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 세상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윤 추구에 골몰하는 천민자본주의가 횡행하고 있다. 개인주의가 이기주의로 전락되어 버렸고 그것을 합리적인 것으로 미화시키는 세태가 된 것이다. 이는 약육강식의 월가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 한국의 경제 흐름도 이런 천민자본주의가 판치는 우울한 양상이 전개되고 있다는 소리가 고막을 때린다. 그 결과 사회 전체가 큰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

실천적 경제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인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Ernst Friedrich Schumacher)는 사람들의 사고의 방향을 바꾼 극소수의 창조적 인물로 각광 받았다. 그는 20세기의 지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조직은 규모가 커지면 반인간적으로 변한다고 갈파하였다. 자본주의 조직이 너무 커져 반인간적으로 전락되어 버린 것이다. 그는 그의 세 권의 저서 중 첫 번째 저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 1973)’20세기의 고전에 들어가는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그의 책 제목을 빌려 메가 처치 지향적인 그리스도교계에서 신선한 충격을 준 작은 교회가 아름답다라는 화두가 나올 정도였다.

슈마허는 첫 저술에서 전통 경제학의 주류와 테크놀러지를 향하여 거센 비판의 화살을 날렸다. 오늘날 주류 경제학의 모든 가정과 전제의 뿌리부터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하고 도전한 것이다. 두 번째 저서인 혼돈으로부터의 도피(A Guide for the Perplexed)’에선 첫 번째 저서의 내용에 철학적·도덕적 바탕을 제공함으로써 보다 건전하고 바람직한 삶을 위한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

그는 성장제일주의이며 인간의 자연 정복에 역점을 둔 현대 경제 목표 추세에 제동을 건다. 아무리 경제 성장이 물질적인 풍요를 약속한다고 할지라도 그 과정에서 환경 파괴와 인간성 파괴라는 결과를 야기시킨다면, 성장지상주의는 맹목적 추구의 대상이 아닌 성찰과 반성의 대상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는 인간을 위한 경제 구조의 진정한 모습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방안으로 '작은 것'을 강조한다. 인간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 규모를 유지할 때 비로소 쾌적한 자연 환경과 인간의 행복이 공존하는 경제 구조가 마련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처방을 보노라면 재벌들의 블랙홀에 먹이사슬로 빨려 들어가는 한국의 중소기업의 아비규환의 소리를 일찌감치 대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정도의 느낌이 든다. 그는 대량생산 구조 체제보다는 지역 노동과 자원을 이용하여 소규모 작업장을 만들자고 제안하며 더 작은 소유, 더 작은 노동 단위에 기초를 둔 중간 기술 구조가 강화되는 것만이 세계 경제의 진정한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중간 기술이란 인간을 생산 과정에 복귀시키므로 생존수단의 부재로 빈곤에 시달려온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는, 대중에 의한 생산을 이루어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것이다.

슈마허의 이런 경제학적 사상의 특징은 한마디로 소규모 지향적이고 동시에 분산 지향적이다. 어떤 사람은 그의 이런 사상을 두고 현실과는 동떨어진 반경제학적(antieconomic science)이라고 비판한다. 반면에 슈마허가 주장하는 진정한 발전의 길이란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올바른 길,’ 즉 인간의 얼굴을 한 기술을 통한 환경과 인간성의 회복에 있다는 것이 강점이 된다.

인간의 본성은 이윤추구에 광분하기 마련이다. 슈마허는 이런 인간 본성의 문제 해결책을 불교 경제학적 시각에서 찾고 있다. 불교경제학은 불교라는 종교가 가지고 있는 마인드인 간소, 비폭력이라는 대명제와 경제라는 학문을 접목시킨 경제학이다. 자본주의 발전 성장은 불교적 정신문화가 지배하는 나라들과는 거리가 먼 서 유럽 그리스도교 국가들에서 이었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밝혀졌는데 답을 불교에서 찾는다는 것은 잘 어울리지 앉는 것처럼 느껴진다. 더구나 색즉시공(色卽是空)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있음을 없음으로 보는 신념체계를 빌려 자본주의 경제 구조에 대한 개혁을 시도한다는 것은 아귀가 잘 맞지 않아 역설적이다. 차라리 묵시문학적 환상이라는 덧칠이라도 되어 있다면 희망을 가져 볼만한 것인데...

 일찍이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가 자본주의의 원인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서 유럽에서만 자본주의가 발달한 원인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에 맞닿았으며, 이러한 자본주의 정신이 발달함에 따라 자본주의가 발생하고 발전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막스 베버는 부를 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배격하면서도 직업 노동의 결과로서 부를 획득하는 것은 신의 은총으로 보는 청교도는 소비를 억제함으로써 자본 축적을 촉진했다고 보았다. 즉 청교도의 금욕에 의한 강제적 저축은 자본의 재투자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이것이 베버가 말하는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정신 간의 상관관계의 핵심을 이룬다.

 그렇다면 바른 자본주의의 길은 청교도적 마인드의 부활과 갱신에 있다. 그런데 서구 교회들의 쇠락으로 청교도적 윤리적 의식이 자본을 지배하는 시대가 지나버렸고 대중은 권력을 추구하는 자들의 복지 프로파간다 아편주사에 마취되어가 사회 경제 구조는 더욱 꼬여가고만 있어 그 비극적 명운은 공룡의 종말처럼 다가오고 있다. 이 시대 이기주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복잡다단한 경제 구조의 고르디 언 매듭을 풀 자는 그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피 뿌린 옷을 입고 백마를 타신 분의 등장(19:11)이라는 예언에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큰 것들이 판치는 어둠의 세상과는 달리 그 분이 세우시는 나라에서는 작은 것이 진정으로 아름답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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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