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구원과 조사심판의 관계
십자가 구원과 조사심판의 관계
십자가 구원 그리고 영생
죄가 하나님과 인류 사이에 끔찍한 분리의 심연을 초래하였으나 인간은 갈보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을 통하여 그 분리의 심연을 넘어 하나님께로 다시 나갈 수 있게 되었고, 그것도 계속적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엡 2:18, 벧전 3:18 참고).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인간 대신에 대속적 속죄를 제공하는 심판을 받으셨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ὑπέρ, huper)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義)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무죄함은 대속의 원리에 있어서 그 바탕이 된다(히 4:15, 7:26, 벧전 2:22, 요일 3:5). 무죄한 그리스도를 죄로 삼으시고자 성육신하시도록 했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 실제 죄인으로 취급되어 죄의 삯인 형벌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지셨다(마 27:46). 대속적 죽음을 당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義)가 되게 하셨다. 이렇듯이 그리스도의 대속과 신자의 칭의는 밀접한 관계에 있다.
세상 죄에 대한 죄책은 그것이 마치 그리스도의 것인 양 그에게 전가되었다(사 53:3~6; 벧전 2:22~24). 우리의 죄가 마치 그리스도의 것인 양 그분에게 전가되었듯이, 그분의 의(義)도 마치 우리의 의인 것처럼 우리에게 전가된 것이다. 구원은 갈보리에서 화목제물(hilasterion, 롬 3:25)이 되신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을 수용하는 것에 달려 있다. 그의 죽으심을 수용치 않으면 구원을 상실한다. 구원의 유일한 기초는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하여 죽으신 공로를 받아들이고 그를 구주로 믿는데 있다. 그리하여 믿는 자는 정죄의 심판에서 해방되어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위 본문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것은 신자가 현세에서부터 벌써 영생을 소유했다는 뜻이다. 이런 사상은, 성경 다른 곳에서도 가르치고 있다(눅 17:21, 고후 5:17, 골 3:3, 벧전 1:23). 스밀데(E.Smilde)는 이 점에 비추어 요한의 이 영생 사상이 바울의 칭의론(稱義論)과 원리상으로 같다고 하였다. 곧, 신자가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는 말씀은 이미 ‘의롭다’ 고 선언하므로 현세에서부터 심판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보장을 받는 칭의를 받았다는 의미이다(Leven in de Johanneische Geschriften, P.44).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라는 표현에는 신자와 하나님 사이에 인격적 관계의 형성을 함축하고 있다(만나주석).
요 5:24에 나오는 ‘심판(κρίσις)’은 ‘분리,’ ‘선택,’ ‘결정,’ ‘판결’의 뜻을 지녔다(Kittel. TDNT 3:941). 동사 ‘크리노(krino)’는 ‘선과 악을 분별하다’(discriminate), ‘분리하다’(separate)의 의미와 ‘정죄하다’(condemn)의 의미가 있는데 본 절에서는 후자의 의미가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본 절에 나오는 ‘영생을 얻는 것’이란 구원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구원(소테리아, σωτηρία)’이란 고난, 멸망의 위기나 죽음에서 구출해 주는 행위를 가리킨다. 소테리아의 본 의미는 죄와 사망과 저주에게 구원받는 것이다. 구원을 주도하는 것과 그 능력을 부여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이다. 인간의 영역은 그에 대한 수용 여부의 반응을 하는 것이다. 딤후 3:15은 성경에 대한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요 5:24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악된 불의의 삶으로부터 야기되는 모든 불안과 죄책에서 벗어나는 죄에 대한 심판을 받은 것과 또한 죄사함과 의롭다하심(justification)을 받고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과 아울러 장래에 하나님 앞에서의 평강과 희락의 삶을 누리게 될 것까지도 포괄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赦)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9).
하나님은 죄사하심을 약속하셨다(렘 32:34; 미 7:19, 20). 그리고 그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시는 신실한 분이다(시 89편; 롬 3:25; 고전 10:13; 딤후 2:13; 히 10:23; 11:11).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신실하신 성품대로 죄를 사하시겠다는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셔서 죄를 자백한 자들을 용서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의로움에 근거하여 고백한 죄인들을 용서하신다. 요일 1:9은 사죄의 권한이 하나님께 있음을 시사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통하여 그 분의 은혜로 죄를 사하여 주심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구별되고 빛 가운데서 영생을 향유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신다. 죄 문제 해결책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구속과 회복에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하는 것은 첫 회심 칭의 이후의 삶이 항상 의로운가? 한번 구원 받으면 영원히 구원 받는가?라는 질문에 직면한다는 점이다. 특히 이른바 이중예정론 주장자들은 하나님께서 구원 받을 자와 멸망 받을 자를 타락 전 또는 타락 후 인간의 선택과 상관없이 이미 작정하셨다는 지론을 펼치고 있다. 성도견인 교리가 한번 구원 받으면 영원히 구원 받는다는 사상을 전제하고 있어서 신앙 이후 어떤 심판도 받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재림교회 내에서 이런 이중예정 사상에 뿌리를 둔 사상에 현혹 받아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 받은 자는 십자가 이후의 심판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주장에 동조하면서 조사심판을 거부하는 자도 있지만, 이는 거시적 차원에서의 구원의 복음의 시각과 맞지 않는다. 또한 요한복음 5:24이 전달하고 있는 영생은 이런 편향적 시각과는 차원이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선택과는 상관없이 구원 선택과 유기(遺棄) 결정을 먼 예전 시간대 어느 시점에 하시지 않았다. 그런 선택은 인간이 자기 삶의 현재 시간대에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것인지 아니면 배척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구원 받았다고 고백한 사람들이 배신과 반역에 빠진 경우가 많아 왔다. 그리스도의 교회사에는 어린양의 탈을 쓴 늑대 같은 자들이 얼마나 설쳐 왔는가. 그리스도의 교회 안으로부터 작은뿔과 적그리스도가 등장하였다. 그리고 구원 확신을 한 사람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은혜로운 그리스도의 은혜 구원을 얼마나 싸구려로 전락시켜 왔던가. 여기에 의인과 악인 모두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신다”(전 3:17).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변호하시고 그에게 상급을 주고, 악인에게는 공의에 따라 징벌의 심판으로 보응하신다. 게인(Roy Gayne)이 말한 것처럼 조사심판은 회심 후에 누가 죄를 지었는가를 조사, 판단하는 것이 아닌, 누가 용서를 받고 현재도 은혜로서 그 용서를 유지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이다(누가 심판을 두려워하는가? p. 146).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자비로운 용서와 구원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면서도 이 양자는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반응하는 인간의 태도에 따른 결과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항상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게 되기를 원하시며(딤전 2:4), 이 일을 위해 독생자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인간의 불순종과 완악함이 끝내 구원의 문을 막아버릴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실상 심판이 주목적이라면, 하나님은 굳이 독생자를 보내지 않고서 물이나 불 혹은 기타 천재지변(天災地變)을 통해서도 심판하실 수 있다. 그러나 조사심판이 필요한 것은 과연 누가 십자가의 구원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리스도의 의(義) 안에 거하고 있느냐를 공적으로 판가름하는 데 있다. 더구나 하늘성소에서 하시는 조사심판에서 예수중보자와 옹호자로 중보 간구하신다.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조사심판의 계획과 목적이 매우 우호적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미 십자가 공로로 구원 받은 자들이 그리스도 중심이 되지 않고 자기중심으로 나갈 위험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끊임없이 하늘성소에서의 대제사장을 앙망하고 그의 은혜의 보좌로 나가도록 권고하고 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5-16).
십자가 영생구원과 조사심판의 관계
현재 진행되고 있는 조사심판을 재림 전 심판으로 바꾸어 부르기도 한다. 조사심판은 심판의 방법에 관련된 표현이고, 재림 전 심판은 심판의 시간적 의미를 함축하는 표현이나 그 폭이 넓어 종말론적 표현으로 한정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왜 재림 전 심판이 필요한가? 하나님은 전지하시기(시 33:13-15; 56:8; 104:24; 139:2, 6; 사 44;28; 말 3:16; 마 10:29-30; 행 15:8; 롬 11:33; 엡 3:10) 때문에 조사심판이 필요 없다. “主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딤후 2:19). 그렇다면 굳이 조사심판을 필요로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조사심판은 십자가의 구원을 불신 내지 약화시키거나 그 십자가의 구원과 충돌하는 개념이 아니다. 먼저 십자가에서 죄를 용서하시는 일이 얼마나 철저한지를 살펴보자. 구속(ἀπολύτρωσις, redemption)은 죄 용서이고(엡 1:7),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이며, 죄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仁慈)하심이 크심이로다 12 東이 西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罪過)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tl 103:11-12).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主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罪를 主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사 38:17).
미가는 포로에서 돌아 온 유대 지파를 두고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罪惡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罪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미 7:19)라고 하였다. 이런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와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및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의 메타포들이 보여주는 것은 구속하시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잊으신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점이 강력하게 나타나 있다. 여기서 구속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담긴 시장의 언어인 속전지불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용서 받은 죄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체험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신분은(요 3:15, 36; 6:47) 재림 전 심판 기간에서도 변함이 없다.
십자가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심판이다. 십자가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되지만, 또한 동시에 그리스도의 죄의 사악성에 대한 심판도 된다. 예수께서는 지상 생애의 전 봉사 기간 중 죄악에 대하여 적대적 메시지를 주셨다. 이것은 공생애 출발점에서 회개의 호소를 한 것에서 단적으로 나타났다(막 1:15). 시험 받으시는 중에서도 죄와의 타협을 완강하게 거절하셨다(마 4:4-10). 그는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셨다(히 12:4). 그는 온 마음을 다하여 자신을 하나님의 죄에 대한 심판에 드리셨다.
십자가 이후 오는 심판은 십자가 심판을 무의미하게 하거나 의문이 들도록 함에 있지 않다. 십자가 이후의 심판은 갈보리 십자가 심판에 덧붙이는 것도 아니다. 조사심판은 오히려 갈보리 심판을 더 들어내고, 그 완전한 심판을 적용하는 것에 그 핵심이 있다. 환언하면, 심판 날은 기본적으로 갈보리에서 일어났다. 다가올 자기희생을 내다보시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요 12:31). 갈보리 심판은 하나님 백성의 종국적 구원과 원수와 그 동조자들에 대한 종국적 파멸 결과를 시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재림 전 심판의 핵심 포인트는 무엇인가? 이 심판은 우주적 대 쟁투와 밀착되어 있다. 사단과 그의 악한 천사들은 반역 때문에 땅으로 쫓겨났다(계 12:7-9). 왜 그리스도의 재림 시 땅에 있는 죄인들이 하늘로 영접 받는가? 하나님께서는 한편을 쫓아내고, 다른 쪽을 반대로 하늘로 취하여 가신다. 이는 공정하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심판의 목적은 자기 백성을 하늘로 데려 가시기 전에 하나님의 공정하심을 증명하는데 있다.
이 세상 형사 법정에서도 사실 확인 내지 조사라는 일련의 공판이 긴 시간에 걸쳐 진행되고, 그 다음에 죄에 대한 언도심판이 뒤 따른다. 무죄 선고를 받은 피고는 자유의 몸으로 석방되고, 유죄를 선고 받은 자는 그가 행한 것에 부응되는 생명형, 자유형, 재산형, 또는 명예형 등의 형벌을 받는다. 이런 과정이 제3심까지 반복된다. 물론 대법원은 법률심이므로 사실관계 심판에 문제가 있으면 제2심으로 환송된다. 이렇게 지상법정 제도에 있어서도 억울하거나 누명을 뒤집어 쓴 피고를 살려내고 그의 인권을 보호하고 공정성을 기하는 제도적 장치를 둘 뿐만 아니라, 재심제도를 두어 추호도 오판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각 심급에서의 판결문을 누구나 받아 볼 수 있게 하여 최대한 정의와 공정성을 기하는 제도적 장치를 두었다. 어느 사건의 판결에 중대 과오나 또는 정치적 편향성이 있다면, 곧 세상 여론의 질타와 비판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해당 법관이나 정권은 불의한 법관 내지 불의한 정권으로 지탄을 받아 무자격자로 전락되고 통치의 정당성도 상실되는 결과를 야기한다. 불의한 재판을 하는 정권은 타도의 대상으로 전락된다. 하물며 하늘 법정은 온 우주를 대상으로 하나님의 의로움을 들어내는 목적을 추구하고 있다.
갈리(Norman R. Gulley) 박사는 그의 조직신학에서 이런 점에 역점을 둔 강조를 하고 있다(The Systematic Theology: The Church and the Last Things, 645-646).
종말론적인 심판들은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세 그룹의 지성적 존재들에게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먼저 재림 전 심판은 모든 인간을 위하여, 다음으로 천년기 심판은 구속받은 인간들을 위하여, 마지막으로 천년기 끝의 심판은 반역적 인간들을 위하여 각각 필요하다. 그리고 이 심판들은 사단의 거짓 참소에 대하여 모든 피조세계 존재들에게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사랑을 증명하는 목적으로 하신 응답이며, 구속 받은 자들과 타락치 않은 존재들에게 반역은 다시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각인(刻印)이 된다(계 21:2-4; 22:3-5). 즉, 이 심판들은 하나님이 공평하심과 사랑이신 분이며 사단은 그 반대라는 점을 모든 지성적 존재들에게 보도록 허락하신 것들이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대속과 부활에 토대를 둔 그리스도의 칭의, 칭의의 결과인 성화, 하늘성소에서의 중보와 중재 및 재림 시 구원, - 이 모두를 포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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