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의식

인간 : 2015. 5. 12. 18:17

사명의식

인간이 제한된 한 평생을 후회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간 날 동안 살아 온 삶을 반추하면서 쓰라림 같은 것을 절감하기가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회 없는 삶은 가능하다. 쓰라림 대신 기쁨을 향유하며 살아 갈 길이 있다. 그것은 사명의식을 가지고 살아 갈 때 가능하다. 인생의 성패는 사명의식을 가졌느냐 그리고 그 사명의식에 따라 매진하였느냐에 매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명의식 없이 살아간 사람과 사명의식에 철저한 사람이 남긴 발자취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르다. 사명이 분명할 때 우리가 종사하는 직업도 학문적 연구도 의미가 있게 된다. 사명은 내 삶의 방향을 좌우한다.

 

창세기 벽두에서는 창조를 통하여 천지 만물과 인간이 지음 받은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는 창조가 존재에 선행한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창조의 목적을 부여하였다(1:28-29; 2;16-17). 인간 창조의 텍스트를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당위가 존재에 밀착되어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성경에 따르면 인간 존재는 명령을 받은 존재로 나와 있다. 아담이 처음 들은 음성은 성스러운 명령이었다. 아담은 창조의 드라마에서 관리자의 배역을 위탁받았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성스러움을 아는데 있다. 그래서 존재의 가치성은 이 명령 받았다는 성스러운 의식과 그 수행 여부에 달려있다. 지금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명령에 복종하여야 한다는 당위성을 내포하고 있다. 인간은 명령을 받고 이 땅에 태어났다. 인간(human being)과 인간됨(being human)은 존재론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사람이 세상 살아가는 매력 포인트는 바로 이러한 사명감을 지니고 그에 매진하였느냐 여부에 있다. 사명의식은 가슴이 뛰는 체험이다. 어느 단체이던지 그 단체나 사회가 내건 사명에 철저한 사람을 필요로 한다. 사람들은 뛰는 가슴으로 자기가 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는 사람들을 보기 원한다.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몰려오는 역사의 파도를 헤치고 공동체를 이끌어 갈 사람들이 될 것이기에 사람들은 그들을 신뢰하기 원한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을 역사의 무대에 띄우기 원한다. 사명의식을 가진 자는 역사를 창조해 가는 조타수와도 같다고 할 것이다.

 

사명이란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통하여 이루기 원하는 일이다. 또한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어떤 일을 하던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과 연계되지 않는다면 그 하고 있는 일은 통속적인 말로 밥벌이의 의미 밖에 없다. 흔히 Mission을 기독교적 시각에서 선교라고 번역하지만, 사명이라고도 번역할 수도 있다. 사명은 하라고 받은 명령이다. 창조 시 주어진 명령은 그 폭이 넓다. 온 세상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본존, 관리, 확장시켜 나가도록 하는 포괄성을 지녔다. 도덕적 명령을 따르는 것은 절대적이다. 사명을 이끌게 하는 천직의식은 단순히 한 직종에 평생토록 종사한다는 의미 이상이다. 그 명령이 하늘에서 왔기에 천직이 된다. 천직의식이 있어야 한다. 하늘이 준 명령이 있어야 한다. 신약성경은 이 하늘이 준 명령을 선교라는 말로 압축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선교는 사명이고 사명은 선교가 된다. 선교의 범주는 창조 명령을 배경으로 깔아야 한다.

 

복음 선교 사명은 특정인의 일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과업이다. 그 출발은 인간됨(being human)에서부터 라야 한다. 침례 받은 사람은 이 사명을 지고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참 생명을 찾은 사람은 사명의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분야에서 일하던지 삶의 목적이 이 사명에 있어야 한다. 신앙하는 사람은 나이 고하, 남녀의 차이, 직업의 종류를 막론하고 선교의 꿈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이다. 이 꿈이 있어야 당사자인 개인의 심령이 살게 되어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속한 신앙공동체에 활력을 부어 넣는다. 선교 사명을 지닌 사람은 신앙공공동체의 불씨가 된다.

 

아브람함 헤셀은 <누가 사람이냐?>에서 인간의 사명적 존재를 두고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명령받았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는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을 기독교적으로 개작한 말이지만 이성주의 철학을 선도한 캐치프레이즈 보다 훨씬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다. 헤셀은 또한 인간은 하나님의 꿈과 계획을 함께 품고 해산의 고통을 겪는 존재, 세계를 구원하고 땅과 하늘을 화해시키는 하나님의 꿈, 그 분의 참된 형상, 그 분의 지혜, 정의와 사랑을 그 분의 꿈을 함께 꾸는 존재이다라고 하였다. 그의 이 갈파는 성서가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들추어 낸 말이다.

 

선지자는 사명의식을 가진 자이다. "선지자"란 하나님께로부터 영감을 받아서 말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메시지를 전하는 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받지 않았을 지라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하시는 일과 길을 가르치고 대변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도 넓은 의미에서 선지자가 된다. 이 선지자들은 타락한 세상 조류를 막는 하나님의 방호벽이 되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지닌 능력 있는 자로 사회의 도덕적, 영적 번영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이다.

 

사명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사명을 세상으로부터 찾지 말고 세상을 위하여 일할 도전에서 찾아야 한다. 인간적인 사색과 추측에서 찾지 말아야 한다. 사명을 일시적인 것에서 찾지 말고 영원한 것에서 찾아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영원하신 분의 뜻에서 찾아야 한다. 이 뜻은 복음서와 편지서들에 그 예증과 함께 잘 나와 있다. 복음서는 이 사명을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제시하고 있다(28:18-20).

 

예수 그리스도는 이 사명의식에 투철하였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17:4). 그리스도께서는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사람들을 만나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이 사명의식의 지반에서 삶을 이어가셨다. 바울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라고 사명 완수를 고백하였다.

 

선교사'--이들은 무엇을 하던지 간에 그 하나 하나의 행동으로 구원의 드라마를 전개시켜 나가는 하나님의 조수들이다. 투철하게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사명의식을 가진 자들이다. Missionary는 사명의식에 꽉 찬 사람이다. 이들은 사명 의식으로 꽉 찬 사람들이다. 이들의 눈물과 기도의 헌신이 이룩한 보고를 읽으면 늘 감동에 젖는다. 이들은 지금 속사도행전의 주인공들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사명의식이 한 평생토록 변치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의 행적과 교훈에 관하여 자주 듣곤 한다. 그러나 업적이 기록으로 많이 남아 있지 않은 당대의 무명의 일꾼들이 있었다. 비록 그들은 사도의 대열에 들어 있지 않지만 사도들로 하여금 일할 수 있는 거점을 마련하고 사도들을 유명하게 한 사람들이다. 심지어 그들은 사도들의 생명의 위기를 보살피면서 선교적 사명을 위하여 평생을 바친 사람들이다.

 

바울과 같은 꿈을 지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커플의 평생토록 걸어 간 복음 선교 사명에 대한 집념은 좋은 본보기가 된다. 아굴라는 본도 출신 유대인으로 로마에 살고 있었다. 이들 부부는 결혼 목적을 이 복음 선교의 꿈을 이루는데 두었다. 이 부부는 AD 49년경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의 추방령으로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정착하여 살았다. 이들 부부가 고린도에서 바울을 만났을 때는 이미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여 있었다. 그들은 바울처럼 옷감을 짜거나 가죽으로 장막을 만드는 사업을 하였지만 그것은 부업이었고 주업은 복음 선교의 사명을 구현하여 가는 교사였다(18:2, 3). 또 후에는 에베소로 이주하면서 자기들 가정을 교회로 삼아 활동하였다. 사도 바울이 AD 52년에 팔레스틴으로 돌아갔을 때에라도 그는 에베소에 남아 개척교회를 돌보았다. 그러기에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저술하여 보낼 때 특히 이들 부부의 문안도 함께 전하였다(고전 16:19). 여기 에베소에서 살 때 당대 명사 중 한 사람인 아불로를 가르쳤다(18:18, 19, 26).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바울이 에베소를 떠났을 때쯤에(AD 57년 봄) 전에 내린 추방령이 약화 내지 폐기되어 로마로 다시 돌아왔다. 여기 로마에서 그들은 복음 선교의 기수들로 활동하였다. AD 57/58년쯤 기록한 로마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은 에베소에서 자기들의 목숨을 내 놓고 바울의 생명의 위기를 타개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이방인의 모든 교회가 감사하는 말과 더불어 문안 인사를 하고 있다(16:3-4). 바울이 두 번째로 로마에서 투옥되어 있을 때쯤에는 이들 부부는 다시 에베소로 파송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이들 부부에게 문안하고 있다(딤후 4:19). 로마교회도 사실상 이들 부부의 가정교회가 그 시발점이 되었다는 전승이 내려오고 있다.

 

이들 부부의 행적을 살펴 볼 때 문자 그대로 지중해를 가운데 두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눈부신 모습이다. 자동차도 없는 고대 사회에서 두 발로 걷는 선교사였으며, 배 멀미를 마다하지 않았으며 지중해의 거친 파도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추방당하면 그것을 선교의 기회로 알았으며, 자기 집을 교회로 삼아 가정교회를 운영하였으며, 사도가 위기를 맞았을 때는 자기 생명을 돌아보지 않고 뜨거운 동지애로 보살폈고, 사도가 투옥되어 선교 현장에 갈 수 없었을 때는 대신 가서 활동한 평신도 선교팀이었다. 이들은 사명의 줄로 묶인 부부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부부는 자원 선교사의 효시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은 하나님의 꿈을 이루고자 하는 가슴에 사명을 가지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사명의식은 재림신앙의 불꽃을 활활 타오르게 하는 활력소가 되고 있다.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사도들의 후계자들이다. 이 선교사들이 가는 곳에는 이적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새 생명들이 하나님의 품속으로 향하고 있다. 선교사--이들의 투철한 사명의식은 새 세계의 여명을 알리는 복음 기수들이다.

거룩한 사명을 지닌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비판과 박해, 조롱의 대상이 되어 왔다. 현실 역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전개 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역행하기도 하고 왜곡도 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가페를 가슴에 안고 정의를 구현하려는 거룩한 사명을 지닌 자들이 고투를 하며 때로는 미로 속에서 방황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가페는 거룩한 사명을 가진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씨줄과 날줄로 직조되어 있을 것이다. 여기에 성도의 인내가 요청되는 이유가 있다(14:12). 암울한 세상에서 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9:12)은 참고 견디어 나가야 한다. 아가페 하나님이 참고 견디고 있기 때문이다.

나 여호와의 노는 내 마음의 뜻하는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쉬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말일에(훗날 그 때가 되어서야) (너희 눈이 열려) 그것을 완전히 깨달으리라”(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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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AHN0211