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의 관계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의 관계
그리스도교계에서는 첫 4세기 동안에 주로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논의가 전개되었다. 5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의 상관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논의가 전개되었다.
I. 오랜지 회의(529 A.D) 개최 배경과 4대 입장
서방교회는 하나님의 은혜 편에, 동방교회는 인간 의지 편에 역점을 두었다. 그러나 동방이나 서방교회가 은혜나 자유의지를 부인한 것이 아니었다. 서방교회는 동방교회보다 더욱 인간의 본성에 대한 비관주의의적 견해가 강하게 의식하였었다. 오랜지회의는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 사이의 논쟁으로 야기된 쟁점을 매듭짓기 위하여 소집되었다.
이 논쟁의 주된 관심사는 구원에 있어서 개인이 어느 정도 책임을 지느냐는 점과 동 구원을 위한 은혜의 역할 범주에 관한 것들이었다. 구원의 수단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의 역할에 관하여 대립되는 견해와 이를 조화시켜 이해하려는 주장들이 네 가지 견해들로 나타났다. 4가지 견해는 아우구스투스주의 (Augustinianism),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 半 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 및 반 아우구스투스 주의(Semi-Augustinianism)이다.
1. 아우구스투스주의 (Augustinianism)
Augustine(354-430)은 기독교신학과 신플라톤주의 철학 양 분야를 종합하여 창조적인 영향을 끼친 교부들 중 거성이었다. 그는 특히 삼위일체, 교회론, 죄와 은혜론에 있어서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북아프리카 타가스테(Tagaste)에서 이교도 아버지와 신실한 어머니 모니카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교육 영향을 크게 받아 자랐지만 19세 때 금욕주의적 윤리관을 지닌 마니교(Manichaeanism)에 입교하여 9년 동안 수행하다가 그들의 속임수를 알고 그들과의 생활을 끝냈다. 그는 383년에 이탈리아 밀란에 가서 Ambrose로부터 가르침과 세례를 받고 신플라톤 철학에 심취하였다. 로마서 13:13-14의 말씀은 그의 기독교 개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는 395년 북아프리카 Hippo에서 감독으로 위촉 받은 이래 헌신 봉사의 삶을 죽을 때까지 살았다. 그는 고백론(참회론)에서 은혜의 힘이 이끄는 대로의 자신의 영적 순례의 길을 서술하였다. 그의 유명한 고백은 이렇다. “당신께서는 당신 자신을 위하여 우리를 만드셨으며, 당신 안에서 쉼을 얻을 때까지 우리의 마음에는 안식이 없나이다.”
아우구스투스는 마니교, Donatists 및 Pelagius의 가르침을 배척하고 이른바 하나님의 은혜와 같은 그리스도교 정통교리를 옹호한 참피온 역할을 하였다.
원죄(original sin)와 그 전가(transmission)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은 향후 그리스도교계를 지배하는 사상이 되어 갔다. 아우구스투스의 구속관은 원죄관으로부터 도출되었다. 인간의 타락 전 상태는 완전한 자유, 즉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posse non peccare)'이었다. 이는 인간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으로 가능하였다. 완전한 자유는 타락의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상실되어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방향을 돌려 악으로 돌렸다. 하나님께 향한 진정한 사랑 caritas가 인간에 대한 뒤틀린 사랑인 cupiditas로 바뀌었다. 인간의 이성과 의지는 더 이상 영혼의 능력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은 욕망의 덫에 걸려 정욕에 사로잡힌 몸이 되었다. 그리하여 인간의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posse non peccare)'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능력(non posse non peccare)'로 변하였다. 인간은 타락 후에 선을 선택할 자유를 상실하였다.
아우구스투스에게 있어서 원죄는 영원히 죄책을 짊어진 상태를 의미하였다.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죄책은 세례에 의하여 제거 되지만, 인간의 본성은 죄로 인하여 손상된 본성으로 전락되어 버렸다.
아담의 타락된 본성은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 성적인 결합(정액)을 통하여 유전적으로 전달되었다. 후손들은 아담의 죄로 인한 영향뿐만 아니라 그의 죄책에도 참여한다. 인간은 죄인으로 죄책을 가지고 탄생한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서 5:12을 그 근거로 삼았다. 모든 사람은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 아담 안에 단일한 존재로 있었다. 아담의 죄책을 공유한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원죄의 영향 아래 놓여 인간 본성의 부패성을 생식을 통하여 전가 받았다. 타락의 상처는 오직 주입된 은혜로만 가능하다. 은혜는 사람 안에서 새로운 의지를 창조한다. 주입된 은혜는 주입된 사랑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 없이는 선한 것을 행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율법의 완성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하여 주실 때만 가능하다. “당신께서 명령하신 것을 허락해 주시고, 당신의 意志하는 바를 명하소서(Da quod jubes et jube quod vis)”(Confessions, X, 29).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언제나 믿음과 함께 한다. 구원에 있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인간 구원의 유일한 근거인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의지이다. 이 은혜가 믿음이나 복종보다 선행한다. 하나님은 창조 전부터 특정 인간들을 택하셨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선택을 하나님의 전능하신 의지와 작정에 달려 있어서 무조건적이며 불가항력적이다. 은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하여 주어진다. 구원 받을 자는 이 예정하는 선택과 은혜에 저항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에서 “모든 사람”은 모든 부류 내지 종류를 뜻한다고 해석하였다.
하나님의 은혜가 선을 행할 수 있도록 인간의 의지를 불러오지 않고는 의지의 자유란 없다.참된 자유는 은혜의 전제 조건이 아닌 은혜의 열매이다.
2.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
Pelagius는 아일랜드 출신의 수도사로 AD 390년 쯤 로마에서 엄숙주의 설교가로 나타났다. 그의 출생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는 금욕주의적이고 영성이 있는 모범적 모습과 엄격한 기독교 도덕성을 요청하는 일 등으로 대중에게 성인으로 어필하였다. 418년에 카르타고공회의는 그의 가르침을 정죄하였다. 그는 431년 에베소회의에서도 배척 받았다.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이 암브로스의 영향을 받았던 과 유사하게, 펠라기우스는 397년 콘스탄티노플 감독 John Chrysostom의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409년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을 검토하고 인간의 천부적 능력과 노력으로 도덕적 완전과 천국으로 인도하는 일에 무력하다고 비평하였다. 411년 그는 이론적 체계가 Coelestius와 함께 로마를 떠나 아프리카로 가서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적 영향을 체감하고, “당신께서 명령하신 것을 허락해 주시고, 당신의 意志하는 바를 명하소서”와 같은 구호를 도덕적 무력성을 표출하는 것으로 평하였다. 이어서 그는 곧 팔레스타인으로 가 거기서 414년 유명한 Pelagius 논쟁이 터졌다. 거기서 그는 제롬의 적대자가 되었다. 418년 Carthage회의에서는 펠라기우스주의를 단죄하였으며 교황 Innocent 가 이 결의를 확인하였다.
펠라기우스 사상은 자연주의적이다. 인간 구원을 위하여 초자연적 은혜가 필요 없었다. 인간은 백지 상태, 즉 죄된 본성이나 원죄 같은 것이 없이 탄생한다고 주장하였다. 아담의 불순종의 죄는 오로지 그 자신에게만 영향을 끼쳤다. 아담은 나쁜 모본을 남긴 것이다. 그리스도 초림 전에 무죄하게 산 사람들이 있었다. 아벨, 아브라함, 이삭, 동정녀 마리아 같은 사람들이 그들이다. 로마서 5:12의 “모든 사람”은 이런 사람들을 제외한 ‘죄를 범한 모든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른바 원죄나 죄의 전가란 있을 수 없다. 죄란 인간 탄생과 함께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 본성에 내죄된 죄된 본성 개념을 배척하였다. 죄는 행위일 뿐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인간은 현세에서 무죄한 완전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란 자유의지나 외적 제도 같은 것이다. 따라서 은혜는 자연적이고 보편적이다. 인간은 자유의지로 선을 택할 수 있다. 인간은 자기의 의지의 능력으로 구원에 이르게 된다.
소지니파와 유니테리언 교도들은 펠라기우스의 이론을 받아 들였다.
3. 半 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
교회가 펠라기우스주의를 배척하였지만 모두가 아우구스투스 사상을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남 프랑스 Gaul 지역에서 아우구스투스 사상을 운명론으로 몰아붙이며 반대하는 전위적 세력이 형성되었다. 그 지도자는 John Cassianus(360년 경 탄생, 430-435년 사이에 죽음)이었다. 그는 399년 경 크리소스톰이 있는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그로부터 부사제(deacon)로 안수 받았다. 교황에게 유배된 크리소스톰을 신원하기도 하였고 Marseilles에서 남자와 여자를 위한 각각 수도원을 세웠다. 그는 수도사적 영성을 수도원의 아버지로 불리어졌다.
카시아누스의 사상은 영적 완전과 은혜에 집중되어 있었다. 영적 완전을 목표로 한 길로, 완전생활 추구, 기도생활, 성경지식에 역점을 두었다. 그는 인간의 자유의지의 역할을 중시한 때문에 아우구스투스의 항거할 수 없는 은혜와 무조건인 선택 사상을 배척하였다.
半 펠라기우스주의는 펠라기우스 신학에서 파생되어 나온 분파가 아니었다. 오히려 펠라기우스에 반대하면서 아우구스투스 신학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 요체는 인간의 타락성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도덕적인 생활의 영위를 위한 조화를 모색한 것이다. 즉, 인간의 자유의지에 하나님의 은혜를 더하는 방식으로 구원의 길을 모색한 것이다. 그는 원죄교리를 수용하면서도 은혜의 전능성을 배척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모든 인간이 아담의 죄에 참여하는 한 죄는 그로부터 물려받은 상속물이 된다. 이로 인하여 인간은 은혜의 도움 없이는 구원을 받을 수도 없고 도덕적인 삶을 살 수도 없다. 카시아누스는 은혜와 자유의지에 관하여 동방과 서방 신학 사이를 연결하는 가교를 구축하고자 한 것이다. 카시아누스에게 있어서 인간의 의지가 선행 활동한 후에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는 방식이 그 특징이 된다.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이룰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는 인간의 의지가 역사하는 조건 위에서만 주어진다. 그리하여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은혜는 구원을 위하여 함께 일한다.
4. 半 아우구스투스주의 (Semi-Augustinianism)
신적 선택의 주권성에 기초를 둔 은혜와 인간의 선택의 책임성에 토대를 둔 자유의지 사이에 조화를 시도한 제 의견들이 제기되어 왔다. 이 시도 중 온건한 아우구스투스주의 내지 반 아우구스투스주의(Semi-Augustinianism)가 있다. Arles지방 Caesarius (AD 468-542)가 그 주도자적 위치에 있었다. 그는 502년 아를르에서 감독이 되었다.
수 십여 년 간 半 펠라기우스주의의 만연으로 고울 지방에서 신학적 논쟁이 계속되며 분파가 속출하는 중 케이사리우스는 529년 오랜지종교회의 개최를 추진하였다. 그는 온건한 아우구스투스주의 노선에서 원죄, 은혜, 및 예정의 교리들을 다룬 25개의 규범을 채택시키는 일에 성공하였다. 이 신앙고백은 반펠라기우스주의를 배척하면서 수정된 아우구스투스의 은혜 교리를 수용하였다. 교황 Boniface II가 그를 지원하였다. 케이사리우스의 사상적 계보는 오리겐, 암브로스, 아우구스티누스, Riez의 Faustus, Fuligentius 등이었다.
케이사리우스의 신학적 사상은 오랜지회의에서 발표한 선행은총(prevenient grace)를 포함한 인간론과 구원론에 나타나 있다.
원죄의 결과로 전 인류가 타락하였으며 인간의 자유의지는 손상을 받았다. 인간은 하나님의 선행하는 은혜의 개입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자기의 힘으로는 영적 발전을 이룰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기의 죄를 씻고자하는 의지를 기다리기 전에 그 마음을 일으키신다. 인간이 복음의 가르침에 동의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먼저 성령 하나님의 깨우침과 감화에서 기인된 것에 불과하다.
케이사리우스는 오랜지회의에서 신앙규범의 기초가 되는 견해들을 피력하면서 은혜가 자유의지에 선행한다는 설교를 하였다. 회의 막판에는 Gregory the Great가 온건한 아우구스투스 입장, 즉, 半 아우구스투스주의를 옹호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저항할 수 없는 은혜나 자유로운 결단 사상을 피하였다. 은혜는 저항할 수 도 있어서 극단적이고 엄격한 아우구스투스주의의 예정론을 기피한 것이다. 오랜지회의는 인간의 공로가 하나님의 은혜를 앞지를 수 없다는 규범을 채택하였다. 은혜는 인간이 가진 모든 선의 원천이 된다. 그러나 저항할 수 없는 은혜 개념이나 세례 받지 못한 유아 死者의 원죄 전달 방법 등에 대하여는 침묵하였다.
오랜지 회의는 인간이 타락하여 죄된 본성을 지녔지만 구속 받지 않은 인간의 의지의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을 수 있는 선한 점이 아직도 내재한다고 본 半 펠라기우스 교리를 배척하였다. 오랜지회의는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지에 선행 주도하고 인간의 의지는 이에 협력한다는 도식을 정립하였다. 이는 일종의 복음적 협동론이라고 볼 수 있다.
II. 오랜지회의 규범(The Canons of the Council of Orange)
오랜지회의가 채택한 다음의 규범은 인간의 타락상에 대한 이론적 토대가 되기도 한다.
규범 1. 만일 어느 누구가 온 몸, 즉 몸과 영혼이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나쁘게 변화 된 것을 부인하여, 영혼의 자유가 손상되지 않고, 오로지 몸만 부패하여졌다고 신봉한다면, 그는 펠라기우스의 과오에 속임을 받은 자이며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겔 18:20)와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롬 6:16) 및 “누구든지 진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벧후 2:19)는 성결 말씀과 모순 된다.
규범 2. 만일 어느 누구가 아담의 죄가 아담에게만 영향을 끼치고 그의 후손들에게는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하거나, 죄에 대한 형벌로 몸만 죽고, 영혼이 죽는 것이 아니어서 아담의 죄가 전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하면, 그는 하나님께 불의하며,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는 사도의 말씀과 상치된다.
규범 3. 만일 어느 누가 하나님께 기도한 결과로 하나님의 은혜가 부여될 수 있다고 하여 우리로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하는 일이 은혜 자체가 아니라고 하면,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롬 10:20)라는 바울이나 이사야의 말씀(사 65:1)에 모순 된다.
규범 4. 만일 어느 누가 우리 의지가 죄로부터 정결케 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계시어서 성령의 주입과 역사를 통하여 우리 의지가 정결케 되는 일을 시인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는 성령을 거스르고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잠 8:35)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라는 말씀에 어긋난다.
III. 재림교회 내 죄관 흐름과 복음적 협동론
초기 재림교인들은 첫째 사망은 아담의 죄의 결과이고, 둘째 사망은 개인적인 죄의 결과로 보았다. 그들은 아담의 본성을 중간본성으로 보았다. 1888년까지의 원죄관은 다분히 인간론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1888년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에 관한 논의가 제기된 이후에는 원죄를 구원론적 시각에서 다루었다. 그리하여 아담의 죄는 신체적인 죽음뿐만 아니라 도덕적 부패성도 유발한 것으로 보았다. 20세기로 들어서는 원죄를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와 그로 인한 분리로 보는 기류가 등장하였다. Heppenstall이 원죄를 그릇된 행위(wrong doing)로 보기 보다는 그릇된 존재(wrong being)로 보는 소이가 여기에 있다.
재림교회는 아우구스투스의 전가 이론에 따라 아담의 죄의 죄책이 그 후손에게 전가된다는 사상을 배격하지만, 아담의 죄의 영향, 즉 부패성은 후손에게 물려준다고 본다.
인간의 죄됨은 아담 안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아담이 율법을 범하였기 때문에 그의 모든 후손들은 죄인들이 되었다(MS 126, 1901). 아담의 죄가 그 후손에게 불순종의 내적 성향을 갖고 탄생케 한다(5BC 1128). 우리의 마음은 본성적으로 타락되어 자기의 힘으로는 올바른 과정을 추구할 수 없다(IHP 163). 다윗은 어린 아이들이 악으로 기우는 성향을 지닌 본성을 물려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3BC 755; 욥 14:4; 시 58:3; PP 61, 64, 306; MH 372, 373; GC 533). 아담과 하와는 그 후손에게 죄에 대한 성향과 그 형벌, 즉 죽음에 굴복하는 성향을 물려주었다(6BC 532).
이와 같이 아담의 죄로 인한 유전적 죄악성의 뿌리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죄에 대한 개인적 책임을 강조한다(겔 18:20).
죄의 본성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은혜의 주도로 은혜와 인간의 의지 사이에 협력하게 하는 일이 선행하고, 실제적인 죄(자범죄)에 대하여는 인간 의지의 주도로 은혜와 의지 사이에 협력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복음적 협동론의 특성을 인정한다.
IV. Ellen G. White의 인간의 자유의지
1. 인간의 의지는 타락으로 인하여 사단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그러나 그대는 그대의 의지가 그대의 모든 행동의 근원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의 품성에 있어서 그처럼 요긴한 요소를 이루는 이 의지는 타락으로 사단의 지배하에 들어가 버렸다. 그리하여 사단은 언제나 그 자신이 기뻐하는 뜻을 따라 역사함으로 사람의 완전한 멸망과 불행을 도모해 왔다. 그러나 하나님의 무한한 희생은, 그분의 독생자 예수님을 주셔서 죄를 위한 희생제물이 되게 하심으로 그분의 정부의 원칙을 하나도 깨뜨리지 않고 그분으로 하여금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게 한다. “그대 자신을 나에게 바쳐라. 그 의지를 내게 달라. 나는 그것을 사단의 지배에서 빼앗아 내가 소유하겠다. 그렇게 될 때 나는 나의 기뻐하는 뜻을 따라 그대 안에서 역사할 수 있다.” ”(5증언, 515).
2. 인간은 자기의 의지를 하나님께 먼저 바치고 새로운 의지를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지를 파괴하려고 하지 않으신다. 그것은 우리가 의지의 활용을 통해서만 그분께서 원하시는 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지를 순결하고 깨끗하게 된 상태로 다시 돌려 받기 위하여,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께 바쳐야 하며, 또 그분께서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사랑과 능력을 아낌없이 쏟아 부으실 수 있도록 그분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그것을 그분과 연결시켜 놓아야 한다.”(보훈, 62).
3. 의지의 자유는 선택의 자유와 능력이다.
“각 사람은 어떤 권세가 자신을 지배하도록 할 것인지를 선택할 자유가 있다. 아무리 깊이 타락하고 죄악적인 사람일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발견할 수 있다. ”(소망, 258).
“의지는 사람의 성질에 있어서 지배하는 힘이요, 결정하고 선택하는 능력이다. 이성을 가진 사람은 옳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모든 경험에서 “너희 섬길자를 오늘날 택하라”(수 24:15)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사람은 하나님 의지의 편에 자기의 의지를 순종 시킬 수가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 자신을 하나님의 힘에 결합시켜, 어떤 경우에라도 악을 행하지 않게 되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 모든 청년과 아이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성실한 품성을 형성하고 유익한 생애를 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교육, 289).
4. 품성의 힘은 의지력과 자제력에 있다.
“품성의 위력은 두 가지, 곧 의지력과 자제력으로 구성된다. 많은 청년들이 강하고 제어되지 않은 격정을 품성의 위력으로 오해하나, 사실은 자신의 격정에 지배를 받는 자는 연약한 사람이다. 인간의 진정한 위대함과 고귀함은 그가 지배받는 감정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가 지배하는 감정의 힘에 의해서 측량된다. 가장 강한 사람은 모욕에는 예민하나 격정을 억제하고 그의 원수를 용서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진정한 영웅이다”(1보감, 602).
5. 의지력을 복종시켜야 한다.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마5:29).
이는 단호하게 의지력을 처 복종시켜 나쁜 감정으로 버리라는 말씀이다.
“품성의 힘은 두 가지, 곧 의지력과 자제력으로 구성된다. 많은 청년들이 강하고 제어되지 않은 격정을 품성의 위력으로 오해하나, 사실은 자신의 격정에 지배를 받는 자는 연약한 사람이다. 인간의 진정한 위대함과 고귀함은 그가 지배받는 감정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가 지배하는 감정의 힘에 의해서 측량된다. 가장 강한 사람은 모욕에는 예민하나 격정을 억제하고 그의 원수를 용서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진정한 영웅이다”(증언보감, 1권, 602).
인간은 감정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러나 의지력의 통제에 따라 감정의 노예, 즉, 에피투미아(欲望)을 벗어나야 한다. 은혜의 역사에 따라 주어지는 성령의 권능을 의존하는 성화된 이성과 의지의 통제 아래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감정적으로 아무리 하고 싶어도 하지 않는다. 감정이 나쁜 것이 아니다. 다만 죄의 욕망에 감염된 감정이 나쁜 것이다. 사랑, 기쁨, 긍휼 등이 모두 감정에 속하는 것들이다. 이런 감정들이 성경의 원칙 아래 통제되어야 한다. 이것을 통제하는 것이 성령의 지배를 받는 이성과 의지의 역할이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위하여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깨달아야 하고 자기 속에 이룩될 큰 변화에 마음을 쏟아야 한다. 열렬하고 꾸준한 기도와 노력으로 분기해야 한다. 그릇된 습관과 행습은 떨쳐버려야 한다. 이 같은 잘못들을 시정하고 바른 원칙을 따라 살고자 하는 결정적인 노력만이 승리를 가져다 줄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 스스로 하도록 능력을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해 주시기를 기다리는 까닭에 그들이 마땅히 차지할 수 있는 지위를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엄격한 정신적 및 도덕적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그들의 노력과 결합시키심으로 그들을 도우실 것이다”(부조와 선지자, 248).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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