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많은 학자들은 “그리스도의 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답을 추구하여 왔다. Schoeps와 W. D. Davies는 “그리스도의 법”을 랍비 문헌 자료를 기초로 메시아를 통해 주어진 종말론적 혹은 메시야의 토라로 본다. Dodd, Räisänen과 Stoike이다. Dodd는 “그리스도의 법”을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롬 8:2)과 같은 것으로 여긴다. 그는 또 다른 연구에서 다음과 같은 진술한다: “그리스도의 법은 선택된 백성들로 구성된 사회를 위한 특수한 법전이 아니다. 이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본성의 계시에 바탕을 둔 것으로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인간의 위기 시 피하여야할 원칙들을 확실하게 한다.” 요컨대 Dodd는 이 “그리스도의 법”이 현재 모세 율법을 대치한 그리스도의 말씀(verba Christi)이라고 한다. Heikki Räisänen는 그의 이러한 관점을 확실하지 않은 것으로 비판하고 있다. Davies는 그리스도의 법을 그리스도의 말씀의 수집으로 여긴다. Raisanen은 그리스도의 법은 단순히 “그리스도 교회의 특성화된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도 법”의 의미에는 두 가지 다른 관점들이 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법은 모세 율법 또는 “믿음의 율법”(롬 3:27) 그리고 토라의 “성령의 율법”(롬 8:2)과는 구분이 된다는 해석이고, 다른 해석은 바울이 이 표현을 그의 상대자들로부터 얻은 것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몇몇 사람들은 이것은 바울 그 자신의 표현으로 보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법”이라는 문구의 의미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 가운데, 가장 최근의 해석은 “그리스도의 율법”(고전 9:21)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명의 성령의 법”(롬 8:2)과 같은 바울의 다른 유사한 표현들을 비교함으로 그 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들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문맥과 구약성경에 나오는 “여호와의 율법” 등 상응하는 표현들을 무시하거나 간과하며 그리스도의 율법관과는 거리가 먼 이해이다.
바울이 사용한 “그리스도의 법”이라는 형식은 바로 그 다음에 이어지는 문맥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갈라디아서 6:2의 문장은 전후의 배경을 하나의 단위로 읽어내야 한다. 동 구절의 본문은 말하길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한다. “다른 사람의 짐을 지고”라는 문구에서 “baros”라는 용어는 분명히 문맥의 진행 상황에 따라 앞에 나온 구문과 관련되어 있다(갈 5:13-6:10의 paraenesis). 바울은 “성령으로 행할지니”(갈 5:25)라고 모든 회중에게 호소한다. 갈라디아서 5:26에서 분노와 질투는 자기기만적 정신의 표현들이다. 이것은 사랑과 반대된다. 사랑이란 자기 자신을 돌보는 것과 같이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기 때문이다(갈 5:14). 이 구절에서 주제가 되는 것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어 나오는 절(갈 6:1)에서, 바울은 영적인 것을 원하는 사람들 또는 책임감을 가지고 자신들의 문제와 잘못들과 죄를 없애기 위해(갈 6:2) 갈라디아 교회에서 진정한 복음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부탁한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율법을 이룬다는(갈 5:14)는 진술은 다른 사람의 짐을 지라는 특별한 권고의 기초가 된다. 여기에서 바울은 율법의 정신을 강조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사랑의 율법(nomos)을 연계시켜 율법의 이 정신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새로워졌다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이 문맥에서 “그리스도의 법”을 사랑의 법으로 대치하는 해석은 맞지 않은 이상한 해석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의 법은 서로 짐을 지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짐을 서로 지는 것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것이다. 세상을 살면서 상처나고 깨어진 형제, 자매를 붙들고 함께 그를 빚어 만드신 하나님의 눈과 가슴이 되어 그의 고통과 비참을 함께 느끼며 마침내 그를 도와 그를 회복시키는 작업--이것이 바로 성령의 사역이며 우리의 회복의 사역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역의 외연이다. 우리는 우리 죄 짐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심으로 우리를 회복하게 하신 주님의 사랑에 빚진 자들이다. 이제는 우리도 서로의 짐을 기쁘게 져야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길이다.
구약성경은 율법을 하나님의 율법, 여호와의 율례 등 하나님께서 주신 법이라는 율법의 원천을 붙여서 표기하고 있다. 이른바 율법시인 시편1편, 19편, 119편에서 “여호와의 율법”내지 그 동의어적 표현들이 자주 나오고 있는 점에서 잘 드러나 있다. “여호와의 율법”이라는 표현은 율법을 주신 분의 성품의 발현으로서 법을 보도록 시사하고 있다. 율법은 하나님의 품성의 사본이 된다. 따라서 하나님과 율법을 분리시켜 표현하는 일은 자칫 율법의 원천되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을 수도 있어서 오해 소지를 만들 수 있다. 율법과 하나님을 떼어 놓는 일은 율법이 하나님의 품성의 사본임을 간과 내지 망각으로 유도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법을 분리시킨 결과는 율법에 대한 잘못된 이해의 시발점이 된다.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 이 모세의 탄원에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품성을 드러내는 선언을 하는 것으로 응답하셨다. 거룩한 율법의 시여 배경에는 하나님이 자기 계시 중에 어떠한 품성을 지니신 분인지 잘 나타나 있다.“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7 인자를 천 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 사 대까지 보응하리라”(출 34:6-7).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향한 사랑의 6가지 다른 표현들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담겨 있다. (1)“자비롭고(merciful, raham)”는 자궁이라는 단어에 어원을 두고 있다. (2) “은혜롭고(gracious, to bow down)”는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머리 숙여 절하는 뜻이 들어 있다. (3) “노하기를 더디하고(slow to anger)”는 긴(arak, slow, 더딘, 참는) 코(af, longsuffering)를 가졌다는 뜻이다. 따라서 화가 날 때 긴 코를 가졌기에 코로 씨근거리는 것이 더디다는 것이다. (3) “인자 (in goodness, steafast love)”는 언약적 사랑으로 끈질기게 친절하며 언약적 충성이 강하다는 것이다. (4) “진실(truth, 확고부동, 신뢰성, 견고한 사랑)”이 “많다(abundant)”는 것은 바다처럼 광활하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5)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keeping mercy for thousands)” 끝없는 사랑을 (6)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forgiving)”하신다는 것에서 용서는 “옮기다.” “들어 올리다,”“제거하다”는 뜻이다.
거룩한 법을 선포하기 전 선포자의 품성을 이렇게 상징적 언어로 나열한 것은 법의 근본정신, 진정한 정신을 자기의 품성으로 강조하신 것으로 보인다.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시내산에서 주신 율법의 정신이 흐려지고 편협하게 이해, 적용하고 있는 것을 개혁하셨다. 산상보훈은 시내산의 입법자가 그 진정한 정신을 되살려 놓으신 입법자의 해석이다. 사도들은 율법의 본래의 거룩한 특성이 왜곡, 상실되어버린 것을 회복하여 바로잡으시는 그리스도이시기에 “그리스도의 법”이라고 하고 있다. 이 그리스도의 법이라는 표현에는 그리스도 성품의 발현으로서의 율법을 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법이라는 표현에는 그리스도 중심으로 법을 보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정신을 구현해나가야 한다는 과제가 담겨 있다.
그리스도의 법은 구약성경에서 여호와의 율법이라는 표현과 동의어인 것이다. 도덕률 십계명의 근본정신은 오직 하나-사랑이다. 유대주의에서 이 하나님의 사랑의 원리가 배제된 율법 이해가 편만하여 있었다. 그래서 사도는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다. “새”는 없던 것을 새로 준다는 것이 아닌 기왕에 있던 것에서 그 근본정신이 망각, 유린되어 그것을 되살려 회복시킨다는 의미에서 “새 계명”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형제들에게 나아갈 때 율법은 이루어진다. 사랑할 때 회복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우리가 참으로 사랑한다면 형제의 회복을 도와 그가 다시 일어서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의 법, 그리스도의 법 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성품,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법으로 보고 읽어 내야 그 진정한 의미가 살아나는 것이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것은 이런 의미를 담고 있다. 예수께서 산상보훈에서 이점을 복구, 회복하여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다. 용서하고 이해하는 사랑을 등진 율법 강조는 독약을 살포하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Stoike는 역사적 조사연구와 해석적 관찰로부터 바울이 “그리스도의 법”을 교회시대를 위한 새로운 율법으로 조형한 것이 아니라, 그와 그의 대적자들 사이에 일어나는 논쟁에서 이 표현을 선택하므로 노모스라는 용어에 담긴 의미가 지닌 율법주의적 적용을 흐리게 하려고 노력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갈라디아에서 바울의 대적자들인 유대주의자들이 율법의 역할을 왜곡하고 이교도의 개종시에 그들에게 의식률을 부과하고자 했다고 하는 전통적인 논증을 고려한다면 바울이 ”그리스도의 법이라는 표현으로 계명과 사랑의 진정한 내용을 규명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이러한 해석은 사랑하라는 단순한 명령(갈 5:14)에서 다른 사람에게 도전하고 시기하는 것(갈 5:26)을 금하는 것까지 바로 이어지는 내용에 상응한다. 확실히 사랑은 “그리스도 법의 내용”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율법은 이 편지에서 긍정적인 가치를 가지는 사랑에 기초한다.
Schrenk는 “짐”이라는 단어에 의해 갈라디아서 6:2은 율법이 “도덕적 문둥병, 유혹, 죄”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고, 넓은 의미에서는 “사랑의 모든 임무”를 언급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 절은 그리스도인들 성품의 열매 부족이나 도덕적 기준의 결여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탈선을 설명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믿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열매를 보장하신다고 지적한다(갈 5:22-23). 따라서, 사랑은 도덕적 기준 없이는 무의미한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 없는 토라, 계명, 그리고 사랑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법”이라는 표현에서 그리스도는 토라의 해석에 있어서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율법과 사랑의 관계의 진정한 본성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상호 보완적이며 상호간에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율법의 범주는 그리스도의 도래와 함께 폐기되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견고하게 되었다는 것이 분명하다(고전 9:21). Nixon은 완전한 의미를 부여한다는 점과 부분적인 것으로부터 전체적인 것으로, 행위로부터 동기로 확대하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법을 모세 율법의 성취로 이해한다. 확실히 바울은 모세 율법과 “그리스도의 법”사이의 연속성을 견고하게 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법”이라는 표현으로부터 어떠한 “순수법” 개념도 상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속하는 남은 교회는 하나님의 품성으로 가득찬 사랑의 이해가 원동력이 되는 하나님의 계명을 온 세상에 전파하는 사명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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