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진적 여성신학 유감
A. 유니아는 여성 사도이었나?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롬 16:7)
한국에서 신학을 가르치다가 앤드루스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로 활약한 Robert M. Johnston과 Nancy Vyhmeister 는 로마서 16:7에 나오는 유니아를 여성 사도로 풀이하고 있다. (참고, Robert Johnston, “Shape of Ministry in the New Testament and Early Church,” Women in Ministry, 47~48, 그리고 Nancy Vyhmeister, “Junia the Apostle,” Ministry 2013년 7월호).
재림교회 성경주석은 유니아 이름이 여성일 수도 있고 남성일 수도 있다고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다. 로마서 16:7이 너무 간단한 본문이어서 여기에 나오는 이름을 두고 그토록 많은 성경 밖의 자료를 활용하여 여성시대 흐름에 꿰맞추는 해설을 할 수 있는지 우선 의문이 든다. 이런 풀이를 한 두 분은 다소는 자유주의적 해석을 하는 급진적 여성신학의 기류를 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Nancy Vyhmeister 같은 분의 글이 교파를 초월하여 여성신학계에서 인기가 높고 여성 목회 안수 당위성의 전거가 되어온 점에 비추어 그의 학문적 활동은 돋보이기조차도 한다.
그러나 먼저 본문을 중심으로 풀어가는 것이 문제의 핵심을 이해하는 관건이 된다고 본다.
성경에는 바울이 투옥된 횟수가 기록돼 있지 않다.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는 바울이 일곱 번 투옥됐다고 진술한다(The First Epistle of Clement to the Corinthians 5).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골 4:10)도 이런 동료 죄수였다. 실라는 빌립보에서 바울과 함께 같은 감방에 갇혔다(행 16장). 에바브라도 함께 갇힌 자였다(몬 23).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는 바울의 여러 투옥 중 언젠가 한 번 바울과 함께 투옥된 적이 있었을 .것이다. 바울의 동료로 죄수가 된 사람들은 복음전도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다른 동료들 보다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다(고후 11:23).
어떤 이들은 바울의 고통스런 생활의 필요에 응하고자 자원하여 감옥 생활의 불편함에 동참하기로 선택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관행을 로마인들이 허용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주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이는 아름다운 동행이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안드로니고와 유니아가 바울과 ”나와 함께 갇혔던“ 점에 있다. 만일 유니아가 여성일 경우 같은 감방에 남녀가 혼숙하였다는 추론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 점을 과연 사도 바울이 허용하였는지와 아무리 이교 제국이라도 이렇게 남녀를 함께 갇히게 하였느냐는 의문이 생긴다. 여자이름 같지만 남자인 겨우가 예전이나 오늘이나 흔하다. 더구나 유니아가 문법적으로 남성일 수 도 있고 여성일 수도 있다면 함께 갇힌 경우 남성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다음으로 바울의 전도 신조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롬 15:20).
바울은 복음 선교를 다른 사도들이 활동하고 있는 지역을 피하였다. 이 점은 다른 사도들도 마찬가지이다. 더구나 신약성경에서 베드로, 요한 유다 같은 사도들은 목회 및 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지역에 편지를 보내지 않는 것이 그들의 관행이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에 로마지역에 안드로니고와 유니아 같은 유명한 사도들이 있었다면 사도 바울이 구태여 거기를 방문하고자 하거나 편지를 보내고자 하였을까? 어떤 지역에 일꾼이 필요하면 바울이 그 지역에 어느 누구를 파견하기도 했는데 왜 로마교회를 돌보는 일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도록 안드로니고와 유니고에게 부탁하지 않았을까? 더구나 이들은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아닌가? 문맥의 흐름으로 보아 이런 의문이 일지 않을 수 없다.
급진적 여성신학기류의 특징은 자연스럽지 못하게 성경을 마음대로 풀이하는데 있다.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여성신학이 필요한 소이가 여기에 있다.
B. 全聖徒 제사장론
Raoul Dederen은 여성 목사 안수의 이론적 근거로 전 성도 제사장론(만인 제사장론)을 들 고 있다. 그는 시내산 언약 체결 이래 부조들과 이어지는 구약시대에서는 남성 제사장들이 활동하였지만, 신약성경 시대에는 급진적 변화가 일어 만인제사장제도가 도입되어 남성 중심의 제사장제도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하고 있다(“Priesthood of All Believers” in Women in Ministry, 23). 그는 그 근거로 베드로전서 2:9을 인용하고 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그러나 이 성경절은 출애굽기 19:6를 인용, 부연한 것이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출 19:6).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전체를 두고 집단적으로 제사장 나라, 즉 선교 국가적 사명을 지녔다고 선포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특수한 제사장 제도를 두고 있다. 따라서 전 이스라엘 제사장론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신약성경도 평행적으로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를 집단적으로 제사장 나라로 보면서 온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일깨우고 있다. 그러면서 초기교회는 사도, 목사 제도를 두고 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이같은 평행적 기사의 대비를 통하여 신약성경 시대 교회만이 전 성도 제사장론을 추론하는 일은 문맥을 일탈하고 있는 것이다. 신약이나 구약이 모두 기능론적 차원에서 육적, 영적 이스라엘의 사명을 일깨우고 있는 것을 굳이 베드로전서 2:9에 근거하여 급진적 변화로 보는 해석은 무리한 시각으로 보인다. 요컨대, Dederen 박사가 “급진적 변화(a radical transformation)”로 단정하는 시각은 성경의 평행성을 넘어 자의적으로 확대해석하고 있는 것으로 비쳐진다.
이런 분석을 하면서 두 분의 가르침과 지도를 받아 온 필자로서는 미안한 마음을 금치 못한다. 필자는 학부시절과 박사학위 이수시절 잔스턴 박사로부터 배웠고, 데드린 박사로부터는 박사 학위 이수시절 조직신학에 관하여 그 어느 교수들보다도 더 많이 배웠다. 이런 고마운 분들의 모든 학문적 지도에 모두 반기를 드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 분들 역시 미국의 대하같이 맥맥이 흐르는 급진적 여성신학의 흐름 속에 서 있는 분들이라는 점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비쳐질 뿐이다.
여성신학이 무리하게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적 방식으로 이념을 먼저 투입하는 성경 해석을 하지 않고, 성서적-복음적 해석을 하면서 여성 목사 안수 이슈를 다룬다면 이는 환영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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