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주의 종교가들이나 신학자들은 선교라는 개념을 거세시켜 버렸다. 그들은 전도를 기독교 제국주의의 확장 방식으로 간주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교에만 절대적 구원의 길이 있다고 보지 않고 다른 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원이 오직 그리스도만을 통하여서 온다는 시각은 종교 사이의 평화공존에 방해가 될 뿐이다. 그들이 흔히 사용하는 비유적 논거로 산 정상에 올라가는 길이 여럿 있듯이 구원의 길에도 여럿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을 종교적 상대주의나 신학적 다원주의라고 한다.
물론 다른 종교에도 선한 것이 있다. 그러나 그 선한 것은 은총의 파편일 뿐이다. 그 파편들은 구원의 길도 아니다. 초기교회 사도들은 여러 종교들이 지배하는 문화를 뚫고 들어갔다. 그들 대부분은 그런 개척 선교의 길에서 순교의 잔을 받아야 했다. 다른 종교에 구원의 길이 있다면 구태여 순교 당할 이유가 없다. 사도들은 선교의 대 위임명령을 받고 부활의 주님을 전하는 일에 신명을 바쳤다. 희미한 쪼가리 파편에 신명을 걸고 있는 타 종교에도 생명의 복음이 증거되어야 한다.
산정 상에 올라가는 길 비유는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먼저는 모든 종교의 목표가 똑 같다는 발상 자체에 문제가 함유되어 있다. 우선 부활의 소망에 토대를 둔 구원의 진리와 소멸을 지향하는 니르바나가 같은 것이 아니다. 또한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이나 수단이 같을 수 없다. 믿음과 은총을 수단으로 하여 오는 구원(의)과 자기 힘을 쏟아 부어 득도를 지향하는 자력종교의 수단은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점이 있든 데도 그것을 같은 선상에 놓고 보는 함정이 있는 것이다. 파편은 목표지점에서 빗나간 파편일 뿐이다.
“만민이 각각 자기의 신의 이름을 빙자하여 행하되 오직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영원히 행하리로다”(미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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