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경건(敬虔)은 하나님을 우러르고 받드는 마음으로 그의 임재 속에서 하나님을 의식하고 행동하는 삶의 양식이다. Pietas(piety)는 Gr. eusebeia의 번역어이다. Heb. dysij; ㅗ냥는 ‘성도’로 번역되어 있다(시 50:5). 그러나 그 의미는 ‘친절한,’ ‘인자한,’ ‘경건한,’ ‘선한’ 뜻을 지녔으며 하시드는 통상적으로 ‘경건한 사람’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향하여 외경을 나타내는 eusebeia는 신약성경에 12번 이상 나오고, ‘godliness,’ ‘piety,’ ‘religion’으로 번역되어 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딤전 3:16). 경건은 신자의 삶에서 악한 세력들을 이기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승리가 되어 놀라움과 찬탄을 자아내게 한다.
경건은 진정한 덕목이 된다.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벧후 1:4-8).
경건은 그리스도와 같은 품성을 지향 추구하는 삶이다. 그래서 경건은 그리스도인의 이 세상에서의 삶의 시작이 되고, 중간이 되며, 끝이 되고 오는 세계에서의 삶의 본질이 된다(참고, FE 109-110). 경건은 참된 위엄과 품성완성의 기초가 된다(CH, 362). 경건은 인생이 도달해야 될 목표가 된다(Ed 18). 요컨대, 경건은 삶의 전부가 된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경건에만 집중해 야 한다. 왜냐하면 경건은 하나님의 은혜의 승리가 되기 때문이다.
경건의 모양에 역점을 두는 것은 사단의 전략이다(TM 474). 외적 신앙생활의 모양새로는 능력이 없다. “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경건의 모양을 내는 배우들은 많지만 그 능력을 갖춘 자는 많지 않다. 지성적 경건만 집착하는 길은 경건의 모양새만을 갖추는 길이다. “많은 사람은 마음은 깨끗이 씻지 아니하고 지적신앙(知的信仰) 곧 형식적 경건만을 받아들인다”(정로, 35). 가롯 유다는 경건의 모양에만 집착하였다(AA 558). 경건의 모양을 내는 사람들에게는 자기 부인도 자기희생도 없다(5T 172). 오히려 쾌락 추구에 집착한다(3T 29). “참 경건은 겉치레만의 경건과 분명히 구별될 것이다. 그 찬란함 때문에 우리들이 감탄해 왔던 많은 별들이 그때에 어둠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성소의 장식품으로 꾸몄으나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지 않은 사람들은 그 때에 자신들의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낼 것이다.”(PK 188).
경건은 날마다 훈련받고 연습하는 삶에서 구축된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7-8). 그리스도인은 “실천적 경건을 옹호”한다(6증언, 396). “영성과 참된 경건을 사랑하는 마음을 길러”야 한다(2T 315). 매일의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는 일종의 경건의 실천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참된 경건의 삶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며 실제 삶 가운데 어떻게 해야 경건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 모호하다. 여기에 경건의 축이 분명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 축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경건의 기초가 된다. 그리스도께서 중심이 되시지 않은 경건이란 빈 공갈빵과 같다. 참된 경건은 그리스도의 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참된 경건은 십자가 앞에서 나를 발견하고 그리스도를 발견할 때야 이루어진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의는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뜻에 마음과 생애를 일치시키는 것이다. 죄된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과 산 연락을 유지할 때에만 의로워질 수 있다. 그렇게 될 때에 참된 경건이 사상을 향상시키고 생애를 고상하게 할 것이다. 그리하면 신앙의 외관적 모습은 그리스도인의 내적 순결함과 일치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봉사에 요구되는 의식들은 위선적 바리새인들의 그것과 같이 무가치한 예식이 되지 아니한다”(DA 310).
경건이라는 것이 일상생활로부터 도피하여 독거, 은둔하면서 사는 삶이 아니다.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딤전 6:5-6). 삶의 현장에서 타락한 삶을 멀리하고 지족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곧 경건한 생활이 되기 때문이다.
경건은 주관적인 심리 기능을 넘어서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객관적인 방편이 된다. 경건은 한 개인의 품성의 칼라에 따라 열정적 경건, 냉정한 경건, 활동적인 경건, 조용한 경건, 감성적인 경건, 지성적 경건이 있을 수 있지만, 그 여러 형태들을 아우르는 인격 전체가 지향하는 내적 자세와 이상이 되며 삶이 지향하는 행로가 된다. 그런 자세와 이상, 그리고 행로는 하나님의 뜻과 관심에 초점을 맞추면서 살아간다.
“사랑은 경건의 기초이다. 사람이 말로는 아무리 공언한다 할지라도 자기의 형제들에 대해 이기심 없는 사랑을 갖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순진한 사랑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려고 애쓰는 것만으로는 결코 이러한 정신을 가질 수 없다.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 가운데 있어야 한다. 자아가 그리스도께 몰입될 때에 사랑은 저절로 생겨나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품성의 완성은 다른 사람을 돕고자 하는 생각이 마음속에 계속해서 일어날 때 곧 하늘의 햇빛이 마음에 충만하고 얼굴에 나타날 때에 이루어진다”(COL 384).
이런 경건이란 삶으로 번역되는 신앙이며 인품이 된다. “우리들 가운데 있어야 할 참된 경건의 부흥은 우리의 모든 필요 중에서도 가장 심각하고 가장 긴급한 것이다. 이러한 신앙 부흥을 일으키는 것이 우리의 첫째 사업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축복을 받기 위한 열렬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바 하나님께서 당신의 축복을 우리에게 베풀고 싶지 않으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축복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세상의 부모들이 저희 자식들에게 좋은 선물을 주고 싶어 하는 그 이상으로 당신께 구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려고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축복을 허락하시는 약속에 대한 조건들을 성취시키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며 그 조건들이란 죄에 대한 자복, 겸비, 회개 및 열렬한 기도이다. 신앙 부흥은 오직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서 기대할 필요가 있다”(1SM 121).
경건한 자는 인간적 쇼맨십, 허영 및 이기심에 등을 돌리고 하나님의 위대함에 머리 숙이며 그 권능에 굴복한다. 경건한 자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깊은 의식에 사로 잡혀 날마다 살아간다. 경건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숭고한 초월자에 향하여 경외하는 삶을 살아가며 그분에게 자신을 바친다. 경건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완전히 몰입시킨다. 경건한 자는 예배 의식에서 이런 체험을 심화시켜 간다. 그리고 세상을 하나님의 눈과 관심으로 바라보고 감탄하고 감격과 감동을 받는 삶을 이어간다. 하나님의 보살핌 속에 살아가며 일상생활 속에서 그 분의 지시를 받아가면서 살아간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든 경험은 새로운 빛의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 준다. 살아가는 일이 아무리 힘겨워도 그 때문에 자신의 삶이 하나의 기적이며 지금 자기는 하나님의 은혜의 권능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망각하지 않는다.
결국 경건은 하나님의 뜻에 충성하는 것이며 충절을 바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해되던 되지 않던 그 뜻은 선하고 거룩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한다. 삶이란 놀이가 아니라 위임이며 사명이라는 자각 아래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고자 결단한다. 우리는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을 변혁시키고자 하는 수난 받는 종(Ebed Yahweh)의 길을 뒤 따라 걸어가는 순례자들이다. 그리고 시간의 명주실에 영원을 짜 넣는 구속 사업의 한 모퉁이를 섬기는 하나님의 조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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