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len G. White 첫 계시 내용의 의미
Ellen G. White 첫 계시 내용의 의미
1844년의 종교적 열풍--13년 동안 Miller의 재림운동은 S.S. Snow 10월 22일 시간설정으로 더불어 8월 뉴햄프샤의 장막집회부터 열풍이 고조되기 시작하여 10월 22일의 절정을 향해 치 닫고 있었다.
A. 1844년 늦가을 뜨거웠던 정치계
제11대 대통령 선거전 대권주자들--1844년 초부터 후보들 선거 열전
1. 민주당 James K. Polk(당선).
2. Whig당 Henry Clay--켄터기 출신 하원의장 역임, 상원의원, 재림신도로 간발의 표 수로 낙선, "I would rather be right than President"라는 말로 유명, 10년 만 더 활동하였어도 남북전쟁 막았을 것이라는 평가. 그에 향한 중상모략(16대 대통령 이 전까지는 민주당과 휘그당 체제). 그는 10월 22일로부터 2주 후에 낙선의 실망을 당하였다. 대권 도전에 있어서 네 번째의 낙선이어서 그에게 대 실망이 되는 낙선이었다.
3. Joseph Smith와 그의 동생 Hyrum 이 채포되어 6월 27일 살해당함--일부다처주의자 백악관 진입 의도에 격분 살해됨.
B. EGW의 첫 계시 내용
1. 일시와 장소: 1844년 12월 하나님께서 드디어 일어나 활동하시는 때가 왔다. Maine 주 Portland 의 Elizabeth Haines 가정에 5명의 여인들이 그룹기도회로 모였다. 엘렌 하몬 양은 11월 26일에 17세 생일 막 지난 때였다. 그의 간절한 기도 내용은 실망의 이유 알려 주고 앞으로 신앙의 길을 인도하여 달라는 간구가 그 중심이 되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성령의 강림이 있었다. 오순절의 체험이 일어난 것이다. “재림을 믿는 한 자매를 방문하여 그와 같이 아침예배 시간에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 예배는 특별한 집회가 아니었으며 모인 사람은 다섯 명에 불과했고 모두가 여자들뿐이었다. 그러나 내가 기도할 때에 전에 결코 느껴 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내게 임함을 느꼈다”(초기, 13).
2. 기도회 목적--대실망의 의미와 하나님의 지도 갈망
17세 처녀에게 성령 강림, 요엘 2:28-32 예언 성취, 이상(vision)을 보다.
3. 예언자로 부적격한 후보자 여인--엘렌은 예언자의 역사에 있어서 예언자로 선택 받기에는 가장 가망성이 없어 보이는 여자였다.
a. 약한 자 중에서 가장 약한 자--재림교회 첫 역사가 J.N. Loughborough는 그를 “The weakest of the weak”라는 칭호로 묘사하였다. 그러나 이 칭호는 본래 1844년 Hazen Foss가 세 번째 이상을 보았을 때 천사가 그에게 받은 기별을 전하지 않으면 “The weakest of the weak”에게 넘길 것이라고 한 말에서 기인하였다. 포스가 예언적 위임에서 해방된 것은 불행한 일이었다. 엘렌은 가망성이 도무지 없었던 제3의 후보자였다. 그는 돌에 맞은 비극적인 사건의 여파로 지난 8년 동안을 병자로 살아왔다. 얼굴은 기형, 중심신경조직 망가짐, 오른 쪽 폐가 썩어갔고, 왼쪽 폐도 상당히 침식당한 수종성 폐결핵 상태였으며, 심장도 약하였다. 밤에 호흡곤란으로 쪼그리고 잤으며, 자주 기침을 하고 각혈을 하며 기진맥진한 상태, 단명 예견. 의학적으로 사지절단된 환자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상태였다.
b. 초등학교 3학년 중퇴의 교육수준
하나님께서 엘렌을 예언자로 선택한 것은 제3의 선택이었다.
엘렌은 1840년 윌리엄 밀러의 그리스도의 재림의 기별을 받고 회심하였다. 1844년 10월 23일 그는 대 실망을 당한 5만 명 중 한 사람이 되었다.
B. 엘렌의 회심 체험
C. 1844년 실망 후 밀러주의의 분파 그룹들
1. 좌절의 반작용으로 종교 신앙을 포기하고 나간 사람들
2. 극단적인 신앙 노선으로 나간 미치광이 같은 자들--시기파
3. 일요일 준수 재림그리스도교--다수, 일요일 준수, (천년기 과거 완료 신봉)
복음주의재림신도들--밀러 신봉 포기, 개신교에 합류
4. 오는 시대 재림신도들--미래 천년기 및 유대인 팔레스틴 귀환신봉, 교회조직 반대
5. 제칠일안식일재림신도들--제임스 화잇과 엘렌 화잇, Joseph Bates의 지도 아래 연합한 2~30명 정도의 소수, 성경연구와 기도를 통하여 천상성소교리와 안식일 진리 발견, 오늘날 다수
D. 첫 계시-- 남은 무리의 새 예루살렘 도성 여행
“세상 위에 높이 뻗어 있는 곧고 좁은 길”
“다시 보라 좀 더 높이 보라” 눈을 예수께 고정시켜야 걸을 수 있는 길이다.
“내가 가족 제단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내게 임하셨고 나는 점점 높이 올라가서 어두운 세상으로부터 아주 멀어지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나는 돌이켜 세상에 있는 재림 신도들을 찾아보았으나 그들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 때에 음성이 내게 들렸다. “다시 보라. 좀더 높이 보라”는 이 음성을 듣고 나는 눈을 들어 세상위에 높이 뻗어 있는 곧고 좁은 길을 보았다. 이 길 위로 재림신도들이 그 길 끝에 있는 까마득한 도성을 향하여 여행하고 있었다. 그 길이 시작되는 곳에 빛이 있어서 그 빛이 그들의 뒤를 환히 비추고 있었는데 한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그 빛은 밤중 소리라고 하였다. 이 빛이 그 길을 따라 계속 비치고 있었으며 그들은 그 빛으로 말미암아 넘어지지 않게 되었다. 그들이 만일 그들 바로 앞에 서서 그들을 그 도성으로 인도하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저희 눈을 그에게 고정시켰다면 그들은 안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어떤 사람들은 피곤해지자 그들은 그 성에 이미 들어가 있기를 기대했는데 그 도성이 너무나 먼 곳에 떨어져 있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그때에 예수께서는 당신의 영광스러운 오른팔을 드시고 그들을 격려해 주셨는데, 그의 오른팔에서 빛이 나와 재림신도들의 무리 위에 파동쳤고 그들은 큰소리로 “할렐루야!”라고 외쳤다. 어떤 이들은 그들 뒤에 있는 빛을 경솔하게(분별없이 rashly) 부인하면서 그들을 이와 같이 먼 곳으로 인도해 내시는 분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들 뒤에 있던 빛은 사라지고 저희의 발은 칠흑같은 흑암 속에 빠지게 되었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표적을 잃고 예수님을 그 시야에서 놓쳐 버림으로 말미암아 그 길에서 벗어나 저 밑에 있는 어둡고 사악한 세상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곧 우리는 많은 물소리와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는데 그 음성은 예수께서 오시는 날과 시간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다”(초기, 14-15).
분별없는 믿음은 무엇인가?(믿음으로 예수의 옷을 만진 여인)
“그리스도를 단순히 세상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명목상의 믿음은 결코 심령의 치유(治癒)를 가져올 수 없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단순히 진리에 대한 단순한 지식인 동의가 아니다. 온갖 것을 알기까지 믿음을 활용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다. 그리스도에 관하여 믿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어야 한다.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유일한 믿음은 곧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는 것, 곧 그리스도의 공로를 우리들 자신의 것으로 삼는 믿음이다. 많은 사람들은 믿음을 한 의견으로 여긴다. 구원하는 믿음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자들이 자신들을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로 결합시키는 한 거래이다. 진정한 믿음은 생명이다. 산 믿음은 활력의 증가, 의지하는 신뢰를 의미하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영혼은 정복하는 능력자가 된다”(소망, 347).
두 길에 관한 계시
“1856년 5월 27일 배틀크릭 총회에서, 나는 주로 교회에 관련된 일을 이상으로 보았다.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이 내 앞으로 지나갔다. 천사는 말하였다. “하나님은 그 위엄이 두렵지만, 그대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분의 진노가 무섭지만, 그대들은 날마다 그분을 거스린다. ‘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눅 13:24; 마 7:13, 14). 이 길들은 서로 구별되고, 분리되고, 반대 방향으로 가는 길이다. 한 길은 영생으로, 다른 길은 영원한 멸망으로 인도한다. 나는 이 두 길이 다른 것과, 그 길로 여행하는 자들이 다른 것을 보았다. 그 길들은 서로 반대되는데, 한 길은 넓고 평탄하고, 다른 길은 좁고 험하다. 그러므로, 그 길로 여행하는 자들도 품성과 생애와 의복과 대화에 있어서 서로 반대된다.”(1증언, 127)
<1844년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께서는 이 첫 계시에서 일요일을 지키며 돼지고기를 먹으면서 살아간 17세의 처녀에게 임하였다. 첫 계시는 어느 날에 예배할 것인지 채식주의를 하여야 할 것인지가 나와 있지 않았다.
1. 목적--진실한 확신을 가지고 재림을 믿고 따른 좌절과 낙심에 빠진 재림신도들에게 격려와 위로 및 보증을 주기 위하여. 그들은 그들이 입으로 전하는 것에 온 재산을 송두리째 바친 자들이었다. 그런대 이들이 마치 십자가 사건으로 흔들린 11제자들처럼 위태롭게 흔들림을 당하고 있었다. 이들 실망 당한 백성들 위로하고 격려하며 보증을 주실 필요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신학적 인 이해를 바로 하도록 알려 주시므로 위로하시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게 하여주시므로 위로하셨다. 그는“뒤에서 빛을 비추고 있었다.”재림신도들이 걸어가고 있는 길이 옳다고 한 것이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충성하면 하늘 도성으로 인도하신다는 보증이 되었다. 현재적 신학적 곤경을 하나님의 방식대로 설명하시므로 이 보증을 주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가고 있는 길이 틀림없이 천국으로 향하고 있다는 보증을 주셨다.
2. 재림신도들의 정체성--첫 계시의 주제는 “세상위에 높이 뻗어 있는 곧고 좁은 길 위로 재림신도들이 그 길 끝에 있는 까마득한 도성을 향하여 여행하고 있었다”(초기, 14)는 점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14)고 하신 그 좁은 길을 여행하는 작은 무리들이 하나님의 관심과 보호와 인도의 대상이 되었다. 넓은 길을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고 좁은 길은 고통스럽고 비천하고 비방 받는 길로 보인다. 이 길을 걷는 “양심적인 사람들은 마음이 좁고, 미신적이요, 심지어 광신적이라고까지 취급을 받는다”(4증언, 645).
재림신도들은 생명의 길인 좁은 길을 걸으며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천성을 향하여 믿음과 회심의 길, 자기부인과 자아 희생과 굴복의 길을 걸어가는 순례자들이다. 인간 앞에는 항상 생명과 사망의 두 길이 놓여 있다. 걷는다는 것은(walking) 막연하게 방황하는 것이 아닌 목적을 가지고 목표를 향하여 걷는 것이다.
3. 신앙 특징--재림신도들은 생명의 길 양편에는 두 개의 수렁이 있다. 좌편에는 세속주의, 진보 수정주의를 지향하는 좌파와 극단적 자유주의의 수렁이 있다. 왼 쪽 길은 신앙신조가 틀렸고 시대 낙후적이다고 하면서 세속적 삶으로 전환하는 길이거나 신앙을 세속과 얼버무려 비빔밥을 만든 길이다. “인류 전체가 온갖 세속적 마음과 이기주의와 교만과 부정직과 도덕적 타락을 가지고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을 갈 수가 있다. 각 사람은 자신의 의견과 주의에 따라 이기적인 마음이 지시하는 대로 무엇이나 할 소지를 가지고 있다. ”(보훈, 138)
이 길은 유행의 첨단을 따라가는 길이다. 우리 사회는 개혁이라는 미명 하에 좌향좌의 길을 걷고 있다. 지난주에 3인의 대법관 후보들은 국회 청문회에서 공통적으로 간통죄를 폐기하여야 한다고 피력하였다. 하나님의 율법이 분명하게 금하는 일을 범하는 것이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 이 시대의 정의와 불의를 판별하는 최후의 엘리트 지도층의 의식 구조는 일반 민중의 죄관을 대변하는 것이 되었다.
우편에는 시대착오적인 초보수주의 내지 시기 설정과도 같은 극단주의, 율법주의의 수렁이 있다. 생명의 길은 이 수렁 사이에 놓여 있다. 어느 편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걷는 길이 생명의 길이다. 그 길은 균형과 조화가 있는 중도적이며 중용적인 온건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걷고 있는 길이다. 이 길이 정로이며 하늘가는 지름길이며 하늘로 집중되는 길이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고 그 입구가 험하다. 만일, 늘 따라다니는 어떤 죄를 가지고 있다면, 그대는 그 길이 들어가기에 너무 좁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만일, 주님의 길을 계속해서 가고자 한다면, 자신의 길과 자신의 뜻과 자신의 악한 습관과 행동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를 섬기고자 하는 자는 세상의 의견을 따르거나 세상의 표준에 맞출 수 없다. 하늘의 길은 높은 지위와 부를 그대로 가지고 들어가기에도 너무 좁고, 자기 중심적인 야망을 불태우기에도 너무 협소하며, 안락을 즐기며 오르기에도 너무 험하고 거칠다. 그리스도의 몫은 고통, 인내, 자아 희생, 비난, 궁핍, 그리고 당신을 대항하는 죄인들의 반박이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낙원에 꼭 들어가고자 한다면, 우리도 이러한 몫을 받게 될 것이다.”(보훈, 138-139)
중도적 신앙생활은 세속적인 왼 쪽도 아니고 극 보수적인 오른 쪽 노선도 아니다. 재림신앙은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중도적인, 또는 중용적인 길을 걷는다. 엘렌 화잇은 옷 입는 문제를 두고 “이 문제에는 중립적 위치가 있다. 우리는 모두 현명하게 그 위치를 찾아내어 지켜야 할 것이다. 이 엄숙한 시대에 우리는 모두 우리 스스로의 마음을 살피고,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낮추도록 하자. 그 일은 하나님과 우리의 영혼 사이에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1증언, 425-426)고 하였다. 그는 또한 음식문제를 두고 “양 극단들을 모두 피하여 중간 노선을 걸으면 된다. 그대들은 한쪽에만 치우쳐서 균형잡히지 않은 경영자로 비쳐지지 않게 하라. 아무 사람도 그대들에게 빈약한 식사를 하게 하는 영향을 끼치지 않게 하라”(음식, 211)고 하였다. 교육 이론과 실천에 있어서도(입학 연령문제)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상식을 가지기를 바라시며 그 상식을 통해 생각하기를 바라십니다. 환경이 조건을 변화시킵니다. 환경이 사물의 관계를 변화시킵니”(3기별, 217)라고 하였다. 결혼 문제를 두고 “합법적인 것일지라도 극단으로 치우치면 심각한 죄가 된다”(4증언, 505)고 하였다. “우리는 불이 아니면 물을 취하겠다는 극단주의자들을 지지하지 않도록 참으로 경계하여야 한다”(전도, 611).
4. 신자는 걷는 존재이다. 신자는 생명의 길, 좁은 길을 걷고 있는 존재이다. 성경에서 걷는다는 것은 행한다는 것이며 순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성경에는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일로 자주 묘사되어 있다. 인간은 걷는 존재이다. “걷는다(walk)"는 말은 "행한다”라고 번역되어 있다. 그리고 이 행함은 신앙은 동전의 양면처럼 되어 있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별을 주고 있다.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모든 행동, 그분을 위한 모든 극기의 행동, 훌륭하게 견디어 낸 모든 시련, 유혹에서 거둔 모든 승리는 최후 승리의 영광을 향하여 나가는 행진의 발걸음이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도자로 삼으면, 그분께서 우리를 안전하게 인도해 주실 것이다. ”(보훈, 140)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고전 7:17)." “낮에 와 같이 단정히 행하라(롬 13:13). 성령 안에서 행하라(갈 6:16). 사랑 안에서 행하라(엡 5:2). 빛의 자녀로 행하라(엡 5:8). 예수 안에서 행하라(골 2:6).
자동차 세상에서 걷는 다는 것은 거추장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걸어야 건강하다. 생명의 활력을 준다. 영적으로도 행하여야 건강하다. 걷는 것이 위험한 세상에서 미주 대륙을 횡단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땅 끝 마을에서 설악산까지 걷는 사람도 있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은 천리 길도 멀다 하지 않고 걷는 옛 사람의 기개를 보여준다. 6.25때 서울에서 시골까지 걸어서 온 분들의 이야기는 지금도 장하게 여겨진다. 옛날의 길들은 꼬불꼬불한 좁은 길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걷는 정취가 있었다. 지금은 아스팔트 포장된 길에 자동차 판이다. 그래서 스트레스 받으며 걷는다.
신앙이란 순종하며 사는 삶이다. 빛 가운데 살라고 하는 명령을 받고 사는 존재이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직설법이다. 성화도 직설법과 명령법이 있다. 그러나 이 직설법 다음에 명령법이 있다는 사실을 날마다 의식하면서 사는 존재이다. “힘쓰라”는 명령법에는 명령이 들어 있다. 날마다 성화의 길을 걷는다. 하나님의 은혜의 권능으로 그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체험을 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예수의 믿음과 하나님의 계명”은 예수의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직설법과 하나님의 계명을 은혜의 권능으로 지켜야 한다는 명령법이다. 재림신앙은 직설법과 명령법을 동시에 강조하는 사명을 지녔다.
궁극적인 명령은 사명으로 일컬어진다. 인간 존재는 사명에의 존재이다. 사명은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는 것이다. 파스칼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해 본다. “나는 명령 받았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 말은 크리스챤의 사명을 들어내고 있다. 재림신도는 요한계시록 14장의 하나님의 꿈과 계획을 품고 해산의 고통을 겪는 존재, 세계를 구원하고 땅과 하늘을 화해시키는 꿈, 그 분의 참된 형상, 그 분의 지혜, 정의, 사랑의 꿈을 함께 꾸고 이루어 가는 존재이다. 예수께서는 섬기는 사명(마 20:28)/아버지께서 하라고 주신 일을 이루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요 17:4)을 하셨다. 바울은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는 일에 생명을 바쳤다(행 20:4). 남은 무리는 예수께서 걸으신 그 길, 사도들이 걸은 그 길을 걷는 백성들이다. 재림의 소망이라는 미래 지향적인 삶의 목표가 뚜렷한 백성이다. 걸어가야 하는 사명을 가진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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