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가까이 산재한 돌, 나무, 자연의 소리, 저잣거리의 소리 등에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나 찾아보곤 한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런 매체들을 통하여 말씀하실 수 있다. 그러나 재난을 일으키는 자연계에서, 그리고 경쟁과 다툼으로 차 있는 어지러운 세계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의 음성을 듣는 일은 쉽지 안다. 때로는 해산하는 고통이 수반되어야 한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그 대부분의 경우에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대하게 된다.

도도하게 흐르는 역사의 탁류에서 선 앞에 악이 무릎을 꿇을 것인지 확신도 안 간다. 무법천지인 듯 해 보이는 세상에서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신 분으로 다가온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달아날 뿐만 아니라 가족으로부터 도망하고 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은 우스꽝스러운 잔소리가 되고 말았다. 서로를 챙기고 보듬는 인간관계는 시들해졌고, 쾌락이 있는 곳으로 쇄도하고 있는 군상들이 넘쳐나고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조용히 웅크리고 앉아 있는 사자처럼 어떤 순간에, 그리고 어떤 사건들 속에 침잠하여 침묵 속에서 거룩한 뜻을 분별하기 보다는 부산하게 나대는 원숭이처럼 설치는 일에 익숙하여 가고 있다. 저속(低俗)의 대가들은 확성기로 떠들어 대면서 날밤을 세우고 있다. 아름다운 광경을 만날 때 사진 찍는 것이 고작이다. 침묵의 시간대 속에서 가만히 서서 고요한 중에 땅에 묻힌 진실을 느껴보고, 듣고 깨닫는 일이 증발되어 버린 듯하다. 어느 개인에게 신체적 통증이 있으면, 적신호가 되긴 하지만, 아직 회복의 기회가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어느 단계를 지나 의사가 이제는 가서 마음대로 음식도 들고 지내라고 하면 그것은 의사가 환자의 회생을 포기하는 통고가 된다. 가족 등 사회에서도 고통과 통증의 적신호가 켜지면 그것은 아직도 은혜의 시간대가 남아 있다는 증거가 된다.

하나님은 침묵을 통하여 기다리시기도 하고, 때로는 심판도 하신다. 부모는 어느 정도 자녀가 걷는 길에 참견하다가 말을 듣지 않는 자녀를 알면서도 내버려 둔다. 1년에 부모의 간섭에 반감을 품고 떠나는 자녀가 11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어느 순간 더 이상 헤어 나 올 수 없는 수렁에 빠져 든 때는 자기 부모가 자기를 내버려 둔 것 침묵이 벌이었음을 깨닫는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고집하면 그대로 내버려 두신다. 하나님의 침묵은 내어 버림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은 인간이 성적 쾌락의 길을 추구하면 그대로 내 버려두고, 동성과의 변태 성욕을 공론화하거나 미국에서처럼 합법화시키면 그대로 내어 버려두고, 무슨 일이던지 거리낌 없이 자기 마음대로 자행하면 그대로 내버려 두신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1:24-28).

부정한 일에 자기를 맡긴 남편을 보고 말리는 아내가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사람으로 단정하고 포기하고 결별한다. 남편은 그 동안 아내의 침묵의 심판을 받고 있었던 셈이다.

침묵의 심판은 악이 악인을 죽이는 일”(34:21), 악한 자가 그 악으로 넘어 지는(11:5) 일로 나타난다. 사람들은 스스로 해하고(25:7), 자기 팔의 고기를 먹으면서(9:20; 4:5) 살고 있다. 그래서 익인은 자기의 악에 걸리며 그 죄의 줄에 매인다(5:22).

인간은 주어진 은혜의 시간대에 자기가 자기를 심판하면서 아슬아슬하게 살아가고 있다.


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