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
본문: 왕상 18:1-6; 11-15
Ⅰ. 얀 후스 이야기
얀 후스(Jan Hus)는 위기의 시대 혹한의 거센 박해의 바람을 맨 몸으로 맞았다. 그는 단기 필마로 거짓의 시대에 진실을 붙잡고 버텨 내다가 43세 나이로 1416년 7월6일 화형주에 달렸다. 후스의 순교500주년 기념비 아래 새겨진 말은 이렇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모든 사람들에게 진실되기를 기원하십시오(Love each other. Wish truth to everyone.”). 그는 “진실은 항상 이깁니다. (Truth always wins)” 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후스는 성경권위를 드높이고 교황에게 높은 도덕성 요구하는 등 이유로 화형 당했다. 로마 교황청 측이 내 세운 僞증인을 통하여 거짓 증언을 하게 함으로 정죄 당한 그는 "오늘 당신들은 한 마리의 거위(Husa)를 태우지만, 당신들이 태우지 못할 백조 한 마리가 나타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는 화형 당하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였다. 그의 신앙유산은 보헤미안 공동체, 모라비아 교회로 이어져 내려 왔으며, 100년 후 나타난 루터 백조의 종교개혁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Ⅱ. 종말론적 거짓의 전성시대
예나 지금이나 거짓이 세상을 휘어잡고. 거짓의 아비가 역사 이래 세상을 주도하여 왔다. 그러나 특히 종말 시대는 거짓의 전성시대가 되었다.
A. 단 11:40-45 <남방 왕> 정체 *
재림교회 내에서 오늘날 단 11:40-45에 나오는 북방 왕을 교황권으로, 남방 왕을무신론으로 보는 영적 풀이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남방 왕은 정치적이고 지역적 세력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을 배척하는 철학적 세력, 영적 세력으로 풀이한다. 쉐이 (Wm. Shea) 박사는 다니엘 주석서에서 남방 왕을 프랑스 닮은꼴인 무신론과 이성주의로 본다. 남방왕의 주 특징은 여호와 창조주 배척하고 인간이 만든 거짓 이념 (세속화된 종교)에 집착하는 점에 있다.
B. 1798년은 곧 종말의 때를 알리는 신호탄.
1260일(1260년) 예언기간 끝인 1798년은 곧 종말의 때를 알리는 신호탄이다. 무저갱에서 올라온 프랑스(계11:7) 혁명군이 1798년에 교황을 체포했다. 프랑스 혁명은 인간 이성의 여신이 두 증인을 박해하므로 마지막 때를 지배하는 이성주의와 무신론 시대를 열었다. 심지어 프랑스 혁명세력은 성경 배척을 법제화하고 주일제도를 바꿨다.
마르크스 공산 혁명은 프랑스 혁명의 직계 아들로 평가 되고 있다. 오늘날 이 시대는 마르크스 공산주의가 신 마르크스주의 의상을 걸치고 오늘 이 세상을 주름 잡고 있다. 그 여파가 세상을 포스트모던의 탈진실(post-truth)의 시대로 만들었다. 오늘의 시대를 흔히 탈진실(post-truth)의 시대라고 고급 표현이라고 진단하지만, 그것은 사실상 거짓의 시대라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성주의의 아들이 사용하는 방법은 가장 반이성적인 거짓을 혁명전략으로 사용하고 있다. 구소련 몰락 이후 서구의 네오마르크시즘을 추종하는 좌파 지성인들은 그리스도교의 윤리를 때려 부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가정 윤리를 파괴하고 젠더 이슈라는 무기로 음란을 부추기고 있다. 무신론과 음란은 함께 간다. 프랑스혁명이 그랬다. 그리하여 이 시대는 거짓으로 위장한 남방왕의 전성시대가 되었다.
프랑스 6.8혁명에 큰 영향을 끼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사르트르 등 좌파가 창궐할 때, 공산주의 신봉 찬양자 사르트르를 비판한 아롱(Raymond Aaron)은 좌파의 엄청난 비판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롱은 <지식인들의 아편>이란 책에서 종교가 아편이란 말을 바꾸어 공산주의가 좌파 지식인들, 교수들의 아편이라고 응수하였다. 그는 말한다. “정직하고 머리 좋은 사람은 절대로 좌파가 될 수 없다. 정직한 좌파는 머리가 나쁘고, 머리가 좋은 좌파는 정직하지 않다. 모순투성이의 사회주의 본질을 모른다면 머리가 나쁜 것이고, 알고도 추종한다면 거짓말쟁이이다.” 그는 동년배인 사르트르 같은 위선 좌파와는 차원이 다른 사상가였다. 무신론자 사르트르는 마지막에 병실에서 발광하면서 죽었다. 아롱은 마르크스주의(Marxism)를 ‘지식인의 아편’과 ”세속화된 종교“라는 유명한 평가를 내렸다.
함석헌 선생은 <뜻으로 본 한국 역사>에서 ”가장 담대히 거짓을 일부러 들고 나온 것이 유물사관“이라고 규정한 것도 이런 맥락으로 보인다. 우주 만유의 궁극적 실재를 오직 물질로 보는 유물론과 역사 원동력을 경제적 생산 관계 양상의 변증법적 발전 원동력으로 삼아 폭력혁명으로 부추기는 유물사관 논리는 피를 강같이 흘리게 하는 잔인한 독단에 불과하다.
어느 분은 이런 시대의 와류 속으로 들어가는 대한민국을 ‘거짓말 공화국’이러고 진단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사실’과 ‘진실’은 폄하되고, 페이크 뉴스가 범람하고 있다. ‘거짓’과 ‘사이비’가 활개 치는 세상이다. 사실과 진실의 권위가 무너진 폐허에서 선동가들의 거짓말이 번져가고 있다. ‘거짓완판’ ‘부패완판’의 사회로 전락된 느낌이다. “지금은 울 때이다.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부끄럽다. 사람이 어떻게 진실을 만나는가? 거짓을 묻으면 진실이 솟아난다. 가짜의 무덤에서 진짜를 만난다”(아브라함 헤셀, 누가 사람이냐).
재림신도들은 거짓이 행세하며 합법화되어가는 종말론적 시대에 살고 있다. 세상을 장악해 가며 수많은 사람들을 멸망시키는 거짓 악의 세력은 재림신도들에게 경각심을 주고 있다. 가나다 맥마스트대학교 송재윤 교수의 <슬픈 중국>을 읽으면서 엘렌 화잇 여사의 다음 메시지가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다. “크리스천은 낯선 나라에서 하룻밤만 머물고 있다.” 죄악의 소굴인 세상에서 “이 생명이 수증기처럼 사라져 간다(4T 490).
Ⅲ. 진리의 하나님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롬 3:4).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인자와 진실(emeth, אֱמֶת)이 많은 하나님”이시다(출 34:6). 이사야는 “眞理(아멘)의 하나님(amen, אָמֵן)”(사 65:16)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우리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眞理요 生命”(요 14:6)이 되신다.
히브리어로 진리, 진실을 뜻하는 단어는 ‘에메트(emeth)'이다. 이 단어는 세 개의 단어 머리글자를 모아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즉, ‘하나님’을 뜻하는 엘로힘(Elohim), ‘왕’을 뜻하는 멜렉(Melek), 그리고 ‘계속적으로’를 뜻하는 타미드(Tamid)의 각 단어 첫 글자를 따서 조합한 단어라는 것이다(공병호, 탈무드에서 <탈무드에서 인생을 만나다>). 그래서 진리는 하나님을 계속적으로 영원한 왕으로 모시는 것에서 나온다. (진리=하나님+왕+계속되다, 영원하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세속화된 종교나 이념 체계는 거짓이다. 그 안에 진리와 진실이 없다. 마지막 때 무신론 남방 왕과 무저갱에서 올라와 두 증인을 박해하며 인간의 이성을 극대화한 혁명은 아무리 자유, 평등, 박애를 내걸었다 해도 진리가 실종된 구두선에 불과하다.
Ⅳ. 아합의 거짓 이념체계
A. 아합과 이세벨의 바알-아스다롯 세속적 종교 이념 국책화
아합과 이세벨, 이들 악독한 통치자 부부는 백성들을 여호와 신앙에서 배도케 하는 세속화된 우상이념체계로 바꾸어 버렸다. 아합은 이세벨 아내로 맞이한 다음에 나라 전체를 음란한 우상숭배 제단으로 채웠다. 미국을 위시하여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 체계로부터 다른 이념체계를 바꾸어 가는 흐름과 호모와 젠더 이슈로 음란을 부추기는 통치양태를 두고 아합 시대의 닮음 꼴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아합 부부는 진실을 버리고 거짓을 택하여 백성들을 강제로, 그리고 조작된 여론으로 다른 이념체계 속으로 끌고 갔다. 그는 풍요와 다산의 신을 장려하였다. 그는 참 진리의 하나님을 배척하고 위조와 거짓의 신을 따르도록 한 것이다. 시대의 지성이라는 당대 선지자들은 모두 아합을 위한 거수기들로 전락했다. 그들이 만든 조작된 거짓 뉴스가 당대 사회를 옭아매고 있었다.
바넘(Phineas Taylor Barnum)은 19세기 조작의 명수, 희대의 사기꾼으로 알려졌다. 그는 선사시대 거인 같은 석고를 만들고 드릴로 구멍도 뚫어 농장에 매장한 후 발견케 하여 규화인(硅華人)으로 선전, 고액의 입장료를 편취하였는가 하면, 평범한 흑인 할머니 조이스 헤스를 161세 된 조지 워싱턴의 간호사라고 마찬가지 사기행각을 했다. 그가 남긴 말은 유명하다. “1분에 한명씩 어리보기가 태어난다"(There's a sucker born every minute). “대중은 속기 위해 탄생한다.” 옛날 아합 시대에만 바넘이 있는 게 아니다. 오늘날 온 세상에, 특히 권력 추구 집단에 그런 사람들이 판치고 있다.
B. 죄악이 불러온 재난
이스라엘에 기근 재난이 몰아쳤다.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盟誓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數 年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왕상 17:1). 3년 여 전에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보내 이런 선언을 하게 하셨다.
아합이 조작된 여론으로 백성들을 다른 이념체계 속으로 끌고 간 결과로 비가 내리지 않아 기근 재난 심판을 맞았다. 작은 심판은 하나님의 더 큰 심판의 도래를 알리는 경고 역할을 한다.
1. 기근(18:1-2) - 이 때 상황을 눅 4:25은 엘리야 시대 3년 6개월 동안 하늘이 닫히어 (한 때 두 때 반 때 표상) 큰 흉년이 들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스라엘에 내린 3년 반 긴 가뭄으로 인한 기근은 하나님께서 직접 내리신 심판의 경고장이었다. 엘리야가 그 메신저 역할을 한 것이다. 사마리아에는 1260일 오랜 기간 이슬도, 비도 내리지 않았다. 시냇물이 말라버렸다. 사회 경제는 파탄으로 치달았다. 농장도, 들판도 타들어 갔고 사람들의 생명도 타들어 갔다. 하늘이 닫혀 버린 결과이었다. 사람들도, 짐승들도 죽어갔다. 인심은 흉흉해 갔다.
2. 통치자의 책임 전가(18:13)--흉년의 책임을 물어 이세벨은 선지자들 살해하였다. “바알의 제사장들과 거의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일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모두 죽인다면 재난이 사라질 것이라는 거짓 선전에 기만을 당하였다.”(3증언, 276).
3. 가뭄의 원인--당대 지도층의 배교, 많은 사람들의 사악한 죄, 그리고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한 의인의 기도의 열쇠가 재난의 원인이 되었다.
“백성들은 그렇게 무서운 흑암 가운데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공의가 저들에게 발해진 것은 저들의 죄 때문이라는 것과, 또한 저들의 열조의 하나님을 완전히 부인하고 떠나가는 일로부터 저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비하심 가운데 이 두려운 재앙이 저들에게 임했음을 깨달을 수가 없다.”(3증언, 276)
“바알의 제사장들, 아합, 이세벨, 거의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악행에서 재앙의 원인을 찾지 않고 엘리야를 지목, 비난. 아합은 주변 각 왕국과 민족으로 이상한 선지자 수색대, 왕국들과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그들이 그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맹세를 하게 하였다. 엘리야는 하늘을 잠가버렸으며, 그 열쇠를 갖고 사라져 버려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3증언, 276). 하나님이 숨긴 자를 아합이나 이세벨이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Ⅴ. 하나님의 명령-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18:1)
3년6개월이 되어가자 백성들의 마음에 늦게나마 재난의 원인이 자기들 거짓 체제에 있다는 것 감지하기 시작했다. 백성들의 의혹이 일자,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비를 내리게 하겠다는 구원의 메시지를 가지고 왕궁으로 향하게 한다,
A. 엘리야 파송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왕상 18:1). 엘리야는 주저 없이 순종의 발걸음을 옮겨 사르밧을 떠났다.
B. 오바댜와 엘리야의 만남
이전에 오바댜는 엘리야와 만난 일이 없었다. 그러나 엘리야의 영웅적인 신앙 챔피언으로 나서서 활동한 것을 듣고 있었다. 그는 엎드려 말하되 “내 주 엘리아여”라고 했다. 이는 존경심의 발로이다. 오바댜는 3년 반 전 왕궁에 나타나 선언하고 떠나간 엘리야를 늘 기억하며 하나님의 큰 뜻이 무엇인지 찾으며 기도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이 기도에 응하셨다. 홀로 숨어 있던 영웅 엘리야를 위기시대의 파고를 온 몸으로 부딪치며 돌파구를 찾고 있는 오바댜를 만나도록 주선하신 것이다. 오바댜가 엘리야를 만난 것은 하나님의 섭리적 만남이었다. 오바댜는 기다렸던 별의 순간을 잡은 것이다. 엘리야를 숨기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있던 그는 배수진을 쳤다. 하나님이 또 어디로인지 당신을 빼돌리면 나만 죽게 된다는 비극을 말하면서 탄원을 한다. 그는 엘리야에게 함께하는 거룩한 권능을 믿었다. 이 대목에서 나는 믿음의 사람 오바댜가 마음속으로 영적 대쟁투인 갈멜산 대결이라는 큰 판으로 나서게 하는 큰 그림을 그리면서 엘리야를 확실하게 붙잡는 간청을 한 것이 아닐까하는 상상을 해 본다.
엘리야는 오바댜에게 가서 아합에게 엘리야가 나타났다고 전하라고 한다. 오바댜는 엘리야에게 자기를 죽이려고 하느냐고 반문하였다. 가서 아합에게 말하는 즉시 하나님의 영이 당신을 숨겨버리면 나는 거짓보고로 인하여 꼼짝없이 죽을 거라는 것이다. “주(아합 왕)께서 사람을 보내어 당신을 찾지 아니한 족속이나 나라가 없었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엘리야가 없다 하면 그 나라와 그 족속으로 당신을 보지 못하였다는 맹세를 하게 하였다”고 하였다(18:12). 오늘날의 용어를 빌리면 디지털 검색 네트워크를 가동한 상황이었다.
C. 준비된 사람 오바댜(Obadiah)
거짓이 판치는 난세나 험난한 시대에는 양심이나 신앙을 지키기가 어렵다. 하나님은 악독한 통치자가 독재를 할 때라도 당하고 있는 어려움을 한숨과 신음하는 것으로 보내지 않고, 그것을 풀어나가 새 시대의 물꼬를 터주는 사람을 찾고 있다. 그 사람은 불의 예언자 엘리야이다. 그리고 이 엘리야를 아합 왕에게 연결시킨 충신 오바댜이다.
오바댜(오바드야, Obadyahּ)는 ‘여호와의 종’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재난 중에라도 오바댜 같은 이를 키우고 계셨다. 그는 북방 이스라엘에서 “왕궁을 맡은 자”이었다. 오늘날 대통령의 비서실장 겸 수상(prime minister) 같은 역할을 하는 지위에 있던 분이었다.
오바댜와 아합, 이 두 사람의 팀워크는 도무지 조화되지 못할 하늘과 땅 만큼의 격차가 있는 사이인데 어떻게 한 팀이 되었을까? 악한 왕 아합도 탁월한 인물을 보는 눈을 가졌는가? 조폭 보스도 성실하고 신뢰할만한 사람을 제2인자에 앉히는 법인가?
“아합왕도 오바댜가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을 돌이킬 수 없었다”(PK 138).
세계관, 인생관이 달라 마음에는 안 들었지만, 거짓이 판치는 세상에서 가장 진실하고 믿을만한 점이 보인 탓에 국가의 제2인자로 맡겼을 것이다. 악당 부부에게 오바댜를 짝으로 맺혀준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가장 악당 같은 부부에게도 살길을 보여주시고자 가장 선한 사람을 짝지어 주셨을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이었을 것이다.
4. 아합의 주된 관심(18:4)- “물 근원과 모든 내로 가자 혹시 꼴을 얻으리라 그리하면 말과 노새를 살리리니 짐승을 다 잃지 않게 되리라”(18:4), 그는 백성보다 자기 가축 생존에 집착에 더 집착하였다.
Ⅵ. 오바댜의 신앙 인품
위기와 재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본문은 재림신도의 모델이 됨직한 오바댜로부터 신앙인의 세 가지 자세를 일깨우고 있다.
A. “당신의 종은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왕상 18:12)
1. ‘어려서부터’-KJV, from my youth. youth는 십대에서 20대 초반. 청소년 때부터 하나님을 신실하게 경외하였다고 고백한 것이다. 젊은 날은 미래를 준비하는 기간이다. 평안한 시대나 위기의 시대에 한 결 같이 하나님의 경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평소에 기본기를 익힌 사람에게 승리가 있다.
라인홀트 메스너는 히말라야의 8,000미터 이상 고봉 14좌를 최초로 모두 무산소로 완등하는 비법 소개에 사람들이 감명 받았다. 그는 다른 사람처럼 베이스캠프를 5천 미터에 설치하는 방법을 채택치 않았다. 그는 아예 산 아래에서 부터 단계적으로 천천히 고지 적응훈련을 하면서 무 산소 등산 훈련을 하면서 나가 성공했다.
2. “경외(יָרֵא )”-거룩한 두려움, 자신의 무가치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 인간이 사랑과 두려움 및 감사로 엉켜진 거룩한 두려움, 오바댜는 신앙의 기본기가 된 사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다”(잠 1:7; 9:10). “성경 한 문장이 일 만개의 인간의 사상이나 변론보다 더 가치가 있다.” 경외함으로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옷입게 된다.”(3TT 110-111). 심령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임재는 오바댜의 전신에 활력과 힘이 되었다. 학자가 되는 것보다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어렵다. 성경연구도 이 경외 체험을 위한 수단. 수단만 강조하는 일이 너무 많다. 성경연구를 강조하는 시대는 그만큼 경외가 없다는 뜻도 되기 쉽다. 오바댜는 아합 궁에서 성도가 되었다. 그렇다면 어느 곳에서든지 성도가 되는 일이 가능하다.
본문의 ‘경외(yare)'를 헬라어로 번역한 LXX는 ‘phobeo'로 번역했다. 요한계시록 14:9은 “두려워하라”은 바로 같은 단어 ‘phobeo'를 사용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오바댜는 세 천사의 메시지 선포를 사명으로 부여 받은 재림신도의 귀감이 된다.
거짓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에 경건의 비밀과 권능을 지닌 자가 되자!
신학자가 되는 것보다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어렵다는 말이 있다. 성경연구도 이 경외 체험을 위한 수단이다. 성경연구를 많이 강조하는 시대에는 그만큼 경외가 없다는 반증이 되기 쉽다. 오바댜는 아합 궁에서 성도가 되었다. 그렇다면 어느 곳에서든지 성도가 되는 일이 가능하다. 아합 왕이라도 오바댜가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을 돌이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PK 138). 오바댜는 바벨론 궁정에 다니엘, 애굽 바로 궁전에서의 요셉과도 같고, 아람 나아만 장군의 집 계집종과도 같아 보인다.
B. 신앙인들 네트워크 구축, 남은 자손 지도자들 양육 보호
“내가 여호와의 선지자 중에 일백 인을 오십 인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로 먹인 일이 내 주께 들리지 아니하였나이까”(왕상 18:13). 여기 사형령을 피하여 은신처에 숨은 선지자학교 생도들은 짐승의 우상 경배를 거절하여 산골로 피할 종말론적 예언 백성들의 모델처럼 비친다.
사마리아 서북방 60km 상거한 갈멜산에는 약 2천개의 석회굴이 있어 은신처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바댜는 이 지역에 선지자들을 숨긴 것으로 보인다. 몇 해 전 로마 관광을 했을 때 가장 인상 깊게 옛 신앙이 물씬 풍기는 곳은 거미줄처럼 뻗혀 있는 카타콤이었다. 다른 곳으로 도망가지도 않고 로마권역 안에 있는 지하 터널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았던 분들의 발자취가 물씬 풍기는 곳에서는 그들 발자취마다 감동이었다. 그리고 나를 부끄럽게 했다.
1. 동굴 속에 피난처를 찾은 이들은 엘리야 시대의 신앙 네트워크 같이 보인다. 오바댜는 미래 세대의 지도자를 키우고 있었다. 엘리야가 바알 숭배자들과 갈멜산 상에서 대결하였을 때 엘리야의 기도로 하늘의 불이 내려온 것이지만, 산 여기저기 있는 동굴에서 이들 100명의 기도부대의 간절하고 뜨거운 기도가 합하여 역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2. 위험한 일을 장기적으로 혼자서 하는 것은 어렵다. 소수 믿음의 근육이 튼튼한 동료들이 있어 협력하여야 가능하다. 신앙에 투철하여 영성이 강하고 경건한 친구들이 물과 밥을 날려 주어야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고지에서 혼자 승리하며 살 수 없다. 화려한 싱글은 없다. 숯불, 혼자서 사는 일은 어렵고 외로우며 위태. 이일을 위하여 참 신앙의 남은 무리의 지원을 받아 100명을 살려 냈을 것으로 보인다.
위기의 시대에 100명의 선지자들을 살려 내는 일은 생명을 건 모험이다. 잠시 동안은 가능한 일이었다 해도 꼬리가 길면 언젠가는 발각될 일이었고 그 일로 파직은 물론이요 생명을 바쳐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하라고 오바댜와 그의 동료들을 파송한 것이다.
3.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10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11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 4:8-12). 이런 신앙의 삼겹 줄 구축을 재난과 위기의 시대를 넘어가는 디딤돌로 삼자!
C.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소명/사명을 지켜 내는 일에 헌신
1. “아합이 궁내대신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왕상 18:3). 이는 오바댜의 고백이 아닌 열왕기서 편집자 예레미야와 그의 동료 편집자들이 객관적으로 한 표현이다. “지극히(meod)”는 ‘있는 힘을 다하여’(왕하 23:25). ‘굉장히,’ ‘극진히“(대상 16:25)의 뜻이다. 복음서의 푷녀을 빌리면, 메오드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라는 뜻이다(막 12:30; 눅 10:27). 3절에 나와 있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 라는 평가는 부르신 소명을 받고 헌신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아합 왕도 오바댜가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을 돌이킬 수 없었다”(PK 138). 예수께서는 서기관의 질문에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대답하셨다. 여기서 “다하여”는 인간 전 존재를 다하여 라는 뜻이다. 신앙은 all or nothing이다. 하나님은 전부를 요구한다.
2. 엘리야는 15절에서 “엘리야가 이르되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라고 했다. 여기서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부르심을 받은 일에 헌신과 충선을 다했다는 뜻이다.
3. 소명(calling)이란 무엇인가? 선지자 그룹이나 목회자만 소명 받는가? 하늘을 열고 닫을 수 있는 엘리야만 소명 받았는가? 아니다. 세상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어떤 일을 하는 모두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즉, 하나님은 인간에게 사명을 주어 보낸다. 전공영역이 달라도 모두 자기 영역에서 하나님의 사명이 있다.
세속적인 일에 부름 받아 나선 오바댜는 왕궁에서 소명 받은 대로 있는 힘을 다하여 자기 사명에 헌신했다. 그는 직통계시도 못 받고 이적을 행하지 못했지만, 할 수 있는 일에 헌신했다. 그는 일반적인 부르심에 따라 믿음대로 근실하게 살아가는 그룹을 대표한다. 동굴 속의 100명 기도부대도, 7000명(왕상 19:18)도 대부분 이 그룹에 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 중에 오바댜도 들어간다. 계시도 영감도 받지 않은 평범한 신자 군이거나 평범한 직장인들이지만. 믿음을 지키는 일에는 엘리야 보다 더 고생스러웠음직하다. 그러나 오바댜는 믿음대로 돌파해 나갔다. 아합 권력이 하나님 사람들 색출 작업하여 나갈 때, 오바댜는 수상 자리를 내 던지고 싶었을 내면적 갈등을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버텨 냈다. 비가 오지 않아 가뭄에 타들어가는 대지만큼 오바댜 마음도 타들어갔고 고통스런 밤을 수없이 보냈을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고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수상이 된 것은 권력에 탐이 나서인가? 아니다. 하나님이 보냈다는 확신 때문이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은 성직에만 국한 되는 일이 아니다. 성직과 세속적 직업이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calling은 직업도 되고 소명도 된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은 소명도 된다. 맡은 일은 사명이다. 직업은 소명이고 사명이다. 나는 명령 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그래서 천직이라고 한다. 이런 소명 바탕에는 참 신앙이 깔려 있다. 진리에 나를 옭아매고 이 토대 위에서 삶을 사는 것, 여기에 목숨을 거는 것이 소명이다. 엘리야도 이 소명을 따라 움직였고, 오바댜도 국사를 통할할 때 이 이 소명에 따라 사명을 다하였다.
4. “지극히” 충성한 분들 이야기
(1) 최태현 목사는 연합회장으로 헌신하다가 순교
(2) 지리산 천왕봉 아래 신앙 유적지 탐방 이름 없는 분들이 헌신 충성
(3) 이성옥 장충동 대동양복점/을지로 신앙공동체
Ⅶ. 호소
"세상의 가장 큰 결핍은 곧 인물의 부족이다. 그 인물이란 매매되지 않는 사람, 저희의 심령 속이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 죄를 그대로 죄라고 부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마치 나침판의 바늘이 틀림없이 남북을 가리키듯이 양심이 그 의무에 충실한 사람, 비록 하늘이 무너질지라도 옳은 일을 위하여 굳게 서는 그런 사람들이다." (Ed 57).
하나님께서는 위험하고 험난한 세상에서 젊은 시절부터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오바댜를 부르셨다. 그리고 그를 불의 예언자 엘리야와 연결시키셨다. 그런 후에 이들을 아합에게 보내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십자가의 은혜로 살려내시고 참 하나님을 경외하는 양육과정을 거쳐 사명을 주어 세상에 보내신다. 하나님 백성들은 오늘도 선과 악의 대결 속에서 살리고 키우고 보살피는 신앙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대열에 서있다.
하나님은 여호와를 크게 경외하는 평범한 신자들을 오늘도 부르고 계신다. 악의 물결 속에서 선으로 악을 이기며 100명을 살려내는 시대의 남은 무리 네트워크와 함께, 신앙을 지켜 내고 사람을 살려내면서 주의 오심을 준비시키는 일에 헌신하자.
<참고자료>
* 단 11:40-45 의 북방 왕과 남방 왕 정체
2019년 10월 베리엔 스프링스 소재 Village Seventh-day Adventist Church 주최 “다니엘 11장 예언 연구회(Daniel 11 Prophecy Conference)” 모임에서는 재림 교회 성경학도 및 학자들이 난제에 속하는 다니엘 11:40-45의 북방 왕과 남방 왕의 정체에 관한 연구 발표를 한 바 있다. 발표된 연구 논문들은 3가지 입장들로 축약된다.
(1) 북방 왕 터키/ 남방 왕 이집트 입장(The Turkey and Egypt Position)
이는 스미스(Uriah Smith)의 문자적 해석을 따라 북방 왕을 터키로 보고, 남방 왕을 이집트로 보는 입장이다. 이 입장을 견지하는 근거로 다니엘 11장 전체의 문자적 해석에 조화된다는 점, 그리고 엘렌 화잇 여사의 강력한 지지가 있었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러나 북방 왕을 터키로 보는 것은 근동의 정치 정세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엘렌 화잇 여사의 지지가 있었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다분하다는 비판이 있었다.
(2) 북방 왕 교황권/ 남방 왕 무신론 입장(The Papacy and Atheism Position)
이미 11:36-39에서 1798년 이전에 참람되고 박해하는 교황권 세력이 등장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더 이상 문자적 해석은 의미가 없어 40-45절에 나오는 북방 왕을 교황권으로 보는 것은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더 나아가 이런 풀이가 다니엘 7-8장에 나오는 작은 뿔 세력과 평행적이 되고 요한계시록 12-14장의 종말론 및 데살로니가 후서 2;3-8과 잘 어울린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3) 북방 왕 교황권/ 남방 왕 이슬람 입장(The Papacy and Islam Position)
남방 왕의 정체를 종교-정치 세력인 이슬람 세력으로 보는 시각이다. 그리하여 이 입장은 로마와 이슬람 사이에 정치적, 군사적 대결에 역점을 두고 있다. 이 주장은 최근 등장한 풀이로 문자적 해석과 중동의 패권 세력 이슬람을 부각시키나 문자적 해석의 한계성과 중동 정치권력의 취약성을 간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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