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잘 안 풀려 사업이 기우러 지거나 신병으로 고통당하는 분들을 보노라면 마음이 아프기 마련이다. 특히 신앙하는 사람은 사업이 잘 안 되는 것이나, 앓고 있는 병이 자기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내가 아는 어느 집사는 이런 느낌의 수렁 속에 빠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억울하다고 고백한다. 그동안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한다고 해 왔는데 이런 일이 생기니까 하나님이 야속하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하다는 불평을 토로하기까지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고난과 고통이 다가오면 다음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 하나는 하나님께 잘못한 일이 없는데 오는 고난이 있다. 이 경우 당하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의롭지 않다는 생각도 하기 마련이다. 욥의 고난은 이 범주에 든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분 앞에서 순전하게 살고 있는데도 극심한 고난을 당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욥이 고난당하는 것을 허락하셨다. 그 목적이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가르치고 욥을 더 견고하게 하는데 있었다. 역설적이지만,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의롭게 살아가는 욥이 더 의롭게 살게 하시려고 그를 훈련시키신 것이다.

욥의 친구들은 욥이 뭔가 잘 못하였기 때문에 고난당한 것으로 보았다. 그들은 고난을 통한 교정 징계론이나 연단론이나 불행 징계론을 역사적, 신앙적, 도덕적 시각에서 전개하면서 욥을 윽박질렀다. 그러나 욥기가 말하고 있는 중요한 교훈은 고난이나 고통이 하나님의 사랑과 의로우심에서 허용되는 선물이라는 점에 있다. 고난이나 고통은 아프고 쓰리다. 그러나 아픔과 고통을 당하면서 사람은 더 성숙해지고 더 고결해 지고, 더 그리스도인다워 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으로 허락하신 고난은 인간의 교만한 자아를 꺾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신뢰하게 하는 아름다운 교육 도구가 될 수 있다. 선하게 살면서 자기 밖에서 몰아쳐 온 스트레스로 멍이 들고 상처를 받아 급기야 암이라는 고통스럽고 참혹한 고통으로 이어지는 경우들을 볼 수 있다. 모진 고통을 당하고 있는 암환자가 암이라는 축복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것으로부터 그의 안에 이루어져 가는 고결한 하늘 품성이 반사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42:6). 이 본문에서 욥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여 회개한 것일까? 욥이 자신의 무고성을 변호하고자 그의 친구들을 향하여 거의 자만에 가까우리만큼 자기 확신에 사로잡혀 있었다. “ 스스로 한하고”(‘em’as )는 죄 고백과는 상관없는 단어이다. 자기의 현재의 상태에 대한 절망적 상태를 싫어하거나 내어버리다” 뜻이다. “회개하나이다”(nihamti)는 자기의 상태에 대한 고통이나 슬픔의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욥은 하나님, 세계, 및 자아에 대한 새로운 환상을 보고 그동안 지녔던 슬픔과 애통을 버린다는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 Daniel Xisto, “Job 42:6 and the Absence of Sin in Job’s, Repentance,” Ministry, March 2014).

다음으로 죄의 대가로 오는 고난과 고통이 있다. , 죄에 대한 징계와 채찍으로 다가오는 고난이다. 충신의 아내를 빼앗고 충신을 전쟁터 선봉에 서게 하여 죽게 한 다윗이 밧세바로부터 태어난 아이가 죽고, 친 아들이 왕권을 탈취하고자 반역을 일으킨 일 등의 일들로부터 여러 해 동안 이어진 고통은 이 전형적인 사례가 된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를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12:5-13).

죄에 대한 고난의 징계마저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와 아름답고 선하고 의로운 열매를 맺게 하는데 있다. 고통은 죄인을 깨우치는 메가폰 역할을 한다. 여기 본문에 나오는 징계는. 헬라어 파이데이아(paideia)로 그 뜻은 훈육”, “훈련”, “교육”, “징계”, “교정이다. 징계는 품성을 교정하고, 형성하고, 강하게 하고, 온전케 하는 훈련이다.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에 전개되어 온 대 쟁투의 과정에서 성도들 역시 고난과 고통을 당한다. 그러나 성도들은 그 전모를 잘 모르면서 고통을 당하고 주변으로부터 날카로운 손가락질까지도 당한다. 성도들은 상처와 좌절의 늪에서 허우적거리지만 드디어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23:10)고 고백하면서 더 성숙해지는 품성을 이루어 간다.

뿌린 대로 거두는 결과 다가온 삶의 징계를 받아들이기를 꺼린다면 사람은 자주 정도를 벗어나게 된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조화로운 그리스도인 성품을 형성하는 데 필수적인 징계의 경험을 망설임이나 후회 없이, 용기 있고 담대하게 받아들이면서 곧은길로 전진할 것이다. 그는 징계를 피하기 위해 샛길을 찾지 않고, 인생의 정로를 따라가면서 거기서 다시 일어서며 은혜의 제품으로 꼴 지어져 가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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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AHN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