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메섹으로 향한 바울
다메섹으로 향한 바울
- 사도행전 9장을 읽으면서 -
다메섹 스케치
1981년 여름 어느 날 1시경 예루살렘 소재 시리아 대사관에 비자 신청하러 갔다가 휴무 중이어서 다메섹(다마스쿠스)을 못간 아쉬움은 지금도 남아 있다. 다메섹을 가 보려고 했던 이유는 그곳에 남긴 바울의 발자취를 걸어보고 싶어서였다. 도시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관통하는 직가도 걷고 싶었고, 바울을 탈출시킨 성벽도 기대고 싶었다. 나만 장군이 자랑한 강들에 발을 담그고도 싶었다.
다메섹은 현재 시리아 공화국의 수도로서 남서쪽에는 헤르몬(Hemon) 산을 안고 안티 레바논(Anti-Lebanon) 산맥의 동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다메섹은 데가볼리 주요 도시로 시리아 사막 가운데에 있는 오아시스 같은 녹지대이었다. 이 도시는 안티 레바논 산맥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아마나(아바나) 강변에 있다. 도시 남쪽에는 나아르 엘 아와이강 (바르발강)이 남으로 흐르고 있다. 따라서 풍부한 수원에 토지가 매우 비옥하여 생산성이 높은 곳이었다. 그곳 주민들은 대부분 아람 사람들이었지만, 유대인 큰 공동체도 있었다.
전승에 따르면 이 도시는 아벨이 살해된 현장이다. 요세푸스(Antiquities ⅰ. 6. 4 [145])는 셈의 손자인 우스가 이 성읍을 건설했다고 한다(제1권, 248). 이 곳은 아브라함의 청지기 엘리에셀의 출신지로 나온다(창 15:2). 다윗은 이곳에 수비대를 두었으나(삼하 8:6), 르손의 지배 아래 솔로몬 반대 세력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왕상 11:23~25)
가말리엘 문하생의 빗나간 선택
힐렐(Hillel) 학파 문하생으로 등록한 사울은 당대 존경 받는 최고 석학이자 힐렐의 손자이었던 가말리엘의 가르침을 받았다(행 22:3). 가말리엘은 존경받는 라반(Raban)의 칭호도 받았다. 유대 전승은 그를 두고 이상적인 바리새인으로 칭송하고 있다. 힐렐 학파는 샴마이(Shammai) 학파보다 더 유연한 학풍을 지녔다. 힐렐 학파는 덜 율법주의적이었다. 오늘날 말로 표현한다면 샴마이 학파는 극 보수적이며 율법주의적이었다. 이들은 로마의 통치를 비롯하여 모든 변화를 거부하였다. 반면에 힐렐 학파는 로마 정부에 폭력 투쟁을 반대하고 협조적으로 나갈 것을 권고했다. 가말리엘은 당대 헬라 사상에 개방적이었다. 이런 관대하고 유연한 가말리엘은 후에 산히드린 공의회의 사도들에 대한 박해를 두고 만류하는 권고도 하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39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행 5:35, 38-39).
강퍅하였던 사두개인들 조차도 가말리엘의 이 건전한 권고에 어쩔 수 없이 사도들을 죽이지 못하고 채찍질 한 후 석방하였다. 그런데 가말리엘 문하생이었던 사울은 스승이 보인 그리스도의 제자들(사도들)에 대한 여유를 둔 관대한 태도와는 사뭇 다른 열심당원 같은 폭력적 행보를 보여주었다. 오히려 그는 샴마이 학파의 문하생처럼 행동했다. 그는 새로운 빛에 대하여 닫힌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는 정의와 사랑의 사람 스데반의 천사 같은 마지막의 모습이 각인된 자기의 마음을 지울 수 없었었다. 스데반의 고결한 순교에 충격을 받은 그였으나 사울의 행보는 제자가 선생의 열린 자세와는 한사코 반대의 길로 나갔다. 그의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정복자 메시야 사상이 이러한 그의 빗나간 행보를 재촉했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다메섹으로 향한 그의 발걸음은 빗나간 확신에 사로잡혀 무죄한 스데반을 죽이는 그 연장선이 되는 길이었다.
다메섹으로 향한 길은 박해자의 길로 매진하는 길이다. 권력자들은 그리스도교회를 말살시킬 수 있다는 착각을 한다. 예루살렘과 그 주변 유대에서 박해가 일어나자 그리스도인들은 다메섹을 자기들의 피난지로 삼았다. 이들은 박해하는 영국을 등지고 험난한 파고를 넘어 신대륙으로 향한 청교도 같은 발걸음을 걸었던 것이다. 당시에 확장 일로에 있는 교회의 외곽 중심지 다메섹에는 주의 제자들이 계속 모여 들었다. 당시 다메섹에는 30개 내지 40개의 회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시각이 있다. 신실하고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도시에 있는 회당 모임에 참석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울은 그들을 무지하고 광신적인 무리들로 간주하고 그들을 잡으러 가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역 회당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예루살렘 산헤드린의 포고령을 집행하도록 요청받았을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교회를 성공적으로 제압한(행 8:1-4) 사울은 그 여세를 몰아 그리스도인들이 계속 증가하고 있는 다메섹에 가서 주의 제자들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송치하려고 대제사장의 위임장을 받아 살기등등한 기세로 가고 있었다 (행 9:1-2). 다메섹까지 가는 거리는 요르단 강 근처 여리고를 거쳐 가는 최단 코스로 말을 타고 갈 때 225km거리에 6-7일 걸리는 여행이다. 사마리아 길로는 240km가 되는 거리이다.
사도행전의 바울 위상
사도행전 9장 이하는 대부분 바울의 행적을 다루고 있다. 그는 세 차례 선교 여행의 주역이었을 뿐만 나니라. 마지막 로마 여정에서도 중심인물로 나온다. 그의 회심 전 이름은 같은 베냐민 지파 가문에 속한, 이스라엘 첫째 왕 사울(“하나님께 묻다”)의 이름을 딴 것으로 보인다. 사도행전 13장 초두에는 “바울(Paulos)이라고 하는 사울(Saulos)”(9절)이라고 하는 두 개의 이름이 나온다. 한 사람이 활동 배경을 달리할 때 그에 부응하여 걸 맞는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전에는 가족이나 동족 배경, 즉, 히브리적 환경에서는 사울로, 세계 선교의 새로운 장을 펼치는 13:9 이후에는 그리스-로마 제국 내 이방인 선교 사명에 부응하여 “바울”이라고 한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이라는 말의 뜻은 “작은(small)”이다. 겸손이 깃든 그의 이름과 그가 이룬 업적을 비교하면 작은 거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도행전에는 다소의 사울이 회심한 일과 부르심에 관한 이야기가 세 군데 나온다. 행 22장과 26장에 나오는 이야기는 바울의 훗날 자기 신앙 고백을 기록하고 있으나, 맨 먼저 나오는 행 9장은 누가의 객관적 기술이다. 누가는 바울의 회심 전 정통 유대인으로서의 삶, 예루살렘에서의 교육과 훈련, 그의 바리새주의를 밝히고(행 22:3; 26:4-5), 박해자로서의 모습과 다메섹 환상을 소개한다(9:3-7; 22;5-16; 26:12-18). 그리고 교회를 박해하는 적장이 그리스도교 복음 선교의 위대한 챔피언으로 활동하는 전모를 밝혀 가고 있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바울에게 ‘사도’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당대에 바울은 유대 사회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가장 논란의 대상이 되는 독특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누가는 그토록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복음의 전사 바울의 전기적 회심 이야기와 그의 역할을 변호하고 있는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를 직접 부르시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에큐메니칼 사도로 삼으신 것이다.
가시채로 뒷발질하기
스데반을 죽일 때 사울이 보인 열성으로 인하여 사울은 산헤드린 회원으로 선출되기까지 하였다(참고 행 7:59; 8:1; 22:20; AA 102), 그는 곧이어 예루살렘에서 박해를 피하여 다메섹으로 간 그리스도인들을 추적, 가혹하게 진압하고자 한 것이다. 성령의 호소를 무시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불타오르는 열성을 지닌 그는 여행 마지막 날 ‘정오’에 다메섹 근처에서 홀연히 해 보다 더 밝은 강열한 빛을 보고 눈이 멀어 땅에 엎드러졌다. 이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이었다. 그 때 히브리 방언으로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는 음성을 들었다.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 9:5). 그는 그토록 바랐던 메시아를 만난 것이다. 나사렛 예수께서 그의 길을 막은 후, 광신과 미망에 빠진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는 점을 깨닫는다. “가시채를 뒷발질하기”(행 26:14)란 속담은 농부가 소의 느린 걸음을 재촉하기 위하여 쇠막대기로 치는 일을 일컫는다. 여기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동이 어리석고 무모하며 불가능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또한 이는 사울의 양심이 성령이 호소하는 하늘의 기별을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는 양상이나 고투를 드러내는 표현이다.
사울은 맹인으로 전락한 것을 두고 자기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박해한 일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사울의 동행자들은 하늘의 빛을 직시하지 않은 탓에 그들의 시력에는 이상이 없었다. 사울은 직가에 있는 유다의 집으로 인도 받아 “쓰라린 후회”로 가득 차 3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양심의 고투를 하고 있었다. 그는 대제사장이 발급한 위임장을 다메섹 유대인 회당 지도자들에게 건넬 수도 없었다. 주께서 환상 중에 다메섹의 그리스도교 지도자인 경건한 아나니아라는 제자에게 지시를 내렸다. (1) 직가에 있는 유다의 집으로 가라. (2) 기도하고 있는 다소 사람 사울에게 안수하고 다시 보게 하고 그에게 참다운 사명을 일깨워라.
대제사장으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결박할 권한을 받은 사울에게 가는 것을 망설이는 아나니아에게 주께서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행 9:15)이라고 하며 “가라”고 명하신다. 이 명령에 따라 아나니아는 고투하는 사울을 만나 안수 기도를 하였다. 사울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져 나가 시력이 즉각적으로 회복되었다. 물론 이 회복은 다메섹 오기 이전과 같아졌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하늘의 빛에 의해 눈이 멀었던 그리스도의 영광의 표(흔적)를 그의 눈에 몸에 언제나 지니고 다니게 되었다“ (Ellen G. White, Sketches from the Life of Paul, 34).
“바울은 육체적인 고통이 있었다. 그의 시력이 나빴다. 그는 열렬한 기도로 고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지만 주님이 가지신 목적은 따로 있었다”(Ellen G. White, Letter 207, 1899).
갈 4:13-15의 문맥에 비추어, 그리고 위의 EGW의 메시지 시각에 비추어 그가 세 번씩이나 간절히 기도했던 ”육체의 가시 곧 사탄의 사자“(고후 12:7-10)는 안질이었을 것으로 본다. 장로교 유명 목사가 바울의 육체의 가시를 간질로 보는 풀이를 한 것을 들었지만 이는 빗나간 풀이에 불과하다.
그리스도 복음의 챔피언의 관의 길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행 9:19-22).
바울은 즉시 회당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가 첫 복음 전파의 장소로 택한 회당은 박해의 본거지이었다(9:2).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위해 방문하기로 되어있는 장소였던 회당을 복음 전파의 무대로 삼은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역전 드라마인가! 그리스도를 거절한 유대인들이 놀라 당황하였다. 유대 전승의 강력한 논리를 구사하는 옹호자 바울이 배신을 때리는 도전자로 나선 것으로 비쳐진 유대인들 공동체에서 소란이 일어난 것이다. 그들은 해박한 지식과 논리를 갖춘 바울의 설파를 당해 낼 수 없었다. “그들의 놀람은 저희가 예수에게 나타냈던 것과 같은 격렬한 증오로 변하였다.(AA 125). 이는 바울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신호탄이 되어 제자들이 바울을 광주리로 탈출시켰다99:25).
바울의 메시지는 단순하다. 다메섹에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 회당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유대인들이 그토록 기다려 온 메시아라는 것이다. 바울은 먼저 유대인들을 위하여 선교사로 활동했다(고전 9:20; 롬 11:14-25). 그는 가는 곳마다 안식일에 회당을 찾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강론했다. 로마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마지막 장에 나오는 유대인들 동료와 동역자들에게 문안한다. 그는 끊임없이 유대인이 지닌 율법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구원의 복음과 어떤 맥락을 지녔는지를 밝혀 가는 서신을 남겼다. 유대인들이 그를 배척한 때는 이방인들에게 향하였다.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끊임없이 복음의 위대한 챔피언으로 활동하면서 고난을 받으며 급기야는 순교를 당한 것이다.
9:23에 나오는 “여러 날‘에 관한 해설이 분분하다. 많은 주경가들이 바울이 회심한 AD 35부터 38년까지 3년 여 기간을 상정하고 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위기를 피하여 아라비아로 갔다(갈 1;17). 여기에서 바울의 영적 신앙생활의 바탕이 정립되었다. 그는 거기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기도와 명상, 그리고 성경 연구에 진력하였다. 당시 아라비아는 나바테아인(Nabataeans)의 왕 아레타 Ⅳ세(Aretas Ⅳ, BC 9-AD 40)의 통치하에 있었다. 아레타스 왕의 수도는 오늘날 관광의 명소가 된 사해 남쪽에 있는 페트라(Petra)이었다.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와 베레아(Perea) 지역(유대 동쪽)을 다스리던 분봉왕이었다. 그는 나바테안 왕국의 아레타스 4세의 딸 파샬리스 와 결혼하여 20년 이상 살았으나, 이복동생인 헤롯 빌립 2세의 아내이자 또 다른 이복동생 헤로디아와 결혼하므로 아레타스 4세의 딸과의 결혼이 파탄 났다. 침례자 요한이 이 부도덕한 일을 두고 헤롯 안티파스에게 “형제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비판했다가 투옥 당하고 헤로디아와 살로메의 계략으로 결국 목 베임을 당하였다.
아레타스 4세는 자기 딸을 버린 안티파스를 보복에 나섰다. AD 37년 그는 다메섹을 점령 통치권을 장악하였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의로운 침례자 요한을 죽인 징벌로 보았다. 아레타스가 다메섹을 점령한 시기는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가 죽은 AD 37부터 아레타스 4세가 죽은 AD 40 사이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로마 황제는 안티파스의 구원 요청을 받고 시리아 총독 비텔리우스(Vitellius)에게 출동을 명한 후 얼마 뒤 죽어 로마 정정이 불안한 상황에 빠지게 되고 비텔리우스가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갈리굴라(Galigula, AD 37-41)가 황제로 등극하여 아레타스 정권을 봉신국으로 삼고 우호정책을 펼쳤다. 안티파스와 헤로디아는 결국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여 생을 마쳤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생명의 위기에 봉착한 사건은 아레타스가 다메섹의 통치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정치적 소용돌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바울은 국가 간의 분쟁과 강대국의 전횡이라는 시대적 험난한 파고 속에서 다메섹에서 복음 선교자로 나선 것이다. 그의 복음 선교는 각박하고 위기의 시대에 틈바구니 사이를 헤쳐 나가는 하늘의 모험이었다. 그는 가시채로 뒷발질 하는 영혼의 고투를 겪은 후 다메섹으로 향한 박해자의 길을 어렵사리 접었다. 그러나 그는 동족의 위협과 국가 간의 분쟁의 사이에서 의로운 고난을 당한 순교자 스데반의 바통을 이어 받는 길에 자기를 투신하여야 했다. 아라비아 황량한 곳에 가서 기도하고, 명상하며 말씀을 탐구하며 영혼을 찾아 나서서 다시금 다메섹으로 간 것이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행 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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