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교회와 정치
인간은 사회적(정치적) 존재이다. 정치 없는 심산유곡의 시골 생활도 국가 정치적 그물에 속하여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재림교인들 역시 현실 정치의 장(場) 안에 살고 있다. 그러나 두 개의 주권 아래 살고 있는 재림신도들은 더 큰 주권의 다스림을 받고 있기 때문에 이 땅의 주권의 다스림에 대하여 경이원지(敬而遠之)한다.
성경은 특정의 정부 형태를 직설적으로 규범화하고 있지 않다. 엄밀히 말하자면 성경은 어느 하나의 정부 유형을 선호 고정시키고 있지 않다. 그리스도교는 여러 다른 정치 형태 아래에서도 그 사명을 다 하여야 한다. 정부 형태란 그 정부가 국민을 위하여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국민의 투표 심판을 받아야 된다. 정의, 평등, 기회나 개인 존엄성이 더욱 잘 구현될 수 있는 정치 체제는 전제형보다는 민주형 정치일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교회와 현실 국가정치와의 관계를 규범적으로 제시하고 있기보다는 함축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오늘날은 교회와 국가가 상호 분리되는 구조를 바람직한 모델로 보고 있다. 그래야 하나님이 의도한 각각의 기능이 바람직하게 수행될 것이다. 이 분리의 개념은 어느 일방이 타방을 지배하는 것이나 또는 예속관계 아래에 있는 것을 지양(止揚)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분리를 유지하기 위하여 계속적인 경계가 필요하다. 그러나 분리는 격리가 될 수 없다. 그래서 그 연계관계에 관한 탐색이 논의되게 마련이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 유형들
교회와 국가의 상호 관계에 관한 이론들에는 몇 가지 유형들이 있다. 브라운(Wlliam A. Brown)은 시대별로 유형을 제시하고 있다. 즉, 교회가 소수자 위치에 있었던 1-3 세기의 “교회와 국가의 적대 관계(The Church against the World),” 콘스탄티누스 대제로부터 종교개혁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교회와 국가의 동반자 관계,” 종교개혁 시대로부터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교회와 국가의 통합(unity) 시대,” 그리고 근대의 “교회와 국가의 분리시대”이다.
묄만(Conrad H. Moehlmann)은 역사 해석의 입장에서 5개 유형을 제시한다. 즉, 국가는 세속 정치 문제와 영적 문제들에 대하여 최고의 권한을 지니며 교회는 국가의 한 기관에 불과하다는 에라스투스주의(Erastinianism), 교회가 국사와 영적 문제 처리상 최고 권한을 지닌다는 힐데브란드주의(Hildebrandism), 교회와 국사는 고유한 일이 영역 상 상호간 구별되나 분리되는 관계에 있지 않다는 Leo 12세의 동등관할론(Coordinate jurisdiction), 국가가 교회를 외적 명목적으로 국고 지원하는 체제인 명목적 관계(nominal establishment) 및 교회와 국가는 분리되는 자유로운 관계가 있다.
매스톤(T.B.Maston)은 동일형, 지배형, 및 분리형으로 구분하고 있다. 구약시대 신정정치, 현대 스웨덴의 국가 교회는 동일형의 예가 되고, 지배형은 전제국가의 국가 지배형 또는 로마가톨릭교회와 칼뱅주의에 나타난 교회 지배형의 두 가지로 나누이고 있다. 분리형은 오늘날 미국이 그 표본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 분리형이라도 조직상, 기능상의 분리이지 신앙과 정치 생활의 분리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이 분리형 주의자라는 그리스도교 원칙이 정부에 적용되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 또는 국가는 국민의 도덕적, 영적 복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보고 있다. 국가는 모든 종교 단체의 복지에 관심이 있어야 한다. 국가는 교회를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과장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한계도 설정하고 있다.
정부에 관한 성서적 가르침
고대 이스라엘 국가는 하나님의 선택에 따른 신정정치 체제였다. 모세 시대 국가조직의 효율적 운명을 위하여 조직이 정비되었고(출 18:13-27), 사무엘 시대 백성의 요청에 따라 왕정 국가 형태로 나갔다 (삼상 8:20). 그러나 국왕의 권세는 절대적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왕을 선택하였고(신 17:14-20; 삼상 10:17), 하나님께서 왕의 권한을 제한하셨다. 왕의 명령을 지켜야 하였다(전 8:2). 신정정치 체제 하에서 왕은 정치적 지도자이면서도 동시에 영적 지도자라야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대 꼴 지워진 정치 형태와 체제 안에서 복음 전도활동에 전력하였다. 자기 제자
들 가운데는 당시 급진적 폭력 운동가인 열심당원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들의 폭력 활동을 옹호하거나
지지하지 않으셨다. 그는 국가의 합법적 기능을 시인하셨다(마 17:24,25; 22:15-22; 막12:17). 이것은
국가의 질서 유지권, 징세권, 화폐제도를 인정하신 것으로 나타나 있다. 가이사의 징세권 인정에 관한
가르침에는 시민정부의 타당성, 훌륭한 시민이 되어야 하는 그리스도인 자세, 시민 정부에 순복하고 그
권위를 지지하여야 하는 점이 담겨있다고 보아한다. 그 이유는 국가 보호와 혜택을 받고 있기 때문이
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에서 “바친다(render)"는 말에는 의무성 개념이 담겨있다. 당
시 로마 정부의 통치자들은 친절하고 자애로운 통치를 하지 않았다.
“예수께서 사시던 그 당시의 정부는 부패하고 강압적이었다. 도처에서 토색과 편협과 잔인한 압제 등의 악폐들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주께서는 사회 개혁을 시도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국가의 권력 남용을 공격하지도 않으셨고 국가의 원수를 정죄하지도 않으셨다. 그는 권력을 장악한 자의 권위와 행정에 간섭하지 않으셨다. 우리의 모본되신 예수께서는 세속적인 정치를 멀리하셨다”(DA 509).
“그리스도께서는 법률적, 정치적 의문들을 결정하는 질문들을 여러 번 받으셨다. 그러나 그는 속세의 문제들에 개입하시기를 거부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건설하시고자 하신 위대한 영적 세계, 곧 의의 왕국의 머리로써 이 세상에 서 계셨었다. 그의 교훈은 이 왕국을 다스리는 고상하고 성결한 원칙을 천명(闡明)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공의와 자비와 사랑이 여호와의 왕국에서의 지배하는 세력임을 보여 주셨다”(9T 218).
예수께서는 악한 세속 통치자에 대한 비평도 하셨다. 헤롯의 교활성을 두고 여우(눅 13:32)로 묘사하기도 하고 헤롯의 누룩을 조심할 것도 언급하셨다(막 8:15). 또한 집권자들이 임의로 주관하는 것처럼 행동치 말도록 권고하셨다(막 10:41-43). 위에서 주지 않으면 해할 권세가 없다고 세속 정부의 통치자의 한계성도 못 박았다(요 19:11). 또한 주관자, 다스리는 자가 되지 말고 섬기는 일에 으뜸이 되라고도 하신(눅 22:24-27; 참조 요 6:15; 18:33-36) 것은 세상 나라의 특성의 문제점을 부각한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시민정부의 요구는 통치자의 특성에 의존하여 판단될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중의 의무를 진 존재다. 즉 첫째로는 하나님께 그 다음에 세속 정부에 의무를 진다. 성전세(세겔) 문제(마17:24,25)에서도 성전세 납부 의무가 없었던 예수께서는 충돌을 피하면서도 그의 거룩한 사명의 증거를 들어내시고자(신성을 들어내시고자) 성전세를 납부케 하셨다.
바울도 예수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당대 정부의 틀 안에서 활동하였다. 바울서신에 나오는 정부에 관한 대표적인 말씀은 로마서 13:1-7에 나온다. 여기에서 바울은 정부에 순복하여야 될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정부의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1,3,4,6절).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이 어느 특정한 정부를 설립하였다는 뜻은 아니고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정부 권위를 부여하고 세웠다는 것이어서 모든 경우 그리스도인들이 정부의 모든 요구에 순응해야 된다는 뜻으로 해석하여서는 안 된다. 정부의 합법적인 기능을 선한 일의 보존(3절), 악한 일에 진노와 처벌(3-4절), 하나님의 심판의 사자(4절)로 말하고 있다.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란 말씀에는 생사여탈권이 국가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정부에 불순종하는 것은 진노를 유발한다(4절). 정부에 순복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한 선한 증거다(5절). 양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헌신하는 의미에서 순복을 하는 것이다. 바울이 말한 굴복은 아내가 남편에게 하는 “복종”이나 그리스도인끼리 피차 하는 “복종”과 같은 말이다(엡 5:21,22). 바울은 정부에 순복하는 것 외에 위정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고 있다(딤전 2:1-3).
베드로와 요한은 국가에 대한 충성이 하나님에 대한 충성과 충돌 시 하나님께 충성할 것을 주장하였다(행 4:13-20). 그리스도인은 국법의 보호제도에 호소할 수도 있다(행 24:10-27).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알고 있는 국가의 박해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인간이 만든 모든 권세에 주를 위하여 순복하라고 하였다(벧전 2:12-17). “주를 위하여”는 ‘주 때문’으로 하나님께 헌신한 자니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를 시인하신 의미가 담겨 있다.(물론 로마서 13:1-7 과 요한 계시록 13장의 종말론적 권력사이에는 긴장이 있다.)
선거의 열기를 거치고 나서
민주주의 정치 구현에서 선거는 필수 불가결한 제도적 장치가 된다. 누가 더욱 국익을 보호하고 국민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지를 놓고 선거 때마다 우리는 그 열기가 하늘을 찌를 듯한 소용돌이를 체험을 하면서 살아왔다. 다가오는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우리 나라 정당의 이합집산이나 후보자 선정과정에서 불협회음이 세차게 들린다. 지역적 대결 구도도 탈피하였다고 볼 수 없는 현상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자주 부각되고 있는 여론조사의 변화무쌍을 보며, 코커스나 프리이머리의 부작용 파열음이 더욱 심각해 가고 있다. 이념적 대결구도와 세대간의 문화적 대결 구도 역시 전승되어가고 있다. 여기에다가 미디어를 통한 작위적인 전략이 여론을 호도해 갈 여지도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사람들은 미디어 선거 책략에의 파동 속에서 곤혹스러워 할 ㄱ서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러한 선거의 열기가 넘쳐 나는 사회에서 재림신도들 역시 그 열기에 휩쓸려 갑론을박 할 수 있다. 엘렌 화잇은 선거에 당면하여 어떤 때는 투표권 행사의 힘을 말하고, 다른 때는 정치문제 개입에 대하여 침묵을 권고하였다.
1859년 3월 6일자 일기에는 매우 흥미를 끄는 논의에 관하여 진술하고 있다. 시 책임자를 선출하는 투표에 참여하는 것이 좋은지 여부를 놓고 찬반이 맞섰으나 부절제하는 사람보다 절제하는 사람을 지지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날 부절제한 인물들이 공직을 맡아왔으며 비위를 맞추는 수단으로 투표하지 않는 안식일 준수자들의 태도를 인정한다는 뜻을 표현하였고 계속 안식일 준수자들이 투표하지 않는 퀘이커교도들처럼 저들의 노선을 굳게 지키기를 희망한다는 뜻을 말”해 왔으나 엘렌 화잇은 “사단과 그의 악한 천사들은 매우 분주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이 지상에 자기의 일꾼들을 가지고 있다. ‘사단이 실망하게 되기를 나는 기도한다’고 하여 성서적 표준에 부합되는 사람을 지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함축시켜 말하였다”(2SM 337). 도덕률인 십계명을 무시하는 정치인, 특히 백성들의 가정과 건강을 해치는 주류 판매를 승인하는 일을 하고(Te 255), 안식일보다 일요일 신성성에 집착하는 정치가들이나 대표자들이 집권할 수 있도록 투표하여서는 안 된다고 못 박았다(Ev 391; FE 475). 원칙에 굳게 선 바른 사람을 선택하여 투표하는 일은 재림신도의 의무가 된다. 바른 사람이 바른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엘렌 화잇은 정치문제에 관하여 침묵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특히 셋째 천사의 기별과 관련이 없는 문제들에 관하여는 침묵을 지킬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그는 세상과 짝하지 말고 저희 가운데서 나와서 따로 있어야 한다는 경고의 말씀을 상기하면서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후 6:17)는 말씀을 정치문제에 적용하여 권면하고 있다. “그대가 정치 문제를 가지고 투표하는 것에 관하여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든지 간에 그것을 펜으로나 음성으로 선포해서는 안 된다고 권고하였다. 우리 신자들은 셋째 천사의 기별과 관련이 없는 문제들에 관하여는 침묵을 지킬 필요가 있다... 무엇인가를 선포하거나 무엇을 놓쳐서는 안 되리라는 일종의 불타는 욕망이 남녀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으나 저들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나의 형제들이여, 우리 기관지에 그대들의 정치적인 선택을 출판해 내거나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한자리에 모였을 때에 정치적인 발언을 하라는 책임을 주님께서 아무에게도 맡기지 않으셨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치 문제와 관련해서는 안 된다.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유의할 때에 실수함이 없을 것이며 정치적인 투쟁이나 세속적인 애착으로 말미암아 불신자와 더불어 멍에를 같이 메서는 안 된다... 투표하는 일은 오직 그대 자신에게만 국한시키라. 그대가 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행하도록 권고하는 것이 그대의 의무인 줄로 여기지 말라”(Letter 4, 1898; 2SM 336-337).
이러한 정치 문제에 관한 침묵의 필요성을 정치적 견해의 차이가 교회의 통일성을 깨 분열을 조장하기 때문이라고도 지적 하고 있다. 복음전도 제 84 장 “정치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390-396)에는 그에 대한 설명이 잘 나와 있다. “우리 교회와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자들은 어떤 정치가를 옹호하거나, 어떤 정치적 방법을 찬성한다든가 반대한다든가 하는 저희 편견을 밝히는 일에 마음대로 동조하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마음을 동요시켜서 각각 자기가 좋아하는 이론을 옹호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 진리를 믿노라고 공언하는 자들 가운데 이와 같이 동요되어서 저희 감정과 정치적 편견을 발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결과로 교회 안에 분열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주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정치적 문제를 잊어버리게 되기를 원하신다” (Ev 391).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정부의 정책이나 시정 문제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허용치 않으셨다. 특히 “주께서는 정치적 문제를 묻어 버리기를 원하신다.” “이런 문제에 대하여서는 침묵이 웅변이다.” 정치적 방법에 찬성하던가 반대하면 교회 안에 분열이 일고 교단 전체가 공공연한 오해를 받게 된다(교회에 보내는 권면 2:566-568).
엘렌 화잇은 정당들에 대하여 안전한 찬성투표를 할 수 없다고 하며 그 문제점도 지적하였다. 이 세상이 삶의 목적 전부인 불신자들과 결탁하는 것에는 항상 위험성이 따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휘장을 달아야 하지 정치적 휘장을 달고 낭비할 시간이 없다. 신자들 사이에 각기 다른 정당을 지지하는 사상적 대립에 빠지는 일은 원수들로 저들 속에 들어와 알력과 불화를 일으키게 할 도덕적 독소를 뿌리는 기회를 주게 된다. 어느 한 편을 지지하는 일은 다른 편을 반대하는 것이 되어 복음의 빛이 그들에게 들어가는 일에 장애가 될 뿐만 아니라 자칫 정부 지도자들을 헐뜯는 것이 되어 국가의 권위에 반대하는 인상을 주거나 적대감을 주어 교회 전체가 어려움에 빠뜨려질 수 있다.
"우리 형제들 가운데 몇 사람이 정부와 법률에 적대하는 말로 간주될 만한 것을 많이 말하고 기록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 자신을 공공연히 오해받게 하는 것은 잘못이다. 정부의 지도자들이 행한 것을 끊임없이 헐뜯는 것은 현명한 일이 못 된다. 인신공격이나 기관을 공격하는 것은 우리의 할 일이 아니다. 우리는 국가의 권위에 반대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오해를 받지 아니 하도록 매우 조심하여야 한다...우리의 형제들이 부주의하게 말하거나 기록한 비난 섞인 부주의한 표현들이 우리를 정죄하기 위하여 우리의 원수들에 의해서 이용될 때가 올 것이다. 이런 부주의한 발언들은 단지 그 말을 한 자들을 정죄하는 데 이용될 뿐만 아니라 재림교회 전체에 책임을 돌릴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저희의 한 말이 당초에 뜻하고자 하였던 의미와는 왜곡되게 말하여지는 것을 듣고 놀랄 것이다(6T 394: 교권, 316-317).
이 같은 권면들에 비추어 보면 재림교인들이 하는 정치 참여에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재림교인이 어느 분야에서 요셉이나 다니엘처럼 고도의 전문성을 지닌 국정 지도자가 되는 일은 소망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 일은 거센 비방과 비판의 소용돌이 선거풍토가 아닌 고도의 전문성을 통하거나 현재와는 전혀 다른 아름다운 민주 선거 체제 정착을 통하여서 나타나는 것이 소망스럽다. 그리고 누가 적합한 후보인가 하는 판단에 있어서 눈앞의 사탕발림 약속이나, 지역적 또는 지엽적인 이슈보다는 더 큰 차원의 자유민주주의 프레임과 나라의 미래에 역점을 두고 신앙의 자유, 양심의 자유라는 가치를 고양하는 후보를 판단하여 선거에 임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소망스럽다는 인식을 지녀야 할 것이다.
시민불복종 문제
그리스도인과 정치 및 사회 변혁문제에 관하여 혁명(revolution), 재평가(revaluation), 개혁(reformation), 중생(regeneration)의 4가지 상이한 입장이 있다. 혁명은 폭격과 강압으로 사회의 급격한 변혁을 기도하는 입장으로 시위, 보이콧, 단체적 항의, 정권퇴진 운동 등의 방법을 구사하여 사회 구조와 정치제도를 전복하는데 목적을 둔다. 재평가는 도덕적 규범에 입각하여 사회생활 및 구조를 비평적으로 재평가하는 태도를 취한다. 이 입장에서는 참과 도덕성의 개조의 보편적 필요성이나 급박성을 강조한다. 개혁은 낙관적 입장에서 사회의 빗나간 제반 문제에 대하여 점진적이고도 일반적인 개선과 교정을 추구한다. 이를 위하여 사회복지 확장, 범죄 퇴치를 위한 법제도 개선, 및 입법적 제재로 부패한 정부를 교정코자 한다. 중생은 온건한 방식으로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입장이다. 이 입장에서는 한편으로는 혁명적 방법을 배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혁과 부분적으로 온건한 재평가 방법을 지지한다. 사회 질서와 정체 변화를 위한 사회악의 근원적 문제 해결을 구속 개념에 그 토대를 둔다. 이것은 우회적이긴 하나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특히 재림교회는 평화교회로 개인의 평화뿐만 아니라 사회적 평화까지도 추구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마지막 방법에 입각하여 사회윤리, 정치윤리를 구축한다. 그러나 재림교인 역시 사회적 존재이기에 전적으로 이 방법에만 의존하지 않고 부분적으로 건실한 개혁적 방법을 추구한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노예 제도 폐지, 알코올음료 배척운동, 공립학교에서 진화론만 가르지는 것 반대, 일요일 법 제정 반대, 강제적인 노조가입 등을 반대하여 왔다.
시민 불복종 형태는 폭력적인 것과 비폭력적인 것이 있다. 집단적인 시위와 폭력적인 것은 정부에 순복하라는 성서 교훈에 배치될 뿐만 아니라 그 결과가 사회적 혼란과 무질서를 야기시키고 국법 질서의 파괴가 뒤 따라 양심적 평화주의자인 재림신도는 이를 지지할 수 없다. “이 법률이 없다면 세상의 형편은 지금보다 더 악화했을 것이다. 이 법률 중에 어떤 것은 선하나 어떤 것은 악하다. 악법이 증가하고 있어서 우리는 이제 더욱 어려운 입장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굳게 서서 말씀의 원칙대로 생애 하도록 밀어 주실 것이다”(1T 201).
그러나 공무원 사회에 불의가 편만하고, 경찰이 잔인하며 법과의 불공정한 재판을 하거나 정부가 특정 종교단체에 편견을 지니고 있을 때, 그리스도인은 항의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가 그 권력을 남용하고 적당한 한계선을 넘어 설 때 그리스도인은 불의를 바로 잡기 위하여 정부에 호소나 탄원을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도 정부의 불의를 묵과하지 않고 이를 제지하고자 하는 권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를 위하여 혁명적 방법에 호소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 그리스도인은 정부와 불순종하거나 항의할 수 있는가? 국가의 위정자니 법제도가 보다 높은 하나님의 법에 배치되고 정부가 하나님의 자리를 접하여 있으면서 하나님이 금하는 것을 요구하고(예컨대, 안식일 노동과 우상숭배 등) 하나님의 명하신 것을 금할 때(예컨대, 복음전도, 예배, 시침 등)하나님의 백성은 정부의 법과 정치가의 요구에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법에 복종한다(행 5:29). 그러나 이러한 불순종을 하기에 앞서 그리스도인은 겸손하고 조용하게 탄원하여 그 타당성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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