다.
c. Jack Deere
Dallas Theological Seminary교수를 역임한 Deere는 Vineyard운동의 성서적 이론을 구축한 학자다. 그는 그의 두 저술에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권능의 은사구현에 관한 논증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달라진 자기 확신을 전개하기도 했다.
d. The Kansas City Prophets
예언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오늘날 자기 백성을 위하여 말씀하시는 자연스럽고도 성서적인 수단이 될 뿐만 아니라, 마지막 때에 예언적 은사가 교회에 회복되는 것은 교회의 승리를 위한 징표가 된다고 주장한 무리들 즉, Kansas City Fellowship의 활동이 1980년대 후반이래 Missouri주 Kansas City에서 두드러졌다. 이들은 예언적 선물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예언 활동을 하였다.
위에서 열거한 사례 이외에도 예언 은사 지속이나 회복의 필요성 여부에 관한 관심이 기독교계 내에서 고조되어 왔다. 특히 Williams의 다음 진술에서 예언적 은사의 계속론에 관한 강한 확신을 엿볼 수 있다.
성령의 역동적 추진을 통하여 예언을 소생할 때까지 우리 중 많은 사람들 역시 예언이 신약성경과 함께 끝났다는 확신을 지녀왔다(신약성경상의 증거는 이와는 상반되지만). 이제는 우리가 얼마나 그토록 오랫동안 신약성경을 오독해 올 수 있는 것에 대해 놀라울 뿐이다.
그는 또한 신약성서 정경 완성 이후에도 “하나님께서 계속 말씀하신다”라고 확신에 찬 어조로 예언적 은사의 계속론을 주장하고 있다.
이 예언적 은사의 계속론에는 크게 두 가지 입장으로 구별된다. 그 하나는 동질적 계속론 이고 다른 하나는 차등적 계속론 (이중 예언 은사론)이다.
1. 동질적 계속론(The uniformitarianism)
초기 교회에 필요한 영적 선물은 오늘의 교회에도 필요하다. 따라서 성령께서 초기 교회에서 일하신 만큼 오늘의 교회에서도 일하신다. 복음전도의 대 사명(마 28:18-20) 완수에 무력한 이유는 이 초자연적인 성령의 선물을 등한히 한 탓이다. 급속하게 성장하는 교회마다 초자연적인 성령의 선물이 역동적으로 역사하고 있다는 점을 그 증거로 제시한다. 이런 입장에서 예언의 선물은 신약성경이 완성된 후에라도 또는 최후의 사도가 잠든 이후라도 중단되지 않고 같은 성질의 예언적 은사가 등장한다고 본다. 단지 영적 퇴락과 배도의 시대에서 뜸하게 나타날 뿐이다. Jack Deere는 영적 억압이 있는 시기에도 예언의 선물이 현현한 일이 있다고 주장한다. 혹자는 대 영적 각성 부흥과 그리스도의 재림의 박두한 때에 이 예언적 은사를 체험한다고 하고 또 다른 사람은 선물들이 진리의 회복 때문에 재등장한다고 주장한다.
2. 차등적 계속론 (이중 은사론)
이는 흔히 예언은사 차등론 또는 예언은사 등급론으로도 불리워진다. 이 주장은 계속론과 중단론의 사이에서 중도론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 이중 예언 은사론의 주장자는 사도적 예언은사와 비사도적 예언은사로 나누어 설명을 한다. 사도적 예언은사는 구약성경의 예언적 은사의 계승으로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하나님의 대변자격(mouthpiece)으로 그 예언적 말씀(“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은 무오하여 순종해야 되는 권위를 지녔으며 보편적인 적용이 가능하다. 이 말씀이 66권의 성경으로 되어있다. 이 사도적 예언은 사도들 시대에만 국한된다. 그리고 그 예언은 무오 하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비사도적 예언이 있다. 요엘 2:28이 오순절 때 성취된(행 2:17) 이후로는 사도 이외에 몸의 여러 지체들이 예언적 은사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예언적 선물은 유오하여 사도적 예언 은사와 동일한 권위를 보유하고 있지 못하다. 고린도 교회에서 남용되어 문제시 된 은사에는 방언 은사와 함께 이 예언적 은사도 포함되어 있다. 물론 이 비사도적 예언의 선물도 같은 진리의 하나님에게서 오지만 그 전달 과정상 원래의 무오한 계시를 보고함에 있어서 과오나 왜곡 현상이 수반된다. 이 견해의 전형적 대표자 격인 Wayne Grudem은 이 예언적 은사는 신자가 메시지를 몸(body)된 교회와 함께 나눌 때 이 은사가 나타나 주께서 자연적으로 생각나게 한다고 확신한다. 이 비사도적 예언 은사는 사도적 예언 은사만큼 권위를 보유하고 있지 못하다. 오히려 이 은사는 다른 사람의 가르침의 빛 가운데서 분변 되어야 한다. 이 비사도적 예언 은사의 목적은 어떤 활동을 하도록 격려하고 권고하는데 있다. 때를 따라 예고적(predictive)일수 있지만 그 예고가 안 맞을 수도 있다. 이 예언적 은사는 특정 신자의 사상, 이상이나 꿈을 통하여 또는 천사들의 내방을 통하여 올 수 있다. Grudem은 이 예언 은사의 초자연성을 격하시키나 이 초자연성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본다. 이 은사에 관한 대중적 인기가 있는 사례는 은사를 받은 자가 교회 내에는 누군가에 관한 “지식의 말씀”을 받은 경우다. 요컨대 Grudem의 이 같은 이해는 예언을 권위적, 최종적 예언과 비권위적 예언으로 구분하는데 그 요체가 있다. 이 비권위적 예언의 예로 고린도교회(고전 12-14장), 데살로니가교회(살전 5:19-21), 두로교회(행 21:4), 에베소교회(행19:6) 및 아가보 예언(행 11:28; 21:10-11)을 들고 있다. Grudem의 예언 은사 계속론은 다분히 빈야드 운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볼 수 있다. F. David Farnell은 Grudem의 입장을 계속론과 중단론의 중도 타협론으로 보았다. 후에 출간한 조직신학에서 Grudem은 자기의 입장을 중도노선으로 명시하였다.
3. 예언은사 등급론의 이론적 근거
Grudem의 예언 은사의 등급론의 이론적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성경의 권위성과 충분성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성경을 떠나 명제적 계시를 줄 수 없다. 종교개혁이래 일반적으로 신약성경 완성 후에는 하나님의 계시적 활동이 중단되었다고 보아 왔다. sola scriptura원칙에 따른다면 성경 66권만이 하나님 말씀으로 명각 되었으며 이 66권만이 절대적 권위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더 이상의 동질적 계시가 필요 없이 기존 성경으로 충분하다고 한다.
(2) 성령의 조명성 이해
신자와 그리스도의 관계는 신비적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을 성령의 조명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또 우리를 지도하신다. 성령의 이 조명 형태는 신자의 사상을 고취하기도 하거나 특정 인상을 꼴 지우기도 하고 확신을 부여하며 기타 지도를 하신다. 이 같은 조명 형태는 일반적으로 명제적, 축어적 형태를 띈 것이 아니고 개인적이어서 그 보편적 적용에는 한계가 있다고 본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있는 현상을 두고 단지 하나님께서 마음에 주신 생각 혹은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느낄 수 있는 방법으로 그 의식 속에 심어 주신 생각을 예언이라고 보고 있다. 구약성경의 예언자와 신약성경의 사도(=예언자)들의 계시 사건은 이러한 성령의 조명성을 초월하는 사건이다. 따라서 이 성령의 조명으로 오는 것은 절대적 권위를 갖지 못한다. 그러나 이 조명이 어떤 형태로 오는 경우에 기존 성경과 모순되지만 않으면 명제적 계시로도 올 수 있다.
(3) 체험으로부터의 논증
이 예언적 은사를 받은 사람이 예언 은사를 직접 체험한 것으로부터의 논증이다. 오늘날 이 같은 시각에서 은사를 받은 사람들에 관한 출판물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체험으로부터의 논증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4) 주석적 논증
이 논증은 신약성경 본문과 원어 분석에 토대를 두고 있다. Grudem은 사도들의 예언적 은사는 무오 하나 일반 신자들이 이 예언 은사를 행사하는 경우 유오하다는 입론을 전개하고 있다. 이 이중 구조의 예언 선물 논증을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a. “사도들과 선지자의 위”
“너희는(하나님의 권속)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엡 2:20). Grudem은 여기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선지자들인 사도들” 또는 “사도-선지자들”로 이해하여 전형적인 선지자와 구별한다. 신약의 사도는 구약의 예언자에 준 한다. 그는 에베소서 4:11의 “목사와 교사”도 “목사-교사”로 보는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여 동일한 대상을 두고 묘사한 결합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b. “선지자”의 개념의 다양성
신약성경에서 “선지자”란 말은 광범위한 의미를 띄고 있다. 이에 반하여 구약성경에서 “선지자”란 말은 구체적 명백성을 띄어 “초자연적 수단으로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를 전하는 사람”을 뜻한다. 이 때문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사도로 칭하고 선지자라고 하지 않았다. 신약성경에서 “외적 감화에 따라 말하는 자”또는 단순히 “대변인”이나 “전달자”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말은 신적 권위를 지닌 것이 아니었다.
c. 바울이 선지자의 제언에 불순종한 사건
성령의 감동을 받은 제자들이 두로에서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만류한 일이 있었으나 바울이 그 말에 따르지 않고 여행을 계속하였다(행 21:4-6). 바울이 가이사랴에 이르렀을 때 선지자 아가보가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성령의 말씀 즉 띠 임자가 이렇게 유대인들에게 결박당할 것이니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말을 거스려 굳이 예루살렘 여행을 계속한다 (행 21:11-14). Grudem은 선지자의 예언이 사소한 점(“유대인들이 띠 임자를 결박한다는 점”)에서 맞지 않은 것을 바울이 미리 알고 그 명을 거스리고 여행을 계속했다고 한다. 사소한 차이란 바울을 구속한 자들의 신원에 해당한다. 즉, 유대인이 결박한 것이 아니고 로마인이 결박할 것이란 점이다. 이는 신약성경 예언의 사소한 부정확성을 수반한 하나의 사례가 된다는 것이다.
d. 먼저 하던 이에게의 침묵 명령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이는 잠잠 하라”(고전 14:30)는 말씀에서 Grudem은 만일 구약성경 시대의 선지자이거나 신약성경 시대의 사도인 경우 그 계시-즉 사도 바울의 계시를 고린도교회에 등장한 예언적 은사를 받은 자가 감히 비견하거나 간섭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e. 다른 이들의 분변
예언하는 자가 둘이나 셋이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고전 14:29)라고 한 말씀을 두고 하나님 말씀의 계시는 분변할 대상이 아니라고 하며 예언에 등급이 있다는 근거로 본다. Grudem은 위 본문에서 “다른 이”를 교회(몸) 일반을 두고 한 언급이라고 본다. 교회일반 신도들의 분변(판단)은 영감 받은 것이지만 무오한 예언이 될 수 없다고 본다. 또한 그는 위 성경 절을 통하여 신약의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제시로 본다.
f.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니라”
구약성경상의 예언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니라”란 형식 어구로 도입되고 있다. Grudem은 비 사도적 예언에 같은 도입어구가 나타나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더구나 현대 예언자들이 예언할 때 “이는 주께로부터 온 말씀이라”는 말을 하지 않고 있다.
g. 좋은 예언과 좋지 않은 예언
바울이 데살로니가 신자들에게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살전 5:20, 21)고 한 말씀에서 예언의 권위가 성경과 비교하여 열등하다는 것과 좋은 것이 있다면 좋지 않은 것도 있다는 추론을 한다.
h. 예언의 불완전성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고전 13:9-10). Grudem은 “온전한 것이 올 때”를 “완전한 분이 오실 때”로 번역하고 이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예언적 은사는 그리스도의 재림 시까지 계속될 전망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완전할 뿐이다.
i. 가르침의 하위에 있는 예언
가르침은 성경에 대한 설명이나 적용 또는 사도들 교훈의 반복 내지 설명이어서 오늘날의 예언은 이 가르침의 하위에 있다.
4. 예언 은사 등급론의 문제점들
신구약 성경 그 자체는 예언적 은사의 소산물이다. 성경은 66권을 범주로 된 경전이다. 예수께서 구약성경을 모세의 율법과 모든 선지자들의 글과 시편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 것을 시사하고 있어(눅 24:44) 구약 정경 그 자체가 완성된 것임을 짐작케 한다.
히브리서 벽두에서는 계시의 전개를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1,2). 주전 15세기부터 모세가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하기 시작하여 1500여 년 간 하나님께서 그 기별을 위탁하셔서 적합한 선지자들을 불러 그들에게 계시를 주시고 그 내용을 기록하게 하셨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통하여 결정적인 계시를 주셨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최대의 종국적인 계시가 되신다(요 1:18참조). 신약성경은 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에 관한 영감 받은 사도들의 증거와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지상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에 관한 사도들의 해석이 하나님의 궁극적 계시를 제공하기 때문에 후에 다른 그 어떤 예언의 선물들도 이에 필적할 수 없는 것이다. 더 나아가 신약 정경 완성 후의 예언적 은사는 신약성경과 동급의 정경적 동등성을 갖거나 그것을 대체하거나 그에 추가적인 정경으로 될 수가 없다. 오히려 예언적 은사를 받았다고 한 주장들은 성경의 검증을 받아야 하게 되었다(살전 5:19-21; 요일 4:1-3; 마 7:15-20).
그러나 신약성서 경전 완성 이후의 예언적 은사에 수반된 계시나 영감의 질이 정경에 비하여 하급에 속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또는 경전 완성 이후의 예언적 은사의 기능이 정경 내의 예언적 은사의 그것과 차이가 있어 더 열등하다는 뜻도 아니다. 이는 신구약 성경시대에 정경 예언자와 비정경 예언자의 계시와 영감 및 역할 상 차이가 없었던 것에 비추어 보아 확인된다. 어떤 면에서는 나단과도 같은 비 정경 예언자가 예언적 은사를 받고 수많은 영감적 시를 쓴 다윗을(행 2:30) 책망한 사건이나(삼하 12장) 비 정경 예언자 엘리야의 예언자로서의 행적은 우상숭배와 부도덕의 먹구름 위에 찬란히 빛나는 거성 이였다.
Grudem의 예언 은사 등급론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이 각기 예언 은사를 활용할 수 있다고 이완시킨 점에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은사를 성령께서 “그 뜻대로 나눠” 주신다 (고전 12:11). 즉, 은사는 성령의 주도권 하에 있지 인간이 임의로 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성령께서는 다양한 은사(고전 12:4, 6) 중에 어떤 이에게는 사도로, 어떤 이에게는 선지자로, 어떤 이에게는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이에게는 목사와 교사로 주신다(엡 4:11). 여기서 바울은 선지자 개념을 일반화시키고 있지도 않다. 그래서 바울은 “다 선지자겠느냐?”(고전 12:29)고 부정적 답을 유도하는 수사학적 질문을 하고 있다. 따라서 “다 예언을 하면”(고전 14:24) 이나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고전 14:31)란 말씀은 예언의 은사를 이미 받은 사람들에 관한 일이지 모든 그리스도인을 두고 한 말씀이 아니다. 성령의 조명 이론에 입각한 차등 은사론은 이 같은 점을 간과하고 있다.
체험으로부터의 논증은 체험자의 주관적 증언에만 토대를 두고 있는 주관성을 탈피하지 못한다는 한계성이 있다.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 수반되는 신체적 현상에 대한 자신의 주장뿐만 아니라 목격자의 증언 내지 검증이 필요한 것이다.
Grudem은 Greek어 문법구성 해석상 일반적 원리를 따르기보다는 예외적 또는 비정상적인 방식에 집착하고 있다. 혹시 앞에서 기술한 여러 가지 논증 중 한 두 개 정도에서 독특한 방식의 해석을 하였다면 강점도 될 수 있겠으나 거의 모든 해석을 그런 방식으로 일관하고 있어 정상적인 논조로 보기 어렵다.
주석적 논증의 하나인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선지자들인 사도들”로 보는 것은 Granville Sharp 규칙을 책 전체의 문맥을 무시한 채 동 원칙을 복수명사에 무조건 적용하고 있다. 더구나 같은 에베소서 4:11에서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주셨으나”에서 선지자들이 사도들과 명백하게 구분되고 있다는 점에도 유의 해야한다.
Grudem처럼 사도들만이 교회의 기초가 되고 교회 시대의 시작점이 된다면, 그의 논증에서 고린도전서 13: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의 해석에 있어서 선지자가 필요한 이유가 무엇이며 또한 사도의 직분이 그리스도의 재림 시까지 계속되지 않은 이유는 나변에 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Grudem이 “선지자”개념을 광의로 보는 논증은 전술한 것에서 이미 지적하였거니와 특히 오늘날 교회에 예언 은사가 존속한다는 것과 그 은사의 자질에 관한 판단과 증언을 할 수 있다는 것 주장과 상치된다. 하나님의 권위가 거세된 예언자 개념을 이완적으로 설정하고 모든 신자들을 예언자시하는 것은 신약성경에서 예언자 개념을 실종시키는 일이 된다. 예언을 가르침의 하위에 둔다는 것은 정경 완성 이후에 등장하는 예언 은사가 정경 보다 하위에 속한다는 것으로 보면 의미가 있겠으나 은사의 질이 하위에 속한다는 것으로 보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
아가보의 예언 사례(행 21:11)는 Grudem의 논리의 사활을 건 이슈가 된다. 아가보가 사소하지만 유오한 예언을 했다는 해석이 과연 타당한가? 아가보는 그 전에 천하에 흉년이 들 예언을 “성령으로” 말하였고 이 예언은 글라우디오 때 성취되었다(행 11:27, 28). 바울에 관한 예언이나 흉년 예언 모두 성령의 감동으로 말하였음에 유의를 요한다.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결박될 것이란 예언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처형된 사건을 두고 베드로는 유대인의 소행으로 보고 있으나(행 5:30) 사실은 로마 병사들이 처형하였던 것이다. 이것을 두고 베드로 말이 잘못이 있다고 할 수 없다. 아가보가 예언 할 때 “성령이 말씀하시되”란 표현은 존중되어야 한다. 성령께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바울이 아가보의 위험 경고를 두려워하지 않고 “의무의 길에서 이탈하지 않고” 여행을 계속한 것은 별개의 사항이 된다.
먼저 하던 이를 방해하지 말고 침묵할 것을 명한 것은(고전 14:29) 예언의 상하 등급을 매기는 근거가 될 수 없다. 문맥을 보면 은사는 예언자의 제재 하에 있었고 이교도의 엑스타시한 은사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울은 단순히 예언자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면 기다릴 줄 아는 질서를 지키고 제재도 받아야 된다는 것을 진술하고 있다. 두 세 사람이 이미 예언하였다면 또 예언하고 싶은 자는 다음 집회시 까지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다른 이들”의 분변(고전 14:29) 문제에 있어서 “다른 이들”은 다른 선지자들이거나 분변의 은사를 지닌 자들이다. 거짓 선지자 등장으로 교회가 시끄러우므로 피차가 분변해야 한다. 동 문맥은 참 선지자가 거짓 예언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초기교회에서 미혹의 영을 받은 거짓 선지자가 참 예언을 할 수 있느냐가 중심적인 문제가 되었다(요일 4:1-6).
고린도전서 13:8-10에서 “예언도 폐하고”라고 한 것은 인간 구원이 완성되는 때에 그들을 지도하여 오던 예언 은사가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 동 은사가 불완전하여 폐지된다는 뜻이 아니다. 또 “온전한 것이 올 때”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신자들의 구속이 완성되는 때 인간이 지닌 지식은 신적 진리의 광휘에 삼켜질 것으로 보아야 한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란 말을 사용하여 예언자임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31; 14:4,5,39에서 회중 개개인 모두에게 방언의 은사나 예언의 은사를 추구하도록 권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명하고 있는 것은 전체 회중이 몸을 세울 더 큰 은사를 추구하라는데 있다.
5. 중단론과 계속론의 일치점들과 차이점들
예언적 은사의 중단론과 동질적 계속론 및 차등적 계속론 사이에는 일치점들도 있고 차이점들도 있다.
(1) 일치점들
중단론과 계속론 모두 성경은 하나님의 무류한 말씀이 되며 절대적 권위를 지니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삶과 봉사 제 영역에서 이 말씀에 순복 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설사 견해의 차이가 있다해도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됨을 배척해서는 안되고 성도의 교제를 지속해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다. 또한 상반되는 두 입장 모두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를 체험하는 일을 중요하게 보아 날마다 삶의 매 과정과 기도, 예배, 말씀 강론 시 하나님과 참된 생명력 있는 개인적 관계를 체험해야 한다고 본다. 최대의 경이로운 기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탄생하는 일이고 또한 탄생한 이후 성령의 권능의 지도를 받아 거룩함과 신앙 안에서 자라나야 한다고 보고 있다.
이적과 성령의 역사에 관한 세부적 이해는 차이가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치유하시며 이적을 행하시고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설교 및 여러 가지 봉사를 하도록 권능을 부여하고 그 주권적 의지에 따라 그리스도인에게 특정의 경우 성경 말씀을 기억케 하시고 성경말씀을 특별한 상황에 적용할 통찰력을 주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감정과 정서에 감화를 주시며 통상적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는 특수한 정보를 제공하신다고 보고 있다.
(2) 불일치점
교회시대 성령께서 치유하고 지도하고 이적을 행하시며 봉사를 위하여 권능을 부여하며 우리 마음에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는 일에 관한 방법론상 차이와 어느 정도 이런 일을 격려할 것인지에 관한 격려상의 차이가 있으며 하나님께서 사물들과 일들을 우리 마음에 생각나게 하는 일에 관한 표현상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 계속론적 시각에서는 이것을 예언의 선물이라 하고 중단론적 시각에서는 이 예언의 선물을 신약성경 완성과 더불어 종결되었다고 보아 이를 반대한다.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예언적 선물을 주실 수 있으나 그것이 성경에 추가 될 수 없다는 시각에서는 이 예언적 은사를 성경적 계시 개념과 질적 차별을 두지 않는 시각과 차이를 두어 성경 시대의 예언적 선물과는 다른 한계점들이 내포되어 있다고 보 는 시각이 있다. 이런 두 시각에서는 예언의 신의 가능성과 정경 완성론을 조화시켜 이해하고 있는 외형적 공통점은 있으나 내용적인 면에서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차등 계속론이 영적 은사의 계속성을 강조하는 것은 수긍할 수 있으나 예언 은사를 다수 회중 중심으로 보아 예언적 은사의 불완전이나 과오를 쉽게 인정한다는 문제성을 안고 있다. 더구나 예언적 은사 현현을 두고 먼저 엄격한 성서적 검증 과정을 거쳐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여부를 판단하기보다는 신앙공동체 내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현상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Michael Maudlin이 말한 것처럼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게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가 하노라”(행 5:38-39)라는 방관적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 사태의 진상을 오도하고 있다.
빈야드 운동에 수반되는 갖가지 기현상을 모두 영적 은사의 계속으로 보는 결과 그것들이 성경 시대의 은사들과는 모든 점에서 다 조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피하는 방법으로 차등계속론을 전개할 수는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종말론적 참된 계시의 권위성을 박탈하거나 또는 무력하게 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더구나 요한계시록 13장에 등장하는 새끼 양 같은 짐승이 “용처럼” 말하고(11절),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13-14)에서 시사하듯이 마귀의 종말론적 “말” 활동과 이적이 특출하게 나타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교회는 이에 대단한 경계를 해야한다. 마귀 역시 은사 계속론으로 위장하여 활동하는 특성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무분별한 예언 활동의 수용을 지양하여야 한다.
V. 예언적 선물의 종말론적 등장 가능성 근거
A. 종말론적 논증
이 예언적 은사의 지속성은 거짓 선지자의 등장(마 24:24)에서도 반증된다. 더구나 마태복음 24장의 종말론적 문맥은 마지막 때 예언적 은사를 지닌 자의 등장을 예견케 하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가 종말시대를 살고 있다는 점이 바로 이 예언 은사의 발생 배경이 된다는 논증이다. 이러한 논증은 고전적 오순절주의자들과 은사 운동자들도 마찬가지로 주의 재림의 임박성이 이 예언적 선물의 증가를 초래케 한 동인이 된다고 보았다. 사실상 많은 예언들이 어느 정도 묵시적 사건들과 관계되었다. 이 은사가 현저한 양태로 등장한다는 이 종말론적 논증은 그 호소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B. 역사적 논증
이 예언적 은사의 활동이 역사적으로 중단되어 본 적이 없다는 논증이다. Deere나 또는 다른 사람들이 2000년 그리스도교 역사에 있어서 완전히 중단된 일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Deere는 이 예언적 은사가 스코트랜드 종교개혁 지도자들 가운데서도 등장한 바 있다고 한다. 그는 더 나가서 대설교자 Charles Spurgeon도 이 은사를 행사하였다고 본다.
C. 초자연적 현상의 체험과 목격으로부터의 논증
이 예언적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 초자연적 신체적 현상이 수반되는 것을 체험하거나 또는 목격자의 증언으로부터의 논증이다. 다니엘이 이상을 볼 때에 몸에 힘이 빠지고 호흡이 없어진 것(단 10:8,17)은 이 같은 초자연적 신체적 현상의 예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체험자의 증언에만 토대를 두지 않고 목격자가 검증한 후에 증언한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논증의 객관성을 강화시키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논증은 다른 논증들과 함께 하여야 그 객관성을 살릴 수 있는 한계성도 있다.
D. 주석적 논증
a. 요엘 2:28-32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요엘이 “그 후에(훗날에)”라고 한 표현을 베드로는 “말세에(마지막 날들에, ταί έσχἀται ὴμέραι)”(행2:17)라고 인용하였다. 이 베드로는 ταί έσχἀται ὴμέραι란 표현을[ 베드로전서 1:20의 έσχἀτων τών χρὀνων 과 동의어 적으로 사용하였다. 베드로는 요엘의 예언을 오순절의 성령 부어주신 사건에서 성취된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오순절 때의 성령강림은 요엘서 예언의 부분적인 성취다. 요엘에 나오는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 . .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려와”(2:30, 31)란 징조들이 오순절 사건 때에는 수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이적들은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2:31)있어야 하고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이 일들을 재림의 징조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마 24:29, 30). 이처럼 요엘 2장의 예언의 이중적 성취에는 마지막 때 예언적 은사의 현현이 예고된 것이다. 더구나 요엘 2:32에서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한 묘사는 종말론적 남은 자들의 교회에 이 예언적 은사의 현현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오순절 때의 이른비가 역사적 사건이었던 것처럼 그 종말론 성취는 역사적인 늦은비의 사건이 될 것이다.
b. 마태복음 7:15-20; 24:24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고 미혹하게 하리라”
이러한 말씀들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마지막 때 거짓 선지들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어 참 예언의 선물의 종말론적인 등장을 예기케 한다.
c. 구속사의 중요 사건에 수반된 예언의 선물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증거,” “모든 은사,” 및 “그리스도의 날”을 연관시키고 있다. “그리스도의 날”은 직전의 문맥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의 날인 재림의 때를 가리키고 있다.
신약성경의 예언 선물이 포함된 영적 은사 교리(고전 12장; 엡 4장)를 배척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성경을 거부하는 일이 된다고 보아도 무방하리 만큼 강조되어 있다. 성경 시대의 역사를 성찰하면 위기를 당하거나 의미심장한 시대에 특히 예언적 선물의 역할은 지대하였다. 홍수 전에 에녹, 므두셀라, 노아의 예언적 은사를 통하여 경고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역사상 위기시대에 예언자들을 일으키셨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예언적 은사를 주어 출애굽의 대 역사를 이끌었고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의 침략 시에 대․소 예언자 군을 일으키시어 국난을 대비케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시에는 침례 요한을 불러 백성들을 준비시켰다. 그렇다면 구속의 경륜을 완성시킬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도 어떤 예언적 선물을 등장시키실 것이란 입장은 성서적 논리가 된다.
d. 그리스도의 날과 “그리스도의 증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고전 1:4-8).
바울은 위 성경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시는 그의 재림의 날을 대비하는 일에 “그리스도의 증거”가 견고하게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증거”는 “예수의 증거”(계 19:10)와 동의어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증거”나 “예수의 증거” 모두가 종말론적 문맥에서 등장한다는 공통점을 띄고 있다.
e. 성령의 은사 약속
그리스도께서 “올라가실 때에 …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엡 4:8). 성령께서는 교회가 그 사명을 다하도록 이 선물들을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고전 12:11) 주신다. 영적 선물들은 교회의 연합을 조성케 한다(엡 4:16). 교회에 주신 선물들, 즉 사도, 선지자, 복음전도자, 목사 또는 교사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엡 4:13)게 하는 목적이 아직도 완전히 이루어 진 것이 아니다. 따라서 교회는 이 성령의 은사 특히 예언의 은사가 필요하다.
f. 요한계시록 12:17; 19:10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묵시 문학의 절정인 요한계시록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등장할 예언적 은사에 관한 예고를 하고 있는지 여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남은 자 중에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욜 2:32)한 말씀이 시사하고 있는 바를 지적하였거니와 요한계시록이 남은 자의 특징으로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계 12:17)라고 하고 있고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예언의 신)”이라고 정의하고 있어(계 19:10) 요엘의 남은 자 사상을 명확하게 발전시키고 있다. 이 같은 이해는 일찍이 James White이 개진한 바 있었다. 그는 요한계시록 14:15의 곡식 추수 명령을 풀이하면서 요엘 2:32의 “남은 자”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를 가지고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야 할 큰일에 관한 약속을 상기하면서 선물의 등장이 종말론적 필연성을 띈 것으로 갈파하였다.
(1) 두 여자
요한계시록은 종말론 부분에서 두 여자를 줄곧 대비시키고 있다. 즉, 해를 입은 순결한 여자(12:1)와 붉은빛 짐승을 탄 큰 바벨론 이름을 이마에 지닌 타락한 여자(17:3-5)가 대칭적으로 나온다. 어떤 의미에서 두 여자 모두 여자이기에 같은 실체인 그리스도교 교회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두 여자 모두 자손을 두고 있다(12:17; 17:5). 요한계시록 12장에서는 그리스도교 전 역사상 하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순결한 신도들을 묘사하고 있고 요한계시록 17장에서는 그리스도교 전 역사를 통하여 배도한 무리들의 발전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용이 분노하고 있는 대상(계 12:7)인 성도와 예수의 증인의 피에 취한 타락한 여자의(계 17:6) 박해를 피하여 광야로 도망한 순결한 여자는 본질상 여러 충성스러운 무리들을 대표한다. 이들 무리들은 그리스도 교회 역사의 시대 특히 암흑시대 동안에 하나님을 근실하게 믿고 성경에 충성한 무리들을 상징한 것이다. 그리고 예언 은사의 등장은 이 충성스러운 무리들의 시대인 것이다.
(2) 남은 자손의 정체
여기 요한계시록 12:17의 순결한 “여자의 남은 자손”의 정체는 역사 시대의 충성스러운 전 그리스도인이나 오늘날 전 그리스도교회 신도들을 지층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 때 이 여자의 남은 자손은 첫째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계 12:17). 둘째로 바벨론에 있는 “내(하나님)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계 18:4)는 말씀에 비추어 보아 요한계시록 12장의 남은 백성이란 일반적인 의미에서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을 지칭하는 말이 아닌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는 특수한 무리를 두고 사용한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τὴν μαρτυρἰαν τού ΄Iησού Χριστού)를 가졌다(계 12:17). 따라서 인류역사의 최후의 단계에 부름 받은 이 남은 백성이 하나님의 마지막 메시지를 선포할 사명을 지녔다고 추론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마지막 메시지는 요한계시록 14:9-12에 나오는 소위 셋째 천사의 기별이 된다. 물론 이 셋째 천사의 메시지는 첫째와 둘째 천사의 기별 내용을 전제 내지 포괄하고 있다 (계 14:6-14). 요한계시록 12:17의 “여자의 남은 자손”이 셋째 천사의 기별을 온 세상에 전파하도록 특별한 사명을 받았다는 점에서 전 그리스도교계에서 특별한 기별을 가진 특별한 존재가 된다.
(3) “예수의 증거”(계 12:17)
여자의 남은 자손이 가진 “예수의 증거”에 종말론적인 예언적 은사가 담겨 있는가?
“예수의 증거”란 말이 요한계시록에 6회 나온다(1:2,9; 12:17; 19:10; 20:4). 한국말 번역 “예수의 증거(τὴν μαρτυρἰαν τού ΄Iησού)에 대한 번역은 문자 그대로 단순 속격 구문으로 보고 번역하고 있으나 구문 내에서 동 속격 구문을 이해함에는 크게 둘로 나누인다.
첫째로는 예수에 관한 증거(증언)로 보는 이해가 있다. 속격인 “예수의(΄Iησού)”를 목적격적 속격(objective genitive)으로 보아 “예수에 관한 증거”로 번역한다. RSV는 이 같은 문법적 이해에 토대를 두고 “who bear tesimony to Jesus”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 입장에서는 예수님에 관한 그리스도인들의 증거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로마 카톨릭의 The New American Bible에도 같은 입장에서 번역을 하고 있다.
둘째로 예수께로부터(from) 온 증거(증언) 또는 예수님에 의한(by) 증거(증언)로 보는 시각이 있다. 이는 주격적 속격(subjective genitive)구문으로 본 번역이다. 이 번역에 따르면 예수께서 교회에 주신 증거란 의미가 된다. TEV는 이 구문을 주격적 속격으로 보고 번역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전체에 나와 있는 동 구문의 용례로 보아 요한계시록 12:17의 “예수의 증거”는 두 번째인 주격적 속격 구문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증거(증언)는 예언적 계시를 통하여 주신 것이 되어야 한다. 요한계시록에 사용된 다음 구문의 용례들의 개념에 비추어 볼 때 이 같은 입론은 자연스러운 귀결이 된다.
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계 1:1,2)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 하였느니라.”
이 문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of)”란 구문은 예수께서 요한에게 주신 계시란 점에서 주격적 속격이다. 이와 유사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도 “예수 그리스도로부터(from)” 또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by)”의 의미를 띄고 있다. 이런 용법은 “이것들을 증거 하신 이(ὸμαρτυρών ταύτα)”(계 22:20)에서도 확인된다. James Moffat은 이 요한계시록 22:20의 “증거 하신” 것을 “예수의 증거”와 동일시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선지자들을 감동시킨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계시로 보았다.
②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 (계 19:10)과 “네 형제 선지자들”(계 22:9)의 평행성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그리하지 말고”(계 19:10)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계 22:9)
위 두 평행적 본문에서 보면 예수께로부터 증거를 받은 자가 선지자적 기능을 하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③ “예수의 증거” (계 12:17)과 “대언의 영(예언의 신)“(계 19:10)의 동일성
요한계시록 19:10은 “예수의 증거”가 “대언의 영(예언의 신, τὸ πνεύμα τής προφητεἰας)”이라고 천명하고 있다. 이 성경 절은 구체적으로 “예수의 증거를 지닌 형제들은 예언적 영감을 소유한 자들”이라고 정의하였다.
④ “대언의 영(예언의 신)”의 정체
대언의 영은 예언적 계시를 기록하거나 전달하는 성령이 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말한 것이다(벧후 1:21). “은혜의 성령” 또는 “진리의 성령”같은 표현은 은혜와 진리를 전달하는 성령이란 의미이다. 따라서 예수로부터 온 증거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를 받은 선지자(계 1:10참조)를 고취하는 성령의 기능과 동격이 되거나 연계될 수 있다. 이러한 계시는 사실상 예수의 증거(증언)가 된다. 이러한 해석은 베드로 전서 1:11의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에 비추어 “대언의 영(예언의 신)”이란 문구는 구약성경 시대 예언자들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감동 받아 그분으로부터 증거를 받아 지닌 자가 된다. “대언의 영(예언의 신)”이란 표현은 예언의 핵심이나 진수로 이해 될 수 있다. 증거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예언의 진수나 핵심이 된다. James White 역시 “예언의 영”, 혼, 및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증언)이다. 또는 인간 구속 경륜과 사업에 관련된 예언자의 목소리는 구속자의 목소리가 된다.
⑤ 남은 자가 예수의 증거를 가진 시간대
요한계시록 12:17은 남은 자 예수께로부터 예언적 증거(증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가지고 있다는 단어는 ἒχω의 현재분사형 ἐχὀντων인바 그 강조점은 남은 자손은 용이 분노하는 종말론적인 시간대에 존재한다는 점에 있다. “예수의 증거”(12:17)가 예수께서 예언적 통로를 통하여 교회에 주신 증거일진데 이렇게 종말론적인 배경에서 등장한 남은 자손이 그것을 소유한 점이 확연하고 이 “예수의 증거”가 신구약 성경 경전 완성 이후 예언적 은사의 형태로 된 영적 은사의 종말론적인 현현을 시사한다는 추론은 성서문맥에 합치한다.
VI. 정경과 예언적 선물의 상호 관계
정경 완성 후의 예언적 은사의 기능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정경적 예언자의 그것과 유사할 수밖에 없는 것은 양자가 같은 성령께서 주신 권위적 선물이기 때문이다. 정경완성 이후의 예언적 선물은 정경을 보완하거나 추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존의 정경을 강화, 보호하고 그 의미를 명료화시켜 신자들이 그 분명한 가르침에 따르도록 함에 있다.
정경 완성 이후의 예언적 선물의 진정성에 관하여는 기존 정경의 빛에서 검증 확인되어야 한다. 소위 예언적 선물을 받았다고 해서 그 모두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예언적 은사를 무조건 배격할 것도 아니다. 이미 지적하였듯이 예수께서는 일찍이 거짓 예언자를 주의하라고 하셨다(마 7:15). 특히 예루살렘 멸망과 세상 끝에 큰 표적과 기사들을 행하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의 미혹하는 일을 예고하시었다(마 24:24). 사도 바울은 신약성경 중 초기의 책에서 예언적 선물을 등한시하거나 모욕하므로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그 예언적 선물의 주장자를 덮어놓고 배격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살전 5:19-21)고 권고하였다. 사도 요한도 “영을 다 믿지 말고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요일 4:1)고 권고하였다. 엘렌 G. 화잇 역시 이 같은 맥락에서 종말론적인 다수의 거짓 예언자들의 등장과 그 범 세계적 격증을 경계하였으며 그들의 활동이 초래케 할 미혹, 혼란, 반역, 교리적 이단성 등을 지적하였다. 예언적 선물 등장에 관한 정경적 검증 확인 표준은 기존 계시와의 일치 여부 (사 8:20), 예언자의 삶과 그 추종자들의 삶에 나타난 열매(마 7:20), 예언 성취 여부(렘 28:9), 및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관한 태도(요일 4:2) 등이다.
그렇다면 고린도교회의 예언적 은사는 이 같은 맥락에서 그 진정성을 판단할 것이지 예언의 선물의 질을 평가 절하하여 이해할 일이 아니다. 예언 은사들 다수 회중에게 이완시켜 보편적으로 이해하는 현상은 정경 완성 이후의 예언적 은사 기능을 심도 있게 다루지 않은 것에서 오는 현상이다. 즉, 성경과 성경 완성 이후의 예언적 은사의 상호관계 설정을 무시하는데서 기인한 것이다.
정경 완성 후의 이 예언적 선물은 그 특성이나 역할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점들을 지향하여야 한다.
(1) 신앙과 행위의 기초가 되는 성경을 지향케 한다.
(2) 성경에 이미 나타나 있는 가르침을 조명하고 명료화시킨다.
(3) 성경의 원칙을 매일 생활에 적용시킨다.
(4) 교회로 하여금 성경이 명하고 있는 사명을 수행하도록 지시 및 촉매 역할을 한다.
(5) 교회 건립을 돕는다.
(6) 교회를 성경진리로 견책, 경고, 교훈, 격려하고 또 건립하며 연합시킨다.
(7) 교회를 거짓 교리로부터 보호하고 신자들을 올바른 입지에 서도록 한다.
VII. 결론
정경 완성 후 예언적 은사가 계속되느냐 아니면 중단되었느냐에 관하여 역사적으로 논란이 계속되어 왔다. 중단론은 특히 마태복음 24:24; 요엘 2:28-30; 요한계시록 12:17; 19:10 등이 명백히 종말론적 예언적 은사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는 점을 무시하고 있다. 예언적 은사의 중단론과 계속론의 대치상태를 극복하고자 중도론적 견지에서 고린도교회의 예언 은사에 관한 기별을 중심으로 예언적 은사를 정경적 예언은사 또는 사도적 예언 은사와 비정경적 예언 은사 또는 비사도적 예언 은사 사이에서 예언 은사 등급론(차등 은사론 또는 차등 계속론)을 전개하므로 돌파구를 마련해 보고자 한 Grudem류의 신학적 입장은 상당한 호소력을 가진 듯하나 포도원 운동의 옹호 입론에 치중한 나머지 정경 완성 후의 예언 은사의 개념을 성서 시대의 그것에 비하여 일반 회중 다수가 행사할 수 있는 것으로 이완 시켰을 뿐만 아니라 예언 은사의 내용상의 과오나 불완전성을 강조하는 이질적 계속론을 구축하는 자기 한계를 탈피치 못하였다.
정경 완성 후에 예언적 은사가 계속된다고 한 주장은 그 계속된 예언 은사가 정경의 연속이 아니고 오히려 그 정경으로 안내하고 정경의 내용을 명료화시키며 그 현대적 적용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예언 은사의 질은 정경의 그것과 동일한 선상에 있다. 정경적 예언 은사나 정경 후의 예언적 은사가 모두 같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점에서 동질 예언적 은사의 계속론이 보다 더 일관성이 있다.
특히 예언적 은사의 종말적 현현이 남은 백성의 등장과 함께 요한계시록 12:17과 19:10에 예고되어 있다는 점을 요한계시록 전체 문맥과 함께 연구되어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예수께로부터 증거를 받은 예언자가 비범한 설교자 이상으로 그리고 성경시대의 예언자와 동질성을 가지고 등장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오늘날 이 종말론적 예언적 은사의 등장에 관한 올바른 이해가 성경 종말론을 푸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열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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