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로우신 하나님

윤리 : 2012. 5. 24. 13:22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이 질문에 대하여 우리가 무덤까지 가지고 갈 유일한 대답은 자비하신 하나님이라는 한 마디 일 것이다.

I. 시내산에서 자비를 선포하신 하나님

오래 전 병원에서 갓 태어난 연약한 아이를 안고 집으로 올 때 장차 이 아이가 몰려 올 온갖 세파를 뚫고 살아갈 일을 생각하니 측은하기 짝이 없는 생각에 빠졌던 때가 있었다. 부모는 갓 태어난 생명을 보고 불쌍한 마음을 갖게 된다.

흙을 빚어 사람을 만드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신 때 하나님께서도 그런 측은한 마음을 갖지 않았을까 하는 상념에 빠진 적이 있었다. 하나님이 불어 넣으신 숨결에는 측은한 마음, 즉 연민(compassion)도 들어 있었을 것이다. 인간의 몸과 숨결에 담긴 하나님의 연민이 없다면 다가오는 시련과 비참함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이 질문에 대하여 우리가 무덤까지 가지고 갈 유일한 대답은 자비하신 하나님이라는 한 마디 일 것이다.)

모세의 탄원을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시내산 아래에서 송아지를 신으로 떠받드는 빗나간 선민들에게 다시 법을 선포하기 전 당신 자신의 품성을 먼저 선포하셨다. 하나님께서 법을 주시는 마음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율법에 내재된 진정한 정신을 자기의 품성으로 미리 요약하신 것이다. 요컨대, 하나님도 율법도 자비라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7 인자를 천 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34:6-7).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향한 사랑의 각기 다른 표현들 중에 첫 번째로 나오는 단어가 자비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자비가 어떻게 현현하는지를 설명하시고 있다.

자비롭고(merciful)”- ‘자비롭다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라훔’(rahum)이다. 이 라훔은 생명을 잉태하여 키우는 탯 집인 자궁을 뜻하는 rehem과 연관된 단어이다. 자비하다는 말은 곧 모성애를 지닌 어머니의 자궁 같다는 뜻이 들어 있다(rahum ‘full of compassion’이 시 112:4; 11:4에도 나온다). 어머니는 생명싸개 탯 집 안에서 꿈틀거리는 새 생명을 위하여 온갖 정성을 다 바친다. 혹시라도 새 생명에 조금이라도 나쁜 것이라면 그것을 멀리하는 모정은 무한하다.

자비는 은혜롭고(gracious)” ,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머리 숙여 절하는(to bow down) 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노하기를 더디하신다(slow to anger).”노하기를 더디 하신다는 것은 긴(arak, slow, 더딘, 참는) (af, longsuffering)를 가졌다는 뜻이다. 그래서 화가 나 코로 씨근거리는 것을 더디 하신다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에 자비가 들어 있는 특성을 仁慈라고 한다. “인자끈질기게 친절한 언약적 사랑이다(in goodness, steafast love). 인자와 진실(truth, 확고부동, 신뢰성, 견고한 사랑) 많다는 것은 (abundant) 인자와 진실이 바다처럼 광활하다는 것이다. NKJV는 자비(ḥesed)를 천대까지 베푸시고(keeping mercy for thousands)로 번역하므로 자비와 헤쎄드가 동의어적 의미를 지닌 것을 드러내고 있다.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는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신다(forgiving, 옮기다. 들어 올리다).

II. 긍휼(矜恤, eleēmōnes)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5:7).

예수께서는 산상 보훈 8복 중간 교훈에서 이웃을 향한 신자들의 기본적인 자세에 관한 메시지를 주고 있다.

A. 矜恤의 의미자랑할 긍도 되지만 여기서는 슬플 긍,’ ‘불쌍히 여길 긍,’ ‘괴로워할 긍,’ ‘아낄 긍의 뜻을 지녔다. 자는 불쌍할 휼,’ ‘구휼할 휼.’ ‘근심할 휼,’ ‘동정할 휼의 뜻이 들어 있다.

헬라어 엘레에모네스(eleēmōnes)동정적인,” “자비로운,” “곤궁한 자에게 동정을 베푸는것을 뜻한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불쌍한 인간을 향하여 능동적으로 선행을 베푸는 자이다. 위에서 잠시 살펴보았지만 자비에 대한 히브리어는 라훔(rahum) 이다. 라훔은 인정 많은,“ ”자비로운또는 자궁의 뜻이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사랑이 연민으로 나타난 것을 함축하고 있다. 히브리어 ḥesed(דסח자비, 인자)는 이런 불쌍히 여기는 사랑을 나타내고 있다. 또 동정을 나타내는 히브리어로 ḥus가 있다. 이 단어의 뜻은 '덮다', (상징적으로) '측은히 여기다,' ‘긍휼히 여기다,’‘관심을 갖다,’‘아끼다,’ ‘불쌍히 여기다,’ ‘동정하다,’ ‘동정심을 가지고 바라보다,’‘하나님의 눈에 눈물이 고이다는 뜻을 지녔다.

B. 자비의 마음은 감정이입(Empathy)을 한 마음이다.

이 자비로운 자는 하나님의 자비의 눈으로 사람과 사건들을 보고, 상대방의 마음으로 생각하며 느끼는 자세를 갖는 자이다. 상대방이 겪는 일을 같이 겪는 공감이다. 상대방의 마음속에 들어가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잘못된 일을 하였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마음을 이해하고 동정하면 용서할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감정에만 사로잡혀 있어서 다른 사람의 느낌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C. 사랑의 현현과 반응

1. 하나님 사랑, 부모 사랑 같은 나보다 높은 분의 사랑(헤세드, 아가페)을 받고 - 경외와 존경,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

2. 친구나 동료의 친근한 사랑, , 나와 동등한 분의 사랑(필레아)을 받고 - 감사와 친근한 마음

3. 나보다 못한 사람들에 향한 사랑(헤세드, 라훔, 후스, 엘레에모네스) - 자비와 동정을 나타내는 마음씨에 평생 잊을 수 없어하며 그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

D. 긍휼의 현현 예시

a. 부모가 잘못한 자녀를 불쌍하게 여기는 일 탕자의 아버지처럼 부모가 빗나간 자식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용서하고 돌보는 사랑을 베푸는 것이 바로 긍휼이다. 가정이 와해되었을 때 누군가가 100% 망하는 기로에 서 있는 자녀를 불쌍히 여겨 붙잡아 주어야 그 자녀들이 살 수 있다. 온 가족이 말씀과 믿음으로 하나님께 붙으면 산다. 가정 붕괴는 사회 혼란의 원인이 된다.

b. 부부가 서로 불쌍히 여기는 일 젊은 날의 로맨틱한 사랑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감사, 신뢰 그리고 연민의 마음으로 바뀐다.

c. 자녀가 연로한 부모를 불쌍히 여기는 일 - () ‘엄마를 부탁해

부모를 학대, 저주하면 하나님도 용서하지 않으신다(21:17; 27:16; 20:20).

F. 최고의 자비 현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일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숱한 무리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6:34; 14:14). 주님의 마음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그래서 그는 죽음의 길에 있는 자들에게 영원한 삶의 길을 가르쳐 보여 주셨고, 병든 자를 치유하셨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이 바로 이 긍휼(자비)이다(2:17). 하늘 성소에서 그리스도는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merciful [eleēmōn] and faithful high priest)“으로 봉사하시면서 나의 피, 나의 피하면서 십자가의 속죄의 보혈로 자비(긍휼)를 탄원하시고 계신다. 그는 자비로운 하나님의 마음에 중보하고 계신 것이다.

G. 자비를 받아 용서 받은 하나님 백성들은 그리스도의 자비의 마음을 삶의 현장에서 구현하여야 한다. 긍휼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용서하는 것이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관대한 마음이고 용서하는 마음이다. 긍휼한 마음을 지닌 사람은 상대방을 용서하는 마음과 관대한 마음으로 대한다. 모든 것을 아는 일은 모든 것을 용서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18:35). 어떤 사람이 잘못된 일을 하였다면 그만한 딱한 사정이 있을 것이다. 그 마음을 이해하고 동정하면 용서할 수 있게 된다. 프랑스 격언-모든 것을 아는 것이 모든 것을 용서하는 길이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 받은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리고 긍휼을 구하는 마음은 긍휼을 베푸는 마음으로 나타나야 한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성도라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 병들고 가난하며 외로운 사람들(고아와 과부들)을 불쌍하게 여겨야 한다. 특히 믿지 않은 자들을 바라볼 때 불쌍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고 물었다(10:25-37).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이니이까?”하고 율법사가 물었다. 예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하시면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냐?고 물었을 때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자이니이다고 대답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의 율법의 진정한 정신은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느냐 여부에 달렸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를 받아들임으로써만 율법을 지킬 수 있다.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제가 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사람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실물, 378)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라 하시니라.” 도움이 요구되는 사람에게 그와 똑같은 부드러운 친절로 대하라. 그렇게 함으로 그대가 온 율법을 지킨다는 증거를 보여 주게 될 것이다.”(실물, 380)

그 사마리아 사람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이행함으로써 자기를 업신여기는 사람들보다 더 의롭다는 것을 드러내 보였다. ”(실물, 381)

많은 사람들은 마음의 성전이 황폐된 사람들을 냉담하고 멸시하는 눈으로 바라본다. 어떤 이들은 이와 다른 동기로써 가난한 자들을 돌보지 않는다. ”(실물, 382)

사랑과 동정을 베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곳마다, 다른 삶을 복되게 하고 향상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곳마다 거기에는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것이다. ”(실물, 385)

정신적으로 병든 그대의 형제들은 마치 그대 자신이 형제의 사랑이 필요 되었던 것처럼 그대를 필요로 하고 있다. 이 형제들은 그들처럼 연약했던 자들의 경험이 필요하며 또 그들을 동정하고 도울 수 있는 자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아는 것이 우리로 몹시 도움이 요구되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실물, 387).

이 세상에서 비록 연약하고 가난하고 의지할 사람이 없다 할지라도 예수를 믿고 성령이 함께 하면 그는 거룩하고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바뀐다. 그러나 아무리 건강하고 부요하며 명성과 권세를 아울러 지니고 있다할지라도 예수를 믿지 않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 위에 머물러 있으며, 살아 있어도 산목숨이 아니라 죽은 목숨이기 때문에 불쌍한 자들이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처지에 있든지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당당하여야 한다. 그리고 믿지 않는 모든 이들을 불쌍하게 여겨야 한다. 그들이 비록 이 세상 삶에 성공한 듯이 보여도 주님을 만나기까지는 참으로 불쌍한 존재인 까닭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III. 긍휼의 축복

A. 긍휼을 베풀면 자기 안에 축복을 받는다.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하느니라”(11:17). 잔혹한 마음은 자기를 해친다. 그러나 긍휼을 베풀면 자기의 심신을 건강하게 한다. 그리고 행복해 진다.

B. 긍휼을 베풀면 긍휼을 되돌려 받는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7:12).

(예화)

C. 하나님의 긍휼을 받는다. 긍휼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받는 조건이 된다.

a. 긍휼히 여기는 마음 -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2:13).

IV. ER(emergency room) 같은 교회에 필요한 열한 번째 계명

A. ER 응급실은 환자가 오기 전에는 깨끗하지만 환자가 온 다음에는 각종 기기, 치료 약품들 등으로 어지럽혀진다. 환자의 피로 얼룩지고 더렵혀지게 마련이다. 이것이 응급실의 본연의 모습일 것이다. 교회는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응급실이다. 교회가 사랑의 수혈을 하는 응급실 구실을 하자면 어지럽혀지기도 하고 눈살이 찌푸려지기조차도 한다. 우리는 이 번잡스럽고 깨끗지 못한 상태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생명이 위협 받고 있는 절박한 사람을 위기에서 구출해 내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온 골목을 즐비하게 채운 리무진들에서 내린 사람들이 있다. 턱시도를 하고 헤어스타일이 다소 이상한 우람한 사람들이 열을 지어 기다리는데 중고차를 타고 싸구려 옷을 입은 한 사람이 나타나자 대기한 사람들이 일제히 머리를 숙이는 장면을 연상하여 보라. 이 것이 세리 마태의 집 잔치 집에 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일 수 있다.

B. 열한 번 째 계명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13:34, 35).

Colombia에서 몇 년 전 적십자기를 내걸고 무장 게릴라로부터 인질을 구출한 사건을 두고 국제 적십자사에서는 정중하게 항의하였다. 적십자기를 위장용으로 사용한다면 누가 그 적십자기를 믿겠느냐고? 하나님은 11번째 계명을 위장용으로 준 것이 아니다.

갈보리는 하나님의 ER이다. 전 인류의 죄를 위하여 하늘의 의사가 희생당하신 곳이다.

C. 요나서의 결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4:11). Should I not be concerned(ḥus)about that great city? ḥus - 본래 의미는 '덮다', (상징적으로) '측은히 여기다':- 긍휼히 여기다, 생각하다, 아끼다. 불쌍히 여기다. 동정하다. 동정심을 가지고 바라보다. “하나님의 눈에 눈물이 고이다.”요나서의 결론은 바로 이 말씀에 있다. 요나의 관심은 정의와 공의에 있었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인간의 정의 관념을 넘어 자비에 초점을 두시고 있다. 선악을 분변치 못하는 (좌우를 분별치 못하는) 인구 60만 명을 불쌍히 여기고 계신 것이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자. 하나님께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 죄를 덮으셨다. 속죄라는 말은 덮는다의 뜻이다. 요나는 덮으면 되겠느냐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덮으시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마음을 눈물어린 눈과 아끼는 마음으로 니느웨를 보도록 호소하시는 메시지를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 잡아 주시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에 붙으면 산다. 교회가 연민하는 아가페, 즉 자비의 쇠사슬이 되어 갈 때 비로서 그 사명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가장 어려운 시간에, 긍휼히 여기시는 구주의 자비 안에서 피난처를 찾게 되고 영원한 거처로 영접 받게 될 것이다”(MB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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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