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캠벨의 <1922: 재림교 근본주의의 부상>을 읽으면서

 

마이클 갬벨(Michael W. Campbell) 박사는 <1922: 재림교회 근본주의 부상(1922: The Rise of Adventist Fundamentalism)>이라는 책을 근래 Pacific Press를 통하여 펼쳐냈다. 이 책은 2022년에 나온 133쪽의 얇은 보급판이다. 재작년에 읽었지만 혹시 어느 신앙 동지들에게 도움이 될까 하여 여기 재림교회 내 근본주의가 끼친 영향에 대한 개요를 소개한다.

 

캠벨의 연구 무대

캠벨은 앤드루스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조지 나이트 교수 문하생으로 재림교회 역사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의 학위 논문은 The 1919 Bible Conference and Its Significance for Seventh-day Adventist History and Theology (1919 성경연구회와 재림교회 역사와 신학에서의 그 중요성)이었다. 그는 신학 교수로 Southwestern Adventist University AIAS에서 역사신학 및 조직신학을 가르친 바 있다. 그는 콜로라도와 칸사스에서 안수 목사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재림교회 백과사전 부편집자로도 활동하였다. 그는 여러 저술들을 출판하였다. 스승 조지 나이트의 저작물을 능가하는 출판 목표를 세우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그는 오늘도 재림교회 신학이라는 신경망을 진단하는 역사적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저자는 현재 북미지회 문서관리 및 조사연구 국장(Director) 책임자로 일하고 있다. 그의 주 업무는 재림교회 내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에 관한 구두 증언을 채록, 보관하여 장차 교회사 자료로 삼고자 하는 데 있다. 심지어는 어떤 인물이나 사건의 어두운 국면의 역사 자료도 채록하고 있다고 한다. 그가 채록한 자료들의 공개는 증언자들이 잠든 이후 어느 시기에 공개한다는 약속을 전제로 하는 재림교회 역사 사료 수집 편찬가이기 때문에 재림교회를 비평하거나 헐뜯는 역사가와는 다른 신중성을 취하고 있어서 신뢰성이 가기도 한다. 그리하여 그는 재림교회사 연구가들의 관심 대상 인물이 된다. 캠벨의 <1922: The Rise of Adventist Fundamentalism>은 이미 출판한 <1919: The Untold Story of Adventism’s Struggle with Fundamentalism>의 속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은 짧지만, 독자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이 책은 두 부분으로 나뉜 목표, 즉 일반 독자를 위한 짧은 작품이 되는 동시에 10년 동안의 재림교회 문헌을 요약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애쓴 점이 뚜렷하다. 캠벨은 1차 자료들을 폭넓게 읽고서 그로부터 내용을 끌어냈으며, 역사적 증거를 신중하게 다루고 있다. 그러나 집약적 필법으로 인하여 紙面 분량이 짧아서 더 자세한 내용을 알기 원한다면 저자가 사용한 자료들을 살펴야 할 것이다.

 

책의 구도

근본주의에 포위된 재림교회

근육질의 재림신앙

재림교회 근본주의 옹호

베이컨류 재림신앙: 프라이스 주장의 정당성

엘렌 화잇 저술 무기화

엘렌 화잇 저술 경전화 시도

재림교회 근본주의

대총회장 직위 교체 전말

 

근본주의란

흔히 기독교인들은 근본주의를 복음주의와 동일 선상에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실 근본주의, 복음주의, 보수주의는 같은 뜻이 아니다. 근본주의는 복음주의의 한 형태로 볼 수 있지만, 모든 복음주의자가 근본주의자는 아니다. 종교개혁 이래 프로테스탄트 복음주의는 근본주의보다 더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며, 다양한 신학적 관점과 사회적 참여를 포용한다. 근본주의는 교리에 역점을 두고 복음주의는 교리와 함께 개인적 회심을 강조한다. 근본주의는 문자적 해석을 고수하는 반면, 복음주의는 다양한 해석을 포용한다.

17세기와 18세기에 계몽주의와 이성주의 사상의 발전은 그리스도교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자연주의, 과학주의, 이성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19세기 초 그리스도교 교회에는 자유주의 신학의 성행으로 이어졌다. 초자연주의보다는 懷疑, 자율, 자연, 조화, 진보라는 기치가 시대조류가 되었다.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을 비평학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성경의 권위를 무너뜨리며, 나아가 그리스도교 신앙 자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영향력을 크게 끼쳤다. 그래서 신신학(New Theology)으로 지목된 자유주의 신학은 그 자체 안에 유해 독소로 차 있다는 반론이 팽배하였다.

 

이 같은 그리스도교 반동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영국과 미국에서 근본주의 형태로 등장하였으며 1920년대 그 절정을 이루었다. 특히 개신교회권 내에서 1878년 뉴욕, 1886년 시카고, 1895년 나이아가라 등 이어지는 성경 및 예언 연구회 활동이 선풍적 영향을 끼쳤다. 이런 배경에서 근본주의의 또다른 형태인 세대주의가 등장했다.

이 기간에 성경 무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대속사, 그리스도의 신체적 부활-재림론이라는 근본주의 5대 교리가 형성되었다. 그 외에도 그리스도의 기적의 역사성, 인간의 전적인 타락 등의 교리를 포함시키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문자적, 신체적 지상 재림을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 원리로 간주했지만, 그들의 계시 영감의 본질에 관한 이해에 있어서 갈등과 한계, 재림의 때와 방법에 관한 견해차, 천년기에 관한 상이한 견해 등 대립각을 세우는 일로 근본주의 신학 내 분열이 그 강도를 더해 갔다.

근본주의 운동은 반() 지성주의 경향으로 기울고 있다는 비평을 받았다. 그리하여 근본주의자들은 신학 발전의 저해 요인이 된다는 비판도 일었다. 그들이 자유신학 자체를 비정상적인 신학 발전의 결과로 보고 신학 연구를 멀리하거나, 신학교육을 포기한 채, 성서학교(Bible Institute)를 많이 세워 전도자 양성에만 주력한다는 비판도 일어났다.

 

20세기에 이르러서는 19세기 서구에서 발전한 보편성, 근원성, 일반성을 강조하는 신학적 방법과 내용을 포기하고 그 대신 상이성과 특수성을 찬미하는 탈자유주의신학이 등장하였다. 이를 두고 흔히 포스트모던신학이라고 한다. 이런 배경에서 사회적 억압의 구조를 비판하는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이라는 정치신학의 조류가 휩쓸고 갔다. 더 나가서 탈자유주의신학은 다른 한편으로 토속종교를 수용하는 혼합종교적 색채를 띠는 다원주의 기치를 내걸었다.

 

근본주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간 재림신앙

초기 근본주의 신학 발흥에 영향을 받은 재림신학은 근본주의의 형태를 수용할 뿐만 아니라 그 철저한 형태를 지향하였다. 재림교회 내 1920년대 저작물에는 자유주의 신학을 신신학이라고 하는 풍자화가 나돌았다. 재림교회 신학은 근본주의 신학에 발맞추어 성경의 권위를 신봉하는 태도를 확연하게 표명하였다.

 

재림교회 인사들은 1919525-61일에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세계 근본주의자들의 성경연구회 모임에도 참여하였다. 세계 근본주의 성경 연구 모임에 재림교회 측에서는 F.M. WicoxC.P. Bollman이 참석하였다. 그 참관기는 Adventist Review and Sabbath Herald 1919619일 자에 게재되었다. 윌콕스는 근본주의자들의 어떤 논점들이 잘못된 것이기는 하지만, 저들의 성경을 치켜세우는 열정에 찬사를 보냈다. 재림교회 초기 기본교리 형성에서 이들 근본주의 기본 신조 모델의 영향을 받았다.

 

재림교회는 191971일로부터 89일까지 메릴랜드주 타코마 파크(Takoma Park)에서 성경학자들과 교사들이 역사적인 성경연구회를 개최하였다. 동 모임에서는 성경 해석 방법과 예언 해석의 여러 측면에 관한 논의를 펼쳤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하였고 모든 논의 자료를 덮어 두었다. 대총회장 A. G. Daniells 목사가 의장을 맡았으며 회의 진행은 일반적으로 질문 응답식 토의 방식이었다. 이 모임에서 핵심 초점은 축자영감론과 예언적 저술들의 무류성에 관한 이슈였다.

교단 지도자들은 세계 근본주의자들이 마련한 모델에서 나갈 실머리를 찾았다. 저들의 기본신조 모델은 재림교회 지도자들이 재림신앙을 옹호하고 기본신조를 마련할 징검다리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1872Uriah Smith가 재림교회의 신조 비슷한 작업을 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제칠일침례교와 재림그리스도교 지도자들과 토의를 위하여 마련한 초안 그루터기 같은 것이었다. 재림교회는 19198월에 확실한 基盤(A Sure Foundation)”이라는 재림교회 기본신조 성명서(20개 조)191912월에는 두 번째 기본교리 성명서(22개 조)를 출판하였다. 19204월에는 19개 항목으로 된 기본신조를 출판했다. 앞 두 신조는 주로 한 문장으로 소박하게 기본신조를 표명하고, 세 번째 신조는 개별 신조를 항목화시켜 설명식으로 하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19204월에 출판된 기본신조 역시 근본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특히 삼위일체, 안식일, 십계명, 율법과 복음의 관계 신조 등을 명시하므로 재림신앙 신조 체제가 진짜 근본주의 체제라는 점을 확인하고 있다. 이 세 기본신조는 장차 1931년의 기본신조의 촉매 역할을 했다. 1931년 기본신조는 더 세련되게 자구 수정을 거쳐 1931년 재림교회 연감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성명서는 재림교회 내에 근본주의 부정적 영향도 드러내고 있다.

 

재림신앙의 근본주의 신학 지향의 특징

1. 문자적 창조론

재림교회 신학자들은 문자적 창조론을 제칠일 안식일 신앙 및 성경영감론과 연계시켰다. George McCready Price는 근대주의자들이 들고 나온 그리스도교 진화론을 거짓 과학으로 보고 배척하였다. 근대주의 과학은 성경의 창조론을 백안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과학적 팩트를 분류하고 그 범주를 정하는 지식 기반에서 거짓과학을 대처하지만, 무조건 참된 과학에는 적대적이 아니라고 한다.

Francis Bacon은 근대 철학자로서 과학과 종교의 분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문제의 관건은 베이컨의 세계관이었다. 베이컨이 과학적 사실을 범주화하고 개념을 분류하는 방식을 따른다는 것은 곧 진화론의 허구를 들추어내는 예리한 칼날이 되었다. 진화론이 바탕을 둔 장기 진화 가설은 Charles Lyell<지질학 원리>와 대척점에 서 있다. 과학에도 자연의 명확성을 중심으로 한 과학적 실용주의 길에 확고히 서서 유물론적 세계관이 주장하는 자연의 진화성을 추구하는 시각을 배척해야 한다는 것이다.

 

1910년대 말과 1020년대 초의 재림교회는 진화론을 배격하고 문자적 창조론을 신봉하였다. 재림교회 근본주의는 문자적 창조론 배격이야 말로 제칠일 안식일 포기와도 같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문자적 창조론은 재림 신앙의 정체성의 핵심이 되었다. 근본주의적 재림신앙은 문자적 창조론과 축자영감론 및 성경 무오론과 연관되어 그 의미가 더욱 중요시되었다. 이리하여 재림신앙은 근본주의 자들 중의 근본주의자들이 된 셈이었다. 재림신도들은 근본주의자들의 5대 교리를 수긍하였을 뿐만 아니라, 더 나가서 문자적 창조론과 홍수 격변론을 사실상 추가할 만큼 되었다.

 

2. 초자연적 성경 영감과 성경 예언의 타당성

근대주의는 자연주의적이어서 계시와 영감에 있어서 초자연주의를 신봉하지 않는다. 따라서 성경이 그 자체로서 최고의 권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배척한다. 오히려 성경은 인간 이성의 재단과 가위질에 맡기는 역사비평방법을 도입한다. 그 결과 안식일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재림신앙의 근본주의 신학은 안식일의 영구적 타당성을 신봉한다.

초자연주의적 성경 영감의 무류성과 그 권위성을 강조하는 재림신앙의 근본주의는 성경 예언의 타당성을 강조한다. 물론 근본주의 신학 내에 예언 해석의 다양한 기류가 있어 왔다. 특히 세대주의 신학에서 이스라엘 중심의 종말 예언 해석은 특이하다. 그러나 재림신학에서는 그리스도 중심의 예언 풀이와 영적 이스라엘 계승의 원리에 따라 1920년대 재림신도들은 참된 근본주의자로 자처하였다.

 

3. 영감 기록의 무오성과 무류성

앞에서 지적한 방하 같이 성경무오성은 창조론과 맥을 같이하는 이슈이었다. 1919 성경연구회는 특히 엘렌 화잇의 영감 기록의 무오성 이슈에 대한 논의는 비상하였다. 심지어는 예언의 신의 권위를 성경 위에 두는 극단적 내지 급진적 시각도 있었다. F.M. Wilcox는 증언의 축자영감론을 신봉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펼쳤다. 특히 엘렌 화잇의 역사적 사건에 관한 기록과 관련하여 축자적 영감론이 과연 맞느냐는 문제 의식이 강하였다. 1920년대 성경 무오론괴 성경 예언의 무오론 사이의 융합을 시도한 저술가들도 있었다. 거룩한 예언(prediction)의 무오성은 성경 예측의 무류론을 제공하였다.

 

4. 성경의 역사적 문자적 성취

재림신도들은 자유주의 그리스도교 등장 또는 근대주의 출현을 두고 그리스도의 재림의 징조로 보았다. 재림신도 저술가들 중에는 근본주의의 중축이 되는 교리는 성경 무오론과 그리스도의 재림이라고 설파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성경무오론이나 그리스도 재림론을 조롱하는 현상을 두고 베후 3:3-7의 문자적 성취라고 보았다.

1920년대 재림교회가 성경의 역사적 진정성을 확인하고자 성경고고학에 관심을 돌렸다. 성경의 정확성을 설명하는 과학적 방법으로 고고학적 여러 발굴 결과에 집중하였다. 이 방법은 진화론이 성경을 폄하해 온 것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이 되었다. Tel-el-Amarna 토서판 발굴은 모세 이전에 문자 사용을 입증하였다. 이로 인하여 모세가 오경을 기록할 수 없었다는 주장은 헛소리가 되고 말았다. 성경 고등비평가들이 주장해 온 비판에 대하여 역사적 증거가 결여되었던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어깨를 펴 맞설 수 있게 되었다. 고고학적으로 소돔 위치와 바벨탑 유적 탐사도 성경의 권위성에 기여하였다. 재림교회 학자 Siegfried Horn 박사는 성경 고고학 발굴을 성경의 과학적 및 역사적 진정성과 정확성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보았다.

 

근육질 재림신앙

저자는 "근육질의 재림신앙"에서 교회가 엄격한 창조론과 성 역할을 다루고 있다. 재림교회는 근본주의 신앙 노선과 빅토리아 시대의 근육질이 강한 남성상을 결합시킨 당대 사회분위기를 수용하였다. 저자는 남성이 지배하고 여성은 가정생활에 충실한 것을 요구하는 시대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재림교회 내에서 여성의 영적 지도력의 활동이 열려 활발했던 점을 부각시켰다. 그렇다고 이는 남성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저자는 엘렌 화잇이 능력있는 여성들의 활동을 강조한 사실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결국 근육질 중심의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여성들이 영적 지도자로 활동이 쇠퇴한 재림교회 모습에 아쉬어 하면서 재림교회 초기 지도자들은 열린 마음으로 여성의 목회 진출과 영적 리더십을 수용하였던 점을 상기하고 있다.

 

엘렌 화잇 저술을 보는 위험한 시각

저자는 제5장에서 엘렌 화잇의 진술을 곤봉으로 휘두른 아픈 역사도 들추어내고 있다. 그는 끈질기게 희망을 품고 있지만, 1920년대의 어두운 면과 그 시기가 재림교회의 사상과 실천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설명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1. 엘렌 화잇 저술의 무기화

1920년대에 엘렌 화잇이 기록한 글을 여기저기에서 발췌한 편집본이 출판되었다. 그 내용의 흐름 새는 신도의 외적 행위 규제에 초점을 둔 문자주의적이고 완전주의적인 독법을 반영하였다. 고도로 도덕적 포준을 강조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겠지만, 외적 행위 규제를 중심으로 한 편집본이 등장한 것이다. 예컨대, Claude E. Holmes은 재림 청년들의 고도로 도덕적인 표준을 강조하는 계간지 Bulletin을 편집하였다. 초기 Bulletin 발간은 건강과 의복 개혁이슈를 다루었다. 그는 교단 출판소 자동 주조 식자기 운영자로서 이런 작업을 날마다 하였다. 그의 활동 배후에는 문자적 창조론, 성경 영감 무오론 및 완전주의라는 시각이 있었다. 이렇게 엘렌 화잇 저술의 무오론을 지지하는 편집물들이 나돌았고 더 나가서는 엘렌 화잇의 저술이 성경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수용하지 않는 지도자들을 정죄하는 일도 있었다. 무오론자들의 정죄 표적은 당대 대총회장 A.G. DaniellsW.W. Prescott이기도 했다. Daniells는 엘렌 화잇의 증언의 축자영감성을 지지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화잇 자신도 자기의 무오성을 주장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예언의 신이 성경에 대한 유일한 안전한 해석도 아니며, 엘렌 화잇이 역사에 관한 권위성을 주장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펼쳐 비판의 도마에 오른 것이다. 이미 1910년대에 HolmesDaniells 같은 교단 지도자들은 의도적으로 교단을 잘 못 이끌고 있다고 확신했다.

Judson S. Washburn의 조부가 밀러운동에 참여하였고, 아버지는 목회자이었으며 역임한 G.I. Butler 목사이었다. 그의 친척은 J.N. Andrews 가정과 혼인 관계를맺었으며 그 자신도 1888년 목회자로 활동해 어느 모로 보나 그는 재림교회 순혈 족보에 속하였다. 1888년 총회 배경에서 그는 한 때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메시지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훗날 엘렌 화잇의 경고를 받고 자기가 한 때 눈이 멀었다고 실토하였다.

 

2. 엘렌 화잇 저술의 경전화

HolmesWashburn의 눈에 1919년 성경연구회가 의심과 어둠의 프로그램에 면류관을 씌우는 것으로 비쳤다. “이 확실한 의심의 식품과 어둠의 권고야 말로 재림교단 역사상 가장 무서운 일로 여겼다. 이들의 눈에는 Daniells 대총회장이 의도적으로 교단을 잘 못 이끌고 있다고 보았다. 교단 지도자들이 엘렌 화잇의 저술을 진실로 신뢰한다면 마땅히 라이프 스타일을 고양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Daniells 대총회장이 1917년 아시아에 순방 여행 중 Holmes는 대총회 서고를 뒤져 각종 문서들과 엘렌 화잇과 대총회 지도자 개인 사이의 서신들을 열람하였다. 특히 당대 교단의 학자 Precott이 엘렌 화잇의 1911년 판 <각 시대의 대쟁투> 1911년 판에 더 적합한 최신 역사적 자료로 대체할 것을 추천한 것을 보았다. Holmes는 엘렌 화잇의 승인 없이 내용 첨삭한 것을 두고 엘렌 화잇의 저술이 전에 것 대신 변경된 것으로 보았다. Daniells은 여행에서 돌아온 후 Holmes에게 출판되지 않은 문서 사본을 모두 반환하지 않으면 해고하겠다고 통보했다. 결국 반환하지 않아 그는 해고 당했다. 그 후 Holmes는 가지고 나온 자료를 출판하였고 지도자들을 비판했다. HolmesWashburnDaniellsPrescott가 엘렌 화잇의 저술을 교묘하게 조작하였을 것으로 확신하였다. 이들은 1919 성경연구회가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세뇌작업의 일환으로 보았다. 이들은 엘렌 화잇 저술을 성경 위에 두는 기류가 역연했다. 심지어 그들은 엘렌 화잇의 저술이 자기들의 성경이라고까지 단언했다. 이들은 엘렌 화잇의 아들 윌리에게도 그런 증언을 했다(“I love your mother’s writings. They are all Scripture to me.). 최소한도 엘렌 화잇의 저술은 성경에 대한 신적 주석으로 보았다. HolmesWashburn은 영감 기록의 무오론과 그에 대한 문자주의적 및 완전주의적 시각에서 엘렌 화잇의 저술을 무기화시킨 것이다. 이를 지지하는 신도들이 적지 않았다. 이런 맥락에서 1922년 대총회 회기 때 21년 동안 활동해 온 Daniells 대총회장 직책이 교체되는 교단 역사의 분수령이 일어난 것이다. 교단 최고 지도자가 근본주의적 성경관에 서지 않는 것을 두고 신신학으로 매도되고 직위 교체까지 이어진 것이다.

 

이 책을 둘러본 소감 몇 토막

이 책은 1922년 교회 모임에서 대총회 회장 A. G. DaniellsW. A. Spicer로 교체하는 것으로 절정을 이룬다. 대니얼스가 취한 엘렌 G. 화잇의 영감에 대한 무오론이 결여된 근본주의적 견해가 불신을 당한 것이다. 엘렌 화잇의 영감의 요체는 성육신적 시각이다. 신적 요소와 인적 요소의 균형진 조화를 이룬 이 성육신이론은 20세기 후반에 등장하였다. 교단 최고지도자로서 진실을 이야기하였지만 아직 더 밝혀져야 하는 과제를 담고 있는 중에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아직 일반 지도자들이나 신도들은 무오론자의 강변으로 인하여 정당한 인식을 하기 전 방망이를 휘두른 세력에 한패가 된 것이다.

 

교회는 사회 속에 살아 있으며, 그들이 알아차리든 못하든 간에 사회에 의해 형성된다. 1920년대 재림교회를 더 잘 이해하는 방법은 더 넓은 그림을 보는 것이다. 사실, 이 책의 가장 눈에 띄는 점 중 하나는 재림교회, 근본주의, 및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여주는 광범위한 연대표이다. 하딩 대통령의 친족이 재림교회 신자가 있었다는 정보, 타이타닉호의 침몰, 그라고 재림교 예언자가 되려는 마가렛 로웬의 행적을 두 번씩이나 포함하고 있어 그 역사적 세부 사항은 다양하다. 이 연대표는 재림교회의 사상에 작용하는 종교적, 정치적 영향의 범위에 대한 힌트를 제공한다.

 

<1922>이라는 책은 재림교회의 역사에 반드시 건너야 할 강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이 책은 그 강을 건너는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어서 현재의 관심사와도 관련이 있다. 역사가들은 이 시대를 더 깊이 파고들 새로운 세부 사항과 새로운 이유를 찾을 것이다. 그러나 그 최고의 가치는 교회의 현재에 대한 통찰력이다. 캠벨은 근본주의가 현재도 실재하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의 교회 대화는 1919년과 1922년의 대화와 섬뜩할 정도로 닮았다고 결론지었다. 이 책은 평신도 독자들에게 통찰력과 낙관주의를 동시에 제공한다. 1920년대를 여행할 수 있다면 2020년대도 그럴 수 있다.

 

이 책은 1919년과 함께 재림교회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 이상의 일을 하고 있다. 그것은 연구를 위한 새로운 문화적, 맥락적 전망을 열어주고 있다. 이전의 역사학들은 1920년대의 신학적 변화를 논의했지만, 캠벨의 연구는 1차 자료에 대한 폭넓은 독해를 통해 탐구된 사건들로부터 100년 동안 거리를 두는 이점이 있다. 독특하게도, 이 책은 1920년대 재림신도들은 그들 자신의 시간과 장소에 확고하게 정착시키는 역할을 보여준 것처럼 교회는 사회 속에 살아 있으며, 그들이 알아차리든 못하든 간에 사회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이다.

 

A. G. DanielsW. A. Spicer로 교체하여 총회 회장으로 임명하는 것에 관한 마지막 장보다 더 분명한 곳은 없다. 이 책은 근본주의 비판자들의 승리에 머물기보다는, 정치 과정에서의 스파이서의 결백과 그 입장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그의 주저함을 강조한다. 이 책은 스파이서 목사가 교회가 선교사업에 집중케 함으로써 논쟁에서 멀어지도록 이끈 것에 대한 낙관적인 설명으로 끝난다.

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