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론의 2대 모델
기독론의 2대 모델
I. 서론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해와 케뤼그마가 여러 유형들로 형성되어 왔다. 스킬레벡스는 초기 기독교공동체의 그리스도론의 모델 네 가지를 설정하고 있다. 이 기독론론의 모델에는 종말론적 소망의 표현인 마라나타 (Maranatha 또는 Parousia) 기독론, 신인(Theios Aner) 기독론, 지혜(Sophia) 또는 로고스 기독론, 파샤(Pascha) 또는 부활(Easter) 기독론이 제기되어 왔다. 이들 모두는 예수의 인격에 토대를 두고 있어 상호 맥락을 지녔다. 전통적 그리스도론은 대체로 본체론적 기독론이 대종을 이루어 왔으나 오스카 쿨만은 신약의 기독론(Christology in the New Testament) 끝부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 보다는 기능에 역점을 둔 기능적 기독론을 설파하였다. 이 외에도 현대신학에서 Moltmann은 장차오실 분으로서의 그리스도, 즉 “앞으로부터의 기독론(Christology from ahead)”을 전개하였다. 이는 종말론론적, 성령론적 및 삼위일체적 기독론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근본적 시각의 차이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즉, “위에서부터의 기독론”과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이라는 두 모델이다. 역사적 기독론 연구에서 “위에서부터의 기독론”과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의 양대 줄기는 각 시대를 통하여 이어져 온 흐름이 되어 왔다. 이 양대 줄기는 예수 그리스도에 향한 신앙공동체의 고백적 특징을 안고 있다.
“위에서부터의 기독론”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는 삼위일체 교리와 영원한 로고스의 성육신 교리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은 예수의 인성으로부터 시작하여 점차적으로 그의 메시야 의식과 신성에 까지 이르는 방식을 취한다.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은 1세기에 팔레스틴에서 살았던 예수의 역사적인 구체적 사역으로부터 전개한다. 이 두 유형의 기독론은 일종의 방법론적 성격을 지녔다.
이 두 유형은 역사적으로 그 주장자들에 따라서 그 내용에 차이가 있다.
II. 아래로부터의 기독론(Christology from Below)-에비온파적 기독론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역점을 둔 기독론을 전개한다. 주로 안디옥 학파의 기독론이 이 추세를 띄었다. 이 입장에서는 예수를 수퍼스타와도 같은 역사적인 인격으로 보고 있다. 이 방식에 있어서 예수는 이상적인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완전한 사람, 인간이 지향해야할 인간의 原象(Urbild), 즉 이상적 인간으로 인식된다. 이 조류의 기본적 입장은 예수의 완전한 신성과 성자와의 동등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현대에는 자연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귀납법적인 이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이 강조되고 있다. 현대신학에 있어서 이 방식의 대표자는 실존의 조건 속에서 하나님과의 일치성을 잃지 않은 예수를 추구한 폴 틸리히, 부활을 중심으로 역사적 예수로부터 출발한 W. Pannenberg 등이다.
이상적 인간 모델에 역점을 둔 이 방식은 예수의 신성을 약화시키거나 제한시키는 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해에서 구원론적 동기보다는 모델이나 모범적 인간의 죽음으로 보기 쉬운 점 등이 문제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A. The Ebionites
에비온파는 유대교적 특성을 지닌 기독교의 한 분파로 구약성경의 율법에 역점을 둔 신학적 특색을 지녔다. Epiphanius에 따르면 이들은 AD 66년 예루살렘 파멸 시 Pella 지역으로 피난한 그리스도인들까지 소급된다.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다. 그는 수침 시 성령강림으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가 되었다. 예수는 하나님 율법 준수의 전형적인 모델이 되어 이 신분을 취득하였다.
에비온파는 보통 사람이었던 예수가 수침 시 성령강림으로 메시야가 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메시야의 수난과 고난에 대하여는 덜 강조하였다. 에비온파의 기독론이 그리스도의 신성과 동정녀의 탄생을 부인한다는 점에서 이단으로 비판되어 왔다. 그러나 그들의 재림소망, 천년기 신봉, 안식일 성별 와 율법준수 및 에비온사람들이란 용어가 “가난한 사람들”을 뜻하는 것이 시사하듯이 금욕주의적, 채식주의적 생활양식의 돋보이는 점도 있다. 물론 이런 돋보이는 점들에 대하여도 극단적인 점이 들어 있었다. 갈라디아서 같은 바울 편지서를 배척하고, 마태복음, 베드로와 야고보 편지서 등을 경전으로 옹립하는 편향적 신약 경전관을 보여주었다.
에비온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주로 그들에 대한 비판 문헌들을 토대로 하여 그들의 본색을 거론하여 왔다는 문제점은 극복되어야 한다.
B. 역동적 단일신론, Dynamic Monarchianism)
이름이 암시하는 대로 역동적 단일신론은 신성의 통일성을 강조한다. “군주”(monarch)는 문자적으로 ”유일한 통치자“를, "역동( Dynamis)"은 “권능”을 뜻하는 헬라어에서 유래한다.
Theodotus 는 그리스도 안에 있던 신성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비인격적 권능(dynamis)이고 하나님 자신은 아니라고 보았다. AD 195년에 이 주장은 정죄 받았다. AD 260년 경 안디옥교회의 감독 Paul of Samosata (3세기)는 이 역동적 군주론을 발전시켰다. 예수는 수침 시 Logos를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이는 일종의 양자론적인 기독론이다. 그래서 그는 보통 인간 예수와 구분되는 존재가 되었다. Logos는 비인격적인 하나님의 힘이어서 이 Logos를 받은 예수는 수퍼스타가 되었다. 모세나 선지자들 안에도 로고스가 거주하였지만 예수의 경우 양적으로 그들보다 훨씬 능가하는 거주였다. 예수가 자신의 고유한 신성을 갖지 못하고 참된 인간 영혼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신성한 능력이 예수의 인간 육체에 생기를 넣어 주었다고 가르친다. 역동적 군주론자들은 신성의 통일성을 견지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완전히 부인하여, 그를 단지 하나님이 택하여 메시야가 되게 하고 신성의 위치에까지 격상된 단순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이 이론의 변형된 형태인 양자론(Adoptionism)에 따르면, 인간 예수는 완전에 도달했고 침례 시에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되었다.
오늘날 유니테리안들에게도 이 입장이 나타나고 있다. 사모사타 바울의 양자론은 AD 268년 안디옥 회의에서 배척 받았다.
단일신론은 사실상 영지주의의 많은 신과 마르시온의 두 신(神) 개념-그가 악한 하나님이라고 생각했던 구약의 하나님과,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여겼던 그리스도-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반작용적인 운동이 종종 그러하듯이 그것은 극단으로 나아갔으며 그 결과 나중에는 교회가 단죄할 수밖에 없다고 여길 정도로 이단이 되었다. 군주론의 특징을 이루는 경향은 대부분 교회로부터 영지주의적인 가르침을 몰아내고자 하는 것이었으나, 이 치료책은 예상과는 달리 그 질병을 고치기는커녕 오히려 큰 황폐를 야기했다. 군주론과의 싸움은 2세기 말에 시작되어 3세기까지 계속되었다.
A. Ritschl에게도 이 역동적 단일신론 성향이 나타난다.
C. Arius (c. 250-c.336)
(별도 자료 참고)
D. Nestorius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 이후에 교회의 관심은 소위 그리스도의 본성과 인격(person) 문제에 관한 기독론적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요소들의 본질을 정의하고, 이 둘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어떻게 두 개의 본성이 한 인격 안에 함께 존재할 수 있는가?
이 논쟁의 국면은 각각 알렉산드리아와 수리아의 안디옥에 있던 서로 상반되는 두 학파로 집중되었다. 두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의 진정한 통일성을 인정했으나,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두 본성의 통일성을 강조하면서 신성의 중요성에 역점을 둔 반면에, 안디옥 학파는 두 본성의 차이를 강조하면서 인간적인 국면의 중요성에 역점을 두었다. 안디옥 일파들은 신성과 인성이 끊임없는 공존과 협력관계에 들어가긴 했으나 실제적으로 결합되지는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한 인격 안에 있는 두 본성을 분리하고 완전한 결합이 아니라 단지 영구적인 교제가 있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와 인간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를 예리하게 구분하였으며, 인성을 더욱 뚜렷하게 인식하였다. 그들은 두 본성의 연합이 각자의 의지의 연합을 통하여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인간 본성은 실제적이고 온전했다는 이론을 견지했으나, 인격의 통일성을 위태롭게 했다. 인격의 통일은 불완전하고 불충분하고 확고하지 않고 무의식적인 연합이었으며, 이로써 두 본성은 자의식을 가진 단일 인격의 참된 연합을 이루지 못했다. 이와 달리,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두 본성이 기적적이고도 완벽하게 혼합되었는데, 인성은 신성과 하나로 융합되지만 신성에 종속된다고 보았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이 인성 속으로 들어갔고, 이러한 신성과 인성의 연합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인류를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 두 학파의 충돌은 5세기 초에 있었던 네스토리우스 논쟁에서 절정에 달했다. 안디옥 출신의 네스토리우스는 참 신성과 참 인성을 인정하였으나, 그것들이 자의식을 지닌 단일 인격 속에서 연합된다는 점은 부인하였다. 네스토리우스가 생각하는 그리스도는 실제로는 도덕적 및 공감적인 연합을 누리는 두 인격이지만, 상대 인격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받지 않는다. 신성은 비하(卑下)되지 않으며, 인성은 승귀(昇貴)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있고 사람도 있지만 신인(神人)은 없다.
안디옥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 사이의 논쟁을 진정시키기 위한 제3차 기독교 총회가 431년에 에베소에서 소집되었다. 이 총회는 네스토리우스와 그의 가르침을 단죄하였으나, 니케아 신조를 대체할 새로운 신조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상호간에 골이 깊어지고 이에 따른 논쟁만 격화되어 다른 모든 교리 문제들을 방치하게 되었을 뿐 실제로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E. Liberalism 및 the Old Quest
F. Pannenberg 및 Now Quest
III. 위로부터의 기독론(Christology from Above)
위로부터의 기독론은 예수의 신성에 그 초점을 둔 방식을 취한다. 이 입장의 성서적 근거는 빌립보서 2:6-8에 두고 있다. 이 방식은 일종의 우주론적 지평 관점에서 허무하고 유한 사물을 넘어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를 추구하는 연역적 방식이다. 이 접근 방식은 초기교회 이래 가장 오래된 고전적 방법이다. 주로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이 추세를 띄었다. 흔히 가현론적 기독론(Docetic Christology)이라고도 한다. 이 입장에서는 예수의 완전한 인성을 부인 내지 약화시킨다. 인성이란 보이는 듯하지만 가현적일 뿐이다.
현대신학에 있어서는 Karl Barth가 이 입장의 전형적 대변자이다. E. Brunner 역시 이 방법을 선호한다.
그러나 이 방식은 예수의 신성 논증의 사변성, 로고스에 역점을 둔 결과 역사적 예수에 대하여 등한시한 점, 영원 무한하신 하나님이 유한 가멸적 인간 안에 임재한다는 난제 등에 직면하는 문제점들을 지녔다.
A. Gnosticism (2세기)
영지주의는 일종의 혼합주의로 그리스 이원론에 입각하여 신이 악한 육신으로 화육한다는 것을 부정한다. 그리스도는 최고신 하나님의 밀사로서 gnosis를 가져 왔다. 그러나 그는 육신으로 화육한 것이 아니고 잠시 인간의 모습으로 비쳤을 뿐이다. 육신을 포함하여 물질은 악할 뿐이다. 인간은 그리스도가 가져온 영의 해방 지식(gnosis)를 통하여 가능한 것으로 묘사하였다.
영지주의의 아류인 Docetism이 전형적인 가현설적인 기독론을 펼쳤다. dokein(~처럼 보인다) 수 있듯이 이라는 희랍어에서 알 수 있듯이 그리스도의 인성은 겉으로만 인성으로 보였을 뿐 비실재적인 것, 즉, 幻影이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그리스도의 고난 역시 비실재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초기의 믿을 만한 전승에 다르면 시몬 마구스(참조 행 8:9-24)가 그리스도의 본성과 인격에 관한 오류를 처음으로 제창한 자이며 따라서 첫 번째 기독교인 영지주의자라고 지적하고 있다. 혹자는 그 후 몇 해 후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케린투스(Cerinthus)라는 기독교인이 영지주의자로 보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라는 것은 겉모습만 그렇게 보였을 뿐, 실재는 아니라고 함으로써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주장을 했다.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완전히 부인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보통 인간인 예수라는 존재를 일시적으로 소유한 유령 즉 “아이온”(aeon)이었다는 개념을 갖는다. 신성이 실제로 성육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영지주의가 기독교에 미친 엄청난 영향력에 관하여 교회사가인 래투릿은, ”얼마 동안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여기던 자들 가운데 다수가 여러 가지 영지주의 형태 중 이런저런 형태를 고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사도 시대에 점차적으로 생기기 시작한 영지주의는 교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2세기에는 절정에 달했다. 교회는 영지주의의 심각한 위협을 인식하고 줄기차게 싸워 승리하였다.
이레내우스는 2세기 후반에 쓴 글에서, 요한이 케린투스의 가현설적인 견해들을 반박하려는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복음서를 기록했다고 말한다. 요한은 자신의 편지에서 이단적인 가현설에 대하여 더욱 분명하게 경고하면서 그 지지자들을 “적그리스도”로 낙인찍는다(요일 2:18-26; 4:1-3, 9, 14; 요이 7, 10). 바울은 로마에서 첫 번째 투옥기간 중에(AD 62년경) 골로새에 있는 신자들에게 가현설의 오류에 관하여 경고하였고(골 2:4, 8, 9, 18), 거의 동시에 베드로는 더 강력하게 경고의 음성을 높였다(벧후 2:1-3). 유다도 가현설의 이단에 대하여 언급한다(유 4절). 계 2:6의 “니골라당”은 전적으로 가현설 주창자들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영지주의자들이었다.
2세기 초반에 여러 영지주의 교사들이 일어나서 유해한 이설들로 교회를 괴롭혔다. 그들 중에 두드러진 이들은 알렉산드리아 출신 바실리데스(Basilides)와 발렌티누스(Valentinus)였다. 그러나 아마도 가장 영향력 있고 성공적이었던 가현설 사상의 주창자는 2세기 후반의 마르시온(Marcion)이었을 것이다. 그는 결코 영지주의자가 아니었지만, 그리스도에 관한 그의 견해는 영지주의자들과 매우 흡사했다. 그는 예수의 출생과 육체적인 생애 그리고 죽음은 실제가 아니었고, 단지 실제 같은 모습을 보였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2세기 후반에 이단에 대항하는 위대한 정통파 수호자로서 이레내우스가 용감하게 나섰다. 그의 논쟁적인 저서 이단들에 대항하여(Against Heresies)는 특히 영지주의 이단을 겨냥한 것으로서 오늘날까지 보존되었다. 이레내우스는 하나님의 통일성(unity)을 강조했다.
B. 양태론적 단일신론 (Modalistic Monarchianism)
서머나 지역의 Noetus와 Praxeas가 처음으로 양태론적 군주론을 주장하였으나 Sabellius (3세기)가 이 이론을 발전시켰다. 사벨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하나님과 동일시하였다. 성부, 성자, 성령은 하나인 동시에 동일 본질에 속하기 때문에 그 이름으로써만 구분된다. 그는 태양, 열, 광선의 상호관계 논리를 삼위에 비유적인 적용을 하여 아버지는 태양, 아들은 광선, 성령은 가열 능력으로 보았다. 요컨대 삼위는 같은 하나님의 현현하시는 존재 양식으로 보았다. 현대 유니태리안 교도에 까지 이어지는 이 양태론적 군조론은 성부, 성자, 성령의 인격이 구분되는 존재라는 점을 부정한다. 삼위의 각 칭호는 시대별로 하나님의 현현 양식일 뿐이다. 신성에 역점을 둔 이 입장에서는 그리스도가 참된 완전한 인성을 지녔다는 점을 부정한다. 역동적 군주신론과의 차이점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하나님과 동일시하였다는 점에 있다.
양태론적 군주론자들은 한 하나님이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냈다고 가르쳤다. 그들은 인격의 구분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삼위일체적인 성격에 관한 신조를 완전히 버렸다.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의 참된 신성을 인정했으나, 그 둘은 동일한 신적 존재에 대한 서로 다른 명칭에 불과하다는 설명을 서둘러 첨가했다. 이 견해는 종종 성부수난설(Patripassianism)이라고 불리는데, 그것은 아마도 성부가 성육하여 아들이 되었고 그 후에 그리스도로서 고난을 받고 사망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와 비슷하게 부활 시에 아들은 성령이 되었다. 이 학설은 가장 유명한 지지자인 사벨리우스(Sabellius)의 이름을 따라 사벨리우스주의(Sabellianism)라고 불린다. 사벨리우스주의자들은, 동일한 신적인 개체가 삼위(三位)의 명칭들을 가지고 다양한 우주적 기능을 수행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성육하기 전에는 그 신적 존재는 아버지였고, 아버지는 성육신 때에 아들이 되었고, 부활 시에 아들은 성령이 되었다.
3세기 초에 테르툴리아누스는 양태론적 단일신론을 반박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의 인격성과 신성의 통일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는 하나님보다 서열이 낮은 지위에 속한다고 제안했는데, 이것이 종속론(Subordinationism)으로 알려진 이론이다.
[참고: 3세기 중엽에 오리겐(Origen)은 ‘영원한 세대’라는 이론을 내놓았는데, 그것은 아버지만이 최상의 의미에서 하나님이라는 주장이다. 아들도 아버지와 영원히 공존하지만,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파생되었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이다. 오리겐이 잘못 생각한 대로, 인간의 모든 영혼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영혼도 선재하였으나, 순결하고 타락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영혼들과 달랐다고 믿었다. 로고스 즉 신적인 말씀은 예수의 인간 영혼과 해체할 수 없는 연합을 이루게 되었다. 오리겐은 요 1:1에 나오는 하나님(theos)과 그 하나님(ho theos)을 구분한 후에, 아들은 근본적이고도 절대적인 의미의 하나님이 아니며, 단지 호 데오스가 아닌 데오스라고 부를 수 있는 제2등급의 신성이 주어짐으로써 “하나님”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피조물과 창조되지 않은 것의 중간이 될 것이다. 오리겐은 아리우스주의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질 수 있다.]
C. Apollinaris (4세기)
라오디게아 감독으로 지낸 아폴린나리스(c. 360)는 인간 구조의 삼분법에 따라 인간을 soma(몸), psyche(식욕, 정욕 등 욕망의 animal soul), pneuma(rational spirit)로 구성되었다고 본다. 그리스도는 soma와 psyche를 지녔지만 인간의 pneuma는 지니지 않고 신적 로고스로 대체되었다고 본다. 그리스도는 2/3 정도만 인간일 뿐이다. 여러 차레 정죄 받아 오다가 AD 381년 콘스탄티노플회의에서 정죄 당하였다.
D. Eutyches (c. 378-454)--에베소회의(431)에 Nestorius를 반대하고 알렉산드리아의 Cyril을 지지, 사실상 Apollinarianism지지, 그리스도는 화육 전에 두 본성을 지녔으나 화육으로 두 본성이 연합한 후에는 하나의 본성, 즉 제3의 본성(tertium quid)으로 되었다. 이 연합에 있어서는 신성이 중심이 되어 마치 대양에 꿀방울이 떨어지듯이 신성에 인성이 합류된 것이다.
E. Monophysites(단성론)--Cyril of Alexandria은 그리스도가 오로지 하나의 본성을 지녔다고 보았다. 에베소 총회 후에 단성론 혹은 유튀케스주의(Eutychianism)라고 알려진 또 다른 이론이 일어나 자리를 잡고 그리스도에 관하여 네스토리우스의 주장과 정반대 이론을 발표했다. 이 학설의 주창자인 유튀케스(Eutyches)는, 성육할 때 예수의 본래의 인성이 신성으로 변했으며, 그 결과 인간 예수와 신성을 지닌 그리스도가 한 인격, 한 본성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의식의 통일을 주장했는데, 두 본성이 완전히 융합되어 사실상 각자의 정체성을 상실하였다고 했다.
F. Monothelites(단의론)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두 본성은 두 가지 본성을 주관하는 한 의지에 의하여 행동하는가 아니면 두 의지에 의하여 움직이는가?라는 문제에 대하여 단의론자들은 신성의 의지가 우세하여 인성의 의지는 그 속에 잠기게 된다고 여겼다. 680년에 열린 제3차 콘스탄티노플 회회에서, 의지는 한 인격에 관한 문제라기보다는 두 본성에 관한 문제라고 결의하였고, 의지를 가진 한 인격 속에 두 의지가 있다는 편을 옹호하였다. 이 결정으로, 서방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본성과 인격에 관한 정통적 정의가 완결되었으며, 오래 끌어왔던 삼위일체와 기독론에 관한 논쟁들이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730년경에 다메섹 사람 요한은 동방 교회 내에서 이 교리들을 다시 집약하였다. 동방과 서방 교회에서 종교회의의 결정들은 교의(敎義)가 되었다.
G. Neoorthodoxy 및 No Quest
H. 실존주의 및 New Quest
IV. 에큐메니칼회의
아리우스 논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AD 325년에 소집된 제1차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는 “정통파의 아버지”로 나서서,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있었고 그는 이전의 무존재로부터가 아니라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에서 왔다고 주장하였다. “한 본질”(one substance)을 뜻하는 호모우시오스(homoousios)라는 용어를 그리스도에게 적용하면서, 그가 아버지와 하나이며 동일한 본질을 가졌다는 신조가 이 회의에서 확인되었다. 호모우시오스는 다른 뜻으로 이해될 수 없었다. 이 회의는 아리우스주의와 사벨리우스주의를 바른 진리로부터의 이탈이라고 단죄하였으며, 삼위일체를 주장한다고 신성의 통일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며 신성의 통일성을 주장한다고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것도 아니라고 천명하였다. 그리하여 니케아 신조는,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난 자 […아버지의 본체, 하나님의 하나님], 빛의 빛, 참 하나님의 참 하나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난 바 된 아버지와 한 본질(호모우시온[homoousion])이다”라고 선언하였다. 이 신조는 삼위일체 정통 교리의 결정적인 시금석이 되었다.
아리우스주의자들은 회의의 결정을 거부하고 분파를 이루어 나갔는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아리우스주의는 교회의 가장 무서운 적이 되어 왔다. 니케아 종교회의 이후에 때때로 반(半)아리우스주의자라고 하는 무리가 교회를 괴롭혔다. 그들이 사용한 주요 단어는 호모이우시오스(homoiousios)였는데, 이 단어로써 그들은 니케아 총회 때 결정한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동일 본질”)와는 대조적으로, 아들은 아버지와 “유사 본질”을 가진 분이라고 설명하였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 및 갈게돈회의 및 또 다른 종교회의들은 니케아의 신조를 재확인하고 그 의미들을 명백하게 설명했으며, 삼위일체적 시각에서 문제의 핵심을 풀어 나갔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두 가지 참된 본성이 존재함을 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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