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스 기독론 개요
로고스 기독론 개요
I. Logos의 철학적인 의미
고대 그리스 합리주의를 추구하는 철학자들은 ‘말씀,’ ‘이성,’ ‘설명,’ ‘수집,’ ‘재산,’ ‘목록’ 등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 로고스를 만물을 지배하는 “법칙”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더 발전하여 로고스는 사색의 결과 얻어지는 “사물의 근거,” 수학적 술어인 “비례‘ 사물 상호간의 관계를 결정하는 ”척도,“ ”사고능력,” “이성,” “인간정신,” “사고(思考) 내용,” “정의(定義)” 등을 의미하였다. 헬레니즘 시대 스토아학파는 로고스를 ”우주 만물을 합목적적으로 지배하는 법칙“으로 이해하였다.
헬레니즘 영향 하에서 유다주의 사상가 알렉산드리아의 희랍계 필로(20 B.C.-50 A.D)는 예수와 사도들과 동 시대 사람으로 로고스를 신과 세계의 중재자로서 하나님의 ’형상‘이며 대표, 심지어는 세상을 창조하신 “제2의 하나님”으로 해석하였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론에 입각하여 하나님의 로고스는 하나님의 행위로(Sac. 65)보았으며, “창조된 것들 중 맏”이 되었다고 한다(Leg.All. III.175). 이리하여 당대에 “신의 로고스,” “신의 아들,” “로고스-신론” 라고 하는 사상이 풍미하였다. 그러나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유다주의 철학에서 로고스는 신성이 물질과 직접적으로 함께 하거나 접촉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신적 현현의 원칙이 되는 로고스는 신과 우주 사이에서 완충작용을 하는 역할을 한다.
II. 성경의 로고스 사상
1. 로고스-하나님 기독론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말씀” 곧 로고스가 하나님이셨고,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요한복음 서두의 이 말씀만큼 후대 신학에 영향을 끼친 말씀이 별로 많지 않다는 주장이 있다. 로고스 개념은 당대 그리스도교 밖 지식인들과의 대화의 물꼬를 트는 열쇠가 되었다. 또한 대내적으로 지배적인 컨셉이 되어 그 정체와 위상에 대하여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특히 2-3세기에 활발한 전개되었다.
요한복음은 당대 그리스 철학에서 “말씀”이 “신의 아들,” “로고스-신론”이라는 당대의 사상 풍토를 활용하여 그 서두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는 명제로부터 시작해서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 거하셨으니 이가 그리스도 예수라고 서술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로고스)“이 되고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고 천명한 것이다. 특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라고 영광의 로고스를 부각시켜 차별화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요, “본체의 형상”이셨다.
그러나 요한이 그리스 언어적 표현을 빌렸지만 그 사상은 히브리적이지 헬라적인 것이 아니었다. 필로는 로고스를 중성 대명사(it)로 받았지만 요한은 남성대명사(He)로 받았다. 그는 로고스를 메시야로도 보지 않았다.
요한이 그리스도의 칭호로 로고스를 선택한 이유는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품성, 마음, 및 의지를 나타내시고자 오셨기 때문이다. 언어는 사상의 표현 방식이 된다. 로고스는 창조와 구속의 권능을 지녔다.
요한복음 서언은 로고스의 3가지 중요 국면들, 즉 로고스의 신성과 아버지와 밀접한 관계, 그의 창조주로서의 사역 및 로고스의 화육에 관하여 상설하고 있다. 요한은 사도들의 가르침은 ”생명의 로고스“라고 소개한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요일 1:1-2). 요한계시록은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계 19:13)하여 “하나님의 로고스”가 역사의 마지막 심판단계에서 등장하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로고스”는 마음과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는 분으로 대제사장이 되어 승천하였다고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히 4:12-14).
베드로는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Logos)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고 썩지 아니하는 로고스 사상을 제시하였다.
그리스도교 교리 발전사를 통하여 로고스 기독론 이해의 역사는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되어 갔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로고스가 헬라의 우주론적 사변에 의하여 결정된 어떤 내재적 원리나 법칙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라틴어 성경에서 로고스를 "sermo(강설,講說, 베풀어진 말씀)"로 번역 표기하고 있는 점은 이를 증거한다. Tertullianus는 Apology에서 “말씀(verbum)"이라는 용어를 채택하고 있다.키프리안에 따르면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선지자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강설,“ ”하나님의 강설인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 심지어는 ”강설 말씀(verbum sermo)이었다.(Cypr. Test. 2.3.).
(요한복은 서두는 당시에 기독교 계통의 한 분파로서 왕성한 활동상을 보이고 있던 영지주의에 대한 대응의 결과로 들어간 내용이라고 보는 해석도 가능하다.)
2. 로고스의 구약성경 배경
요한복음 이전에 구약성경은 로고스 사상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창 1:3).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저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계의 모든 거민은 그를 경외할지어다.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 33:6-9).
위 본문에 비추어 보면 말씀은 어느 정도 인격적인 특성을 갖추고 있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시 107:20).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시 147:15; 18절 역시 참고). 말씀은 그 목표를 이루고자 역동적인 활동을 한다.
하나님의 지혜 역시 인격화되어 나타난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우심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잠 8:22-26).
70인 역에서 구약성경의 rbd “다바르(dabar)”를 로고스로 번역하여 그 창조적 권능 (시 33:6; 참고. 창. 1:3, 6, 9, 등.)과 신적 마음과 뜻을 전하는 의사교통(렘 1:4; 겔 1:3; 암 3:1)의 특성을 살리고 있다.
III. 교부시대 로고스 기독론 사상
1. 양자론적 로고스 기독론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한 이단은 알로기(Alogi) 파(2,3세기) 요한의 로고스 교리가 신약의 다른 교훈과 충돌된다고 하여 그의 저서들을 배척하였다. 이들은 예수가 비록 동정녀에게 이적적으로 탄생하였지만 오직 인간일 뿐이며, 그가 침례받을 때 그리스도가 강림하시어 초자연적 능력들을 부여하셨다는 것이다.
알로기파의 사상은 제 3세기에 나타난 역동적 단일신론(力動的單一神論 Dynamic Monarchianism)으로 이어졌다. 역동적 단일신론의 처음 대표자인 비잔티움의 데오도투스(Theodotus of Byjantium)가 로마의 감독 빅토르(Victor)에 의하여 파문되어 그 세력이 점점 약해져 가다가, A.D. 260년경 안디옥의 감독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mosata)에 의하여 부흥하였다. 그에 의하면 예수는 수침 시 Logos를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이는 일종의 양자론적인 기독론이다. 그래서 그는 보통 인간 예수와 구분되는 존재가 되었다. Logos는 비인격적인 신적 이성, 하나님의 권능이어서 이 Logos를 받은 예수는 수퍼스타가 되었다. 이 신적 능력은 인간 예수 안에 점점 침투하여 그 인성을 신화(神化)하였다. 이렇게 인간 예수가 신격화하였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그를 하나님으로 볼 수는 없으나 하나님의 존영(尊榮)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사모사타의 바울은 예수와 로고스를 구별하여, “예수”는 다른 사람과 동일한 인간으로, “로고스”는 비인격적인 신적 이성으로 보았다. 그의 로고스 기독론의 교리는 위의 단일성과 성의 단일을 의미하는 하나님의 단일성을 주장하는데 그 초점이 있었다.
2. 종속론적 로고스 기독론
신플라톤주의가 풍미한 알렉산드리아에서 오리겐(Origen)은 동방신학의 전통을 세운 태두였다. 그는 신의 창조 시 모든 것 중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 로고스라는 사상을 배척하였다. 그는 로고스의 선재를 주장하였으며 로고스는 시간 속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고 영원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유출(emanation)하였다. 로고스는 아버지와 같이 동일한 본질에 속한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와 다르며 아버지에게 종속된다. 아들은 제2의 하나님이다. 구원은 이간이되 되신 로고스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3. 차등적-종속적 로고스 기독론
제 4세기의 아리우스에 따르면 아버지는 아들에 선재하고 성자 하나님은 낳기(begetting)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리스도는 무 존재(non-being)로부터 피조적 존재(creature)로 나왔다고 한다. 모든 존재가 본질상 하나님과 다른 것처럼 말씀도 아버지와 다르다 (heteroousios)는 시각에서 시작이 없으신 성부와는 동등하지 않다. 하나님은 인간을 직접 창조한 것이 아니고 시간 속에서 또는 시간 이전에 먼저 로고스를 창조한 후 이 로고스가 인간을 창조하였다. 아버지는 이 세상을 직접 창조하지 않았고 아들이 창조하셨다. 성자가 말씀(로고스), 아들, 지혜, 권능, 빛이라는 상징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그리스도를 나타낸 이런 상징들이 아버지에게 적용되는 경우와는 사뭇 차이가 있다. 아버지로부터 파생된 것과 아버지가 지니신 것과는 구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4. Logos-Flesh 기독론
라오디게아 감독 Apollinaris (c. 360)는 안간 구조의 삼분법에 따라 인간을 soma(몸), psyche(식욕, 정욕 등 욕망의 animal soul), pneuma(rational spirit)로 구성되었다고 보았다. 그리스도는 soma와 psyche를 지녔지만 인간의 pneuma는 지니지 않고 신적 로고스로 대체되었다고 본다. 그리스도는 2/3 정도만 인간일 뿐이다. 여러 차례 정죄 받아 오다가 AD 381년 콘스탄티노플회의에서 정죄 당하였다. 그는 사람이 신, 혼, 영의 3부로 구성되었다는 헬라 철학의 3분설의 개념을 가지고 로고스가 죄의 좌소인 영의 자리를 취하셨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관심사는 로고스의 신적 본질을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이라는 사상에 만족하지 못하고 사람이 그리스도의 인간적 존재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에 있었다.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은 신적 특성을 소유하여야 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의 삶과 사망은 인간의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리아의 태는 하나의 통로일 뿐이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영이 없는 육(flesh)을 입으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오직 하나의 본성과 하나의 본체만을 가졌다. 이 본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육체로 변했던 로고스의 본성이었다.
아포리나리스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적 요소와 신적 요소가 결합되었다는 사상이나 로고스가 단지 사람의 본성을 입고 있다가 그것과 영적인 방법으로 결합하였다는 사상을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그리스도는 신체를 가졌지만, 그는 신체는 어떤 방법으로 승화하여 거의 사람의 신체가 아니었다는 신성 강조에 편중하였다. 그의 관심사는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희생시키지 않고 그리스도의 위의 단일성을 확보하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무죄성을 지키는 것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이런 신학적 사상에 대하여 안디옥 신학자들, 특히 카파도키아 교부들은 반대하였다. 그러나 아리우스 사상을 제어하는 일에는 기여하였다.
5. Logos-Man 기독론
성경을 풍유적으로 해석한 것에 경도된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과는 달리, 안디옥학파는 역사적, 문법적 해석을 고수하였다. 안디옥학파의 기독론 대표자는 428년에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가 된 Nestorius였다.
안디옥에서 발전된 기독론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과 혼 모두를 가졌으며 그의 인성은 성장의 과정을 거쳤다고 보았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같은 본질이었으나, 로고스는 인간으로 변형되지 않고 여전히 자신의 신적 본질을 간직한 상태에서, 스스로 인간의 형체를 입으시는 동시에 자신을 인간의 본성과 연합하였다. 이러한 연합에 있어서 로고스가 인간의 본성을 하나의 신체적 기관으로 사용하셨고 그것을 통하여 일하신 것이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이 두 본성이 여전히 차이가 있으며 각기 독립적인 실체로서 그들은 단지 두 요소 사이에는 도덕적 본성의 통일, 의지의 통일이 있고, 활동과 목적의 일치에 의하여서만 연합되었다. 아포리나리스처럼 육체의 문제가 아니었다. 안디옥학파에게는 로고스와 인성의 융합은 불가능하였다.
안디옥학파의 관심을 이끈 사항은 하나님의 불가고통성(impassibility)의 문제였다. Theodore(428 死)는 로고스가 “나의 본성은 파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나 자신은 파괴 당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씀한 것으로 제시하였다(Hom. catech. 8.6). 신성에 따라 불가고통성이지만 인성에 따라 가고통적이라고 본(Ep. Cyr.2.4) 네스토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학파의 인성-신성혼합의 교리는 로고스의 불가고통성 교리를 위협할뿐만 아니라 인간 예수의 가고통성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린다고 보았다.
IV. 맺는 말
사도들은 당대의 로고스란 용어를 빌려 헬라 문화권의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를 밝히므로 선교의 기폭제로 삼았다.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복음을 증거하는 접촉점이 되는 용어의 선택은 복음진리에 대한 불필요한 마찰과 소위 이교적 혐오감을 피하면서 위임된 사명을 완수하는 방편이 될 것이다. 한국에서 초기에 엘로힘(데우스)을 “천주(天主)”라고 표기하므로 동양인의 도덕적 대상인 천제(天帝)를 연상케 하고 “하느님”이라고 부름으로 하느님이라는 전통신앙에 이질감을 피하게 하는 총명한 번역이 되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리스 철학이나 헬레니즘화된 유다주의의 로고스 사상 내용으로부터 초탈하여 구약성경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로고스 히브리사상의 틀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하였다. 로고스는 그리스도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나타내는 말이 되었다.
교부시대에 다양한 로고스 기독론들이 전개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확립, 인성 확립 및 양성의 관계 이해를 모색한 부산물들이다. 교부시대 에큐메니칼 회의에서 설정 채택된 신조들에 나타난 기독론에서는 로고스라는 표현을 피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지혜와 언어의 한계를 피하지 못하면서, 그리스도의 양성 문제와 그 상호관계를 성서의 시각에서 이슈를 풀어보고자 하는 고뇌가 담긴 시안들을 엿보여 주고 있다.
“그리스도는 본질적으로 그리고 최고의 의미로 하나님이시다. 그는 영원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하나님이시다 ”(화잇주석, 요 1:1-3).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전부터 계셨고, 명확히 독립된 개체이시지만 아버지와 하나이시다. 그는 하늘의 뛰어난 영광이셨다”(화잇주석, 요 1:1-3).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지금까지도 신비요, 앞으로도 신비로 남아 있을 것이다. 나타난 것은 우리와 우리의 자손들을 위한 것이지만 근본적으로 그리스도를 전혀 우리와 꼭 같은 인간으로 만들어 버리지 못하도록 모든 사람에게 경고하라. 신성과 인성이 연합한 정확한 때를 우리들이 알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계시해 주신 대로 우리들은 우리의 발을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계속 굳게 디디고 서 있어야 한다”(화잇주석, 요 1:1-3,14).
“그리스도의 신성의 영광이 잠시 동안 그가 입으신 인성으로 가리워졌지만 그가 사람이 되셨을 때도 하나님이시기를 그친 것이 아니었다. 인성은 신성을 대신하신 것이 아니었고 신성도 인성을 대신하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경건의 비밀이다. 신성과 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밀접하게 그리고 나눌 수 없는 하나가 되었지만 그 양성은 확연히 구별되는 개별성을 갖고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비록 자신을 낮추사 사람이 되셨지만 여전히 그는 삼위 하나님 중의 한 분이셨다. 그가 신실하고 충성을 다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의 신성은 그대로 있었다”(화잇주석, 요 1: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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