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죄(original sin) 이슈

           

 

들어가는 말

유한한 인간은 지적 한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죄로 인하여 손상된 인간의 마음에는 이해의 한계가 있는 영역이 많다. 유혹에 넘어간 인간의 본성은 너무도 타락하게 되어 그들 스스로 사단을 저항할 능력이나 의향도 가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비밀한 또한 신비한 이슈들을 대면하게 된 것이다.

 

불법은 비밀이다. “불법의 비밀(το μυστηριον της ανομιας; musterion tes anomias)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살후 2:7). 불법의 사람을 활동케 한 주체는 사탄이다. 이 사탄의 세력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막는 자때문에 현재로는 은밀하게 활동하고 있을 뿐이다. 바울이 본문에서 지적한 것은 종말론적 불법 비밀이지만, 모든 죄와 불법은 먼저 비밀리에 자행된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악에 대한 억제를 놓아버릴 때, 그 비밀리에 진행된 악마의 불법 비밀 활동의 전모가 들어날 것이다.

 

악의 기원도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온 일도 미스터리 영역에 속한다(GC 384, 385).

 

하나님의 말씀에는 그 신령하신 저술자의 품성과 같이 유한한 사람으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것이 있다.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온 것,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쓰신 것, 중생(重生), 부활, 그 외에 성경 가운데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은 사람의 생각으로 해석하거나 충분히 이해하기에 너무도 깊은 신비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의 신비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할 까닭이 없다. 천연계 가운데서도 우리는 항상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 둘려 있다. 아무리 비천한 생물이라도 매우 지혜가 많은 철학자의 능히 설명할 수 없는 난문제가 된다. 우리의 지식 범위 이상의 신기한 것들이 도처에 있다”(정로, 106).

 

원죄 논의 역사 개요

이와 유사하게 아담의 죄로 인하여 오늘 이 땅에 죄가 편만해졌지만, 그의 후손에게 전가되는 과정을 밝히는 일은 쉽지 않다.

이 원죄 이슈는 그 원죄 자체에 국한된 이슈가 아니다. 원죄 그 자체에 관하여 어떤 시각을 가지느냐에 따라서 여러 중요한 신학적 이슈들을 보는 시각이 달라질 것이 때문이다. 원죄가 여러 신학적 주제들과 얽혀져 있는 난제이기 때문에 단칼로 무 베듯이 자를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원죄 논쟁의 역사는 펠라기우스-아우구스투스 이래 오래되었다. 펠라기우스(360-420)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과 죄책은 아담의 죄와 무관한 것으로 신봉하였다. 그래서 아담의 죄책이나 타락한 본성은 후손에게 전가(imputation)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모든 사람은 아담이 죄를 짓기 전과 같은 상태로 탄생한다. 그리고 죄는 인간의 자유 선택에 따라서 행해진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의식적으로 행한 죄에 대하여서만이 책임이 있다고 본다. 이런 주장은 시 51:5에 어긋난다.

 

아우구스투스(354-430)는 죄가 유전적으로 후손들에게 직접적으로 전가된다고 주장했다. 이 전가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그래서 인류의 성품은 부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롬 5;12이 자기의 주장의 강력한 증거가 된다고 보았다. 모든 사람이 지었다고 한 것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짓는 원동력이 아담의 유전으로 인해서 결과가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Jacob Arminius, 1560-1609)와 그를 따른 자들은 아담의 죄의 결과로 본래적 의를 잃어버렸으므로 인간이 탄생할 때에는 아담의 죄의 결과인 부패한 본성을 지닌 채 탄생하다고 보았다. 타락한 본성은 아담의 죄의 유전 결과로 인간은 무력한 존재가 되어 이에 대한 책임은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아담 후손의 전적 부패를 인정하지만, 아담의 죄책을 이어 받은 것이 아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이중예정론이 아닌 조건적 예정론을 수용하였다. 아담의 죄책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해결하여 후손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죄의 유전으로 오는 부패성을 두고 롬 5;12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인간이 부패한 상태에서 성령과 협력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죄를 범할 때 죄가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갓난아이는 죄인 아닌 셈이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선행적 은총에 저항, 거절할 때 죄인이 된다. 이런 사상은 칼뱅주의의 맹렬한 비평에 몰려 항론파로 지목되었다.

 

칼뱅주의자들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과 죄책 모두가 아담의 죄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이런 시각에서 그리고 항론파의 주장을 배척한 1618년 도르트 회의(Synod of Dort)에서는 이른바 TULIP이라는 5대 교리를 결정하여 금과옥조로 삼았다. 5대 교리란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무조건적인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제한 속죄(unlimited atonement), 저항할 수 없는 은혜(irresistible grace), 및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이다. 훗날 칼뱅주의자들은 이 5대 교리 영어 첫 글자를 따서 튤립이라는 멋진 어휘를 조립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존 웨슬리는 아르미니우스 사상에 깊이 영향 받아 아르미니우스의 학생으로까지 불려졌다. 그는 원죄 개념을 수용하였지만, 그 원죄를 모든 인간에 영향을 준 유전된 부패성으로 보았다. 그는 심지어 갓난아이라 할지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마찬가지로 거듭나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아르미니우스와 차이점을 보여 준다 [John Wesley, The Doctrine of Original Sin According to Scripture, Reason and Experience In Answer to Dr. Tayler (New York: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in the United States, 1817, 340-341)]. 이리하여 그는 아르미니우스의 사상을 수정 보완하여 전개하였다. 그는 선행은혜 사상을 수용하여 생명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작동한다고 보았으며 의롭게 하시는 은혜의 사역은 성령을 통하여 성화된 삶으로 인도한다고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선택의 자유 역할을 중요하게 여겨 흔히 칼뱅주의적 전적 타락론에 함몰된 인간의 자유 선택의지를 살려 냈다.

 

재림교회 내 논의 양상

원죄논쟁은 재림교회 안에서라고 예외가 아니다. 원죄 관련 이슈들에 관한 논쟁이 1960년대 이후 교회 안에 소용돌이를 일으켜 왔다. 인간의 전적 부패론을 두고 로마천주교를 따라가는 신신학으로 매도하기 일쑤였으며, 죄를 행위 개념으로 축소 이해하는 시각을 펼치면서 무죄한 완전주의를 추구하는 분파운동도 일어났다. 필자가 교회에 나오던 때가 1960년대 초이어서 줄 곧 혼란스런 신학적 분위기 속에서 갈팡질팡하기도 했다. 이 원죄에 대한 시각의 차이에 따라 성화와 완전에 대한 시각의 차이로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 된다. 그리하여 성화와 완전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에 관한 이슈가 재림교회 안에서 뜨거운 이슈들이 되었다. 더 나가서 이 논쟁은 그리스도의 인성 이슈(참조, 필자 발표 논문)로까지 점화되었다.

 

1960년대에 이래 특히 Edward Heppenstall 박사가 앤드루스대학교 조직신학 교수로 활동하던 시절에 출판한 저술들은 (The Man Who Is God Salvation Unlimited) 비판의 타깃이 되었다. 그를 이은 후속 조직신학 교수들의 이름이 도마 위에 오르곤 했다. 특히 완전주의자들의 지나친 비판의 소리는 높았다. 북미주 지회는 줄기차게 그런 비판을 하여 온 사적 목회단체들과 일련의 대화를 하였지만, 결국은 갈라서는 단행본 Issues: The Seventh-day Adventist Church and Certain private Ministries을 발행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에서는 이른바 미국에서의 독립목회 운동을 따라 <견고한 토대> 같은 분파로 나가기까지 하였다. 이들은 재림교회가 역사적 재림신앙 노선을 버리고 로마 가톨릭의 원죄 사상을 수용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재림교단 내에서 몇 저명한 학자들은 계속하여 교단에 속하면서도 완전주의 시각을 보여 왔다. 예컨대, 즈커, 맥스웰, 더글러스 등이 그런 분들이다. Ralph Larson 박사는 로마린다의 Campus Hill 교회의 담임 목사로 재임 시 일련의 논문에서 헤펜스톨 교수의 책을 중심으로 비평을 전개하였다. 필자는 필리핀 실랑 캠퍼스에서 MAMDiv 과정을 이수 중 라손 박사 문하에서 실천신학 분야의 과목들을 이수할 때 그 분의 훌륭한 인품을 주목했고, 후일 미국에 유학 갔을 때, 그 분의 The Word Was Made Flesh : One Hundred Years of Seventh-Day Adventist Christology 도 출판하자마자 읽은바 있었다. 마닐라 석사과정 재학 중 그는 어느 월요일 아침 채플에서 이 이슈를 길게 강론하는 일도 있었다. 재림교회 내 논쟁의 긴 역사를 고찰한 자료는 이미 나와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언급을 피한다. 필자가 재림교회 내의 조직신학 석학 Raoul Dederen 박사와 Hans K. LaRondelle 박사의 문하에서 수학한 것은 행운이었다. 복잡한 신학적 이슈에 대한 이해를 정립하는데 있어서 결정적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재림교회 선구자들은 아르미니우스-웨슬리의 사상적 계보의 후예들이다. 특히 다음의 엘렌 화잇의 메시지는 전적 부패(타락)과 선행 은총 및 그리스도에 나가는 첫 단계인 하나님의 영의 이끄심을 받아야 함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빠진 죄의 구렁텅이에서 우리 자신이 힘으로 피해 나올 수는 없다. 우리의 마음은 악한데 우리가 그것을 고칠 수 없다.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14:4).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8:7). 교육과 수양과 의지력(意志力)의 연단과 인간의 노력은 각각 상당한 분한(分限)을 가졌으나 이것들이 마음을 변화시키는 일에는 무력한 것이다. 이것들이 혹 행위의 외모적 단정을 만들어 낼 수는 있다 할지라도 마음을 고칠 수는 없으며 생애의 동기(動機)를 깨끗케 할 수도 없다. 사람이 죄에서 벗어나서 성결하여지려면 먼저 마음속에서 동작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나니 곧 위로부터 새 생명을 받아야 한다. 이 능력은 곧 그리스도이시다. 오직 그의 은혜만 이 죽은 심령의 기능에 생기를 주어서 그것을 하나님께로 즉 거룩한 데로 이끌 수 있는 것이다”(SC 18).

 

사람의 본성에는 악을 행하려는 성향 곧 인간이 자신으로서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이 내재되어 있다. 인간이 이러한 힘에 대항하여 싸우며, 진심으로 유일한 가치로 받아들이는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힘으로부터이다. 그 힘은 곧 그리스도이시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한 일은 이 힘과 더불어 협력하는 것이다. 모든 교육적인 노력에 있어서 이러한 협력이 최고의 목적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Ed 29).

 

많은 사람들은 구속 사업의 첫 단계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혼돈하고 있다. 회개란 죄인 자신이 스스로 그리스도에게 나올 수 있는 한 가지 일로 여겨왔다. 또한 저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축복을 얻기 위하여 죄인이 반드시 합당한 자격을 얻어야 하는 줄로 생각하였다. 물론 회개가 용서의 선행 조건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께 가납하심을 받는 유일한 조건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며 죄인은 스스로 회개할 수도 없고 스스로 그리스도에게 나오기 위하여 준비할 수도 없다. 죄인은 회개하지 않는 한 용서함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회개가 죄인 자신이 하는 일이냐 아니면 그리스도의 선물이냐 하는 문제가 결정되어야 한다. 죄인이 그리스도에게 나오기 이전에 그의 마음속에 자신의 죄에 대한 가책으로 가득 차야만 하는가? 그리스도에게 나오는 제일 첫 단계는 하나님의 영의 이끄심을 받는 것이다. 사람이 이 이끄심에 응할 때에 그가 회개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는 것이다”(1SM 390).

 

그러나 원죄 논쟁은 끝나지 않고 있으며, 현대에 이르러 칼뱅주의 원죄관은 호되게 비판을 받아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어야 하는 신세로 전락되었지만, 그 잔불이 아직 남아 솔솔 불붙고 있는 양상이어서 세말까지 이어질 것으로 본다.

 

로마서 5:12 이해

로마서 5:12은 전통적으로 원죄 사상의 근간이 되는 성경적 근거가 되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ἁμαρτία))世上에 들어오고 로 말미암아 死亡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를 지었으므로(ἐπί) 死亡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δια τουτο ωσπερ δι ενος ανθρωπου η αμαρτια εις τον κοσμον εισηλθεν και δια της αμαρτιας ο θανατος και ουτως εις παντας ανθρωπους ο θανατος διηλθεν εφ ω παντες ημαρτον.)(5:12 ).

 

암브로시우스는 “epi ho(εφ ω)를 옛 라틴어 번역에 따라 "in quo"로 오독하여 (아담) 안에서(in whom)” 로 보았고, 그 결과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모든 사람이 아담의 허리 근원에서 범죄하였다고 풀이하였다. 그리하여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그 때 범죄하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아담 안에서 모두가 죄를 범하였다고 보는 원죄 사상을 전개하는 이론은 “epi ho”를 잘 못 이해한 것에 토대를 두고 있다.

“epi ho”때문에(because)” 로 번역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본문에 사용된 헬라어 표현 에프 호’(‘에피 투토 호티의 축약형으로, ‘그런 이유로라는 뜻임)는 단순히 때문에(으므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이해해야 맞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원문에 따른 바른 해석이 된다.

그러나 이 해석에도 의문이 남아 있다. 모두가 죄를 범하는 것이 각 개인의 자기 죄인가 아니면 아담의 죄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 된다. , 아담이 죄를 범하였을 때 각 개인이 죄를 범하였는가? 아니면 모든 사람이 각기 자기 죄를 범하는 것인가? 여기 본문에 나오는 “epi ho” 이하 구절이 각 개인이 자기 죄를 범하는 것을 묘사한 것이라고 보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아담 안에서라는 구절이 여기에서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본문을 여기에 소개할 필요가 없다. 12절은 아담이 죄를 범하였다고 하지 않고, 그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둘째, 동사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느니라라는 진술은 각 사람이 실제적으로 지은 죄를 두고 한 표현이지 아담의 죄 안에 참여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다(2: 12 참고). 우리는 바울이 하고 있지 않는 의미를 본문에 부가하여서는 안 된다.

세 째,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느니라의 의미를 더욱 명료화하기 위하여 바울이 다른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점을 고려하여야 한다. 로마서 3:23은 로마서 1:17-3:26에서 논하고 있는 것처럼 전 인류의 실제적인 죄를 지칭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 이 문맥에서는 아담 안에서 죄를 범하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라는 사상이 결여되어 있다. 과거 시제 죄를 범하였느니라는 역사를 통하여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한 행위를 묘사하고 있다.

로마서 5:12의 핵심은 죄가 보편적이기 때문에 죽음도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아담의 범법행위를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와 사람들을 종으로 삼는 세력이 되어 왔다. 그리스도 이외에는 그 어느 누구도 이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없게 되었다. 아담의 행위의 결과로 전 인류에게 죄는 불가피하게 되었다. 인류의 대표자로서 아담은 그의 모든 후손에게 영향을 끼쳤다. 아담이 우리의 원 조상이기에 우리는 그와 연대되어 존재한다. 그리하여 죄가 우리를 관장하게 되었다.

 

로마서 5장은 두 아담의 본성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에게 끼친 그들이 끼친 결과를 비교하고 있다.

 

로마서 5:12이 말하고 있는 요점이 아담의 죄 때문에 우리가 죽는다는 점에 있는가?

로마서 5:12-21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에 관한 중요한 논점을 제시하고 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포인트는 아담의 죄의 결과와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를 대비시키는 점에 있다. 5:12의 의미를 바로 포착하기 위하여서는 5장의 문맥을 통하여 사도가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를 조명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본문 그 자체의 의미를 먼저 음미하여야 한다.

 

1. 죄가 인격화되어 있다.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에서 죄는 낯선 단어다. 본문에는 죄의 기원에 대한 언급이 나와 있지 않다. 죄는 단지 누군가가 접근하기만하면 이 세계의 출입문에서 엄청난 것을 가져다주는 인격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의인화적 언급은 로마서 6-7장에서 더욱 발전되어 큰 권세를 가지고 사람들을 종으로 만드는 왕 같은 세력으로 묘사되어 나온다.

 

2. 아담의 죄는 독특하다.

아담의 죄의 결과는 그의 후손들이 범하는 어떤 죄와 차별화 되어 있다. 아담의 죄는 보편적 영향을 끼쳐 죄가 세상을 장악할 홍수문을 열어 제킨 것이었다. 아담을 통하여 육체적 죽음과 영적 죽음이라는 악한 현상이 이 세상에 이른 것이다.

 

3. 죄와 사망의 두 세력이 전면적으로 인간 세상을 장악하였다.

피조물은 죄의 노예로 전락되어 그 노예상태에서 해방을 기다리고 있게 되었다(8:20-22). 아담의 불순종의 행위는 인간 및 이 세상과 연대되었다. “이와 같이라는 말은 결과적으로또는 그러므로의 의미를 시사하고 있다. 죽음이 전 인류에게 파급되어 보편적이 되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게 된 것이다(고전 5:22). 타락 이래로 인간은 죄성을 타고난 존재가 되었다(2:3). 本質上(φύσις nature, 자연) 震怒子女이었더니에서 보 듯 본성이 태어나면서부터 불순종의 상태로 전락되었다. 전 인류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바뀌었다.

 

4. 아담의 죄와 각 인간의 죄

죄는 보편적이다. 모든 인간은 죄를 범하였으므로 죽는다(5:12). 아담의 죄 결과가 그 후손들에게 끼친 죄의 결과적 연대 범주는 어떤가? 칼빈주의에서의 아담과 각 개인과의 관계 유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1) 계약적 수장권론(Federal headship) - 각 개인은 자기의 신체적 본성을 부모로부터 받으나 하나님께서 직접 영혼을 창조하신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전 인간의 대표로 하셨다. 이는 그리스도의 대표성과 평행적이다. 계약신학자들의 입장이다.

 

(2) 자연적 유전론(Natural headship) - 영혼 유전론적 입장을 취한다. 아우구스투스를 시발점으로한 원죄론 입장을 발전시켜 왔다. 인간 구조 이해에 있어서 이분법에 따르며 신체도 영혼도 부모로부터 유전 받는다. 전 인간은 아담 안에서 정액 형태로 존재한 것이다. 각 개인은 아담의 죄에 참여한다. 고로 각 개인은 아담의 죄를 전가 받는다.

 

위 두 이론은 인간 영혼을 독립적 실체로 보는 전제에 문제점이 있다. 그렇다고 성서적 계약 사상이나 부모로부터 유전적 성향을 전수 받는다는 사상을 모두 배척할 것은 아니다.

아담은 개인인 동시에 모든 인간의 근원적 통일성을 주는 존재가 되어 그의 죄의 결과 인간 모두는 죄인이 된다. 아담의 죄가 생리적으로 후손들에게 유전되는 것이 아니지만,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아담과 하나가 되어 그와 연대된 근원적 통일성을 이룬다. 그리고 인간 존재는 아담의 죄로 인한 결과로 죄의 성향을 갖고 태어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아담 후손들은 유전된 죄(inherited sin)라는 굴레 속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는 인간이기 때문에 벗어날 수 없다. 죄는 이 유전적 약점을 파고들어 행위로 나타내게 한다.

 

원죄 개념 내용 변이

한 때 원죄란 죄 가운데서 잉태하여 생리적으로 유전된다는 전통적 시각에서는 위에서 살펴 본 롬 5:12 외에도, 다윗이 자기 존재의 시작으로부터 유전적 罪性에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본 시편 51:5이나, 욥기 15:14를 동원하여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의 원죄의 근원을 성관계로 이해하여 인용하였다. 이리하여 임신과 분만으로 아담 안에서 전 인류는 죄의 덩어리가 된 것이다. 이런 시각은 죄의 비밀을 다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성적 접근 방식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신학자들은 죄가 인간의 성행위를 통하여 유전된다고 하는 것에 근거를 둔 원죄론이나 죄 전가론을 비판하여오고 있다. 인간이 행동으로 참여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배격한다. Raoul Dederen 박사는 에밀 부르너의 통찰과 궤를 같이하여 강의실에서 창조 당시의 은 보시기에 좋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창조라고 보았다. 성을 죄악으로 보아 죄 유전의 수단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각은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곡해한 것이다.

 

죄의 유전론의 치명적 약점은 자유와 책임이라는 인격적 존재라는 인간의 본질에 불일치한다는 점에 있다. 원죄가 유전되었다면, 인격의 책임을 어떻게 물을 수 있으며, 인격적 자유 결단성을 북돋아 성숙한 방향으로 어떻게 나갈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오늘날 학자들은 원죄를 과거에 집착한 생물화학적 논리구조가 아닌 죄의 보편성이나 죄의 불가피성을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더 나가서는 죄를 초인격적인 것으로 본 애매한 표현을 사용한다. 콘첼만은 원죄를 두고 나의 죄는 내 앞에 있으며 상실된 존재는 불가피하다는 것에 대한 철저한 표현이라고 신약성서신학의 스케치(개요)에서 갈파하였다(221). 이와 유사하게 지동식은 원죄란 인간이 모두 하나님 앞에 반역한 죄인이라는 개념을 전달하는 것으로 잘라 말한다(지음 받은 존재, 225).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를 등진 죄인이다. 이런 시각들은 원죄라는 단어의 함의가 변질된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원죄를 칼뱅주의의 시각으로 보는 것은 한물 간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저 원죄 어휘나 붙잡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아르미니우스-웨슬리의 시각을 이어 받은 재림교회의 선구자들의 시각이 올바른 것이다.

 

자연적 타락과 불순종의 성향 유전

엘렌 화잇은 원죄라는 어휘를 삼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엘렌 화잇은 첫째 아담과의 관계에서 인류가 그에게서 받은 것이란 죄책(guilt)과 사형 선고(sentence of death)밖엔 없다”(CG 475)고 진술하였다. 이는 원죄 사상을 수용한 것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전 인류의 타락상을 표출한 것이다. 이런 통찰은 마음의 자연적 타락성 (the natural depravity of the heart)"(In Heavenly Place 195, 196)을 두고 한 표현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 인간 모두가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보편적 타락성)을 받은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점에서 화잇은 부분적으로나마 아우구스티누스적 및 칼뱅주의적 타락론을 수용하고 있으면서도, 아담의 죄책의 전가를 배제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 Woodrow W. Whidden, "The Humanity of Christ Debate: What Did Ellen White Teach?", Ellen White and Current Issues, vol. 2 ).

 

아담은 그 후손들에게 죄된 불순종의 내적 타고난 성향을 물려주었다(5BC 1128).

 

만일 어린 아기를 출산하기 전에 어머니가 방종하거나 이기적이고 조급하며 흥분적이면 그런 기질들이 아기의 성질에 반영될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자녀들이 거의 극복할 수 없는 악의 성향(性向)들을 상속물로 물려받았다. 그러나 만일 어머니가 확고하게 바른 원칙들을 따르고, 절제하고 극기하면, 또한 그가 친절하고 온유하고 이타적이면, 그는 그와 같이 고귀한 모든 품성의 특성들을 아기에게 물려 줄 수 있다”(MH 372-373).

 

죄 때문에 그의 후손들은 선천적으로 불순종의 성향을 타고난다(Because of sin his posterity was born with inherent propensities of disobedience)”(5BC 1128; White Comment, 1:1-3,14).

 

자녀들이 부모의 비행의 결과로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나 그들이 부모의 죄에 동참하지 않는 한 부모의 죄 때문에 그들이 벌을 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체로 자녀들은 부모의 발자취를 따른다. 유전(inheritance)과 부모들의 모본으로 말미암아 아들들은 아버지가 저지른 죄를 짓는다. 나쁜 버릇과 그릇된 식욕과 저열한 품행은 육체적 질병과 퇴화 현상을 지니고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전승물로 내려간다. 이 무서운 사실이 죄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을 견제하는 데 큰 힘을 발휘해야 한다”(PP 306).

 

만일, 사단이 사람들의 마음을 흐리게 하고 기만하여 그들이 위대하고 선한 일을 성취할 수 있는 선천적 능력이 그들 속에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할 수만 있으면, 그들은 할 수 있는 힘이 그들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그 일을 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된다. 그들은 어떤 초월한 능력을 인정하지 않게 된다”(1T 294).

 

연대책임 (Corporate solidarity)의 진상

아담의 죄책에 대하여 후손은 연대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죄의 결과를 후손이나 타인이 마치 연대책임을 지는 것 같은 사건들이 나온다.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과실을 사하나 형벌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고 아비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14:18)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탄생한 아이는 다윗의 죄로 죽었다. “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우리아의 처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삼하 12:15). “사형 선고는 다윗에게서 그의 범죄의 아이에게로 전가되었다.”(부조, 722).

 

여호수아 7장에 나오는 아간의 죄로 인하여 자녀들이 언약적 저주 아래에서 모두 징벌당하였다.

왜 아간과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벌을 받았을까? 그 까닭은 그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큰 표준인 하나님의 율법의 지시를 따라 훈련과 교육을 받아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간의 부모들은 아간이 거침없이 주의 말씀에 불순종하도록 방치하였고, 그의 생애에 되풀이 되어 나타난 이 같은 원리들은 그의 부모들을 또한 부패케 하는 영향을 미쳤다. 정신은 다른 정신 위에 작용과 반작용을 거듭한다. 아간의 식구들을 다 그 징벌에 포함시킨 것은 그들 모두가 다 그 죄에 연루(連累)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원고 67, 1894).”(화잇주석, 7:24-26).

 

비록 기브온 사람들이 멀리서 온 것처럼 위장 순복하였지만 여호수아는 기브온 사람들을 죽이지 않고 그 땅에서 살도록 허용하겠다고 엄숙히 맹세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이 엄숙한 맹세에 기속되어 있었다. 따라서 만약에 그들이 한 맹세를 어기면 필연적으로 심각한 결과가 따를 것으로 알고 있었다. 400년 후에 민족주의적인 운동의 일환으로 사울과 그 휘하 신하들은 여호수아와 회중의 방백들이 했던 거룩한 맹세를 어기고 기브온족을 도륙 및 약탈하였다. 이 일로 기근이 임하고 결국 사울 자손 7명을 처형였다.

 

다윗의 치세 시 인구조사로 7만 명이 온역으로 죽은 사건(삼하 24)은 엄청난 국가적 재난으로 이어졌다. “인구 조사하는 일은 백성 중에 불만을 일으켰으나 그들 자신들도 다윗의 행위를 자극시킨 동일한 죄악을 품고 있었다. 여호와께서는 압살롬의 죄를 통하여 다윗을 형벌하신 것처럼 다윗의 과오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죄악을 벌하셨다”(부조, 748).

 

우리 열조는 범죄하고 없어졌고 우리는 그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5:7). 그러나 같은 장에서 우리 머리에서 면류관이 떨어졌사오니 오호라 우리의 범죄함을 인함이니이다”(5:16)라고 하고 있다.

 

죄 때문에 고통과 벌을 받는다는 사상은 구약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이스라엘 역사의 초기에는 개인이나 전체를 분리하지 않고 함께 망한다는 징벌의식이 팽배하였으나, 주전 7세기부터는 왜 의인이 악인들과 함께 망하거나 고통을 당하는 연대책임 운명에 휘말려 들어가느냐는 질문이 등장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예레미야 31:29-30과 에스겔 18장에 나와 있다.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찜이뇨”(18:2).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18:3).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아들이 어찌 아비의 죄를 담당치 않겠느뇨 하는도다 아들이 법과 의를 행하며 내 모든 율례를 지켜 행하였으면 그는 정녕 살려니와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18:19-20).

 

에스겔서에 나오는 속담은 조상들의 죄로 인하여 자기네들이 고통당한다고 생각하는 사상이 풍미하는 모습을 말해 주고 있다. 유다가 망할 당대의 시대정신은 자기들은 죄를 회개할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다고 하면서 불행의 원인을 조상 탓으로 돌리고 있다.

그들의 연대책임 속담의 근거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20:5)에 두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열거한 성경적 근거들은 성경을 잘못 풀고 있는 것이다. 이미 위에서 인용한 바와 같이 엘렌 화잇은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20:5)를 다음과 같이 풀고 있다.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한다. 자녀들이 부모의 비행의 결과로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나 그들이 부모의 죄에 동참하지 않는 한 부모의 죄 때문에 그들이 벌을 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체로 자녀들은 부모의 발자취를 따른다. 유전과 부모들의 모본으로 말미암아 아들들은 아버지가 저지른 죄를 짓는다. 나쁜 버릇과 그릇된 식욕과 저열한 품행은 육체적 질병과 퇴화 현상을 지니고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전승물로 내려간다. 이 무서운 사실이 죄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을 견제하는 데 큰 힘을 발휘해야 한다.”(PP 306).

 

타인이나 조상들의 죄 때문에 고통당한다는 연대책임론은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타인이나 조상의 죄로 인한 고통은 불가피하지만, 그 고통은 하나님의 징벌을 받는 것이 아니다. 우한 코로나 19 바이러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가.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나 조상 죄 때문에 자기가 하나님의 징벌을 받는다는 사상은 정당하지 못하다(18:25). 저들의 연대 책임적 속담에는 하나님을 비난하는 음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암 환자가 급증하고 있는 것은 반드시 암 환자 자신의 책임으로만 볼 수 없다. 속이는 음식이 범람하고 오염물질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으며 사회의 구조적 부조리와 무한대적 죽기 살기 식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만연하는 세상에서는 암환자가 폭증하기 마련이다. 암환자의 고통은 징벌이 아닐 경우가 많을 것이다.

 

연대책임보다는 각 사람은 하나님과 직결되어 있다는 개인책임을 강조하는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이미 신명기 24:16에 나와 있다. “아비는 그 자식들을 인하여 죽임을 당치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비를 인하여 죽임을 당치 않을 것이라 각 사람은 자기 죄에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

 

그렇다고 예언자의 속담 비판 필치를 개인주의를 신봉하는 것으로 보면서 연대책임을 폐기하거나 거절하는 눈으로 보는 시각에도 문제가 있다. 오히려 각 개인은 자기가 속한 사회를 살려내야 하는 사명과 책임을 지고 있다는 강한 의식이 지배하여야 그 사회가 건실하게 발전한다. 개인이 전체 속에 함몰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속에 있으면서도 그 자신이 전체의 운명을 죄우할 수 있는 책임적인 존재라는 시각에서 해석하여야 한다. 다니엘은 성화의 모델이지만 마치 자기가 잘못한 것으로 보고 중보기도를 하였다(9:5, 20). 한 사람의 의인이 민족공동체나 신앙공동체를 살려내야 하는 책무를 지고 있다. 예언자들이 남은 무리를 이끌어내려는 필치를 전개하고 있는 것은 이런 책무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철저하게 개인주의적으로 남은 자 사상을 풀려고 하는 시각은 천박하다.

 

마치면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인간은 자기가 행한 죄에 대한 죄책을 받는다. 그러나 죄의 부패, 오염된 존재로 이 땅에서 살아간다. 하나님 앞에서 이른바 성화의 모델이었던 다니엘은 민족의 죄를 마치 자기가 잘못한 것으로 보고 중보기도를 하였다(9:5, 20). 그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자기라는 존재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한것을 절감하였다(10:8). 계시자 요한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앞에서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되었다(1:17). 신앙적으로 위대하게 살아간 살아 온 인물들은 하나님 앞에 선 자기를 죄인으로 여겼다. 평생을 모범적으로 살다가 몸에 힘이 빠져 누워 있던 한 성직자는 이렇게 고백했다.

  평생 동안 했던 말과 행동이 모두 위선이었어요. 지금에 와서 보면 단 한 가지도 선을 행한 적이 없어요.”

이사야도 생애의 마지막에 이르러 갈 때 이렇게 고백했다.

무릇 우리는 다 不淨같아서 우리의 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罪惡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64:6 ).

 

<참고 자료: 죄의 전가론 도표>

죄의 전가(轉嫁)에 관한 이론들

 

정죄 무 유전

정죄 유전

 

Pelagian

모본론

Arminian

성령론

New School

율법론

Federal

계약론

Placean

새 본성론

Augustinian

유전론

1. 영혼의 기원

직접 창조

직접 창조

직접 창조

직접 창조

직접 창조

간접창조

(중개 창조)

2. 출생시

인간의 상태

순진무구,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음, 부패성없음, 자유의지

부패되었지만,

여전히 성령과

협동할 수 있음

부패되고

사악하지만,

그것이 죄는 아님

부패/사악

부패되고 ,

무능하고,

정죄 받는 존재

부패/사악

=

부패되고,

무능하고,

정죄받는 존재

부패되고,

무능하고,

정죄받는 존재

3. 아담의 죄의

영향(결과)

자기 자신에게만,

후손에게 영향 안 줌

육체적,

지성적으로 그의

후손들을

부패시킴.

아담의 죄책이

전가되지 않음.

부패성,

사악성을

전인류에게

전달함

언약으로

후손들을

정죄받게 하고,

부패된 채

태어나게 함

모든 후손들을

선천적인

부패성에

관련시킴

아담의 죄,

타락성과 죽음

4. 모든 인간이

어떻게 죄를 짓게 되었는가?

아담의 모본을

따름으로

성령의 도우심에도

불구하고

아담의 자신의

행위를

의식적으로

비준

알고있는 율법을

자발적으로

범함으로

아담의 죄 안에서

죄인으로

간주됨으로서

부패된 본성을

소유함으로서

아담안에서 모든

사람이 정액

형태로 아담의

죄에 참여함으로

5. 부패성의 의미

각각의 경우,

악한 습관에

대해서만

성령을

무시하고 악한

습관을 유지함

악한

성향들이지만

정죄받지는 않음

정죄받을 악한

기질과 상태

정죄받을 악한

기질과 상태

정죄받을 악한

기질과 상태

6. 무엇이

전가되었는가?

자신의 죄들

오직 인간 자신의

죄들과 이 본성을

비준

사람의 개인적인

범죄 행위들

아담의 죄,

인간자신의

타락성, 그리고

인간 자신의 죄들

오직 부패된

본성과 인간 자신의 죄

아담의 죄,

우리의 부패성,

자신의 죄

7. 죄가

초래한 사망이란

무엇인가?

영적 및 영원한

죽음

작정에 의한

육체적 및 영적

죽음

영적 및 영원한

죽음만

육체적, 영적

그리고 영원한

죽음

육체적, 영적

그리고 영원한

죽음

육체적, 영적

그리고 영원한

죽음

8.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름으로

모본론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성령과

협력함으로

성령론

성령에 의해

계시된 진리의

영향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율법론

그리스도의

행위를 통하여

의롭다고

선언됨으로

계약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본성을

소유함으로

새 본성론

우리와 하나가 되신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유전론

 

 

 

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